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의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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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10
지난 2020년 4월로 기억하는데요. 코로나19가 터지고 나서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대면 예배 금지’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면서 주일예배는 물론 새벽기도회나 수요예배와 같은 주중 예배도 모두 온라인으로 대체되었던 것을 다들 기억하실 것입니다.
교회들마다 미처 준비된 안 된 상태에서 온라인 시스템으로 전환을 하다 보니 여러 혼란스러운 일도 많았는데요. 당시에 저도 부목사로 시무하던 교회에서 어떻게 하면 대면 예배만큼이나 비대면 예배에서도 성도들에게 은혜를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동료 부교역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여러 영상 콘텐츠들을 만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집합 금지로 인해 새벽기도회를 한 3~4개월쯤 비대면으로 드리면서요. 낮에 동영상을 찍어서 다음날 새벽 5시쯤에 유튜브에서 송출되도록 예약했었거든요. 그전에는 꼬박꼬박 새벽에 나가서 실시간으로 기도하다가 코로나 핑계로 몇 개월을 새벽에 정당하게(?) 빠지니까 부끄러운 얘기이지만 정말 편하더라고요. ‘이렇게만 새벽에 푹 잘 수 있으면 평생 목회해도 전혀 힘들지 않겠다’ 당시에 이런 철없는 생각도 드는 거예요. 그러다가 다시 대면 예배가 재개되었을 때 새벽에 나가려니까 몸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몸이 편한 게 좋은 게 아니더라고요.
코로나 시기에 이렇게 몸이 편했다가 다시 회복하기 어려웠던 것은 비단 저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 교회 교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교회를 이탈하지 않았습니까? 아마 코로나 이후로 나오지 않는 분들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셔도 벌써 생각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많은 사람이 갑작스럽게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은, 단지 코로나 영향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정말 그렇다면 코로나가 종식된 이후에 다들 돌아와야 하잖아요? 물을 끓일 때 데울 시간이 필요하고 장작에 불이 붙을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듯이 성도가 일순간에 빠져나간 일은 코로나 그 전부터 서서히 이탈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저만 하더라도요. 새벽에 좀 푹 자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조광운 목사님이라는 분이 쓴 「과잉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팔복을 주제로 한 책을 보면, ‘하인리히 법칙’이라는 게 나오는데요. 큰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는 그것을 경고하기라도 하듯 반드시 징후가 발생한다는 이론입니다. 이 원리를 한국 교회에 대입해 보면 코로나는 성도 이탈이라는 기폭제 역할을 했을 뿐, 성도들은 그 이전부터 서서히 교회를 이탈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교회 이탈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그 중심에 신앙의 타협이 있다는 것이죠. 새벽에 일어나지 않아서 편했던 저처럼 나도 모르게 조금씩 세상과 동화되고 점점 닮아가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요, 여러분. 사탄은 요즘 참 편하다고 합니다. 물질주의, 세속주의를 교회에 살짝 물들여 놓았더니 성도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 쪽으로 기울어져 있더라는 거예요. 그런 찰나에 코로나는 교회를 떠날 좋은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겉으로 드러난 코로나가 아니라 그 중심에는 신앙의 타협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의 타협은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실종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책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의 생각은 어떠세요?
자, 오늘은 팔복 시리즈 마지막 8번째 말씀으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의 복’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먼저 오늘 요절 말씀인 마태복음 5장 10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합독)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여기서 ‘박해를 받는’으로 번역이 된 헬라어 ‘데디오그메노이’라는 말은 ‘추적하다’ ‘핍박하다’는 뜻의 현재 완료형입니다. 즉 남에게 쫓겨 와서까지 핍박을 당하는 것을 뜻하는데요. 무엇 때문에 그런 핍박을 받습니까? 그 이유는 단 하나, 의로운 일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팔복의 네 번째 항목,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얻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기 위해 일하다가 받는 고난입니다. 그것이 의인에게 고난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라는 것이고요. 그렇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일하다가 고난을 받은 자들에게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복은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로 시작해서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로 끝나는 것이죠.
여러분, ‘박해’란 세상이 기독교 신앙을 공격하기 위해 가하는 것이라면요. ‘혐오’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나와 다른 정체성을 지녔을 때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이 혐오 아닙니까? 성도는 예수님을 닮아가기 때문에 세상과 다른 정체성을 가지게 되고 세상은 예수 믿는 자들을 혐오하고 박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오히려 내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세상과 타협한 성도는 스스로 기독교 신앙에서 이탈하게 되고 예수님과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니 세상은 그들을 박해할 이유가 없어지게 된 것이죠. 혐오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모르는 분들이 볼 때 자신들과 동일한 정체성이 느껴지는데 굳이 박해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흔히들 지금 이 시대를 ‘신앙의 이유로 박해와 핍박이 없는 시대’라고 하지만, 어쩌면 타협한 신앙이 박해를 초래할 이유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4세>에 나오는 대사에서 유래되었는데요. 2003년에 방영된 드라마 <상속자들>의 부제로 쓰여 대중적으로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그 드라마에서는 조선 시대의 정조 임금이 나오는데요. 정조 임금은 늘 백성과 조정이 염려되어 밤마다 침상을 맴돌며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왕으로서 짊어져야 할 왕관의 무게였던 셈입니다. 이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한복음 19:19-20 합독
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 당시 십자가 처형 때는 죄수의 죄목을 써 놓은 패를 붙였습니다. 사형 선고를 했던 빌라도는 죄목을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게 했는데요.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것이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 3개 국어로 기록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히브리어 외에 다른 두 개의 언어가 당시 전 세계를 대표하는 언어였거든요.
어떤 면에서는요. 여러분, 예수님을 고발하던 죄 패가 오히려 예수님이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아마 당시에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다들 예수님의 죄 패를 찍어서 SNS나 유튜브에 올렸을 거예요. 그런 전례가 없었으니 뉴스 특종으로도 나갔을 겁니다. 이렇게 죄 패가 오히려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왕관의 무게는 실은 십자가의 무게였습니다. 예수님의 머리를 짓누르던 가시면류관의 무게였습니다. 이렇듯 세상이 예수님에게 십자가의 박해를 가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온 인류의 왕이심을 오히려 확인시켜 주는 증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성도의 삶에 박해가 있다는 것은 사실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지켜가기 때문에 박해가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이셨기 때문에 박해를 받으셨듯이, 우리 성도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성도로서의 신앙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왕관을 잃어버린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신앙 때문에 받는 박해로 어려움을 겪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살면서 신앙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손해를 입는 것이죠.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박해를 받게 됩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 한 분은 가공식품에 사용되는 포장지를 생산하는 공장을 경영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분이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신앙 양심에 따라 철저하게 세금을 내셨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세무서에서 안 믿어 주는 거예요. 너무 정직하게 경영하면서도 수익이 높으니까 안 믿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한 2년 전에, 일 년 동안 몇 차례의 세무감사를 받게 되었는데요. 그 장로님이 세무서를 쫓아다니면서 소명하고 감사 서류 준비하시느라 너무나 힘드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어떤 경우든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살려다 보니 오히려 오해를 받아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업이든, 공무원이든, 자영업이든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사려다 보면 내가 불이익 ‘박해’를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박해에 대해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요. 내가 살면서 겪는 모든 어려움을 박해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면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은데요. 우리가 신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또 신앙의 관계 안에서 얻어지는 많은 아픔과 어려움을 다 박해라고 착각하고 상처 입었다고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 분들이 선택하는 것은 계속 교회만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우리의 대단한 착각일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요나를 보십시오. 요나는 대단한 착각에 빠졌던 사람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그들을 구원하라는 말씀을 주셨어요. 그게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죠. 그런데 요나의 의는 뭐예요? 자기감정과 자아로는 절대 니느웨가 구원을 받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니느웨로 가기 싫어서 자기 욕망대로 자기 본성대로 다시스로 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항구에 갔더니 마침 또 어디로 가는 배가 있어요? 다시스로 가는 배가 딱 대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요나가 어떤 착각을 합니까? ‘아, 다시스로 가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구나!’ 유혹받은 것을 형통으로 착각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마귀가 주는 떡인지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요나가 그 배를 타게 됩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책임으로 배가 엄청난 태풍에 좌초될 위기에 처하게 되죠. 그때 요나가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신앙의 여정 속에 오는 박해가 아니라 내 죄에 대한 책임이고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요나 1:12 합독
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15절]
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이렇게 박해와 자신의 죄로 인해 받게 된 징벌을 구분할 때 “바다가 뛰노는 것이 그친지라” 비로소 회복이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혹시라도 내가 불순종한 것으로 인해 계속 반복되는 문제는 없는지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죠.
예전에 부목사 시절에 어느 장로님 부부가 등록을 신청하셨는데요. 예배가 끝나고 담임목사님과 면담을 하는데요. 계속 이전 교회에서 상처를 받은 것만 얘기하시는 거예요. ‘참, 어려운 시간 보내셨나 보구나’ 했는데, 심지어 그 이전 교회에서도 상처를 받으셨대요. 두 분이 너무 가련한 피해자처럼 말씀하시는데, 만나는 목사님마다 본인들에게 상처 준 이야기만 하셨습니다.
참 안타까운 마음이었지만, 제가 그 두 분에게 아쉬웠던 것은요. 장로님, 권사님 쯤 되셨는데, 만일 이렇게 사람 때문에 반복되는 고난이 있다면 먼저 말씀 앞에 나 자신을 비춰봐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두 가지를 분별하지 못한 채 교회라는 건물 안에 또 신앙이라는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영적인 박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다 보니 돌이킴은 없고 원망과 자기 연민에만 빠지는 경우가 있더라는 사실입니다. 좀처럼 그 굴레 가운데서 벗어나질 못해요.
자,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내가 죄에 대한 책임인지 아니면 의를 위해 핍박받는 것인지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려다가 어떤 불이익이나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천국과 같이 평안한 거예요. 내가 주를 위해 한 일이고 교회의 영광을 위해 희생했는데 내가 억울하거나 분노가 생기지 않고 이상하게 내 안에서 통치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느끼며 이상할 정도로 내 마음이 편해지는 경험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것은 천국이 현재형으로 내게 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의 징벌을 자꾸 핍박이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돌아다니고 가련한 척하는 것은 마음에 분노, 억울, 섭섭함이 가득 차서 천국은커녕 마음이 정말 지옥 같을 수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분노가 차오를 때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은 어떠십니까? 천국이십니까? 지옥이십니까?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많은 아픔과 손해들은 과연 박해입니까? 아니면 죄에 대한 책임입니까? 우리에게 이런 분별력이 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여러분, 박해를 받는 것은 왕 같은 제사장만이 짊어질 수 있는 왕관의 무게임을 여러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니 신앙 때문에 박해가 있다는 것은 내가 실은 하나님 나라의 왕족임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죄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인 것처럼, 내 이름표에 “하나님 나라의 왕족” 혹은 “예수님의 신실한 최측근”이라고 쓰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그리고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그런 인생은 절대 실패한 인생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박해가 자기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듯이, 믿음의 성도에게도 박해는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자식이 좋은 대학 가고, 사회적으로 성공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박해가 없는 것은 오히려 내가 세상을 닮아가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는 것이죠. 왕관과 관련 없는 자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박해가 있는 성도는 당장은 그 왕관의 무게가 무겁겠지만, 훗날 왕관의 영광을 누릴 것이기에 그것을 아는 그 사람이 바로 복된 사람이라는 것을 여러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진짜 분별력 있게 살아야 하는 것이요. 이 시대를 말세의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말세에는 성도들을 현혹하는 복음의 탈을 쓴 유사 복음(가짜 복음)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이 고등학생들이 어떤 주제로 토론을 하냐면은요. 만일 누군가 병원에 가서 아이를 낳았어요. 그러면 아이의 신체를 보고 아들인지, 딸인지를 확인하고 챠트에 기록하잖아요? 그런데 이게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그 아이의 성별을 왜 병원에서 결정하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아기를 낳으면 신체를 보고 결정하면 안 되고 만 18세까지 기다렸다가 성인이 될 때 본인이 결정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난 18세가 되었고 자기는 여자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에 따라 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부모도 둘 다 엄마일 수 있고, 둘 다 아빠일 수 있기 때문에 엄마, 아빠라고 하지 않고 ‘페어런츠 원’(부모1) ‘페어런츠 투’(부모2) 이렇게 표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죠.
여러분, 이거 참 심각한 문제 아닙니까? 대통령 취임식 때도요. 더이상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지난 존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 때 기도를 한 목사님이요. 저는 그 영상보고 충격이었는데요. 흑인 목사님 한 분이 대통령을 위해 이런저런 내용으로 기도를 하더니 맨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이 아닌 ‘다양한 종교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고 마치는 거예요. 이런 중요한 공식 석상에서 어떻게 이렇게 기도할 수가 있죠? 여러분, 이게 유사 복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목사이고 장로이고 권사이고 집사입니다. 게다가 우리 교회는 모태신앙인들이 많기 때문에 30년, 40년 이상 신앙생활 하신 분들도 많으실 거예요. 그런데 세상을 살아가는데 신앙적으로 아무런 갈등이 없어요. 십자가의 무게보다 세상의 가치가 더 좋아요.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의 신앙을 좀 점검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요나가 착각한 것처럼 내가 다시스로 가는 것이 진짜 형통인가? 갈등이 생겨야 정상 아닙니까?
지난 주일에 소개해 드린 손양원 목사님요. 손목사님이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이 십계명 제1계명을 지키고자 신사참배를 거부하시다가 투옥되셨을 때, 사모님께 보낸 옥중 편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솔로몬의 부귀영화보다 욥의 고난을 더 사모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로마 감옥 속에서도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 “주 안에서 기뻐하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바울이니까 손양원 목사님이니까 그렇게 사는 거로 생각하신다면 여러분, 팔복의 말씀은 성경에서 지워져야 합니다. 물론 너무나도 높은 차원의 말씀이지만, 날마다의 삶에서 우리가 실현해가야 할 실제적인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팔복의 삶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이런 생각을 우리가 버리고요. 오늘 팔복의 말씀 마지막인데요. 이제 이 팔복을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리세요. 한 번 보물 지도라고 생각해 보자고요. 보물을 찾는데 지도만 있으면 안 되잖아요? 보물이 있는 그곳에 가서 보물을 찾아야 하는 것이죠. 팔복이라는 보물을 찾으세요. 그래야 내 것이 됩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저는 이 팔복의 말씀을 정리하면서요. 어떻게 하면 박해 가운데서도 왕관을 지키고 이 팔복이라는 보물을 소유할 수 있을지 한 가지의 대안을 나누고 마치려 하는데요. 특별히 유사 복음에 현혹되지 않도록 우리가 마음에 함께 새겼으면 합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왕관을 지키고 팔복의 보물을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대안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르게 살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다음 구절인 마태복음 5:11 합독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여러분, 이 말씀이 우리의 보물 지도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와 연결시켜서 설명하시지 않습니까? 즉, 의를 위해 박해받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받는 박해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베드로전서 2:21 합독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 구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의 개념을 쉽게 설명하고 있는데요. 싱클레어 퍼거슨이라는 분이 쓴 「성화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이 구절을 해석하기를, “본을 끼쳐”에서 ‘본’이라는 말은 ‘~아래에 쓰다’라는 뜻을 지녔다는 의미로 ‘습자첩’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습자첩이라는 게 초등학생 저학년 아이들이 쓰는 종이인데요. 선생님이 글자를 쓴 후에 아이들이 그대로 따라 적을 수 있도록 돕는 도구를 가리키는 것 아닙니까? 이처럼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비전, 동기, 삶의 양식 등 그분의 모든 것을 그대로 습자지처럼 따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고난’과 ‘본’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받은 고난이 성도들이 닮아야 할 ‘본’이라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삶의 방식이 세상과 달랐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라면 그 ‘예수님의 다름’을 본받아 고난과 박해를 받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즘은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모습으로 활동하는 것을 찾아보기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잘 구별이 안 되는 것이죠. 애굽 왕궁에서 요셉이 구별되고, 페르시아 수산 궁에서 느헤미야가 구별되고, 바벨론 왕궁에서 다니엘이 구별되었습니다.
당시 왕궁은 관료들이 모여서 사회의 정책을 결정했기 때문에 사회의 공적 영역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요셉, 느헤미야, 다니엘은 누가 보더라도 달랐습니다. ‘다름의 영성’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다름이 어둠 속에 빛이 되었고 사회 부패를 멈추게 할 방부제와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하름교회는 또 어떻습니까? 세상에 속해 살되 하나님 나라의 왕관을 쓴 자로서 구별 되어지고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다름’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별되지 않고 있는 것이죠. 그 결과 박해는 없을지 몰라도 세상에 속해 함께 부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요즘은 좋은 교회가 어떤 교회냐고 물어보면 따뜻한 교회라고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저도 따뜻하고 사람을 품어주는 교회 참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딱 왔는데 모든 성도들이 다 웃고만 있는 거예요. 신도회나 목장 소그룹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는데 다 내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끄덕해주는 공동체가 있으면 다 좋은 공동체라고 합니다. 예전에 청년 사역을 할 때도 청년들에게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냐고 물어보면 자신들을 공감해 주는 교회라고들 했습니다. 공감하는 교회, 따뜻한 교회 다 좋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문제는 무엇인가요? 따뜻하고, 공감해 주는 것만으로는 성도들이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자라지를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랑으로 충만하지만, 그 사랑 속에서 바른 진리가 선포 되어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하름교회가 따뜻하고 공감해 주는 교회가 되는 것도 좋지만,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바른 진리가 선포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15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합독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자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것이고, 그리스도처럼 변화되어 가는 사람들 그것이 진정으로 왕관을 쓴 자녀와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죠.
그래서요, 여러분! 교회가 이 시대에 박해를 받는 이유는 사실은 교회가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기 때문이에요. 오히려 교회에 대한 높은 기대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경건과 거룩을 추구하다 보면 반드시 박해는 오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성도는 반드시 삶 속에서 크고 작은 박해를 겪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우리는 영광의 왕관을 소유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방식으로 살 때 왕관을 소유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세상과 다른 방식을 추구할 때 왕관을 쓰며 빛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팔복은 처음 심령이 가난한 자와 오늘 마지막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은 자의 복은 모두 현재형입니다. 둘 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아닙니까? 그러나 여러분, 천국은 먼 미래에 내가 죽으면 가는 곳만이 천국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이 땅에서 경험되어질 수 있는 곳이 바로 천국임을 여러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니 팔복의 삶을 살아가시면서 천국을 미리 당겨 쓰세요. 하나님께 천국을 가불해 달라고 하세요. 그러면 박해의 순간에도 천국이 경험되어지고 주님의 통치가 내 삶 가운데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왕관을 쓴 자로서 다르게 사는 삶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 : 세상의 유혹 시험이
❙합심기도
여러분, 우리 이제 함께 기도하시는데요. 여러분들 삶 가운데 어떤 박해나 억울한 일이 있으십니까? 혹시 그 일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왕관을 썼기 때문인가요? 그렇다면 여러분, 오히려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천국을 당겨 쓰세요.
그리고 내 삶에 박해나 핍박 같은 것은 없다는 분들이 계신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팔복의 복은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걷는 그 어려운 길을 갈 때, 주님이 우리에게 “네 마음 내가 다 안다”라고 위로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시간 오늘 주신 말씀의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한 번 크게 부르시고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마침 기도
살아 계셔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 이 시간 우리 하름의 성도들께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습자지와 같이 내가 예수님을 온전히 닮아가는 인격과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는지요? 아니면 주님이 주신 왕관을 내려놓고 구별됨이 없이 세상에 동화되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 왕관을 쓴 자로서 그 무게를 견디며 우리가 다르게 사는 인생이길 원합니다. 그런 중에 당하는 억울함이나 박해가 있다면 믿음으로 가는 그 길에 “네 마음 내가 다 안다”라며 위로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여 주시옵소서.
팔복의 복을 이 땅 가운데 당겨 쓰는 우리 하름의 모든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오늘 말씀으로 왕관의 무게를 견디며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다르게 살면서 팔복의 복을 누리길 다짐하는 사랑하는 교우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