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도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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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회복

권력자들의 비리가 종종 드러날 때 보면 항상 내부 고발자가 있습니다. 정말 비리를 저지른 사람들을 고발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자기도 거기서 같이 이득을 누리다가 뭔가 서운한 일을 당하거나 물러나게 되면서 배신을 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을 봅니다.
사실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배신도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사실 배신할 일도 없습니다. 충성하지 않았던 사람이 변절하는 일도 없습니다. 다만 그 사랑이나 충성이 자기가 따르던 대상을 향한 진실한 사랑과 충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에 사랑하고 충성했던 것이었을 뿐입니다. 대개 자기가 따르던 사람이 변했다고 말하며 돌아서지만, 사실은 그 사람이 내 욕망을 채워주지 못하니까 떠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더 많이 사랑할수록 더 비열하게 변절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배신은 사실 자기를 위한 이기적인 사랑 때문에 상대방을 이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세상에서 상대방을 향한 충성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때에만 유효합니다. 자기가 따르다가 손해를 보면 왜 따르겠습니까? 뭔가 이익을 얻으니까 따르는 겁니다.
진정한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내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주었는데 아깝다면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냥 좋은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만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끝까지의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다 사랑을 합니다. 그런데 조금 하다가 내 마음에 안 들면 그만둡니다. 조금 하다가 뭔가 나에게 유익이 없으면 중단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조금 하다가 그만두는 사랑이 아니라, 끝까지의 사랑, 배신을 당하시면서도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가룟 유다만 배신한 게 아닙니다. 열두 명 모두 배신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그 ‘끝까지의 사랑’을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바로 그런 사랑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 가룟 유다의 배신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지난번 본문에서 예수님은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18)라는 시편 41:9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제자들 중에 배신할 사람이 있을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미리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을 일러두는 이유는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메시아)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19)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배신에 관한 말씀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해주시고, 실제로 그 말씀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21절에 예수님의 마음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1절)
우리가 모르고 있다가 당하는 것도 괴로운데, 이미 그렇게 배신당할 것을 알고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얼마나 괴롭습니까? 정말 괴롭습니다. 제자의 배반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은 이때 마음이 정말 괴로우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괴로우셨다고 하는 경우가 이곳을 포함해서 세 번 나옵니다. 바로 얼마 전 살펴본 대로 나사로가 죽은 후 그의 누이 마리아가 우는 모습을 보셨을 때 괴로워하셨고(11:33, 38), 자신의 십자가의 때를 내다보시면서 괴로워하셨습니다(12:27). 그리고 오늘 본문인 13장 21절에서 가룟 유다의 배반을 말씀하실 때 괴로우셨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배신을 해서 배신감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이런 상황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괴로우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 모두 ‘죽음’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괴로우셨습니다. 아무리 죽음이 영광에 이르는 통로라고 해도, 죽음이라는 현실 자체는 괴로운 것입니다. 죽음이 괴롭기 때문에 죽음 없는 삶을 소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하시는데, 아직까지는 누구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열두 명 중 누구라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될 수도 있고, 배신자가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때 이 말을 듣는 제자들에게 그것이 어떻게 다가왔겠습니까? 그냥 쉽게 넘길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정말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를 가리켜 말씀하시는 것인지 제자들은 서로를 의심합니다.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2절)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태복음을 보면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마 26:22)라고 물었다고 나옵니다. 마태도 그 열두 명 중 하나였습니다. “주여 나는 아니지요?”라는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제자들은 서로를 의심했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의심한 겁니다. ‘혹시 내가 아닌가?’
그러니까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배신할 마음을 약간은 품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생각이 없었다면 이것을 묻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진짜로 돈 받고 팔아넘길 생각을 열한 명은 하지 않았을지라도, 언제든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분위기를 보니까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미 그들의 마음에 미세한 흔들림이 있었습니다. 자꾸 돌아가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고난과 죽음이 자꾸 마음에 거슬리니까 그 말씀을 들을수록 ‘내가 한자리 하려고 따라왔는데 잘못 따라온 게 아닌가? 죽는다고 하는데, 그럼 한자리 하려는 나의 꿈이 부수어지는 게 아닌가?’라고 계속 의심했던 겁니다.
그때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하시는데, ‘팔리라’라는 말이 ‘넘겨준다’라는 뜻입니다. 꼭 돈을 주고 판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배신할 수 있다는 말로 듣고 다들 마음이 뜨끔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배신과 의심의 분위기를 넘어 예수님을 조금 더 확신하는 제자가 나옵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3절)
여기에는 ‘누웠다’고 되어 있는데, 그 당시 유대인들은 식사할 때 왼쪽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먹었습니다. 그것을 감안하면, 이 제자는 예수님의 오른쪽에서 예수님의 앞쪽으로 비스듬히 겹쳐서 누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예수님]가 사랑하시는 자’라는 표현과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라는 표현을 보면, 예수님의 품에 닿아서 기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품에 기대고 있을 정도면 얼마나 친한 사람입니까? 또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이니까 얼마나 친한 사람입니까? 굉장히 친밀하고 편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대개 학자들은 이 사람이 요한복음을 쓴 요한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요한이라고 생각하면, 이때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제자들은 도대체 누가 배신한다는 것인지가 아주 궁금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성격이 아주 급한 사람인데 뭐라고 합니까?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4절)
베드로는 이 순간 요한과 탁 눈이 맞았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식탁에서 둥그렇게 비스듬이 누워 먹는데, 이 순간 베드로의 눈이 요한과 마주쳤습니다. 그래서 요한에게 말로 한 게 아니라 머릿짓을 합니다. 머리를 움직이면서 예수님께 여쭈어보라고 한 겁니다.
멀리서 베드로가 큰소리로 ‘주님,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너야!’라고 말씀하실까 봐 감히 물어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과 예수님만 알아들을 만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25절)
바로 예수님의 가슴팍에 붙어 있으니까 살짝 조용히 물어본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도 요한만 알아들을 만한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해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26절)
이것을 보며 어떻게 대놓고 유다에게 주심으로 그 사람이 유다라고 드러내시는가 할 수 있는데, 사실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에게 떡을 적셔서 다 주셨습니다. 그러다 유다에게도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더더욱 알 수 없는 것이지, 제자들이 바보라서 보는데도 몰랐다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떡 한 조각을 주실 때 가룟 유다가 저 반대편에 있었다면 줄 수가 없습니다. 거기까지 걸어가서 빵을 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보이지가 않습니다. 바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바로 옆에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학자들 중에 이 장면을 보면서, 요한이 예수님의 바로 오른편에 있었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왼편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빵을 적셔서 바로 주셨습니다. 바로 옆에 있다가 금방 받은 겁니다.
유대인의 문화에 의하면 당연히 오른쪽이 중요한 자리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왼쪽이 최고 상석입니다. 주인의 왼쪽이라는 말은 자기 오른쪽에 주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가 가장 상석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니까 가장 큰 믿음을 보여준 제자 또는 가장 충성스러운 제자에게 내어줄 만한 그 자리를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할 가룟 유다에게 주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러분 같으면 그렇게 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저 같으면 못합니다. 이미 ‘얘가 나를 배반한다.’라고 다 알고 있는데 상석에 둡니까?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합니다. 곧 나를 배신할 자에게 왜 최고 상석을 내어줍니까? 미워서라도 가장 멀리 있는 자리, 제일 안 좋은 자리를 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옆 상석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마지막까지 사랑을 베풀고 계신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것은 유다를 향한 사랑의 호소이며 계속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그래도 유다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으니까 유다가 영웅이 아니냐?’ 그런 게 아닙니다. 유다는 돈 욕심 때문에 주님을 팔아먹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빵까지 적셔서 건네주셨는데, 그런 자상하신 모습 역시 그를 향한 사랑과 안타까운 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지금까지 3년 이상 따라왔는데, 결국 돈 욕심과 탐욕 때문에 이렇게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우셔서, 마지막까지 옆에 두고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끝까지 그를 살려보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가룟 유다를 향한 예수님의 ‘끝까지의 사랑’이었습니다. 13장 1절에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되어 있는데, 이 ‘끝까지’라는 것이 ‘열한 명은 끝까지 사랑하셨고 가룟 유다는 뺐다.’라는 게 아니었습니다. 가룟 유다까지 포함해서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사랑의 표시는 가룟 유다의 회개를 불러온 것이 아니라 배신할 마음을 더 확실하게 굳히는 계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시며 기회를 계속해서 주셨지만, 유다는 끝까지 그 사랑을 거부했습니다.
2. 주님의 사랑을 끝까지 거부한 가룟 유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7절)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보시고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아니, 무슨 사탄이 들어가나? 예수님이 떡 조각을 주시니까 사탄이 들어갔다면 예수님이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게 하신 건가?’라고 오해하기도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사탄이 유다 속에 들어갔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유다는 자기 정체가 탄로 나니까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사탄의 지배를 받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아주 크게 화가 나고 분노해본 적이 있다면 이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쥐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모르던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 때, 둘 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잘못했다고 하며 회개의 길로 나아가든지, ‘그래서 뭐?’ 라고 하며 배 째라는 식으로 더욱 뻔뻔하게 나아갑니다. 요즘 그런 것을 얼마나 많이 봅니까? 잘못이 드러날 때 ‘잘못했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도 가끔은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뭐 어쨌다고?’ 하는 식을 나옵니다.
회개할 마음이 없던 가룟 유다는 배 째라는 식으로 나아갈 뿐 아니라, 사랑으로 지적해주시는 예수님을 아예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합니다. ‘이거 봐라, 베다니 향유 붓던 마리아 앞에서부터 나를 자꾸 몰아붙이더니, 이제는 아예 나를 창피주려고 작정을 했구나. 그래, 어디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도 그럴 수 있나 보자.’
예수님이 떡 조각을 주심으로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간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진작부터 가룟 유다를 배신자로 선포하거나 호통을 치며 야단칠 수도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포함한 모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사랑의 섬김을 통해 그가 마음을 돌이키기를 원하셨습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도 이 사랑을 베풀도록 가르쳐주셨고, 가룟 유다도 이것을 통해 마음을 돌이키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다 아시면서도 결코 그를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이 나를 배신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은 그것을 모르는 상황이라면, 그 사람을 볼 때 곱게 보이지 않습니다. 눈도 쳐다보기 싫습니다. 우리가 다 그렇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다 아시면서도 미워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가 갈 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니까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끝까지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그 사랑을 거부했습니다. 자신의 선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가운데 발도 씻어주시고 떡과 잔도 나누면서 사랑을 나누셨고, 그러면서 가룟 유다가 마음을 돌이킬 충분한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에게는 아직도 돌이킬 기회가 남아 있었습니다.
유다는 바로 이 순간 자신의 탐욕, 예수님에 대한 미움 또는 팔아넘기려는 마음을 다스려야 했습니다. 이때 마음을 돌이켜서 주님께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했어야 했습니다. 아직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이제 자신이 배신자임을 예수님이 다 알고 계시는 것이 분명하니 돌아오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다는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시치미를 뚝 뗀 채 앉아 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떡 한 조각을 찍어다 주는 자가 그라고 하시면서 유다에게 주셨는데, 물론 다른 제자들에게도 주시고 유다에게도 주신 겁니다. 그때라도 그가 회개하며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배신자입니다.’ 하며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다를 사랑하지 않으셨으면 이렇게 오래 기회를 주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는 결국 끝까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선택이었습니다.
왜 유다는 이렇게 많은 기회가 자기에게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음으로 결국 멸망의 길로 가게 된 것입니까? 바로 그것이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유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이 다 재물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듣기 원하셨고, 그 중에도 가룟 유다가 정말 이 말씀을 듣고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가 재물에 마음이 사로잡힌 것을 다 아시고 안타깝게 여기시면서 그런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가 마음을 돌이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가룟 유다의 마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피했고, 결국 결정적인 순간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우회적으로 가르치고 타일러도 듣지 않는 가룟 유다에게 이제 예수님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급박한 마음으로 일종의 충격요법을 쓰신 겁니다. 그것이 바로 마리아가 향유를 붓던 자리에서의 사건이고, 더 나아가 이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직접 가룟 유다의 정체를 드러내신 사건입니다. 그런데도 다른 제자들은 눈치를 못 챕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완전히 드러내고 하신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28-29절)
이날이 목요일 저녁인데, 금요일 저녁부터는 가장 큰 절기인 유월절이기 때문에 금요일부터 주말 휴일을 위해 상점 문을 닫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재정을 맡은 가룟 유다더러 상점이 문을 닫기 전에 가서 물건을 사라고 하신 말씀으로 알아들었을 수 있습니다. 또는 유월절 저녁에는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관례였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명령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30절)
여기서 배경을 ‘밤’이라고 굳이 언급한 이유가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때도 밤이었습니다(3:2). 그것을 통해 니고데모의 영적 상태가 밤이었다는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어둠의 세상에 오신 ‘빛’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3:19)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가룟 유다에게 너무나 어울리는 말씀입니다. 그는 빛이신 예수님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인류 역사상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가룟 유다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에게서 발견되는 모든 죄악의 가능성이 바로 우리에게도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것, 또 진리가 아무리 마음을 두드려도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음을 닫아 버리고 듣지 않는 것, 더 나아가 진리의 외침을 아예 듣기가 싫어서 그 진리를 없애 버리는 죄... 이러한 무서운 마음이 여전히 우리 속에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순간도 방심함 없이 주님의 십자가 앞에 늘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유다처럼 잘못된 길로 갈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물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주일을 안 지키면 내가 주일을 깨는 것이 아니라 주일이 나를 깹니다. 내가 오히려 상합니다.
한 순간이라도 주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 어떻게 가룟 유다와 같은 길을 선택해서 나아갈지 알 수 없는 연약한 존재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순간 더욱 겸손히 주님 앞에 나아가 도우심을 구하며, 그럴 때 주님의 능력을 받아 이 땅에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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