[231021 양청] 91-92문

소요리문답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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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까지를 계산해보니까 종교개혁사를 9주간 살펴보았고, 여름수련회때 살펴보았던 십계명을 제외하면 약 30주 가량 소요리문답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가 찬양을 할 때에도 그렇고, 기도를 할 때에도 그렇고, 늘상 그리스도인의 언어에는 “은혜" 라는 말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만큼 그리스도인의 삶에 은혜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따라서 단 하루를 살더라도 은혜를 받고 사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사람은 은혜를 받아야 변한다. 사도바울도 그러했고,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도 그러했고, 어쩌면 여러분 양 옆에있는 지체들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은혜가 필요한 존재이다. 여러분, 레미제라블 영화나 책으로 보신 분들 아시겠지만, 한 사람이 한 신부를 통해 은혜를 경험한다. 그 은혜를 경험한 사건이 이 사람을 변화시켜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무지 바뀌어지지 않는 사람을 바꿔버리는 것은 대단한 힘이다. 이처럼 우리는 사람을 통해서 은혜를 받는 것도 상당히 큰 힘을 발휘하는데,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무한하신 은혜를 그것도 매일 매순간마다 받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변화시키고도 남는다.
문제는 지금 우리의 신앙이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키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종교적인 형식”이 우리를 끌고가고 있는가, 이것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도 하고 종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사실 너무나도 비슷해 보여서 별로 구별이 잘 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늘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은혜받는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면 종교인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상당히 많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의 수단으로 주신 것이 말씀과 성례와 기도이다. 이 중에서 우리는 지난 시간에 말씀에 대해 살펴보았고, 오늘 91문부터 97문까지는 성례에 대해 다루고, 98-107문까지는 기도에 대해 다루며 소요리문답은 끝이 난다.
91문. 성례들은 어떻게 구원에 효과적인 수단이 됩니까?
답. 성례들은 구원의 효과적인 수단이 되는데, 성례들 안에 있는 어떤 덕이나 혹은 그 성례들을 집행하는 자 안에 있는 어떤 덕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충족하심과, 성례들을 믿음으로 받는 자들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하심 때문입니다.
92문. 성례란 무엇입니까?
답. 성례란 그리스도가 세운 거룩한 예식으로서 지각할 수 있는 표지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새 언약의 유익들이 성례에서 신자들에게 나타나고 인쳐지며 적용됩니다.
93문. 신약의 성례들은 무엇입니까?
답. 신약의 성례들은 세례와 주의 성찬입니다.
성례에 대해서 우리가 몇 주간 공부할 것이다. 우리가 제일 먼저 살펴볼 주제는, 어떻게 성례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가이다. 하나님께서 성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데, 이때 정말 유의해야 할 부분은 성례 자체가 가진 어떤 능력이나, 그 성례를 집례하는 자에게 있는 어떤 덕 때문에 은혜를 주시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부분은 대단히 우리가 많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다. 로마카톨릭의 경우에는 성례 자체에 어떤 효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여러분 교재를 보면 전가와 주입이라고 하는 말을 제가 써놨는데 개신교에서 가리키는 바는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말하지, 주입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로마카톨릭이 설명하는 “주입”이라고 하는 말은 마치 “주사를 놓는 것”과 같다. 마치 약물을 우리 안에 주입하는 것처럼 쑥 집어넣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생기느냐, 주입된 의는 신자 안에서 의로운 행위를 하게 하고 더 많은 의를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의가 내 속에 들어온 것이다. 그 결과 그 뒤로 의를 만들어내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바로 내가 된다. 내가 주체적으로 은혜의 결과인 의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은 로마카톨릭이 말하는 바 의의 주입이 아니라 “의의 전가”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전가한다는 말은 책임과 그 책임의 소재와 관련된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신 것이지, 그 의가 우리 속에 쑥 들어와서 뭔가 화학적 반응을 하고 어떤 뭔가를 만들어내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1번의 B를 보면, “칭의”와 “성의”라는 말을 썼다. 칭의는 의롭다고 하는 일이 일어나는 게 칭의이다. 의롭다고 칭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의는 한자로 “이룰 성”을 쓴다. 내가 의를 이루는 것이다.
실제로 칭의라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칭의를 받는다고 할 때, 칭의는 어떤 뜻인가? 우리가 실제로 죄인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법적 선언이다. 근데 카톨릭에서 얘기하는 “성의”라고 하는 것은 이룰 성, 의로울 의 라고, 의를 우리 속에서 실제로 이룬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가? 로마 카톨릭에서 성찬을 행할 때 어떻게 하는지 아는가? 여러분들 중에서도 로마카톨릭의 성찬을 행하는 것을 보신 분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저도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천주교 장례로 하는 바람에 미사에 참여해 본 적이 있다. 신부가 성찬을 행할 때, 강대상 뒷편에 금고같은 것을 연다. 그러면 금칠을 한 보물상자같은게 나오는데, 그 보물 상자 안에서 떡을 꺼내온다. 그리고 신부가 축사를 한다. 그들의 교리에 의하면 신부가 축사한 앞에 놓인 떡은 실제로 예수님의 살로 변해서 더 이상 떡이 아닌 예수님의 살이다. 떡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의 살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 카톨릭 방송에서 어떤 고령의 신부가 죽을 날이 가까워서 어떤 음식도 소화하지못하고 있었는데, 후임신부가 이를 불쌍히 여겨서 성찬 떡 남은 것을 물에 으깨어 죽처럼 만들어 가져왔다. 그런데 그것조차 넘기지 못하고 토를 하자, 후임신부가 바닥에 흥건해 토한 것들을 손으로 긁어모아 다 먹었다고 한다. 왜? 그게 예수님의 살이니까 낭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웃프지 않은가?
미사에서 성찬을 할 때 떡을 이렇게 배분하고, 그 다음에는 포도주를 나눠주어야 하는데, 천주교는 포도주를 나눠주지 않는다. 왜 안 나눠줄까? 예수님의 피를 일반 성도들이 먹다가 흘리기라도 하면 어째, 아까워서 나눠주질 않고 신부들만 대표로 마신다. 그래서 로마카톨릭의 성찬은 교인들에게 떡만 나누어준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로마카톨릭의 성찬이다.
로마카톨릭의 성찬에 대한 입장을 “화체설”이라고 한다. 될 화, 몸 체 그러니까 이 딱이 실제로 예수님의 몸이 된다는 것이다. 축사한 떡과 포도주에 화학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럼 여러분이 생각해 보라. 여러분이 예수님의 살을 직접 드셨다. 이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일 아닌가. 내 속에 예수님의 살이 들어왔다. 그러면 나는 그 자체로 의로워진 것이다. 성의라고 했다. 의로워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난 이미 존재론적으로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내 힘과 능력으로 의를 행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2번을 보면, 성례 집행자 안에 있는 어떤 덕 때문이 아니라 했다. 여기 덕이라고 하는 거는 어떤 효력이나 능력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뭔가 거룩한 사람이 집례를 하면은 더 효과가 있고, 비교적 가벼운 사람이 하면 별로 효과가 없고...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방영남 목사님이 성례를 집례하시든, 김성도 목사님이 집례하시든, 제가 집례를 하든, 성례를 집행하는 목사의 경건과 능력에 의해서 성례의 효력이 더하거나 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의 사제주의라고 하는 것은 성찬과 관련해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잘못된 신학이다. 왜냐하면, 사제가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권한은 사제가 기도하면 떡이 살이 된다. 사제가 기도하면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가 된다. 그러니까 사제가 성찬을 집례할 때 성찬의 효력은 절대적이다. 사제만이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 카톨릭의 사제주의가 얼마나 비성경적인 주장인지 알 수 있다.
이제 교재 3번을 보면,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라고 했다. 이는 91문에 “그리스도의 충족하심과" 라는 부분에 대한 내용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오직 그리스도의 충족하심 때문이고, 둘째는 성례를 믿음으로 받는 자들 안에 계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먼저 그리스도의 충족하심을 보면, 교재A에 성례는 예수님이 직접 제정하셨고 축복하셨기 때문에 구원의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예수님이 제정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수단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B를 보면, “인과율의 한계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인과율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성찬을 먹었으니까 자동적으로 은혜를 받는다는 생각이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여러분이 일주일동안 말씀에 순종한 후 주일에 예배드리면 엄청난 은혜를 받게 되고, 반대로 일주일동안 하나님 앞에 부끄럽게 살다가 주일 예배의 자리로 오면, 하나님이 은혜는 안 주시고 오히려 소금을 뿌리시며 “니가 무슨 낮짝으로 여길 와?!” 이렇게 하시나? 전혀 아니다.
참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내가 너무나 형편없이 살다가 하나님 앞에 나왔는데, 정말 탕자가 온 것처럼 품꾼의 하나로 여겨주세요 하는 심정으로 부끄럽게 주님 앞에 나아왔는데, 그날 정말 폭포수와 같은 측량할 수 없는 압도적인 은혜를 받을 때가 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인과율의 법칙에 제한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겠다고 하면 이 사람에게 은혜를 주실 자유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은혜 수단은 정하셨지만, 그것이 인과율의 제한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 오로지 하나님의 자유로운, 그분의 주권대로 행하신다는 것이다.
교재 4번의 A를 보면, “우리를 구원하는 직접적인 수단은 믿음이고 도구적인 수단은 성례”라고, 제가 조금 조심스럽게 표현했다. 여러분 교재에는 제가 잘못 입력했는데, A를 보시면, 우리를 구원하는 직접적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직접적인 수단”이 믿음이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때 성례라는 수단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받게 하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수단으로 성례를 제정하셨는데 이 성례 자체에 은혜가 자동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례를 믿음으로 받는 사람들에게만 효력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만일 믿음이 없이 건성으로 성례에 참여한다면 은혜를 받지 못한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에서는 성례에 참여하기만 해도 은혜를 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성례에 참여하는 당신이 무엇을 느끼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살을 먹었거든요. 그리고 나는 사제거든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5번에 보시면, 성례는 그리스도가 세운 거룩한 예식이라고 했다. 세례와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셨기 때문에 신적인 권위가 있는 것이라고 성경이 가르친다. 그러니까 신약 시대의 성례는 세례와 성찬 밖에 없는데, 이 두 가지는 예수님이 직접 제정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28장에서 너희는 아버지 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명하셨고, 성찬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너희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우리는 행한다. 이 두 가지는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예식이다. 그래서 신약의 교회는 성례를 지키는 것이다.
6번에 보시면, “지각할 수 있는 표지” 라고 했다. 지각할 수 있는 표지라는 것은 예를 들어서 시청각자료이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애들을 가르칠 때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시청각 자료들을 쓴다. 학생들은 시청각 자료들을 통해 보다 실감나게 느낄 수도 있고, 그것을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례를 보이는 말씀이라고 한다. 말씀은 듣는 것인데, 성례는 보이는 말씀이라고 설명한다. 시청각 효과이다. 떡과 포도주를 두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맛보고 예수님의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의 의미를 생생하게 깨닫게 하는 점에서 보이는 말씀이다. 성례는 말씀을 시각적인 형태로 나타내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모든 미사를 라틴어로 진행하니 못알아들었다. 알아듣진 못해도 먹을 수 있다. 입은 있으니까 성례는 받을 수 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못 알아듣고 성찬만 받고 가는 것이다. 와서 떡 하나 주어먹고 가는 것, 그것이 그들의 종교의 전부였다. 왜냐하면, 집에 성경책에 있는 게 아니고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떡 먹는 게 기독교였고 그들의 전부였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어떠했겠는가? 말씀을 모르니 이방종교를 따라 신비주의나 미신적으로 빠지게 되고, 온통 비성경적인 것들을 예배 가운데 집어넣는 비정상적이고도 비상식적인 예배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돈 있는 사람들은 유물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뭐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핏자국이 묻어있는 나무판자,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점프하기 위해 발돋움했던 그 발자국이 찍힌 돌판 등. 그런데 그것들이 물론 진짜 그런 일들이 일어났던 유물도 아니지만 설령 맞다고 하더라도 2000년 동안 그게 그대로 있겠나? 성 베드로의 뼛조각이라고 그걸 보물함에 넣어두고 큰 성당에 모셔두고 하는데, 결국 그 뼛조각들을 다 모아서 조립해보니 공룡보다 더 큰 몸집이 만들어졌다는 웃픈 이야기도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모르니 이런 미신적인 신앙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각할 수 있는 표지”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시각적 형태로 나타내는 것이 성례이며 성례는 하나님 말씀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7번에 보시면, 예언, 제사법, 할례, 절기 등 구약의 성례들이 있었다. 구약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인 더 어린 교회였기 때문에 이런 율법과 규례들이 더 많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서 이런 것들이 다 사라졌다. 그리고 예수님이 친히 지정하신 성례, 세례와 성찬 이 두 가지만이 신약 새 언약 시대의 성례이다. 다른 건 없다. 그런데 여러분, 로마 카톨릭에서는 성례가 몇 가지인지 아는가? 일곱 가지이다. 그들은 결혼식도 성례에 포함시켰다. 또한 죽기 전에 기름을 바르는 종부성사, 또 신부에게 자기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도 성례에 포함된다. 이렇게 하나하나 편한대로 추가하다보니 결국 일곱 가지나 되었다. 그러나 여러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성례는 세례와 성찬, 이 두 가지 뿐임을 잊지 마시길 바란다.
8번에 보시면, 구약의 성례, 가령 제사법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보라. 지금 여러분이 주일날마다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러면 우리가 주일날마다 짐승이 한 마리씩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앞에는 목욕탕도 하나 있어야 한다. 피를 닦기 위한. 그리고 칼을 들고 짐승의 목을 따고 배를 갈라서 반으로 쪼개야 하며, 내장도 손질하고 해야 하는데, 이 광경이 얼마나 잔혹하고 참담하겠는가? 아주 자극적이다. 그런데 신약의 성례는 그와 비교할 때 매우 얌전하다.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
구약의 성례가 그렇게 공감적이고 자극적이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풍성하게 기독교 복음이 드러나기 이전이다. 그리스도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신 것이다. 반면 신약 교회는 어떠한가? B를 보시면,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하나님 말씀을 통해 풍성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더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성례는 세례와 성찬으로 간소화된 것이다. 말씀이 성례보다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깨닫지 못한 채 성례에 참여하는 거는 의미가 없다. 그래서 세례를 하는데 그냥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세례를 베풀지는 않는다. 세례를 베풀기 전에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 먼저 듣는다. 성찬을 받을 때에도 말씀을 통해 이 성찬의 의미가 무엇인지 들으면서 성찬의 떡과 잔을 받는다.
9번을 보라.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에 말씀과 성례가 있는데, 이 둘은 어떤 면에서 비슷하고 어떤 면에서 다른가? 공통점은 첫째, 하나님께서 은혜의 수단으로 제정하셨다는 것, 둘째,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것, 말씀을 전하는 것도 그리스도 중심의 말씀이고 성례도 주인공은 예수님이다. 그렇다면 차이점은 무엇인가? 첫째, 말씀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성례는 꼭 그렇지는 않다. 이를 두고 성례는 덜 중요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성례가 말씀보다 더 중요한 주도적 수단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두 번째 차이점은, 말씀은 믿음을 발생시키고 강화시키지만 성례는 이미 발생한 믿음을 강화시킨다. 성례를 통해서 믿음이 주어진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이미 믿는 자만이 성례를 받을 수 있고, 이를 통해 믿음이 강화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복음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고, 그렇게 생긴 믿음은 또 말씀을 통해서 강화된다. 그리고 세 번째 차이점은, 말씀은 다양한 형태로 세상을 향해 선포될 수 있지만 성례는 오직 교회에서 성도들에게만 시행된다. 말씀은 가지 못할 곳이 없다. 어디든지 가서 말씀을 전할 수 있다. 구치소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도 있고, 조금 비상식적인 부분이긴 하지만 법당에 가서 말씀을 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례는 하나님의 백성들, 오직 언약의 백성들에게만 제한적으로 베풀어지는 것이다.
이제 적용이다. 두 가지를 생각해볼 것이다. 첫째, 성례, 세례와 성찬이 은혜의 수단이라면 이를 우리가 얼마나 받아야 할까? 먼저 세례를 생각해보자. 유아세례가 아니라 성인 세례이다. 군대에 있을 때 초코파이 얻어먹으려고 3천명씩 떼로 세례를 주고, 이런 식의 세례는 합당한 세례라고 보기 어렵다. 나중에 이런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나중에 진짜 회심을 하게 됐을 때 그때 받았던 세례를 후회하게 된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서, “너 조회 나온 지 몇 년 됐는데 세례도 안 받았어? 다음 주 세례 받아!” 이런 데 넘어가시면 안 된다. 세례는 정말 정말 자기 믿음을 가지고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성찬도 마찬가지이다. 신자들이 예배할 때 성찬은 할수 있다면 많이 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성찬을 매일 집례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부분은, 말씀과 성례는 같이 가는 것으로서, 말씀을 깨달을 때 성례는 의미를 더해준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복음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면서 성찬을 받을 때 성찬은 훨씬 더 은혜의 수단으로서 강하게 이 역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찬의 의미를 모른다. 마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의 독일처럼, 라틴어로 뭐라고 떠드는데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고, 사제가 주니까 그냥 먹는다. 그렇게 해서는 성례가 은혜의 수단으로서 바르게 작동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례에 대해서 의미를 성경적으로 더 깊이 알고,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도를 점점 더 깊이 깨달아 가면서 우리에게 성례는 더 깊은 은혜의 수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을 경험하게 하며,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말한 것처럼 성찬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즉시 하늘로 들어 올리셔서 하늘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먹고 마시게” 하셔서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시는 그 은혜들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이 신비한 영혼의 만찬을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셨는데, 내가 이를 통해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그 문제는 누구의 탓인가? 그래서 대요리문답을 보면 성례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왜? 그만큼 이것이 신자에게 중요한 문제라는 것, 그 영혼이 죽고 사는데 아주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약속하셨는데 그걸 내가 누려야지. 그래서 앞으로 2-3번에 걸쳐 성례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올 가을에도 성찬이 있는데 이를 잘 공부해서 약속하신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란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은혜의 수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매일 매순간 누리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그 크신 은혜를, 저희가 게으름으로서 누리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시고, 주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충족하고 풍성함을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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