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즐겁고 기뻐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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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주님을 따르는 길은 즐겁고 기쁜 길입니다.
그 즐거움은 세상이 주는 하루 하루의 잠시 잊게 해주는 즐거움이 아닙니다.
그 기쁨은 모바일폰을 켜면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오락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나태함을 깨고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운동하면서 느끼는 쾌감도 아닙니다.
그 즐거움과 기쁨은 우리 심령 깊은 곳에서 울려 오는 찬송 가락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선을 행하게 하는 원동력이고 거기서 느껴지는 깊은 평안과 만족감 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선하게 살고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삶 입니다.
이런 삶을 살고 계시는 우리 구세군 시드니 한인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행복자임을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 합니다.
1.주님을 따르는 일
1.주님을 따르는 일
마음의 각오와 결심
마음의 각오와 결심
오늘 날씨가 덥고 맑습니다.
14장 말미 에서 주님은 수 많은 사람들과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어디로 가고 계셨을까요?
그 때 날씨는 오늘 처럼 맑았을까요?
어쩌면 팔레스타인 지역의 건조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왔을지도 모릅니다. 제자들과 담소를 나누며 걷고 있는 무리 중에 우리가 함께 걷고 있다고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때 주님은 어떤 ‘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는 ...”
웅성 이며 따라 오던 사람들은 순간 적막에 휩싸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그것은 주님을 따르고 주님과 같이 사는 길, 즉 제자의 길 입니다.
그 길은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길 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때론,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도 해어질 결심으로 가야 하는 길 입니다. 당시로 말하면 유대교의 전통을 따르는 가족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고 요즘을 예로 들면, 불교를 믿는 가족이나 힌두교, 이슬람 등의 종교를 믿는 가족에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면 겪을 수 있는 일들을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호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심지어,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주님 뜻데로 살기로 했네" 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영어 제목은 “No turning back” 입니다.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찬양을 작사한 사람은 인도 사람으로서 이슬람 국가인 아프카니스탄과 불교 국가인 티벳을 선교한 선다 싱 입니다. 선다 싱은 시크교도로서 처음에는 아주 극렬한 기독교 반대자 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환상을 보고 회심하고 나서 선교를 떠나려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씀 드렸습니다. 시크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믿는 다는 것은 아버지와 그 가문에 엄청난 수치 였습니다. 결국 엄청난 일을 저지게 됩니다. 여정을 떠나는 아들의 도시락에 독을 탄 것입니다. 물론 죽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선교를 하게 됩니다.
주님을 따른 다는 것이 때론 이렇게 많은 고난과 큰 결단이 필요 합니다.
가족을 등지고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가는 것은 얼마나 큰 결정이고 또한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일인지 보여주는 이야기 입니다. 그야말로 이것이 ‘십자가' 입니다.
그래도 주님을 따르는 길은 마땅히 즐겁고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힘들고 무서워도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선택조건이 아니라, 필수조건 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비행기를 타려면 티켓이 있어야 하듯이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제자가 되려면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고 말씀 하십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해 주님은 28절 부터 설명 해주시는데, 요약하자면...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어떤 건축물을 세우는데,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계산해보고 시작을 해야 그 건물을 완공 할 수 있습니다.
31절-32절 에서 또다른 예로 설명하십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전쟁을 하러 나가는데 상대와 나의 군사력이 얼마나 차이가 나고 승산이 있는지 미리 파악을 하여야 전쟁을 승리 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굴욕적인 화친을 청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예를 들어서 말씀 하셨을까요?
내가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는 결연한 다짐과 각오가 필요 하다는 것입니다. 분명 주님을 따르는 길은 깊이 들여다 보면, 가치가 있고 보람이 있고 즐겁고 기쁜 길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때론 슬픈 일도 있고 희생을 치뤄야 할 때도 있기 때문 입니다.
30절 예수를 믿다가, 중도에 떠나는 일을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고 비유 하신 것입니다.
32절에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는 왕으로 비유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주님의 환상을 보고 거대한 비젼을 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국 내가 끝까지 완공을 했느냐? 싸워서 이겼는가? 에 좌우 된다는 것입니다.
화려 하지 않아도 꾸준히 기도생활 말씀 생활 긍휼배푸는 삶을 평생 살다가 마지막에 주님 품에 안겨야 그게 완공이고 승리 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복받고 어려움도 없이 만사형통 할 줄 알았는데, 왜 저에게 병을 주십니까? 왜 실패를 주십니까? 하고 원망하고 주님을 떠나는 사람은 영생을 등지고 떠나는 것입니다. 완공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싸우지 않고 항복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이미 예수를 믿기로 하는 순간,
병마가 와도 기도하며 이겨 내면 더 큰 은혜를 주시리라
믿는 것입니다.
실패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신앙인 입니다.
어려운 와중에도 이웃에게 도움을 베푸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 입니다. 비용을 치루더라도 건물을 완공하고 목숨을 다해 싸우러 나가는 것이 십자가 군병입니다. 십자가 지더라도 나는 주님 따르리라 결단해야 합니다.
고난의 크기를 보면, 고난을 이길 수 없습니다.
파도를 타는 서퍼가 큰 파도를 더 좋아 하듯이
파도를 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큰 파도는 감사 입니다.
무거운 역기를 들며 운동하는 사람에게는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쾌감으로 다가오고 마라톤을 뛰는 사람에게 벅차오는 호흡은 장차 결승점을 위한 필수코스 입니다.
우리 교회가 장례식도 치뤘지만, 사랑의 마음, 섬김의 마음이 있는 성도는 이 모든 일을 기쁨으로 하고 보람을 느낍니다.
이런 결단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고난과 도전도 능히 이길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이 힘들어도 기쁘게 지고 즐거움으로 감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고 내일 주님 부르셔도 기쁨으로 갈 수 있게 오늘을 살아야 할줄로 믿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아무리 십자가 지고 가는 길이라도 마땅히 즐거워 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 고난도 고난이 아니고 그저 즐겁고 기쁜 길이 됩니다.
2.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일
2.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일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때의 기쁨은 경험해 본 사람만 압니다.
이제 15장 전반에 걸쳐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려주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면면이 어떤지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일반 백성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주님을 따르는 무리에는 병자와 장애인들도 주님의 고쳐주심을 바라고 따랐었습니다.
15장1절에서는 또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그것은 세리와 소위 죄인들 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같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책망 하실만도 한데,
예수님은 비유의 말씀으로 친절하게 설명 하십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탕자의 비유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는 일은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돌보는 것만큼 중요하다
드라크마는 데나리온과 같은 가치를 가진 은화 입니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의 가치 입니다.
크다면 크고 적다면 적은 돈 입니다.
호주 오래 살아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가장 아까운 지출이 뭐냐 하면 많은 분들이 교통범칙금 일것입니다. 조금만 느긋하게 조금만 신경 섰으면 안낼 돈을 내고 나면 막심한 후회가 됩니다. 어떤 파인은 하루 일당 어떤 것은 주급의 절반이 날아가 버리기 때문 입니다. 만약에 노랑불에 지나갔나 빨간불에 지나갔나 헷갈리다가 범칙금이 발부가 안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일당을 되찾은 기분이 듭니다. 아마도 그 여인의 기쁨이 그랬을 것입니다. 큰 옷장 아래에서 우연히 드라크마를 찾았을때의 기쁨 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행방을 모르던 아들을 몇 년만에 찾은 아버지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이 세 이야기의 모두 잃었던 것을 찾은 기쁨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이 세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찾은 후에 기뻐하고 주위의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잔치를 벌인다는 것입니다.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잃은 것을 찾고 그저 기뻐하는 수준이 아니라, 잔치를 벌인다는 것은 그 찾고 있던 것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 인지, 얼마나 간절하게 찾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여기서 예수님이 쓰신 “잃어버린” 이라는 단어는 단지 갖고 있던 것을 잃었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헬라어 “아폴리미”는 잃어 버렸다는 의미 외에 “파괴 하다, 파멸시키다, 잃어 버리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탕자를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라고 표현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누가복음 15:32 (NKRV)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
잃어버린 이라는 뜻은 그야말로 아무런 가망이 없이 파괴되고 사라진 것을 의미 합니다. 다시 되찾을 가망이 전혀 없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런 것을 다시 찾았다는 것은 비교 할 수 없는 기쁨 이라는 것입니다.
양한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 아홉마리를 들에 놔두고 찾아 해멥니다. 몇 바퀴 돌다보면 있을 거야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잃어 버렸거나 늑대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휩싸인 상태 입니다.
드라크마는 단지 화폐 가치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잃어버린 주인의 시각, 아버지의 시각은 타들어가는 애끊는 심정 입니다. 그게 누구의 잘못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상태 입니다. 찾아야 한다. 살려야 한다는 애절함만이 존재 합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상속 해달라고 요구하던 당돌하고 패륜적인 아들이지만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 없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저 멀리 보이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달려가 그 아들을 끌어 안은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어떤 사연으로든 자식을 잃어 버린 부모는 제정신으로는 하루도 살 수 없어 사방을 찾아 다니고 길가에 전단을 뿌리며 10년이고 20년이고 자식을 찾아 헤메입니다.
그런 아들이 가산을 탕진한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그저 돌아온것에 그저 감사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아버지는 오늘도 집나간 자녀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천국문을 닫지 않으시고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원하시며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어떠 하던지, 우리가 무슨 짓을 했던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 애타는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는 자녀는 결국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우리는 그 시점을 경험 해야 합니다.
야구 라는 스포츠는 그 경기 방식 자체가 인생을 담고 있습니다.
집에서 시작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경기 입니다. 홈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절대로 점수를 낼 수 없고 그 경기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으로 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가면서 마감 하게 되어야 가장 복된 인생이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 합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그 아버지 집을 뒤로 한 채, 항상 세상 어딘가에 있을 또다른 집을 찾아 헤메입니다. 우리가 집이라고 착각하는 대부분의 집은 임시숙소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 자체가 나그네 인생이기 때문 입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집이란 우리가 그곳에 가야 할 때 우리를 받아주어야만 하는 곳이다.”
세상의 집은 적당한 비용을 치뤄야 내것이 되고 정기적으로 비용을 지불해야 유지 됩니다. 언제나 우리를 아무 조건 없이 받아주지도 않습니다. 더욱이, 그 집이 내 집이 아니고 은행집인 경우는 더 그렇습니다.
조용필 씨의 노래 “꿈" 의 가사 처럼 타향살이는 외롭고 차가운 곳입니다.
진정 우리의 영혼의 휴식처인 집은 이 땅에는 없다는 것을 빨리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좋습니다.
불행하게도, 둘째 아들은 모든 것을 잃고 처참한 인생의 바닥을 경험 했을때, “아버지 집”을 떠올렸습니다.
세상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만 풍요롭고 즐겁고 기쁜 삶을 살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 풍족하면 타향 살이도 즐거울 것이라고 착각을 하게 합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그 사랑을 풍족히 누리면서 함께 행복하게 사는 길은 왜 재미가 없어 보이고 구미가 당기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 하심을 받으며 영적으로 풍족하게 기쁘고 보람되게 영적 만족 가운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왜 고루해보이고 답답하게 보일까요?
아버지 집에 돌아가야 하는 것을 알아도 하루만 더 하루만 더 미루고 미루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돌아오셔야 합니다.
지금도 동네 어귀에 앉아 석양을 등지고 지친 모습으로 돌아올 아들, 딸을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 오시기 바랍니다.
결론
결론
첫째 아들은 성실하고 항상 아버지 곁에서 함께 했던 착한 아들 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하고 온 둘째 아들이 못마땅했습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같지만
잃어버린 영혼을 위한 아버지의 간절함 보다는 나에 대한 처후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표본이 첫째 아들 입니다.
우리는 너무 우리 입장과 관점으로 인생을 살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 잘되는 것, 나 복받는 것을 잠시 내려 놓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아버지가 간절히 찾고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제, 형으로서, 먼저 믿은 사람으로서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고
아버지가 찾고 기다리는 잃어버린 영혼을 아버지께 돌아오게 하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그 영혼들이 속히 돌아오기를 우리도 아버지 처럼 애타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루 라도 빨리 돌아오기를 더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일 일은 누구도 모르기 때문 입니다.
그들이 아버지의 집에 돌아왔을 때,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잔치하고 마땅히 즐거워 하고 기뻐 해야 할줄로 믿습니다.
내 주변의 잃어버린 영혼은 누구 입니까?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넓으신 은혜와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하심과
성령의 감동감화 역사 하심이
우리교회와 주님의 귀한 자녀들과 그들의 생애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함께 있을찌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