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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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 룻기서입니다.
이 룻기서는 그저 남편과 두 아들을 여읜 가련한 여인 나오미와 충성스런 며느리 룻의 이야기를 담은 듯한 몇개의 에피소드 안에, 족장 시대를 거쳐 사사 시대를 너머 사무엘과 다윗 시대의 풍요함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사의 신비한 청사진이 들어가 있는 귀한 말씀입니다.
룻기는 보아스와 같이 자신의 기업에 손해가 있을 것이 분명함에도 죽은 자의 아내를 사서 죽은 형제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백성들 사이에서 끊어지지 안게 하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텅 빈 나오미와 같은 인간을 구원해 가시는 모습을 명쾌하게 드내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닷가의 수 많은 모래는 그 모양이나 생김새가 같거나 거의 비슷하기에 그 안에 특별한 무엇이 들어 있으리라고 보통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한 알의 모래 안에 자세히 들여다 보고 그 모래알에 대해 자신만의 세계를 품고 있고 있다고 자신의 시에서 읊은 영국 낭만주의 시인의 글귀가 갑자기 떠오르는 것은 성경의 본문도 어떤 때는 다 비슷비슷한 구절이고, 익숙한 나머지 그냥 지나치곤하지만 성경이 품고 있는 그 하나하나에는 놀라운 구속사의 세계를 품고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룻기는 비록 4장, 85절이라는 어찌보면 작은 책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있는 평범해보이기까지 한 에피소드들은 실제로 그 하나하나가 저와 우리 모두를 향한 구속사를 향한 것을 보여주고 있음을 오늘 이 시간을 통해 함께 그 발견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룻기의 시작은 당시 사사 시대에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든 때, 베들레헴에 사는 엘리멜렉이란 인물이 나오미와 두 아들을 이끌고 잠시 타 지역인 모압에 기거하기위해 떠나는 모습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 혼자 남게 되었고, 모압 여자와 결혼 한 두 아들로 혼자 남게 된 마음을 달렐 틈은 길게 주지 않습니다. 10년만에 두 아들마져 자녀를 보지 못하고 그의 아버지의 뒤를 따르게 됩니다. 이에 삶 전체가 아무것도 채울 수 없는 텅 빈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과부가 되어 두 아들 만으로 그나마 버티던 나오미를 마치 강제로 넘어지도록 확 밀려 넘어져버린 상황이 되어버린 나오미를 보여주며 룻기는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면 나오미의 상황이, 처지가 상상이 되십니까? 그동안 거주하였던 가나안에 흉년이 들어 먹고 사는 문제가 닥쳐진 첫번째 어려움이요, 남편 엘리멜렉을 따라 가족을 이끌고 낯선 타지인 모압 지방에서 살아보려고 아둥바둥 애썼던 때에 엘리멜렉은 죽음을 맞이한 것이 두번째 어려움이요, 그나마 두 아들은 아내를 얻어 거주하며 십년이 되는 때에 두 아들은 이름이 등장하자 마자 바로 아비 엘리멜렉의 뒤를 있는 세번째 어려움을 연속으로 맞이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기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이 당시에는 여인이 남편이 없이, 타지에서 살아간다는게 얼마나 어려웠을지 감히 상상해보기에도 그 어려움이 확 와닫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나오미를 보며 성경에서 이 인물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바로 욥입니다. 한 순간에 자녀들을 다 잃고, 자신의 소유도 잃고, 가장 가까운 아내는 자신을 원망하고 있으며, 친한 친구들은 이 욥에게 비난을 하고 있는 욥 말입니다.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7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그러나 하나님은 연속으로 어려움을 겪는 나오미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남은 가족인 두 며느리인 오르바와 룻과 함께 모압으로부터 고향 유대에서 양식을 주신다는 소식을 듣게 하시고, 그들을 고향 땅으로 다시 돌아게 됩니다. 고향을 떠나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던 나오미는 두 자부인 오르바와 룻과 함께 있었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 오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가 처한 첫번째 어려움인 흉년은 이 글을 읽은 우리에게 크게 와닫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예배를 마치고 당장 집에 돌아가서 먹을 쌀이 없는 사람이아니라면 공감하기 어려운 내용이기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비극으로 보이는 고통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예로 아브람과 이삭은 기간으로 인해 각기 애굽과 블레셋 지역으로 피신하였으나 거기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고 전부다 더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흉년이라는 비극이 우리의 삶에 고통만을 주는 것이 아님을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물론 흉년과 같은 고난에서 면제 받는 것은 아니라고 보여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는 실수하고 계신 것이 아닌 함께 하고 계시며, 저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차근차근 이루어가고 계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동일하게 고통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미처 준비하지도 못한 고통을 말입니다. 아니 더 크게 당하기도 합니다. 그 원인도 모르고, 언제까지 인지도 모를,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그 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친히 이루가 가심을 우리는 기억하시길 소망합니다.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고향 유다 땅으로 돌아온 나오미는 자부들에게 각자의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 각가 남편의 집에서 위로 받기를 원한다며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축복을 빌어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을 이렇게 축복을 빌어 줄 수 있었던 것은 두 며느리가 죽은 자신의 아들들과 자신에게 베푼 선대인 인애 때문입니다. 이는 그저 입에 바른 빈 말로 그들에게 돌아가라고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진심으로 축복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그 중에 한 며느리인 룻은 나오미와 함께 하기 위하여 나오미에게 입을 마추며 붙잡으며 시어머니와 함께 동행 합니다.
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그리고, 나오미와 룻은 고향 베들레헴에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는 추수를 시작할 때에 고향에 이르게 됩니다. 기근으로 인하여 고향을 떠난 이들에게, 가족을 잃고, 한 며느리를 보내고, 한 며느리와 함께 남아 어쩌면 출발할 때 세 식구가 두 식구로 돌아오는 세상의 셈법으로 보면 마이너스 같지만, 하나님은 이들에게 마이너스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풍족함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우리에게 따뜻하게 안아 주시고 계심을 발견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
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고향에 돌아온 룻은 이삭을 주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한 밭에 이르러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친족인 보아스에 속한 밭에서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우연히가 우리가 아는 그 우연이 맞는가입니다. 네 맞습니다. 우연히가 맞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스를 만나게 하시는 것이 맞냐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5장: 섭리)
제5장
섭리
2. 제1원인이 되는 하나님의 예지와 작정대로 변동 없이 모든 일들이 되어간다. 그러나 그것들의 되어가는 방편은 제2원인(자연법칙과 인류의 행동 원리와 기타)의 성격대로 필연적인 것, 임의적인 것, 또 혹은 우연적인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이 역시 하나님의 섭리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5장 2항에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필연”, “임의” “우연”의 세가지 요소가 있다고 소개하며 이 역시 하나님의 섭리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이삭의 낱알을 줍는 룻에게 이렇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열심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15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16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이 보아스라는 사람은 타국 모압 지방 출신 룻에게 배려해줍니다. 자신이 거느리는 소년들에게 건들이지 말라고 하고, 목이 마르면 그 소년들이 길어온 것을 마시게 하는 그런 배려 말입니다. 그는 이미 남편과 자식을 잃은 나오미의 상황과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부모와 고국을 떠난 룻의 상황을 세세히 알고 있었기에 이런 배려를 해주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보아스는 룻에게 자신의 식탁으로 불러 함께 식탁을 나누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수하에 있는 베는 소년들에게 룻에게 곡식 단 사이에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고,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 줍게하며, 꾸짖지 말라고 이르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보아스의 모습에 단순한 지시로 보이지만, 호의와 사랑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이는 호의와 사랑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보아스는 룻에게 자신의 곡식에서 직접 줄 수 있는 충분한 재력가임에도 불구하고, 룻이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며 자연스럽게 이삭을 많이 줍도록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게다가 책망하지 말라, 꾸짖지 말라는 것을 통해 이삭을 주워 연명하는 약자에게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행동들을 금하게 함으로 정서인 측면까지 배려하는 모습을 통해 보아스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보아스의 호의와 배려를 받은 룻은 시어머니 룻에게 자랑을 합니다. 이러한 룻에게 나오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20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나오미는 그 호의와 배려를 베푼 보아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비록 보아스의 도움으로 이삭을 주워왔지만, 그 뒤에는 하나님의 배려가 있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감격의 이유는 바로 그가 가까운 친족이고, 기업을 무를 자를 드디어 찾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기업을 무를 자는 인간을 모든 악으로부터 건저 내는 자로 해석할 수 있는데, 모든 악의 궁극적인 근원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 뒤에 있음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보아스를 통하여 끊어진 자신의 가문을 잇게 하실 것과 그 뒤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3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4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
5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나오미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며느리 룻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중매 계획을 수립하며 시행할 것을 구체적으로 지시합니다. 앞서 남편과 아들들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의 모습과 무척이나 대조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룻이 보아스를 만나 산 자와 죽은 자에게 인애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시는 여호와의 손길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나오미는 영적으로 회복되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나오미에 계획에 룻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채 바로 시행하는 결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어서 비록 보아스는 자신의 옆에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 룻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만, 자신이 기업을 무를 자라고 하며 직접 결혼을 요청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12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13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
그러나 보아시는 자신이 기업 무를 자는 분명하지만 자신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기에 그에게 기업 무를 권리와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보아스의 이러한 모습은 지금의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이나, 특권만을 생각하지 않은 그는 책임있게, 의롭게 처리하는 유력한 사람임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돌아갑니다. 나오미는 타작마당에서 돌아온 룻에게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기 까지 가만히 있으리라고 하며 보아스가 일을 진행함을 믿고 기다리라고 합니다.
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2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 앉아 있을 때 때마침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갑니다. 그런데 그는 기업 무를 것과 관계가 없다보니 성경에는 그를 아무개라고 하며 이름 조차도 거론되지 않습니다. 마치 영화에 엑스트라 남자1 처럼 말이죠. 이어서 성읍에 장로 열 명을 청하여 함께 기업무를 자와 보아스 이렇게 서로 대면하여 구체적으로 기업 무를 것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러나 이 아무개인 원래 기업 물러야 하는 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6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네 나는 기업을 못무르겠다고 언급을 합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장로들과 백성들 앞에 룻과 결혼을 하며 기업 무를 자됨을 증인이 될 것을 언급합니다. 그리하여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룻에게 여호와께서 임신하게 하시어서 기업을 무르게하시게 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이새의 아버지인 오벳 태어나게 됩니다.
성경은 짧게나마 족보를 언급하며 이스라엘의 두번째 왕인 다윗까지 기록하며 룻기는 마무리가 됩니다.
이는 훗날 시간이 흘러 이방 여인을 통하여, 기업을 무르지 않아도 되지만, 적극적으로 기업을 무른 보아스를 통하여 가문이 이어가서 자칫 끊어질 수 있는 집안을 세워주시고, 다윗이라는 이스라엘의 왕을 배출하게 되며, 더 훗날 그 가문에서 진정한 우리들의 왕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가문에 포함될 수 있게 됩니다.
룻기 전체를 한번 들여다 보는 시간을 가져봤는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발견할 수 있으셨습니까? 때로는 우리의 녹록치 않는 삶으로 인하여 무척이나 하나님께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 왜 라는 질문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에 하나님께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면 얼마나 서운하기만한지. 화도 나고, 짜증도 나기도 하고, 속도 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에게 해주신 것들을 잊고 하나님을 원망한 적은 없으십니까?
사람은 실수하며 그 실수를 통하여 발전해나가기도 하고, 그 실수가 잘못으로 되어가는 과오를 범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발전이나, 과오를 범할 것도 없이 실수하지 않으심을 다시금 믿고 나아갑시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그 신실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의 삶과 우리 주변을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우리 모두 내어 맡긴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실수 하지 않으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