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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초기 그리스도교 운동 안에서의 바울
어떤 역사학자가 '원 바울'(original Paul)을 복원하기를 원한다면 자료를 신중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역사의 보편적인 규칙들이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첫째, 자료는 오래될수록 좋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시대와 관련된 오래된 자료를 찾아 분석해야 합니다.
둘째, 일차 자료(바울 자신의 것)는 이차 자료(다른 사람이 바울에 대해 쓴 기록들)보다 중요합니다. 바울이 직접 쓴 편지와 바울의 선교 사역을 기록한 사도행전은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셋째, 우리가 가진 모든 자료들은 어느 정도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바울에 대해 쓴 기록들도 그들의 개인적인 시각과 편견이 반영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여러 자료를 조합하여 바울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얻어야 합니다.
당대의 자료 중에서 그리스도교 운동 밖에서 생성되어 오늘까지 보존된 바울에 관한 자료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바울에 대한 직접적인 목격자들의 기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문헌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문헌은 바울이 직접 쓴 편지들과 그의 선교 사역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사도행전뿐입니다. 이 책은 아마도 바울이 죽은 후 약 20-30년 후(즉 기원후 80-90년대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현대 역사 비평이 시작된 이후(즉 18세기 이후)부터는 이 편지들을 포함한 모든 고대 문서는 원저자와 기원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들을 감안해야 합니다. 대다수의 현대 역사학자들은 바울의 편지 중에서 데살로니가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로마서 등 일곱 편의 편지를 통해서만 그의 진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이러한(비유대교 포교) 기초를 다지는 단계에서 예수 운동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유대교와 비유대인의 세계를 넘어서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바울이 새롭게 발견한 것은, 만약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자격에 따라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바울이 우상 숭배와 도덕적으로 부끄러운 행위 때문에 철저하게 죄인 취급했던 비유대인들도 그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주어졌으며, 또한 그것에 근거하여 주어졌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운동은 왜 비유대인 세계로 퍼져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유대적인 근거를 제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비유대인들이 유대인처럼 살지 않아도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통합될 수 있다는 비유대인 선교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 주었습니다."
2장 바울의 편지들과 그 역사적 정황들
“바울은 신학 전문서를 집필한 것이 아니라 편지를 작성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가르침을 편지 형태로 전달하였는데, 이는 그가 현실적인 문제에 직접 대응하는 사상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줍니다. (p. 32-33)”
“바울의 편지에서는 다른 글에서 인용된 부분이나 그가 사용한 용어가 재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중에는 로마서의 클레멘스 편지와 안디옥 이그나티우스 편지가 포함됩니다. (...) 이러한 위명서신은 고대 세계에서 흔히 발생하는 현상이었으며, 그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흔하게 나타났습니다. (p. 36)”
바울의 사상은 요한복음과 함께 후대 그리스도교 신학의 주요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의 편지들은 그리스도교 신약성경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으며, 여러 세대의 믿음과 교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p.32)
현대 역사학자들은 "역사적 바울의 편지"(로마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와 "역사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바울의 편지"(바울의 이름으로 알려진 신약성경의 열두 편의 편지)를 구분하여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바울의 생각과 가르침이 어떻게 발전하고 변화해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p.39)
위명서신(pseudepigraphy)은 고대 세계에서 흔한 현상이었으며, 특히 그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흔하게 발생하였습니다. 바울에 대한 존경심과 그의 권위를 인정하는 의미에서, 일부 편지들은 바울의 이름으로 작성되었지만, 그 실제 저작자는 다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편지들은 바울의 사상과 가르침을 새로운 상황에 맞게 적용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원래는 특정한 수신자가 없는 편지로 알려져 있었지만, 나중에 바울의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데살로니가후서는 바울의 모작으로 작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p.37)
목회서신은 2세기 초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시기에는 바울의 편지들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편지들이 작성되었습니다. 이러한 편지들은 바울의 권위를 이용하여 그리스도교의 진리와 상반되는 주장들을 제시하고 있으며, 바울과의 관련성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의 이름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디모데전서, 디도서, 그리고 디모데후서가 있습니다. (pp.37-38)
바울의 본문들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가지고 있으며, 미래의 상황에서도 창의적인 번역과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는 바울의 편지들이 현대 사회와 문화에 적용되고 이해되기 위해 여전히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바울의 본문들은 다양한 시대와 문화에서 다양한 의견과 해석을 받아들이며, 계속해서 새로운 담론과 이해를 모색할 수 있는 열린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p.152)
3장 바울과 유대 전통
바울은 유대 전통 안에 속해 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도래했다는 확신을 가진 이후부터는 그의 독특한 해석을 전개해나갔습니다.
성전 파괴로 인한 성전 사상, 할례, 코셔(음식법)에 관해서도 바울은 독특해 보입니다. 필론을 보면 그리 독특해 보이지 않습니다. 바울은 할례보다 새창조에 초점을 맞춰 해석해야합니다. "부활을 통해 새로운 현실을 가리킨다."
한 하나님과 한 주님에 대해 말하고 예수를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연관시킴으로써 유대인들의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대대적으로 수정합니다. 바울은 예수를 하나님의 현상으로 선언하기도 했는데, 초기 바울주의자 중 어떤 한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개념을 발전시켜 만물이 예수를 통하여 또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사건을 경험한 이후에는 이스라엘 역사와 세계 역사를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사건이 이미 창세기에 예고되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갈라디아서 3:8). 하나님의 약속을 계약금 조로 미리 받은 것, 즉 미래에 나타나리라 예상했던 바로 그 마지막 시대가 비로소 시작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바울의 유대 전통의 재편성과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심 및 경계를 뛰어넘는 그의 이방인 선교 경험은 문화적으로 상당히 모호한 현상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의미에 대해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직도 많은 논란을 낳고 있습니다.
4장 로마 세계에 위치한 바울의 교회들
가정, 도시, 제국 등 세 등급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로마 사회는 자유인, 노예, 자유민(노예였다가 해방된 자) 등 세 종류의 사람이 추가되었으며, 이는 오늘날의 가족 구성과는 다릅니다. 이러한 다양한 등급은 각각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에클레시아이(eklesiai: 모임들/회중들)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교회들"로 번역되지만, 주목할 점은 이 단어가 어떤 건물을 의미하기보다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p.59). 이러한 모임들은 사람들이 모여서 의논하고 결정을 내리는 장소로, 그리스로서의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러한 모임들은 사회의 의견이나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결혼하자마자 아이를 가지는 것은 통상적이었고, 가정은 최저 생계 수준이거나 그보다 조금 나은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이러한 가정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을 수 있었으며, 안전망이 부족한 상황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가정은 서로의 지지와 협력을 통해 이겨내고, 사랑과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반면, 다른 이들(예, 『바울과 테클라 행전』의 저자)은 그리스도교 여성들에게 결혼을 거부함으로써 사회와 맞설 것을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의 개종자들이 가정의 구조에 순응하는 경우에도 긴장 관계는 고조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념과 가정의 가치와 충돌하는 경우, 가정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할 수 있었으며, 이는 종종 가정의 결속을 위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서로의 신념과 가치를 존중하고 타협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무신론"은 어떠한 역사적·문화적 근거에 따른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정치 당국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 자신도 시 당국자들과 그들 위에 있던 로마 제국의 권력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고전 2:6-8; 빌 2:10)을 보였습니다(p.70). 이러한 태도는 그의 사회적 위치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보여주며, 그의 신념과 지속적인 도전을 나타냅니다.
5장 바울의 초기 이미지들
위명의 편지들은 바울의 과거 이미지들을 확고히 하거나 또는 다시 수정하여 새로운 프로필을 만들어 내었다. <바울과 테클라 행전>에서 그는 성적 금욕주의를 설파하고 결혼하는 사람으로 그려지는데, 이 이미지는 고린도전서 7장을 반영하지만, 에베소서나 디모데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모습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급진적인 바울의 모습은 <바울의 순교>에서 완성된다. 바울의 처형에 관련된 본 문서는 바울을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로마와 타협하지 않는 인물로 묘사한다.
마르키온의 신학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사랑은 누가가 묘사한 은혜롭고 포용적인 예수의 이미지, 곧 인류를 결코 정죄하거나 처벌할 수 없는 완전한 사랑의 이미지에 의해 강화되었다. 유대 전승을 가지고 순수한 복음을 희석시키려고 했던 이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바울에 대한 대안적 이미지와 그의 편지에 대한 다른 해석을 제시하는 길은. 이레나이우스, 테르툴리아누스와 같은 교부들에 의해 진행됐다. 이러한 2세기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바울은 거의 모든 사람이 원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과연 복음에 담긴 함의들을 가장 분명하게 깨달은 선견자(visionary)였을까? 아니면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신성모독적인 방법으로 무시하도록 만든 위험한 극단주의자였을까?(p.74)
다른 이들이 그의 이름으로 새로운 편지들을 작성함으로써 그의 새로운 모습을 발전시켰다. 그의 문학적 개성을 따라 그 편지들의 메시지를 발전시키거나(데살로니가전서를 각색한 데살로니가후서), 또는 그의 가르침을 더 이상 지역적인 위기 상황에 한정되지 않는 형태로 요약하고 일반화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에베소서). 바울이 세운 교회들이 여러 행태의 그리스도교 신학과 실천을 발전시켜나갈 즈음에는 권위있는 교사들이 진리를 분명하게 전달하고 수호하는 자들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바울을 어떤 공동체를 운용하는 인물로 의인화할 필요성이 대두되기도(디모데전서와 디도서). 이 **위명의 편지들(pseudoymous)**은 바울의 과거 이미지들을 확고히 하거나 또는 다시 수정하여 새로운 프로필을 만들어냈다.(p.78)
이러한 2세기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바울의 이미지는 논란의 중심 →결국 바울은 거의 모든 사람이 원하는 인물이 되었다. (p.84)
6장 경전으로서의 바울
2세기 이후부터 바울의 편지들이 받아들여진 전형적 방식(p.90)
1. 그의 편지는 이해하기 힘들다
2. 그의 편지는 성경의 지위를 가진 권위 있는 글이다.
3. 그의 편지는 해석상 논란의 여지가 많다.
4. 해석상의 논란이 너무 컸기 때문에 구원 자체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텔로스가 되신다(로마서 10:4)의 말씀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end)을 의미할까 아니면 율법의 완성(fulfillment)을 의미했을까? 이처럼 바울 서신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은 역설을 좋아했고, 철학적 사고 클이 요구되는 질문을 자주 던졌다는 것이다.
그의 편지들이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이라고 부르고 나중에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이라고 명명한 책과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 성경적 지위는 특별한 독법을 요했고 이에 대한 기대감도 한층 높여주었다.
예컨대, 구원에 관해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서방교회에서는 사법적 은유로 발전했다. 그러나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모스와 가파도키아 교부의 동방교회에서는 변화와 갱생의 은유가 지배적이었다. (p. 97)
무엇이 바울의 편지들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을까? 때로는 그가 사용한 표현 자체의 모호함: 텔로스, 부활, 율법 등(pp.90-91)
사실은 이러한 수수께끼와 같은 진술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존재성과 자아의 정체성에 관한 심오한 질문들, 곧 일종의 신학적 또는 철학적 사고의 틀이 요구되는 질문들이 제기된다.(p.92)
어떤 본문의 해석은 어떤 면에서 연극을 공연하는 것과 상당히 흡사. 대본이 아무리 오래된 고대 작품이거나 아무리 그 대본에 “충실한” 연기를 한다 할지라도 현대의 훌륭한 공연에는 항상 무언가 참신하고 새로운 의미가 담기게 마련(p.98)
7장 아우구스티누스와 서구 교회
그리스도교 역사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기원후 312년)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p.101)→그리스도교 경전이 중심 문화의 본문이라는 지위 획득 + 바울의 편지도 확산
라틴어를 구사하는 서방 교회에서는바울 서신에 관한 주석을 쓴 4세기 지성인들 가운데
히포 출신의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 (p.102)
모든 중세 및 종교 개혁이 제시한 바울 해석은 어느 정도 다른 점이 있다 하더라도 사실은 거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특히 로마서)을 태초의 천지창조(롬 1장)로부터 시작해 만물의 최종적이며 영원한 회복(롬 8장)으로 마무리되는 인류의 보편적 이야기를 서술한 인물로 받아들였다.(p.103)
아우구스티누스는 근본적으로 이 죄를 불순종으로 해석했고 이 죄는 마땅히 하나님에 의해 처벌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바람이다. 즉 하나님 대신 자기 자신에게 공로를 부여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자격과 무관하게 주어지는 것이며,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 공덕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가장 심각한 형태의 죄였다(p. 104-105).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은 성적 욕구와 오랫동안 싸웠지만 결국 실패, 그는 남성의 성욕이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로마서 5:12의 라틴어 번역을 따라 죄책감은 아담이 지은 원죄로부터 물려받아 출산을 통해 대대로 내려왔다고 생각. 궁극적으로 우리 중에 부모의 성적 결합을 야기한 성욕 없이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pp.106-107)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복음의 핵심은 은혜로 요약할 수 있다. 은혜는 선물이나 호의가 아니라, 인간의 행원. 심지어 인간의 의지 안으로 깊이 파고든 어떤 세력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자유 의지 용어를 유지하면서도 바울 서신 안에서 우리의 행동뿐 아니라 우리의 의지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동인을 부각시킬 만한 이유를 발견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적이라는 형용사를 고안해내며, 은혜에 대한 부적절한 견해와 관련된 용어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적 은혜의 효과에 대해 반추하면 할수록 그는 바울의 예정론에 관한 용어를 더욱더 발전시켜나갔다.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가 어떤 의미에서 신자의 존재 자체의 구성 요소라는 바울의 개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정확하기 강력한 수사학을 통해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울려 퍼질 것이다. (p. 110)”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력은 서구의 중세 신학에서 바울의 편지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데 한몫(p.111)
8장 개신교 전통 안에서의 바울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바울에게 부여한 핵심적인 역할은 개신교주의가 신학과 예전과 영성에 있어 매우 “바울적인” 성격을 띠도록 만들었다. 성경 전체를 바울의 관점에서 읽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학 전체를 동일한 관점으로 시도하려는 시도는 전적으로 개신교의 독특한 현상(p.115) → 루터, 칼뱅 등
바울의 영향력은 지난 500년의 개신교 역사에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종교개혁의 여러 갈등으로 인해 증폭된 바울의 호전성은 수많은 내부적 균열을 조장하면서 개신교 안에 자리잡게 된 논쟁 정신을 확산시켰다.(p.123)
마르틴 루터는 믿음과 행위를 대치된다고 주장했다. 율법은 우리의 죄성을 드러내면서 곤란한 처지에 대해 하나님의 개입을 요구하는 반면 복음은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낸 기쁜 소식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행위와 율법의 행위에 대한 대립은 베드로를 향한 바울의 도전처럼 루터 안에서 교황을 향한 도전을 투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루터를 통해 사회적 경제적 소명을 동일한 가치를 지닌 그리스도인의 봉사의 장으로 만들었다. 이런 효용성도 함께 겸비한 것이 바로 루터에 의한 바울 신학이었다.
장 칼뱅(1509-1564년)도 바울 중심의 해석자였다. 성경을 총망라하는 총제적인 신학을 제시하려는 칼뱅의 의지는 다양한 주제를 신학의 전 지형으로 확대하게 만들었으며, 그 이후부터 개혁주의 전통의 그리스도교적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은 바울의 은혜 신학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으며, 이 주제는 그 이후로부터 개신교 영성을 심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p. 125).
9장 유대교-그리스도교 관계 안에서의 바울
바울은 자기 자신을 “유대인”으로 묘사했을 뿐, 단 한 번도 “그리스도인”으로 표현한 적이 없다. (p.127)
유럽의 반(反)유대주의의 역사와 유대인 대학살로 나타난 그 끔찍한 상황의 절정은 최근에 진행된 모든 바울 해석의 맥락을 형성할 뿐 아니라 이 주제가 도덕적으로도 매우 시급한 문제임을 강력하게 시사해준다.(p.128)
유럽의 계몽주의는 유대교를 폄하할 새로운 원인 제공, 바울을 해석하는 새로운 틀도 제공(p.132)
오리게네스와 히에로니무스는 바울의 비판적 견해를 유대인의 제사, 안식일 준수, 음식법, 할례 등 “새 언약”에 의해 대체된 “옛 언약”의 규정들에 관한 것으로 이해했다. (...) 기원후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기원후 135년 발생한 제2차 유대인 반란의 실패는 이러한 독법을 확정 짓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p. 130).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의 논쟁을 행위를 수반하는 자랑 즉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교만을 겨냥한 것으로 이해했다. 루터는 유리 유대인들과의 논쟁에서 유대교를 행위에 의한 의와 자기 구원을 추구하는 종교로 해석했다. 초반에는 복음을 선포하며 유대인들도 복음에 긍정적으로 반응할 것으로 기대했던 루터도 나중에는 환멸을 느꼈다(p. 131).
페르디난트 크리스티안 바우어(1792-1860년)는 바울을 유대교 족쇄로부터 그리스도교를 해방시킨 중심인물로 치켜세웠다. 바우어가 헤겔학파의 정신이란 개념을 높이 평가하는 것을 정당화해주었다. 자유주의 개신교인들에게 이렇나 영적 진보는 그리스도교 영성에 대한 최상의 표현이었다(p. 132). 유럽의 반유대주의가 성장한 데에는 다양한 원인이 꼽힐 수 있겠지만, 바울에 대한 해석도 신학적인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p.132)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새로운 해석이 유행했다. 바울은 개신교 스타일의 개종을 경험하지 않았으며, 그는 단 한 번도 유대주의에 대한 확신과 소명을 저버린 적이 없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소명은 위임을 뜻하고 곧 이방인들에게 전하라는 사도적 사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근본적으로 유대주의에 떠난 적이 없으며,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종교나 관습을 바꾸어야 한다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p. 133).
1977년 기념비적인 책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에서 E. P. 샌더스는 유대교에 대한 오래된 고정 관명르 뒤집어엎는 데 성공했다. 은혜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이미 주어진 언약이라는 틀 안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샌더스는 이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를 바울 당시의 수많은 유대 문헌을 통해 추적함으로써 바울 시대의 유대교가 성경의 언약에 근거한 신앙을 떠났다는 과거의 주장에 도전장을 던졌다(p. 134).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은 바울의 종교개혁적인 독법으로부터 분리시켰으며 바울의 논쟁이 유대교나 혹은 행위에 근거를 둔 영성 등 신념에 의한 반대가 아닌, 바울의 이방인 선교라는 역사적 문맥에 근거한 것임을 천명했다(p. 135).
10장 사회-문화적 비평가로서의 바울
바울의 신학은 극단적인 양극성으로 가득 차 있다(p. 139).
프리드리히 니체는 예수의 가르침을 바울이 왜곡했다고 고발했고, 칼 바르트는 로마서에서 자신들의 종교와 윤리를 문명의 최고 업적으로 치하하고 자유주의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을 허용한 최고 업적으로 치하하고 자유주의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을 허용한 유럽의 허구적인 교만을 치유할 필요 해독제를 발견했다(p 141).
다수 유럽 철학자들(야콥 타우베스, 조르조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 타니슬라스 브레튼, 알랭 바디우 등)은 바울의 종교적인 신념과 분리 시키면 사도 바울을 절대적인 사건 안에서 세워진 진리에 주목한 위대한 인물로 칭송한다. 세속화된 버전은 은혜 신학을 제시하지만, 그 안에는 사회 문화적 차이점들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능력이 있음을 인정한다(p. 142).
누군가는 바울을 통해 노예제 찬성을 누군가는 해방을 주장했다. 이처럼 바울의 신학은 양극성으로 가득했다. 성별과 성개념에도 바울 신학을 다양하게 해석하고 적용한다. 예컨대, 유니아스가 아닌 유니아를 보고 “여성 지도자”로 해석하거나 이것을 강제로 유니아스라는 남성명사로 고쳐 “성서의 표기 실수”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와 같이 바울 신학은 양극성으로 가득하다.
바울 신학을 통해 우리는 사회에 널리 퍼진 고정 관념과 민족, 인종, 또는 국가라는 전제주의적인 주장에 항거하는 독립적인 정치 사고로부터 탈피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바울의 모습이 아직도 그를 우리 사회적 정치적 담론에는 거슬리지만 우리에게 유용한 인물로 남게 하는지도 모른다(p. 151).
갈라디아서 3:28 →계층화된 지위 및 가치로 이루어진 로마 사회에 대한 급진적인 도전처럼 들린다.(p.140)
[고린도전서 1:27-29] → 이 선언은 사회 질서에 대해 새롭고, 심지어는 혁명적인 시각을 제공해줄 만한 강력(p.141)
프리드리히 니체(1884-1900년)는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했다며 바울을 고발. 그는 바울이 모든 “고상한” 것에 맞서 약한 자의 편에 서게 하는 “노예도덕성”을 가지고 그리스도교를 분노와 미움의 종교로 만들어버렸다고 주장(p.141)
더 최근에는 다수의 유럽 철학자(야콥 타우베스, 조르조 아감벤, 슬라보예지젝, 스타니슬라브 브레튼, 알랭 바디우 등)가 바울이 현대 서구 세계의 정치적··문화적 맹관(盲管, cul-de-sacs)을 뚫고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사상가임을 “재발견” (p.142) ****
바디우와 바울: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거짓된 보편주의가 아니면서도 문화적 특수성과 정체성 정치의 분열 효과로부터 자유로운 유형의 “보편주의”가 이 사건(바울 사건)으로부터 나온다. 바디우는 이를 통해 바울의 “세속화된” 버전의 은혜 신학 제시(p.142)
바울과 현대성 간의 잠재적 불협화에 대한 교과서적인 예는 바로 노예제도 문제. 바울의 편지들은 18-19세기에 걸쳐 진행된 논쟁에서 양쪽 편 모두에 의해 폭넓게 원용(援用) (p.143) →성별 및 성 개념과 관련해서도 유사한 문제점(골 3:18; 엡 5:21-33; (딤전 2:8-15).(p.145)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회적 관점을 그에게 전가하여 노예 해방에 대해 그가 취했던 그의 침묵을 일종의 정치적 실용주의로 치부하고 그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은 충동을 수없이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그가 자신의 진정한 견해를 밝혔더라면 아마도 그는 갓 태어난 그리스도교 운동을 큰 위험에 빠뜨렸을 것이라면서 말이다.(p.144)
성별과 관련하여 바울이 가장 편향적으로 다룬 본문에서 여자들은 창세기 2-3장에 근거하여 남자들과 구별된다. 그런데 여기서는 “선천적인” 위계 질서가 여자들이 머리를 가리는 관습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고전 11:2-16). 바울은 이 본문을 포함한 다른 본문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고대의 보편적인 기준을 전제한 것으로 보인다.물론 이런 해석은... 오늘날까지도 어떤 이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p.146)
성별에 가장 급진적인 바울의 선언은 고전 7장(결혼보다 독신주의 우위): 남자나 여자나 매이지 않은 사람이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기 때문(p.147)
바울의 유산이 전통적인 관습과 보수적인 대의명분을 대변하는 데 가장 자주 활용돼 왔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동성애에 관한 오늘의 논쟁에서 로마서 1:26-27에 기록된 바울의 진술들은, 논쟁적이긴 하지만, 보수적인 그리스도교 윤리의 핵심적인 증거임에는 틀림이 없다.(pp.147-148)
이러한 예들은 해석학의 기본 원칙을 잘 보여준다. 본문들은 인간 해석자들에 의해 목소리와 영향력이 주어지며 이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위상과 자신들의 문화적 또는 정치적 의제에 따라 불가피하게 본문들을 선별하고 우선순위를 매기며 담론화한다.(p.149)
어쩌면 우리의 통상적인 의제와 잘 부합하지 않는 바울의 모습이 아직도 그를 우리의 사회적·정치적 담론에는 거슬리지만 우리에게 유용한 인물로 남게 하는지도 모른다.(p.151)
그의 본문들은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의 상황에서 창의적인 번역들과 새로운 해석들을 생성해낼 만큼 충분히 “열려” 있다. (p.152).
구약 중심의 세상에서 살아가던 바울이 다메섹 거리의 연결로 말미암아 신약,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극적으로 들어와 이론적 토대를 세우고, 폭넓은 전도 사역을 통해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현재의 자리에 있게 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하지만 바울이 많은 일을 할수록 말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모든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 결국 교회 성장의 초석을 다져 놓았고, 젊은 나이에 자신의 신념을 위해 자기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다. 존경받아 마땅한 바울에 대한 평은 과거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앞으로도 계속..
<1부 역사>
오늘날 터키 남동부인 길리기아 속주의 다소 출신, 유대인 부모, 유대율법인 토라를 정확히 해석하기로 정평이 나 있던 바리새인으로 그리스어로 번역된 유대 성경에 관해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습득했을 것으로 보인 바울은 유대인 지성인이자 순회 수공업자였으며 나사렛 예수에 관한 새롭고 파격적인 주장을 펼친 선전가였다. 2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13편의 편지가 역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바울의 친서로 간주되었지만 대다수 현대학자는 데살로니가전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로마서단 일곱 편의 편지를 역사적 바울의 편지로 인정했고, 그것을 통해서만 그의 진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바울은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다메섹 등지에 상당히 크고 잘 자리를 잡은 헬레니즘적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 공동체와 매우 친숙했다. 바울은 처음에는 바나바와 팀을 이루어 시리아 지방인 안디옥과 그 주변에 여러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세웠다. 안디옥에서 분쟁이 일어나면서 비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던 바울의 선교사역은 비난을 받게 되었고, 바울 자신도 베드로와 강하게 부딪히고 말았다. 이후 디도, 디모데, 실라라 불리는 실루아노와 함께 서부 및 중앙 터키 지역인 갈라디아와 아시아를 거쳐 꾸준히 서쪽으로 이동하며 마게도냐와 그리스까지 진출했다. 그가 세운 교회 중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고린도 교회가 그에 대한 신뢰를 철회하기도 했다. 바울은 아마도 60년대 초에 반란죄 혹은 치안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그의 나이 50대 초반에 처형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30년간 예수 운동이 발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고 그를 통해 최초 1세대 그리스도교가 직면했던 도전들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바울은 신학 전문서를 쓴 것이 아니라 편지들을 썼다. 다른 편지와 달리 노예인 오네시모를 구하기 위해 지나치게 개인적인 내용을 담은 빌레몬서가 남아 있는 것은 특이하다. 고대 세계에서는 흔한 위명서신과 같이 바울에 대한 존경심에 의해 기록되었고, 그가 남긴 유산을 계승하기 위해 그의 사후에 다른 이들에 의해 기록들도 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데살로니가라는 도시에 세운 교회에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던 그들이 사회적 압박을 견디다 못해 다시 되돌아가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걱정하며 쓴 편지다.
고린도전서는 그리스 남부에 위치한 고린도 교회로부터 받은 소식에 대응하기 위해 쓴 편지로 그들에게는 여러 다양한 측면에서 도전적인 글로, 그들이 취해서는 안 될 자세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고린도후서는 고린도 교회의 일부 교인이 바울의 권위에 도전해 그의 육체적 연약함을 비난하고 나선 이후에 나타난 바울과 고린도 교회 간의 복잡한 관계를 반영한 편지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분노가 가장 격렬하게 드러나는 편지로 할례 문제와 같이 자신이 선포한 복음이 다른 선교사들에 의해 변질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대응한 글이다.
빌레몬서는 빌레몬의 집에 모였던 교회에 보낸 편지로 오네시모라는 어떤 노예가 바울을 찾아와 한 가정 안에서 일어난 분쟁에 개입해 주길 요청한 내용과 관련된 글이다.
빌립소서는 모든 면에서 바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그리스 북부에 위치한 빌립보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1)"의 찬양시는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진술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로마서는 가장 긴 편지로 바울이 그가 소망했던 스페인 방문 길에 앞서 자신의 로마 방문을 예비하는 차원에서 보낸 서신으로 바울의 신학을 함축적으로 요약한 걸작으로 간주된다.
바울의 신학은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유대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특히 여러 수준에서 유대 경전에 철저하게 의존했다. 바울은 여러 본문에서 유대인들을 날카롭게 비판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포기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메시아인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은 바울에게 있어 이스라엘과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다. 바울이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6:15)"에서 부른 새 창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나타난 새로운 현실을 가리킨다. 바울은 좋은 소식에 반응하여 개종자들이 생겨날 때마다 신자들로 구성된 작은 공동체를 세웠는데 그는 이 공동체는 어떤 건물을 의미하기보다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에클레시아이(모임들/회중들)라고 불렀으며 주로 가정에서 모였고, 어떤 경우에는 가게나 공공건물 또는 야외에서 모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이는 데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롬16:23)"와 같이 고린도의 에라스도를 제외하고는 이 모임의 멤버 중 사회의 최상위층에 속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안정적인 수입없이 최저 생활을 유지하며 살았다. 자유인, 노예, 과거에 노예였다가 해방된 자유민의 세 종류의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대부분의 식사 모임은 같은 지역 거주자들이나 같은 직종 혹은 인종(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회비를 내고 월례 식사를 했다. 어쨌든 로마 종교에 대한 그리스도교 운동의 도전과, 로마의 통치권을 강화하는 시각적인 선전 행위 및 시민 종교의 제사 의식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저항은 궁극적으로 로마 문명이라는 거대한 체제를 완전히 전복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적대자들과 날카롭고 심지어는 아주 적나라한 비판과 언쟁을 벌일 수 있는 대단한 논쟁가였던 바울은 게바와도 대립했고, 이로 인해 친구들뿐 아니라 적들을 많이 만들었으며, 비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동료 신자들 중에도 그를 의심하고 싫어하며 반대했던 자들 또한 적지 않았다. 바울은 자신을 자유와 진리를 위해 싸워 승리한 투사요, 성경을 자주 인용하는 긴 설교를 하는 자로 묘사했다. 사도행전 20장의 에베소에서 행한 그의 고별 연설은 로마로 가는 여정이 그의 마지막 여행이 될 것을 미리 예고했다. 바울은 진리를 위해 예수와 스데반의 후계자로서 자신의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던 순교자의 모델로 굳혀지기에 충분한 작업을 수행했다.
<2부 유산>
베드로의 이름으로 작성된 문서가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해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인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3:15~16)"에서 표현했듯이 바울의 편지는 이해하기 어려웠고, 성경의 지위를 가진 권위 있는 글, 해석상 논란의 여지가 많은 글, 해석상의 논란이 너무 컸기 때문에 구원 자체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해하기 어렵고 권위있는 인물이었던 바울은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풍부한 사고력을 가진 그리스도교 신학자로 그가 남긴 유산은 가히 엄청났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기원후 312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교회들이 성장하고 학력이 높은 지성인들이 교회로 영입되면서 그리스도교는 확산되었다. 그 중 히포 출신의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 깊이 뿐만 아니라 후대 서구 신학에 끼친 영향력 면에 있어서도 모두를 능가했다. 그에게 있어 복음의 핵심은 은혜, Gratia였다. 비록 마르틴 루터가 성경의 권위를 그리스도교의 다른 모든 권위 위에 올려놓았지만, 신구약성경 모두를 해석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해준 것은 바로 바울의 편지들이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편지는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였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율법의 행위"의 대비를 통해 비유대인들도 모세의 율법을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압력에 저항했다. 루터는 바로 이것이 자기 시대에 가장 크게 대두되고 있던 문제라고 생각했다. 루터는 바울의 독신주의 조언을 결혼보다 성적 순결을 더 우선순위에 놓는 것으로 이해한 오래된 전통에 대항하면서 자신의 수도승 서약을 파기하고 수녀와 결혼해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으며 결혼과 가정생활의 소박함을 향유했다. 장 칼뱅은 바울이 쓴 로마서를 "성경의 모든 심오한 보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묘사하고 칭의의 은혜 뒤에 성화의 은혜를 추가했다. 영국 개신교와 향후 미국 개신교 영성의 핵심 요소였던 청교도적인 자아성찰, 일상의 영성 훈련, 영적 성장에 대한 관심 등은 이 칼뱅의 바울 해석의 직접적인 후예라는 점이 분명하다. 종교개혁의 여러 갈등으로 인해 증폭된 바울의 호전성은 수많은 내부균열을 조장하면서 개신교 안에 자리잡게 된 논쟁 정신을 확산시켰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유대인으로 묘사했을 뿐, 단 한 번도 그리스도인으로 표현한 적이 없다. 강함과 약함, 부와 가난, 자유와 예속, 유대인과 헬라인, 할례받은 자와 할례받지 못한 자와 같이 바울의 신학은 극단적인 양극성으로 가득 차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이 선언은 사회 질서에 대한 새롭고, 심지어 혁명적인 시각을 제공해줄 만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뵈뵈와 브리스가를 비롯한 다른 여성 인물들은 바울에 의해 교회 리더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부각되었고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롬 16:7)"의 유니아같은 뛰어난 인물이 있지만 바울은 여자들에게 남편에게 복종하고, 잠잠하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쓰고 있으며 또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와 같이 급진적인 해석의 가능성이 있는 글도 남겼다. 바울은 보수주의적 혹은 자유주의적 성향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 바울의 수사학적 문화적 유연성과 더불어 이것이 만들어내는 모호함은 우리에게 저주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축복이 될 것이다. 그의 본문들은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의 상황에서 창의적인 번역들과 새로운 해석들을 생성해낼 만큼 충분히 열려있다. 바울 해석자들은 그 메시지 안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사람들을 해방시키며 구원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더욱더 새로운 방식으로 끄집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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