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전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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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믿는 다는 건.
주님을 믿는 다는 건.
지금까지 요한복음을 살피면서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에 대해서 알고 믿음을 갖는 것 즉 복음은 예수께서 어떠하신 분인가를 아는 것이고 이러한 앎을 통해서 올바른 믿음을 갖은 충분히 이해하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면 그렇게 예수님을 잘 안다는 것 즉 믿음을 갖고 그리고 어떻게 된다는 건것인가? 이를 위해 조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정치인을 뽑을 때면 ‘인물을 보고 뽑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죠. 그 사람이 제시한 정책, 그리고 그 사람이 걸어온 길(물론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래서 법적으로 제시되는 정보가 중요한 것이죠)을 보고 뽑습니다. 그러다보니 유명한 사람 또는 이름이 알려진 경우는 그만큼 유리한 경우가 되고 꽤 오래전에는 그래서 유명하고 사회적으로 덕망이 있는 연예인이 정치에 입문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왜일가요? 우리의 정치는 큰 틀에서 정당 정치라고 합니다. 그렇죠. 정당에서 사람을 뽑고 그 사람을 지역의 대표로 보낼때 그래도 앞서 말한 인물의 됨됨이를 먼저 확인을 하죠. 그럴 때 중요한 것이 지역이 갖는 특색 즉 어떤 정당에 우호적인가? 이것을 가늠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의 여론 조사를 하는 것입니다. 예전 같으면 민심을 살핀다 라는 말인데 지금도 민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정당에서 확보한 인물을 뽑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해진 사람 중에서 인물의 됨됨이를 본다는 말은 맞을 지 몰라도 결국은 ‘정당’에서 일어난 1차적인 ‘정당정치’를 이해하지 못하면 지금처럼 큰 사단이 납니다.
신앙도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통해서 예수에 대해서 알고 그것이 믿음을 불러 일으킨다면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사람의 됨됨이’가 바뀐다라고 말합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겠죠. 그런데 보면 도둑질 하다가 도둑질 안한다. 이러면 바뀐게 맞다고 합니다. 동네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예수를 믿더니 사람이 변했다 그러면 예수 믿고 변했다 하는데 이런 이야기는 저와 어른 세대에 많이 듣던 스토리입니다. 하지만 자녀 세대인 여러분은 이런 이야기를 교회에서나 들었지 내가 속해 있는 다양한 공동체에서 보면 말도 처음듣는 말입니다. (통계 종교 인구 변화, 종교에 관심 없어, 불신과 실망)ㅋ
예전에는 교회에 다니면 가장 큰 것이 주일에 일 안하는 것, 담배나 술을 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정체성 같은 것이었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좀 말하면 ‘그래서 어쨌다는 건데요’
그렇다면 우리는 당시에 예수 믿는 다는 것이 사람들이 어떤 변화를 실제로 겪었으며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잠시 머리도 식힐 겸 살펴보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라는 지역에(지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고 말 그대로 예수를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당연히 믿음의 근거는 복음이죠. 그 복음을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살피는 중입니다. 바울이 쓴 글들은 대부분이 서신입니다. 예수로 부터 강력한 변화를 받은 바울은 대략 3년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소아시아 지역(지금의 분쟁지역입니다.)에서 터기 지역으로 그리스 넘어 로마까지 그리고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이 바로 복음이 전해지는 일종의 복음 전파과정을 다루고 있죠. 그렇게 전해진 지역이 어떤 변화, 문제가 있을 때 바울에게 편지를 하면 바울이 편지를 보내는 형식이 바로 바울서신 지금 우리가 읽는 로마서부터 시작되는 바울서신의 기록형태입니다.
현재까지 데살로니가전서는 신약성경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믿는다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전해준 방식이 글보다 말이 먼저고 그런 과정에서 바울이 글을 쓰고 예수의 제자 또는 그들과 관계된 사람들이 글로 남긴 것이라는 기본적인 내용을 알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로 나타났다.
아무튼 바울은 이렇게 데살로니가의 교회라고 1절에 말합니다. 그러니 그들이 주님을 믿는 다는 것이 개인적인 구원뿐만 아니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믿음이 구체화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라고 말이죠. 우리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에도 나타나지만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제일 먼저 나타나는 변화는 ‘말’입니다. 몇 관련 구절을 보면//(야고보서 3:2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엡4:29-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행동에 비하면 말은 변화가 빠른 편이겟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말의 변화’ 그 변화는 내 중심의 변화 즉 가장 침투하기 어려운 ‘우리의 이성’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을 때 들음은 우리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이죠.
이렇게 변한 바울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인정하면서,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 즉 뼈속까지 하나님만을 믿는 그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우리의 변화에 가장 깊은 곳에서 들어나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예배를 하는 지극히 당연한 가운데 스스로 물어보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인정하는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모든 과정에서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물론 판단과 결정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차후에 기회를 얻어서 말씀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그런 바울의 믿음에 대상에 대한 변화 즉 그런 변화를 겪은 사람들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에서 서로의 믿음을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교회가 어떻게 되는지 그저 모여서 ‘나 이렇게 믿었다’ , ‘아 은혜입니다’ 이런 것만 했는지, 아니면 사회 사업으로 힘들고 어려운 이웃을 구제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3절에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라고 말합니다. 여기 3절부터 7절은 하나의 덩어리입니다. 그 첫번째에 해당되는 것이 3절에 나온 내용이죠. 이것을 바울이 안다는 것입니다. 잘 보시면 우리가 잘 아는 단어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보이시나요.
믿음, 사랑, 소망’ 이죠. 그러니까 순서는 복음은 우리에게 믿음을 어떤 형태로 주는가하면 믿음이 움직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 믿으니까 ㅇㅇㅇ 한다. 이렇게 되죠. 믿는 다는 것은 차에 키를 꽂고 돌려서 부릉부릉하게 한다는 쉬운 표현을 해본다면
사랑은 수고 즉 달립니다. 연인에게 움직이는 힘이 사랑이잖아요. 부모가 오라가라 해도 움직이는 건 사랑이 아니라 돈이지만, 그래도 연인이 움직이는 건 ‘수고’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수고했어요 라고 말할 때 사랑에 대한 수고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가족을 사랑해서 일한 부모님에게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나, 자녀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업을 하는 일들도 자기의 일에 대한 수고 즉 칭찬과 위로이지만 그 아래에 받는 것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해도 상처를 주고 다칩니다. 세상이 뜻대로 돌아가는 것 아니잖아요. 뜻하지 않게 다칠수도 있고,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지탱하는 힘은 ‘난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세상의 법칙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쉽게 교회에서 사용하는 표현이죠. 어쩌면 ‘난 할 수 있어’라는 감정적 표현보다 우리가 ‘그냥 견디는 거죠’라고 말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말에 힘을 얻는 이유가 무상무념의 상태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선수에게 최고의 가치 ‘금메달’을 따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최고의 경기를 만들려는 ‘소망’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2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끝에 ‘증거’까지 얻는 사람들입니다.
2. 복음이 하는 일입니다.
5절에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부분 여기에서 멈춥니다. 마치 전시장에 가서 차에 시동만 걸어보고 나오는 것처럼 말이죠. 그것을 가지고 안다라고 말하지만 아닙니다. 계약도 하고 할부에 책임도 지면서 차량을 몰아보면서 아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 복음은 이어서 ‘능력,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놀라운 삼위일체의 하나님 앞에서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갖는 필요한 부분에서 보여주시기는 하셨지만 그러한 믿음은 일시적인 것, 마음을 움직이기는 하지만 기름 없는 차가 금방 멈추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은 믿음을 유발시켜 나 자신을 움직이게 한다면 끊임없는 확신과 소망이라는 기름을 공급해주시는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놀라운 경험입니다.
제가 운전하는 차는 연비가 매우 뛰어난데 한 번 기름을 넣으면 천킬로 미터를 가고 더한 사람은 1500킬로를 운전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도전을 했습니다.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은 해 보았기 때문이죠. 믿음은 우리를 움직이게하고 사랑은 움직이는 동안 우리의 수고를 격려합니다. ‘잘하고 있어’ ‘그래 좀 넘어져도 다시 해봐’, ‘괜찮아 그럴 수 있어 다시 하자’ 여러분 이런 일들이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구하는 일이라고 너무 먼 곳을 보지마시고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먼저 자신에게 자신이 그토록 바라는 것들, 운동하는 것, 다이어트 하는 것, 책 읽는 것, 말씀보는 것, 기도하는 것 너무나 많은 것들에 짓눌러 시도도 하지 않고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주님 저는 건강을 위해 운동하고 싶은데 잘 안됩니다. 주님 좋은 설교를 위해 아침마다 말씀 보기를 원하는데 잘 안됩니다. 이렇게 출발하는 것입니다.
6절에 보니 그들도 ‘많은 환난 가운데’있었음을 알 수있습니다. 주변 상황으로는 교회에 대한 핍박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삶에서는 매일 물을 길어야 하는 여인과 같은 삶도 있고, 돈이 없어, 집이 없어 등등 삶에 전반이 오늘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가 언제나 ‘환난’입니다. 우리의 삶에 한 가지라도 어그러진다고 생각해보세요. 가족 구성원 중에 누가 아픈것, 자기의 꿈을 이루지 못해 괴로워 하는 것, 아니면 늘 어깃장만 놓거나 심하게 다툼하는 것 그 순간부터 ‘환난’입니다.
어제 뉴스에 ‘한 교사’의 죽음 앞에서 부모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고치지 않으면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누가 올지 모른다라고 말이죠. 환난은 부지불식간에 찾아오기도 하고, 잘못된 정치로 부터 시작해 찾아오기도 합니다. 환난은 우리 곁에 가까이 있고 언제든 우리에게 친구처럼 손을 내밀고 장난치는 아이들처럼 넘어져 코가 깨질지 다리가 부러질지 모릅니다.
그런 가운데 ‘성령의 기쁨’은 차량에 연료만을 공급해 무한 달리게만 하는 역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쿠팡 같은 회사의 노동자 정책처럼 이익만을 보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의 코치, 멘토가 되어 도닥이고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돈을 벌어 얻는 한시적 기쁨, 일이 잘되어서 얻는 순간의 기쁨이 아니라 성령께서는 고개 숙인 우리의 고개를 들어 함께 가야할 ‘소망의 길’을 보여주시고 이끄신다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 된다는 것이죠.
간혹 쇼츠에 보면 골인 지점을 앞두고 쓰러진 선수를 뒤이어 오는 선수가 자신의 기록, 메달을 포기하고 넘어진 선수를 이끌어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골인하는 장면을 보면 보는 우리도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나오는 기쁨은 보는 우리도 그렇다면 두 선수에게는 얼마나 크겠습니까?
3. 본은 삶에서 나오는 빛이 되어 영향을 미칩니다.
이렇게 사는 삶이 결국은 영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신뢰를 잃었는데 그 1,2위가 자기만 아는 배타성과 신앙과 일상생의 불일치가 순위를 잡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조사에서 비그리스도인은 교회가 ‘사회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기를 가장 크게 원하고 있다는 것은 빛이 갖는 방향성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빛의 가장 큰 역할은 생명입니다. 그렇죠. 생명을 전하는 일’ 그래서 월드비전이나 각종 단체들 중 특별히 생명을 살리는 단체들이 필요하고 우리는 후원을 하면서 돕는 것이죠. 그렇게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는 믿음은 그들에게도 멀리 ‘마게도냐’, ‘아가야’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간혹 믿지 않는 자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가까이 있는, 같은 성경을 읽고 들으면서도 우리 주변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인간적인 냄새를 풍기는지 지금은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바울 역시 자신이 비록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의 놀라운 ‘교회다움’은 오히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예수께서 하신 사실을 고백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9–10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우상을 버리는 것은 , 당시에 삶의 모든 영역의 중심에 있는 매우 중요한 영역이었습니다. 따라서 우상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 떠나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반혁이 일어난 것이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상을 섬겼던 그래서 우상이 하나님으로 바뀌어 똑같이 제사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요즘 말로 진정한 예배자가 되는 것이죠
그것을 이미 앞서 요한복음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내용을 통해 살폈습니다. 요한복음 4:24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그들은 소망 가운데 즉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믿음 복음의 내용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다시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 그리고 그것을 기다리고 바라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사실을 데살로니가 교회는 알았고 교회는 바로 이것을 중심으로 세워졌음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잇습니다.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요한복음을 살피면서 좀 지치셨나요? 예수 뿐일세라고 천번을 고백해도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올바로 깨닫고 삶으로 나타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천번을 부르는 시간만 유의미할 뿐 데살로니가교회에 나타난 믿음, 사랑, 소망으로 방향을 잡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각자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지식적인 예수로만 남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님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