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다 (벧전 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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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예수 그리스도 위에 놓인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1.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메시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인해서 전 세계가 미움과 증오와 분노로 들끓고 있습니다. 얼마전 이곳 맨하탄에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안전과 평화를 위한 시위가 있었고, 동시에 유대인 커뮤니티에서는 자국의 안전과 평화를 위한 기도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토록 온 세상이 혼란스럽고 전쟁의 무거운 기운이 곳곳에 영향력을 미치는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다'라는 말씀이 어떤 메시지가 될 수 있을까 고민을 하게 됩니다.
2.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도시가 조금 더 좋은 세상이 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의 사람들은 이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방법을 알고는 있을까요? 조금 더 짖궃은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만약, 온 세상의 사람들이 ‘세상이 더 아름다워지는 the way'를 알고 있다면, 과연 세상 사람들은 그 방법대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안타깝지만,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단순히 세상을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방법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 방법을 실제로 실천할 능력도 없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3. 코넬리우스 플랭팅가 라는 신학자는 <우리의 죄, 하나님의 샬롬> 이라는 책에서 오늘날 우리 모두가 ‘죄'에 대해서 말하는데 주저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학교 선생님은 학생의 잘못을 정확하게 지적하지 않습니다. 부모도 자신의 자녀의 잘못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교회의 수많은 강대상에서도 죄에 대한 바른 진단과 해결책이 선포되지 않는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고통은 우리 삶 속에서 기생충처럼 기생하고 있는 죄의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4. 성경이 묘사하는 죄가 무엇입니까? “죄란 과녁을 맞히지 못하는 것, 길에서 벗어나 방황하는 것, 우리에서 나와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입니다. 죄는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며, 귀로 듣지 못하는 것이며, 선을 넘어가는 것이며 동시에 선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플랭팅가에 따르면, “죄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조화로운 상태가 붕괴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그 조화로운 상태를 회복하시려 할 때 이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이번주에 나눌 창세기 1장의 에덴 동산과 정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최초의 세상은 조화롭고, 질서있으며, 평화로웠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창조의 사역을 마치는 마지막 순간마다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It was good.”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에 세상은 급속도로 망가졌고, 아담의 후손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이 세상은 여전히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5. 화성으로의 이주 계획을 꿈꾸는 시대! 운전대에 손을 대지 않고도 목적지에 갈 수 있는 자율주행시대! AI가 목회자의 설교까지 작성해주는 시대! 그런데, 왜 우리는 이토록 어그러진 현실을 목격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이토록 어둑어둑한 세상, 우울한 세상, 차가운 세상에서 나와 우리 가족, 우리 교회만 안전하면 우리는 괜찮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베드로전서 2장 4-10절은 이러한 우리의 질문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6. 4-5절 말씀입니다. “4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그는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으셨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살아 있는 귀한 돌입니다. 5  살아 있는 돌과 같은 존재로서 여러분도 집 짓는 데 사용되어 신령한 집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신앙 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이런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나아감에 따라… As you come to Him(the Lord)”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날마다 찾고, 구하고, 의지하고, 신뢰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예수님을 찾지 않으면서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7. 베드로는 앞선 단락에서 자신의 편지의 수신자들을 갓난 아기에 비유했습니다. 갓난 아기는 본능적으로 엄마의 젖을 빠는 존재들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는 새로운 영적 굶주림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망으로 순전한 양식을 먹고 자라야만 했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갓난 아기와는 또 다른 이미지로 성도들을 교훈하는데, 그것은 바로 ‘신령한 집’ 입니다(Spiritual house, NLT: Spiritual Temple).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돌이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돌은 본질적으로 생명력이 없고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lifeless/inert).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산 돌이십니다. 그 분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8. 지금 이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이 살아있는 돌과 함께 연결된 살아있는 돌들 (living stones)입니다. 그들은 이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신령한 집으로 지어집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성도들과의 관계를 묘사하면서 돌들이 겹겹히 쌓여 완성된 ‘성전'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5절 후반절에 보시면, 베드로는 1세기 성도들은 산돌이신 예수님과 연결하면서 그들을 거룩한 제사장으로, 하나님께서 영적인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모두 과거 구약 시대에 성전에서 보여지는 모습들입니다.
9. 여기서 우리는 교회에 관한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교회는 어떻게 지어져 가는가?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완성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연합' 이라는 단어가 조금 낯설게 느껴지시지요? 포도나무와 그 나무에 연결된 가지의 관계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나무와 가지가 끊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가지는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강한 태풍으로 인해 떨어져 나간 가지들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보다 더 강력한 연합의 이미지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 12장에서 묘사하는 몸의 비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 분의 몸입니다. 머리와 분리된 몸은 죽은 것과 다름 없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 하나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함께 작동하고 있습니다.
10. 예수님과 그의 몸된 교회의 연합이 얼마나 살아있는 연결인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은 사도행전 9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 거듭나기 전 바울이 다메섹에 있는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 북쪽 다마스커스로 가던중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살기가 가득한 심령으로 분주한 걸음을 떼던 바울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사도행전 9장 4-5절 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바울은 살아 생전에 예수님을 만난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가 사도가 되었을 때에도 그의 사도권이 의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나는 지금 너에게 박해를 당하고 있다. 이해가 가시나요? 우리의 고통이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억울함이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연합 속에서 계속해서 완성되어져 갑니다.
11. 둘째, 교회는 항상 복수의 성도들과 ‘함께'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건물도 하나의 돌이 아니라, 여러개의 돌들이 겹겹히 쌓여셔 지어진 건물일 것입니다. 미국에는 돌로 지은 집들이 많아서 우리는 돌들이 모여있는 이미지와 친숙합니다. 건물을 지을 때 돌들을 촘촘히 쌓아서 빈틈없이 지어야 튼튼한 건물이 완성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언제나 촘촘하게 연결된 그리스도의 사람들과 함께 완성됩니다. 예수님과 나와의 연결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나와 다른 지체들과의 연결입니다.
12. 오늘 이 저녁 시간에 우리는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정체되어 있는 사람들은 내가 지금 누구에게 나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영적 성장이 멈춘 지체들은 베드로전서의 말씀을 통해서 내가 산돌이신 예수님과 잘 연결이 되어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한 밤 중에는 모든 버스들도 운행을 멈추고 쉼을 가지면서 정비를 하는데, 여러분의 영혼은 예수 그리드와 연결되어 정비를 하고 있는지요? 이와 동시에 나는 다른 살아있는 돌들과 연결되어 긴밀한 영적인 집에 일부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확인해 보아야합니다. 오늘 이 구절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입니다. 우리 시드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지하고, 붙들면서 점점 더 하나님의 집으로 완성될 것입닏. 동시에, 우리 시드 공동체는 함께 웃고, 함께 울며 하나님의 집으로 완성되어져 갈 것입니다.
13. 이어지는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리 오래전부터 교회를 세우기 위해 준비하신 ‘한 돌’을 볼 수 있습니다. 6-8절 말씀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아라, 내가 골라낸 귀한 모퉁이 돌 하나를 시온에 둔다. 그를 믿는 사람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7  그러므로 이 돌은 믿는 사람들인 여러분에게는 귀한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집 짓는 자들이 버렸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 이요, 8  또한 “걸리는 돌과 넘어지게 하는 바위” 입니다. 그들이 걸려서 넘어지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그렇게 되도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방금 우리가 읽은 베드로전서 2:4-10절은 온통 구약 성경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이사야 28장 16절, 시편 118편 22절, 이사야 8장 14절의 말씀을 전부 염두에 두고 자신의 편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4. 이사야 28장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지도자들의 교만을 지적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북 이스라엘을 술취한 성으로 비유합니다. 술에 취해보셨습니까? 중추신경이 마비되면서 판단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불이스라엘의 술취함은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 영적 상태에 있는지를 잘 보여주지요. 남유다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은 북이스라엘의 교만 속에서 자신들의 교만을 보지 못했습니다. 남유다의 지도자들도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가진 힘을 자랑하며, 여호와의 말씀을 비웃습니다. 이런 교만한 백성들을 경고하시면서 하나님은 심판을 예고하시는데, 그들이 처한 상황이 어떠합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아주 재미나게 표현을 합니다. 이사야 28장 22절 말씀입니다. “침상이 짧아서 능히 몸을 펴지 못하며 이불이 좁아서 능히 몸을 싸지 못함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이사야 28:20). 하나님의 심판의 폭풍이 몰아닥칠 때 그들이 가진 침상과 이불로는 아무것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 궁창의 문을 열어서 물을 쏟으셨을 때 그 어느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지금 그들이 자랑하고 있는 우상들, 자신들의 성취들, 부와 명예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15. 이런 상황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사야 28장 16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을 예고하시면서 그들에게 견고한 기초가 되는 돌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돌이 바로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돌은 그저 평범한 돌이 아닙니다. 이 돌은 모퉁잇돌(cornerstone)입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농장 주인의 아들을 죽여버리는 악한 소작농의 비유에서 시편 118:22을 인용 하시면서 시편의 말씀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통해서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보여주십니다. 마태복음 21장의 소작농 비유에서 등장하는 악한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 그의 아들을 죽여 버립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을 미리 예표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때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자신은 버려질 것이지만,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자신의 높아질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16. 우리는 구약의 약속의 말씀들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는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얼마나 섬세하게, 정확하게 이뤄지고 있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조롱과 수치를 견디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산 돌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참된 교회가 흔들지 않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 교회의 기초가 하나님의 선택으로 바로 그 자리에 놓인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오늘날 교회가 세상 속에서 힘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교회의 모퉁잇돌을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의 삶이 이 세상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믿음의 기초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17.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 귀중한 돌이 모두에게 소중한 돌이 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7-8절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돌은 참으로 귀중한 돌이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돌은 그저 아무짝에도 쓸 모 없는 버려지는 돌에 불과합니다. 지난 주에 한 자매가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함께 사는 룸메이트들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어요. 복음을 듣지 못한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과 같은 사람들은 그저 복음을 듣지 못했을 뿐인데… 그 사람들도 구원을 못 받는 건가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성경의 매우 어려운 교리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과거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관한 교리만큼 수많은 논쟁과 곤경을 초래했던 교리는 많지 않습니다. 종교 개혁의 선봉에 있었던 칼빈 조차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어떤 이들은 구원으로 어떤 이들은 저주로 작정하셨다는 교리는 기쁜 소식이 아니라 끔찍한 소식”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갓난 아기가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닌 것 같습니다.
18. 그러나, 오늘 베드로전서 2장 8절에서 우리는 우리 믿음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이 저녁 시간에 바로 이 순간에 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하심을 선포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을 단 한번도 끔찍한 사건으로 묘사하거나 잔인한 사건으로 묘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드러내는 수단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장차 일어날 모든 일을 작정하셨고, 이는 그 분이 뜻하신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원망을 초래하는 교리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은 오히려 우리를 겸손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 찬양하도록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가 자신을 선택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왜 나만 선택했냐고 항의할 수 있습니까? 이 도시에 사는 10프로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느 누가 왜 나만 선택하고 저 사람들을 버리셨냐고 불만을 터트릴 수 있을까요?
19. 오히려 베드로는 1세기 신자들의 과거와 지금을 대조하며 그들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을 받았는지를 상기시킵니다. 전에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전에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비를 입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누구로 인한 것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 때문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며 이 세상과 이웃을 섬기는 삶으로 초대합니다. 9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20. 사랑하는 시드 여러분! 어둠 속에 살던 사람이 갑자기 빛의 세상으로 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마도 처음에는 그 빛이 너무 찬란하고 환해서 눈을 뜨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보고 경험하고 있는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람은 빛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어두운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빛의 자녀답게 진리의 빛 아래서 이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요나가 생각났습니다.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요나가 뿔이 났습니다. “큰 성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구요?” 그 타락한 도시요? 그 악한 사람들이 가득 사는 도시요? 요나는 선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전하는데 꺼려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도시야말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득한 도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21세기 니느웨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습니다. 애증의 도시, 차가운 도시, 치열한 도시, 정없는 도시! 저는 감히 이렇게 이 도시에 대한 이해를 바꿔보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굶주린 도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맛보고 싶은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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