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에발산에서 저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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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과 저주‌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내다가 이렇게 또 한자리에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 오늘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올려드린 찬양을 받으시고 기도를 받아주시옵소서. 성령님 우리에게 말씀하셔서 마음판에 그것을 새기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배의 처음과 끝을 의탁드리오며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신명기 11장 26절에서 32절 입니다. 제가 한 절 여러분이 한 절 읽고 마지막은 합독하시겠습니다.
신명기 11:26–32 NKRV
26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27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28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2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30 이 두 산은 요단 강 저쪽 곧 해지는 쪽으로 가는 길 뒤 길갈 맞은편 모레 상수리나무 곁의 아라바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의 땅에 있지 아니하냐 31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려 하나니 반드시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할지라 32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베푸는 모든 규례와 법도를 너희는 지켜 행할지니라
오늘은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에벨산에서 저주를 이란 제목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려합니다.
여러분, 인생은 B와 D사이의 C다라는 말을 잘 알고 계실겁니다. 인생은 Birth, 탄생과 Death, 죽음 사이의 Choice, 선택이라는 말이죠. ABCD로 나아가는 알파벳 순서로 말장난을 하는거죠. 많이들 이게 프랑스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의 말이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정작 사르트르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프랑스 사람이 영어로 말 장난을 할 이유가 없어요. 아마 누군가로부터 어디선가 잘 못 퍼진 정보일 것입니다. 아무튼 이것이 누구의 말이건간에 설교에서도 많이 인용되는 이 속담이라고 할까요 격언은 우리에게 이해가 잘 되면서도 생각을 하게 하는 주제를 던집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기 전까지 무수한 선택을 하게 된다. 그 선택에 갈림길에 서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물론 그 선택지는 하나일수도 있고 여러개일수도 있을거에요. 그 선택지 가운데서 우리는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라는 것이 이 말에 대해서 우리모두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어떠한 선택을 해서 만족을 한 적도 있었을 것이고 어떠한 선택은 매우 후회한 경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런 짓은 하지말아야 했는데 하면서 말이죠.
또 길을 잃어본 경험이나 길을 잘 못든 경험을 한 적도 있을거에요. 핸드폰에 길을 검색해서 가고 있는데 지도를 잘못봤거나 방향이 반대방향이라던가 아니면 앞에 표지판을 보고 가다가도 한 블럭을 덜가서 길을 잘못들기도 하지요. 또 요즘엔 네비가 핸드폰으로 잘 되어 있어서 네비게이션을 잘 보고 가다가도 착각을 하거나 잘못보고 다른 곳으로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얼마전에 유튜브에서 보다가 한국인 중에서 20-30대 젊은 사람들이 길을 잃으면 습관적으로 부르는 노래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가수 아이유의 분홍신 입니다. 노래중에 ‘길을 잃었다 빠밤빰 빠밤빰~’이 부분을 그렇게 부른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니까 저도 가끔 그런적이 있는 것 같아요. 길을 잃는 것도 원래 가야하는 길에서 벗어나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것이죠.
오늘 본문인 신명기 ~11장 26절 에서 32에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택을 잘못하면 어떻게 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26절에서 28절 같이 읽겠습니다.
신명기 11:26–28 NKRV
26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27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28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신명기는 모세의 마지막 설교집이라는 것은 다들 알고 게실 것입니다. 모세가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둔다.라고 합니다. 두 가지 선택지가 있는데 이쪽은 복이고 이쪽은 저주야. 그리고 너희는 이것 중에서 뭐 선택할래? 라고 이스라엘 민족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선택하지 않는 선택지는 없어. 그러니까 무조건 선택해야해. 그런데 어느 쪽이 복이고 저주냐 함은 27과 28절에 말합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을 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너희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도 그러니까 가라고 명령하신 길에서 벗어나서 다른 곳으로 가고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원래 알지 못했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을꺼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먼저 원래 지식적으로 알지 못하던, 이제 들어가야할 가나안 지방의 다른 신들을 말합니다. 이 알다라는 단어는 그런 지식적인 앎외에도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알다라는 말이 종주-봉신 조약에서 자주 쓰이는 말이라고 합니다. 봉신 그러니까 신하가 종주 주인과 조약, 계약을 맺게 되는데 신하가 주인에게 일방적인 충성과 복종을 맹세할 때 쓰던 단어가 바로 이 ‘알다'라는 단어입니다. 너희를 애굽에서 구원해서 40년간 광야에서 돌보신 하나님말고 다른 낯선 신들을 알면 안된다. 충성하고 복종해서는 안된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 알다라는 히브리어 원어는 야다 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야다라는 표현은 지식적인 앎도 이야기하지만 경험적인 앎, 그리고 관계적인 앎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특히 부부관계에서 부부가 서로를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이 야다라고 하는 단어에요. 호세아 4장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고 이야기할 때 이 야다를 씁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을 경험적으로, 관계적으로 알 이유는 없다. 이스라엘 너희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알면 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 가나안의 신들은 가나안의 문명을 아주 음란하고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사회로 타락시킨 원인이었습니다. 이 말은 가나안의 신들이 실제로 존재해서 그렇게 했다는 말이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가나안의 주민들이 그러한 세상을 만들어놓은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했던 이상적인 사회,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고 희년으로 인해 불평등이 없는 그런 세상을 파괴하는 그런 신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공동체 안에서 형제로 자매로 가족처럼 연합해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엘, 기업 무를 자라는 제도도 명령하시고 희년이라는 제도도 명령하신 것입니다. 다른 신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불평등이 충만한 어떠한 특권층이 피지배층을 지배하는 세계였습니다. 왕이 있거나 이방신 제사장이 나라를 통치하거나 귀족들이 있거나 하는 사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명령하신 이스라엘의 사회 체제는 모두가 자유민으로 살아가는 세계였어요. 그리고 보통 율법이 다른 민족들에게 배타적일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원래 율법은 다른 민족 그리고 그 민족에서 억압당하거나 버려진 사람들이 유대인이 되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언약공동체로 들어오려는 이방인들을 환대해야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신들을 섬기는 불평등하고 억압을 종용하는 종교와 그 민족들은 유대인과 절대로 섞일 수 없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셨던 사회는 어느 누구하나 특권계층 없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가며 살아가는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보세요. 굉장히 누군가의 위에 서는걸 종용하지 않습니까?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는 것이 어찌보면 정당화되어 있습니다. 나만 아니면 돼!가 기본적으로 깔려있어요. 노력을 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 말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남의 위에 서는것을 좋아하면서 약한 사람들을 얕보고 멸시하고 그들을 억압하는 것은 원래부터도 이방신의 일이었던 겁니다. 나 혼자만 잘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를 돌보고 그들을 억압에서 자유케 하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입니다.
복과 저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고 살면 복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고 하나님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 살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이 주제는 이후의 이스라엘의 역사, 그리고 성경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에요. 당장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후에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살아가기 시작하는 사사기에서 부터 그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죠. 사사기의 캐치 프레이즈가 무엇입니까?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았더라 입니다. 하나님을 섬길때에는 괜찮아요. 가나안의 바알과 아세라등을 섬기니까 어떻게 되죠. 다른 민족들이 침략을 합니다. 그들을 지배하고 억압합니다. 그리고 사사기 말미에 가면 아주 끔찍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레위인이 첩을 들이고 그 첩이 도망가서 찾아오다가 강간당해서 죽고 그 시체를 전국으로 뿌려서 내전이 일어나게 되고 베냐민 지파는 거의 씨가 마르다 싶이 하고 그리고 그 베냐민 지파의 남성들이 아내를 못 얻자 납치를 하죠. 이 얼마나 황당하고 끔찍한 사건입니까. 이러한 일들이 사사기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다른형태로 또 일어납니다.
본문 29절 에서 31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신명기 11:29–31 NKRV
2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30 이 두 산은 요단 강 저쪽 곧 해지는 쪽으로 가는 길 뒤 길갈 맞은편 모레 상수리나무 곁의 아라바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의 땅에 있지 아니하냐 31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려 하나니 반드시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할지라
모세는 네가 가서 차지할 땅, 가나안 땅이죠 가나안 땅에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들어가게 하실 때에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해라. 갑자기 뜬금 없이 산 이름 두개를 대면서 한 산에서는 축복을 선포하고 한 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해라라고 합니다. 이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있다고 하는 요단 강 저쪽 해지는 쪽으로 가는 길 뒤 길갈 맞은 편 모레 상수리나무 굉장히 장황합니다. 이 곳은 어디인가 하면 바로 세겜이라는 지역입니다. 이 세겜은 성경에 굉장히 자주 등장하는 지역입니다. 이 곳은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 땅에 처음으로 정착하고 단을 쌓은 곳입니다. 또 야곱이 라반에게서 떠나 귀환하던 중에 단을 쌓은 곳이 세겜입니다. 나중에 신약에서는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을 만날 때 그 수가성이 세겜입니다. 이 곳은 양쪽 산으로 둘러쌓인 분지이고 지리 상으로는 이스라엘 땅이 남부터 북까지 길게 늘어져 있는 땅에 중간 정도에 위치한 곳이에요. 이 곳은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배와 관련된 아주 중요한 땅입니다. 거기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다시 갱신하게 됩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신명기 27 장 4-5절에
신명기 27:4–5 NKRV
4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5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도착한 그곳에 돌들을 세우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들을 기록하라. 그리고 제단을 쌓는데 거기에 쇠 연장을 대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예배했던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율법을 석회 반죽위에 새기게 했어요. 석회 반죽위에 율법들을 새기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영구적으로 기억할 수 있게 단단하게 새겨진 잊지 않을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돌단에 쇠 연장을 대지 못하게 한 것은 가나안이 철기 문명이었기 때문에 쇠 연장을 대서 보기 좋게 하려면 그들과 관계 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그들의 신이 이스라엘안에 들어올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저주받을 짓을 하게 되는 것이죠. 여호수아에서 이 의식을 그대로 성취합니다. 여리고와 아이성을 점령하자마자 세겜으로 올라가서 이 의식을 진행합니다. 단을 쌓아 예배를 드리고 돌기둥에 율법을 새기고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 반 지파씩 올라서 한쪽에서는 축복을 한쪽에서는 저주를 선포합니다. 형식은 27장의 11절 이후에서 보듯이 두 산의 중간에서 레위지파가 이렇게 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하면 백성들이 큰 소리로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당시 고대근동의 주군과 신하가 조약을 맺는 것이 이것과 비슷했다고 합니다. 신하가 의무 사항을 어기면 조약에 적힌 대로 저주를 받도록 했다고 해요. 이스라엘은 다시 한번 하나님과 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하나님을 왕으로 삼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살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저주의 목록을 보면 처음에는 우상숭배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만들고 숭배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고, 우상숭배는 조약자체를 파기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맹세했는데 그것을 지키지 못한것이죠. 그리고 부모를 함부로 대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장애인을 가진 사람을 모욕하고 약자들을 멸시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성적인 죄와 살인에 대해서 목록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잘 보면 십계명과 아주 유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주신 것에 대해서 그렇게 살겠다고 다시 한번 맹세하는 의식인 것입니다. 이것을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고 이것을 잘 지키고 살면 이 땅에서 복을 주겠다라고 하세요.
이렇게 율법을 돌에 새기고 큰 소리로 맹세했던 이스라엘은 어떤 선택을 했습니까? 여호수아가 살아 있을때에는 잘 지켜진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는 아까 이야기했던 레위인의 첩이야기만 해도 어떻습니까? 거의 모든 것을 다 어기고 있습니다. 간음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약자들을 멸시하고 살인하고 거의 모든 맹세를 어기고 있죠. 사사기 뿐만 아니라 분열왕국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사야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그들에게 정의를 바랐으나 포학이고 공의를 바랐으나 부르짖음만 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으로 이어져서 북이스라엘은 뿔뿔히 흩어지게 됐고 유다는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들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선택을하고 길을 잃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신약시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세상은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그리심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는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각각의 산에서 지켜야 할 하나님의 율법들을 선포하고 그것에 아멘으로 화답했고 석회에 단단하게 말씀을 새겼습니다. 즉 말씀이 그들의 삶의 기준이 되며 여호와의 백성이 말씀 중심으로 살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빅 이벤트인것이지요.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는 석회에 새긴 것처럼 마음판에 단단히 새겨 져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손으로 돌에 새겼지만 하나님의 법, 그리스도의 법을 우리는 우리의 마음판에 새깁니다. 그리고 마음에 새기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하지만 그것이 저절로 새겨지진 않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과 연구입니다. 성령님으로 인해 마음에 깊숙이 새겨진 이 법은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때,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을 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 말씀에 대해 아멘으로 큰 소리로 화답했지만 점점 갈수록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사기와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은 이스라엘은 결과적으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신명기는 복과 저주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순종의 여부가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의 여부를 결정하는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 28:20에서 예수님은
(NKRV)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 지상 명령입니다. 가르치는 것은 그것을 행하게 하는데에 있습니다. 진정한 앎은 행동이 따라옵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다.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을 받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성령님께서 마음에 말씀을 새기신대로 우리의 행동을 선택하게 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에발산에서 선포한 저주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님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분이 모든 저주를 짊어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믿는 것 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보내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를 언제나 주장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아니라면 우리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저주의 선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의 법이 성령으로 그 마음에 인 쳐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도를 행해야하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신다고 했던 선택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선택지였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가족, 친지, 친구 그리고 직장에서 까지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축복하는 귀한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말씀 앞에서
1.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게 하옵소서.
2.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연구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3. 성령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로 복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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