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전하는 교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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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1:6
착한 일 : 구속, 거룩한 성화, 복음 사역에 동참 이상의 의미,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 빌립보서 (본문 주석) 복음의 진보―투옥에도 불구하고(1:12–14)

본 주석은 27절 상반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가 서신 전체의 주제문장이라는 판단하에 12–26절의 내용은 이 주제에 도달하기 위한 필수적인 논의들을 이어 가는 대목이라는 관점에서 해설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 빌립보서 (본문 주석) 복음의 진보―투옥에도 불구하고(1:12–14)

바울은 이 대목에서 “내가 당한 일” 곧 자신의 삶의 사건들을 신학적 진술의 중요한 소재로 삼고 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주로 삼고 난 이후, 그의 삶이 통과하는 인생의 모든 여정은 신학적 성찰의 소재가 된다. 다메섹 사건도 그렇고, 그 이후 자신의 생활도 바울은 끊임없이 반추하고 해석한다. 이는 현대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에게 도전을 주는 주제로서, 자신의 삶과 상관없는 창백한 객관적 주석이나 설명이 신학의 궁극적 목표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물론 오늘 우리의 상황이 아닌 그때 바울의 상황에서 본문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철저히 묻기 위해 우리 자신의 상황과 적절한 거리두기를 하며 성경을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단계는 필요하다. 그러나 결국에는 자신의 고백, 공동체의 상황, “나의 당한 일” 그리고 “우리의 당한 일”이 성경 읽기에 중요한 전제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바울이 “당한 일” 자체가 바울의 신학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어떻게 반응했느냐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핍박을 경험했고, 많은 복음전도자들이 순교를 당했다. 그러나 바울처럼 내밀한 고민을 치열하게 전하는 기록을 남긴 이는 드물다. 누구나 크게 다르지 않은 인생의 일들을 바울은 진지하게 고민하고, 말씀을 붙들고 씨름했다. 그 의미를 진솔하게 자신의 서신에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교회 안팎에서 오해와 핍박을 받았고 그래서 자신을 끊임없이 ‘변증’해야 했던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깊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았다고 이해했다. 자신이 법정에서 하는 말뿐 아니라, 평소 행동, 지금 서신에 기록하고 있는 내용도 복음을 변증하기 위함이었고, 그 상당 부분은 자기 자신을 변호하는 일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자신을 변호하고 납득시키는 일과 복음을 변증하는 일은 동일한 일이었다.

흔히 최고의 설교는 설교자의 삶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바울의 경우 설교와 설교자는 좀더 미묘하고 깊은 관계를 갖는다. 바울 서신의 진술 상당 부분이 자기성찰의 묵상 과정에서 무르익은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알기 원하노라”(빌1:12)라는 말은 단순히 자신이 당한 일을 독자들에게 알리는 것이 아니다. 인생에 일어난 일을 붙들고 씨름하는 과정 안에 복음이 어떻게 녹아 있고 그 안에서 어떻게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 있는지를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신학함의 주 내용은 자신의 문제를 진득하게 또 치열하게 쟁투한 결과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복음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전하는 말씀은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것은 내 삶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창백한 이론과 윤리를 교과서적 진리로 받아들여 놓고, 실천해 보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그러고 나서 설교하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성경을 펼치는 첫 순간부터 우리는 고뇌 가운데 있는 한 인간으로, 그래서 말씀 앞에 갈급한 한 심령으로 서는 것이다. 그 고뇌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여, 자신의 삶으로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자신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고백한다(3:8).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신을 이해하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그 변화의 핵심은 그리스도이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1:21).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 그 변화의 핵인 그리스도의 의미를 중심으로 “내가 당한 일”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빌립보서 본문이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 빌립보서 (본문 주석) 복음의 진보―투옥에도 불구하고(1:12–14)

자신의 매임이 나타난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바울 신학의 중요한 키워드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에서 “그리스도 안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룩하신 새창조의 현실 안에서”라는 말이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8)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새창조의 구현으로서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말한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 빌립보서 (본문 주석) 복음의 진보―투옥에도 불구하고(1:12–14)

“매임”은 바울의 육체를 실체적으로 제한하고 있는 힘으로 시저가 가진 권력의 가시적 표현이다. 바울은 현실에서 작동하는 세속의 권력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의 매임이 알려지는 과정 전체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난 일임을(빌 2:9–11) 강조하는 것이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는 바울의 말 역시, 황제의 권력이 작동하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 위에 더 큰 권력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고백으로 보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시위대 안의 병사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든지, 혹은 복음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는지, 아니면 바울의 비범한 태도를 보고 감동을 하고 존중하게 되었다든지 하는 등의 상황을 가정해 볼 수 있으나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2세기 중엽에 순교한 폴리캅의 순교에 관해 기록한 문서(〈폴리캅의 순교〉)를 통해서 투옥된 바울을 가까이서 대하던 시위대 병사들의 반응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을 체포하러 온 병사들을 오히려 대접하고, 그들 앞에서 의연하고 은혜 충만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그들이 감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예비일 저녁에 그를 추격하던 자들은 그 젊은이를 대동하고 저녁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마치 강도를 잡으러 나선 이들처럼 무장하고 있었다. 저녁 무렵에 그들은 폴리캅이 한 조그마한 집의 다락방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집에서 다른 장소로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거절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했다. 추격자들이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내려와서 그들과 대화했다.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은 그가 고령인 것과 의연함에 놀랐다. 그중에 어떤 이들은 “이런 훌륭한 분을 잡기 위해서 이 야단을 벌이다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바로 그때, 폴리캅은 그 추격자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차려 주라고 지시했다. 사실 그들은 배가 고팠었다. 그리고 그는 방해받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한 시간 달라고 요청했다. 허락을 받자, 그는 서서 기도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며,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기도했다. 그를 잡으러 온 이들은 그의 기도 소리를 듣고 놀랐으며, 그들 중 다수는 그렇게 경건하고 존경스러운 노인을 잡으러 온 것을 뉘우치기 시작했다.

아마도 시위대 군사가 바울에게 받은 인상이 이런 의연함, 경건함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 있다. 시위대는 제국 최고의 엘리트 군사집단으로, 제국과 황제를 보호하는 중추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황제에 대한 그들의 충성은 제국의 안녕에 필수적인 요건이다. 그러나 그들이 늘 황제에게 충성한 것은 아니었다. 로마의 민심이 극도의 반감으로 돌아설 때 그들은 황제에게 칼을 들이대기도 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 빌립보서 (본문 주석) 복음의 진보―투옥에도 불구하고(1:12–14)

바울은 자신의 투옥지인 로마에 있는 교회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다수”는 전부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에 유념해야 한다. 여기에 바울 특유의 과장이 있는 듯하다. 2장 19–21절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빌립보에 보낼 계획을 말하면서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라고 말한다. 역시 로마의 상황인데 이 표현이 보다 솔직한 평가인 것으로 보인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 중 상당수가 바울의 투옥을 부끄러워했거나, 혹 자신들도 연루될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오늘날에도 집안의 누군가가 감옥에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끄러워 숨기려 하며, 거리를 두려 할 것이다. 명예와 수치가 문화적으로 중요한 가치였고, 명예와 수치의 기준이 기계적으로 정해져 있던 바울 당시에 투옥은 심각한 수치거리였다. 그래서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7–8)라고 권면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수가 그러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복음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 복음의 괄목한 진보로 여겨질 일이었다. 여기서 복음의 진보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 편에 서는 연대의 표현으로 드러났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빌립보서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이들”(3:18)과 그들의 영향력이 빌립보 지역에서 확대되는 문제를 염려하며 기록되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요구하는 것도 바울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 편에 서는 일이었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눅 9:26)라고 말씀하셨다.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었다는 강력한 증거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그 부끄러움과 영광은 역전될 것이다. 빌립보서 3장 19–20절에 똑같은 진실이 담겨 있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의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임하시면 “우리의 낮은 몸”을 그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할 것이다”. 빌립보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이 종말의 영광, 곧 영원한 영광의 편에 서도록 설득하는 편지이다. 이러한 설득을 위해서 바울은 지금 로마에서의 상황을 설명하며 미리 준거의 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 빌립보서 (본문 주석) 바울의 기쁨―시기와 분쟁을 일삼는 이들에도 불구하고(1:15–18)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이들, 그리스도인이지만 바울을 대적하는 이들의 위험성을 상기시키고, 이런 경계를 통해서 빌립보 교인들이 당면한 대적들을(“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이들”, 3:18) 분별해 내기를 바라는 것이 빌립보서의 중요한 의도이다.

B와 B′에서 “착한 뜻으로”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 대한 말이다.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라는 말은 복음을 의인화하여 재판정에서 피고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으로 보고, 바울 자신은 변호사의 자리에 서는 구도를 제시하고 있다. 바울이 지금 죄수의 몸으로 자신의 무죄를 변호해야 할 처지에 몰려 있으나, 사실 바울의 본 목적은 무죄 방면이 아니라 복음을 변호하는, 변호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자신을 변호하는 모습이 자세히 나온다. 처음에 재판장은 바울이 자신이 무죄 판결을 위하여 변호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행 26:1), 말을 듣는 과정에서 바울의 목적이 다른 데 있음을 알게 된다. 아그립바는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 26:28)라고 말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고, 그 변호의 자리를 다시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마 10:18) 하신 예언이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 빌립보서 (본문 주석) 바울의 기쁨―시기와 분쟁을 일삼는 이들에도 불구하고(1:15–18)

바울은 복음을 변증하는 일에 세움을 받았다. 이 사역은 투옥과 심문을 요구하며, 순교까지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감옥 밖에서 사역하는 다른 이들은 또 다른 일을 위하여 세움을 받았을 것이다. 오늘 사역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이는 오지 선교사로, 어떤 이는 빈민 지역 목회자로, 어떤 이는 대형 교회 목회자로 세움 받는다. 한 교회 안에도 다양한 세우심이 있다. 각자가 다른 처지에서 사역을 하지만, 다른 사역자도 하나님이 세우셨음을 인정한다면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다.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은 개인적인 호불호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감각이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 빌립보서 (본문 주석) 바울의 기쁨―시기와 분쟁을 일삼는 이들에도 불구하고(1:15–18)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투기와 분쟁”은 바울이 그의 서신들을 거쳐서 가장 악한 일로 지목하는 대상이다. 예를 들면 로마서 1장에서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롬 1:32)라고 지적하는 악덕의 목록에 등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태도로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이 문제가 없다고 바울이 승인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자신은 기뻐하겠다는 바울의 태도를 강조하는 말이다. 이들의 사역 동기는 경쟁과 시기심이다. 바울을 괴롭게 하려고 더 열심을 내었다고 한다. 이런 이들을 감내하는 것은 바울에게 엄청난 고통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빌립보서 1장의 맥락에서 바울은 투옥된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죽음까지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대적들의 패역한 행위도 받아들인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 빌립보서 (본문 주석) 바울의 기쁨―시기와 분쟁을 일삼는 이들에도 불구하고(1:15–18)

투기와 분쟁으로,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까? 바울서신 해석에서 바울의 대적자들의 정체는 중요하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하늘에서 온 천사들이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사자후를 토한 인상이 워낙 강력하고, 또 종교개혁자 루터가 갈라디아서에서의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와의 대결을 신학적 정체성의 뿌리로 삼았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바울의 대적자들도 유대주의자로 보는 견해는 광범위하다.

바울서신에서 율법주의와의 대결이 두드러지는 부분은 갈라디아서, 로마서 그리고 빌립보서 3장 1–9절이다. 빌립보서의 경우 장과 절을 특정하는 이유는 빌립보서의 다른 부분에서는 율법주의자들과의 대결이 관찰되지 않기 때문이다. 빌립보서에 나오는 바울의 이 대적들을 모두 묶어서 하나의 그룹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으나(Silva, 8–9) 설득력은 부족하다. 1장에 나오는 “투기와 분쟁”을 일삼는 자들과 3장 1–9절의 율법주의자들은 다른 그룹이라는 것이 학계 다수의견이다. 바울서신 전체에서 대적자들이 가장 거친 말로 공격하고 있는 본문은 갈라디아서와 고린도후서 10–13장이다. 갈라디아서에서는 할례 논쟁, 안디옥 사건―이방인들의 자격 문제를 포함한 율법의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다. 재미있는 것은 고린도후서 10–13장의 경우 갈라디아서 못지않게 바울이 격렬한 투쟁을 벌이고 있지만, 여기에는 율법주의의 문제가 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울은 여기서 “지극히 큰 사도”들과 힘겹게 싸우고 있다. 자신의 영적인 경험을 자신의 입으로 자랑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겠다는 평소의 원칙을 깨고 삼층천 체험을 말해야 했던 것이 바로 이들과의 싸움에서였다. 또한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고후 11:23)라고 하는데, 여기서 정신없는 말을 하는 이는 바울 자신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면 스스로의 입으로 도저히 못할 말을 한다고 하면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한 자신의 고난을 열거한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상황이 그만큼 절박했다는 말이다. 바울에게 이처럼 큰 위협이 된 그들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바울 자신의 언급을 통해서 추측해 볼 수밖에 없다.

1) 그들은 “지극히 큰 사도들”이라고 불렸다. 바울은 사도 중의 한 명으로 인정받는 것도 여의치 않은 경우가 많았다.

2) 그들은 언변에 능했다. 바울은 그들의 화려한 말재주와 비교당하며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고후 11:6)라고 항변해야 했다.

3) 그들은 사도 바울과 달리 사역에 대한 금전적 대가를 받았다(고후 11:9; 12:13).

4) 바울이 자신에 대해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한 것은 그들이 기적을 행하는 일에 능한 사람들이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사도바울이 자신의 병약함 때문에 고민을 호소한 것이 바로 이 본문이다. 병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 병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거나, 징벌을 받고 있는 표시라는 사고 때문이었을 수 있다. 그닐카, 게오르기 같은 학자들은 이 대적들을 헬라적 신인(떼이오스 아네르) 모델을 따르는 선교사들이라고 본다. 기적을 행사하면서 신적인 영험함을 과시하는 이들이다. 로버트 주윗은 고린도후서 10–13장의 대적들이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염려하고 있는 이들이라는 입장을 보인다.

바울이 깊이 염려하는 것은 예수 믿으면 병에 걸리거나 남들이 당하는 어려움을 겪지 말아야 한다는 사고이며, 이는 바울이 고린도후서 10–13장에서 마주했던 대적자들의 사고와 비슷하다. 바넷, 카슨 같은 학자들은 이를 승리주의라 명명한다. 이런 사고라면, 바울의 투옥 역시 부끄러움이 되었을 것이며, 그가 순교라도 한다면 빌립보 교회의 신앙은 심각한 위기를 겪게 될 것이었다. 그런 구도 속에서 에바브로디도의 질병(빌 2:27) 역시 하나님의 징계로 해석되었을 것이다. 2장에서 에바브로디도의 질병을 주해하면서 상세히 논하겠지만, 이러한 사고의 영향으로 빌립보 교회가 흔들렸던 것이 바울이 이 편지를 쓴 직접적인 계기이다. 바울은 이 편지를 써서 건강하게 회복된 에바브로디도의 손에 쥐여 “더욱 급히”(빌 2:28) 보내야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감사와 기도 다음에 나오는 첫 문장, 곧 본론의 첫 문장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에 바울이 이 편지를 쓴 가장 중요한 이유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단순히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의 근황을 밝히는 내용이 아니라, 본론 중의 핵심이다. 바울의 매임 그 자체는 부끄러운 것이고 패배일 수 있으나. 그것이 알려지는 과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님께서 이 패배조차도 선하게 사용하셨다. 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고난을 받아들이는 바울의 태도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자신의 태도를 모범으로 제시하면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권면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심층연구―잘못된 동기로 복음을 전하는 그들도 구원받는가?

바울은 자신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는, 순수하지 않은 의도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있더라도 자신은 기뻐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거짓 사역자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지, 그들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 중 어떤 이들은 분명히 멸망할 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며(1:28; 2:19), 순수하지 못한 동기의 사역자 중 일부가 이에 해당할 가능성은 농후하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그러나 주님은 이들을 모른다고 하실 것이라 경고하셨다. 오늘날의 말로 하면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교회를 성장시키고, 멋진 설교로 사람을 감동시키고, 대규모 집회로 신문기사를 장식했고, 사회사업도 많이 했습니다”라고 하는 이들 중에 구원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오늘 한국 교회,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이들을 향해 주시는 적확한 말이다. 거짓된 동기로, 시기와 다툼과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사역하는 이들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그들의 사역이 성공적인 경우도 많은데, 하나님은 이들의 사역을 어떻게 여기실까?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1)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받고, 양육받은 사람들의 신앙은 그들의 범죄와 상관없이 유효하다. 그들의 잘못된 동기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일할 수 있다. 이것이 바울이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하고 기뻐했던 이유이다. 종말에 주님 앞에서 “우리가 선지자 노릇” 했다고 말할 그 사역자들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신앙 전부를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의 사역도 사용하실 수 있다.

2) 그 사역자들은 부끄러운 구원을 얻을 수도 있고(고전 3:12–15), 구원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 마태복음 7장 22절의 말씀이 분명한 증거이다. 빌립보서 1장 15–17절에서 말하는 그릇된 동기의 사역자들이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사역의 과시적인 성과를 낸 이들이라도 그것 자체가 그들의 구원을 보증해 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3) 이기적인 동기는 사람을 어리석게 만든다. 바울은 사랑과 지혜는 함께 자라간다고 했다(1:9). 사랑으로 행하는 모든 사역은 그 사역자를 지혜롭게 만든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1:10), “의의 열매가 가득한”(1:11) 삶을 이룰 것이다. 반대로 시기와 다툼으로 하는 사역은 그 사역자를 어리석게 만든다. 단기적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 사역을 사용하실 수도 있다. 사역은 성공하지만, 사역자는 피폐해지고, 어리석어진다. 그래서 스스로 멸망할 길을 선택해 간다. 대단히 성공적인 사역을 이룬 사람들이 말년에 어리석은 실수를 범하는 예를 많이 본다. 이기적인 동기로 하는 사역이 그들을 지속적으로 어리석게 만든 결과이다.

4) 그릇된 동기의 사역자들은 그들의 종말론적 구원이 불확실할 뿐 아니라, 지금 이 세대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기쁨이 없다. 바울은 고난과 박해 가운데,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그를 오해하고 공격하는 이들이 많았음에도 기뻐했다고 고백한다. 사랑으로, 좋은 뜻으로 하는 사역자의 특권이다. 그러나 “투기와 분쟁으로”,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사역하는 이들에게는 그런 기쁨이 있을 수 없다. 외형적인 사역의 성공이 사역자에게 참 기쁨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지금 한국 교회의 문제의 대부분은 자칭 한국 교회를 대표한다는 이들의 문제이다. 가끔씩 신문을 장식하는 그들의 비윤리적인 그리고 비상식적인 행위는 그 현상일 뿐이다. 문제는 그들의 삶에 기쁨이 없고,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언젠가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인 영락교회 담임이었던 임영수 목사의 설교가 한 월간지에 실린 적이 있다.

제가 영락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을 때 마치 군중 앞에 매달린 유리병 안에 제가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 그래서 저는 “하나님! 제가 여기서 원로로 잘 마치려는 욕망에서 해방시켜 주십시오, 그리고 한국 교회의 지도자가 되려는 욕망에서 해방시켜 주십시오. 인기 있는 목사가 되려는 욕망에서 해방시켜 주십시오”라고 하루에 한 번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제 자신이 점점 자유로워지기 시작했고 영락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대형 교회 목사직이 사회적 성공으로 인식되는 현 상황에서,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큰 교회 목사가 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놀라운 사실은 일단 큰 교회 목사가 된 이들은 그 이후에 더 큰 성공의 욕망 앞에 노출된다는 사실이다. 더 큰 교회를 만들고 싶거나, 한국 교회의 지도자로 인정받고 싶은, 혹은 인기 있는 스타 목사가 되고 싶은 욕심이다. 임영수 목사는 대형 교회 목사 중 예외적으로 진솔한 분이리라.

이 욕심을 제대로 직면하고 다룰 수 없다면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없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비극은 대형 교회 목회자들 대다수가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무리를 해서 총회장이나 다른 자리를 탐하고, 더 화려한 건물, 더 큰 건물을 짓고, 이런저런 계기를 만들어서 자신의 영향력과 인기를 과시하거나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들 마음 가운데 견고한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사역의 성공도, 세간의 화려한 관심도, 엄청난 재정을 주무르는 권력도 그리스도가 주시는 기쁨에 비기지 못한다. 돈을 벌수록 더 피폐해지는 물질주의자들처럼, 사역에 성공하면 할수록 불안과 교만, 열등감에 시달리는 것이 그들의 모습이다.

그들의 문제를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바울 자신은 세상 기준으로 실패를 거듭하는 사역자였지만, 그에게는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기쁨이 있었다. 자신들의 능력과 성공을 자랑하던 바울의 대적들의 모습은 오늘날 오간 데 없지만, 깊은 평안과 넘치는 기쁨의 주인공이었던 바울의 글은 오늘까지 남아서 우리에게 복음의 본질을 전하고 있다.

승리주의와 대적해야만하는 바울, 이단적이며 바울을 적대하고 교만하던 “지극히 큰 사도들"을 상대해야만 했던 바울. (시기와 질투)
이런 상황에서 투옥과 질병과 고난과 심지어 순교를 앞둔 상태의 바울은 성도들의 낙심에 심히 고민하였을 것.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 빌립보서 (본문 주석) 바울의 기쁨―시기와 분쟁을 일삼는 이들에도 불구하고(1:15–18)

우리는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감사와 기도 다음에 나오는 첫 문장, 곧 본론의 첫 문장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에 바울이 이 편지를 쓴 가장 중요한 이유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단순히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의 근황을 밝히는 내용이 아니라, 본론 중의 핵심이다. 바울의 매임 그 자체는 부끄러운 것이고 패배일 수 있으나. 그것이 알려지는 과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님께서 이 패배조차도 선하게 사용하셨다. 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고난을 받아들이는 바울의 태도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자신의 태도를 모범으로 제시하면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권면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믿음없는 자의 설교
1.복음은 전해진다
2. 부끄러운 구원의 가능성
3. 어리석은 이기적은 동기 단기적인 성과는 볼 수 있다. 그러나 종래에는 멸망한다. (영적으로나 세상에서도)
4. 그릇된 동기는 현재에서도 참 된 영혼의 안식과 기쁨을 누릴 수 없다. 그는 설교가 시간을 떼워야하며, 교회는 돈을 벌어야되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외형적인 성공은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은 참 된 행복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 빌립보서 (본문 주석) 바울의 목표―삶과 죽음을 초월하는(1:19–21)

이 문제를 적절히 다루기 위해 우리는 종말론적인 구원과 관련한 두 가지 오해를 지적해야 한다. 첫째,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다. 구원의 확신이 비정상적으로 강조되는 것도 이런 인식 때문에 생긴 부작용이다. 이런 식의 좁은 의미의 구원이라면 바울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기도를 부탁한다는 것 자체가 불신의 표현일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종말론적 구원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1:6)라고 할 때의,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아니한 긴 과정을 말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20) 말할 때의 구원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은 천국에 들어가는가 못 들어가는가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어떠한 모습으로 그 앞에 설 것인가가 초점이며, 거기에 이르는 과정 전체가 포함되는 개념이다. 그날에 서로가 서로에게 면류관이 되고(빌 4:11; 살전 2:19–20), 그리스도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것이(빌 1:11; 엡 1:13) 구원이다.

둘째,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구원을 좁게 한정하는 경향은 그 구원을 개인적인 일로만 한정하게 만든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구절에서 구원받아야 할, 혹은 이루어 가야 할 이들은 “너희” 혹은 “우리”임에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 가야 할 것은 ‘너의 구원’이 아니라 “너희의 구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과정은 혼자 가는 고독한 길이 아니라, 함께 가는 길, 그 성공과 실패도 함께 누리고 감당하게 되는 길이다. 이는 개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신약성경이 주는 중요한 도전이다.

신앙은 얄팍한 낙관주의가 아니라 견고한 소망이다. 내가 한 일 때문에 미래를 긍정적으로 전망하는 사람은 상황이 바뀌면 절망한다. 그러나 우리가 한 일 속에서 하나님이 하신 손길을 발견하는 사람은 견고한 소망 위에 설 수 있다.

흔히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신’이라고 할 때 그것은 위의 동심원의 가장 작은 원, 개인이 경험하는 기쁨이다. 이 기쁨은 세상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내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누리는 기쁨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온 우주의 주님이 되셨고 (빌 2:9–11) 그로 인해 온 세계가 새로운 역사의 단계에 돌입했다는 사실이 전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우주적인 변화를 한 개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현실화하는 힘은 코이노니아이다. 코이노니아 없이 기쁨이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우주적 승리 없이 코이노니아가 있을 수 없다. 실제적으로 느끼는 생생한 기쁨이 없는 새창조는 메마른 교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빌립보서에서 이 세 가지 차원이 함께 얽혀 있으면서 서로를 강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바울의 인간학적 단어들은 논하기에 복잡한 주제이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한 인간 전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근본적으로 변화를 겪는다고 본 점이다. 스플랑크논의 본래적 기능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예수의 스플랑크논이 되었다는 것이다. 카르디아의 심리학적 이해보다 예수 때문에 타인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이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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