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22 청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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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2 청년교회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에베소서는 크게 두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인 1-3장이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에 대해 교리적고 신학적인 진술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4장부터 6장까지는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시작이 이렇다.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지금 바울의 상황은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기에 에베소교회와 소통 할 수 있는 방법은 유일하게 서신이었다. 그럼에도 바울이 말하길 자신은 로마의 법으로인해 갇혀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갇혀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금 자신에게 처한 이 어려움이 하나님의 손을 벗어난 것이 아니라 이것마져도 지금 이렇게 바울이 갇힌 상태인 것마저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보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면한다. 여기서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신을 만들지 않았다. 세상의 많은 신들은 사람들이 만들어냈다.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만든 것이 신이다. 지금 당장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더 큰 두려움의 대상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
여기서 부르셨다르 번역된 원어는 ‘교회’라는 뜻의 ‘엑클레시아’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 공동체이다. 이처럼 부르심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 바로 뒤에 나온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바로 성령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것은 우리가 하나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힘으로 하나되게 할 수는 없다. 하나되게 하신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미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이다. 여기서 “힘써” 번역된 원어의 뜻은 ‘애를 쓰다, 노력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는 명령 분사 현재형으로 쓰였다.
다시말해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기 위해 힘써야 하는 기간이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당시 초대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들간의 갈등이 문제였다. 서로 관련 없는 사람들 아니 어쩌면 예수님 믿지 않았으면 서로 원수같이 지낼 사람들이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통한 성령의 역사로 서로간의 막힌 담을 허물고 함께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었다.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체된 한사람 한사람의 지속적인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3-6절에서 ‘하나’ 라는 단어가 7번이나 사용되었다. 이는 교회의 속성에서 하나됨이 그 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은 절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쉽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모두가 노력하고 애써야 하는 부분임을 반드시 기억하길 바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 될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본문 2절에 나와 있다.
첫째로 겸손이다. 겸손은 온유나 오래 참음보다 먼저 나왔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이라는 관사의 수식을 직접 받는다.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이루는 겸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겸손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가정에 손님을 초대하고 대접하기 위해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였음에도 뭐라고 하는가? “차린 것이 없지만, 부족하지만 맛있게 많이 드세요” 하는 것이다.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아침부터 정성을 다해 준비하였음에도 그러한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려는 마음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나를 낮추는 것이다.” 성경속에서 겸손의 도를 가장 잘 보이신 모델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되심에도 불구하고 겸손의 극치를 보이셨다. 예수님도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자신을 낮춰 하나님의 뜻대로 이 땅에 내려오셨다. 그것도 창조주이신 그가 피조물의 형체로 오셨다. 그뿐 아니라, 이땅에서 그 모든 고난과 고통을 감당하시고 끝내 죽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성도들은 날마다 자기의 옛 본성과 자아를 부인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성도 각자가 소유하고 있을 때 교회 구성원 각자가 서로를 세워줌으로써 교회 공동체 전체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됨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두번째는 온유이다. 온유 역시 성도의 필수적인 덕목으로 강조되고 있다.
온유는 약함으로 인한 온순함을 의미하지 않고 강함을 절제함으로써 나타나는 부드러움을 의미한다. 다시말해 성령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고 절제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온유는 타고난 성품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중 하나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죄의 경향이 있기에 순간적인 감정과 기분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과거 김익두 라는 유명한 건달이 있었는데 안악골의 호랑이 라고 불릴정도로 무서운 존재였다. 그러던 그가 안악교회 스왈론 선교사님을 통해 복음을 접하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였고 전도사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너무 놀라워 일제 시대였던 그 당시에 미국 신문에 실릴 정도였다. 하루는 김익두 목사님이 부흥회 참석하기 위해 산길을 걷다가 너무 더워 웃옷을 벗어 놓고 바름을 쐬고 있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술 취한 사람이 오더니 “너는 왜 나보다 먼저 올라 온거야?”라고 말한 후 김익두 목사님을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김익두 목사님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 매를 맞았다. 그리고 술 취한 사람에게 “형님 다 때렸습니까?” 묻자 그는 “다 때렸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김익두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형님이 받으셨군요” 이 말 뜻을 알아들을 수 없자,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김익두요” 이 말을 듣자 때린 사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살려달라고 어떻게 하면 되겠냐고 해서 부흥회 같이 가게하였고, 그는 이 일을 계기로 예수님을 믿게 되고 훗날 장로까지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절제하고 통제함으로 성령님께서 교회를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
세번째로 오래참음이다. 오래참음의 원어는 ‘멀다’와 ‘분노’라는 두단어의 합성어이다. 그러기에 오래참음의 뜻은 분노로부터 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힘과 강제성으로 구원하시고 예배의 자리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어 우리를 오래참으심으로 구원하시고 우리가 주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게 하셨다. 그러기에 우리도 성령님이 하나되게 하신 우리 공동체를 힘써 지키기 위해서는 분노의 감정으로부터 의식적으로 멀리 떨어져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생명을 살리는 공동체임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넷째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해야 한다. 용납한다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구별해야 할 것은 서로의 다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다원주의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용납하는 근거는 ‘나도 맞고 상대도 맞다’는 생각이 아니라, 사랑함으로 이해하고 사랑함으로 용납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를 용납하기 위해서 앞에서 이야기한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4-6절을 보면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공동체가 하나가 되는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성경에 써있는 이야기지 이게 실제로 되겠냐고!? 라며 하며 해보지도 않고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몸도 하나고 성령도 한분이시고 주도 한분이시고 믿음도 하나고 세례도 하나이고 하나님도 한 분이시다. 불가능할 것 같은 것들도 하나이다. 그러니 우리도 하나 될 수 있다는 그 마음 그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성령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우리 공동체를 힘써 지켜야 한다. 그것을 포기하지 않길 바란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렇게 오게 된것은 누군가의 애씀과 노력이 있음을 기억하고 이제는 특정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있는자리에서 하나되게 하기 위해 겸손하고 온유하고 오래참으며 서로를 용납해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우리 청년공동체를 힘써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