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23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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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294 하나님은 외아들을
본문 롬9:21-24 (신p.251)
자비와 긍휼의 아버지 하나님, 지금도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멸망과 저주로 달려가고 있는데, 그들과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는 우리에게는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어 이 은혜의 자리로 나아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입은 자로서 늘 감사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삶을 살아가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절대주권 안에서 각 사람을 그분의 목적에 따라 세우시고 사용하신다.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시는 것도, 그리고 모세를 긍휼의 그릇으로 사용하시고, 바로를 진노의 그릇으로 사용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전적인 자유로운 선택과 주권에 속한다. 바로가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하나님이 정하셨다면 하나님이 그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는데, 바울이 이들에게 뭐라고 경고했는가? 20절을 보면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창조주께로부터 지음받은 존재에 불과하면서 감히 하나님께 반문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토기장이와 진흙덩어리의 관계를 한번 생각해보라. 토기장이는 살아있는 인격체이고 진흙덩어리는 생명력이 없는 무인격체에 불과하다. 이것은 마치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빚으시던 상황을 생각나게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그 사건을 우리는 창세기 본문을 통해 잘 알고 있다. 토기장이와 진흙 덩어리 사이에는 질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어떤 토기로 빚어질 지는 전적으로 토기장이의 권한에 속한다. 진흙덩어리는 토기장이에게 이래라 저래라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실제로 아담이 창조될 때에도 그러했다. 흙으로 아담이 빚어질 때에 생명력이 없는 흙덩어리에 불과한 그가 창조주 하나님께 말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오로지 하나님이 빚으시는대로 그가 만들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토기장이가 진흙덩어리로 토기를 만들 때에 아무런 계획 없이 만들지는 않는다. 그 토기를 만들어서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를 염두해 두기 마련이다. 21절 말씀처럼 어떤 토기는 귀히 쓸 그릇으로, 또 어떤 토기는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든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귀히 쓸 그릇을 긍휼의 그릇으로, 또 천히 쓸 그릇을 진노의 그릇으로 표현한다. 먼저 진노의 그릇을 만드시는 그분의 목적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22절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방금 읽었던 말씀에서처럼, 그리고 함께 읽진 않았지만 17절의 말씀에서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진노를 보이시고 당신의 능력을 알리시려고 진노의 그릇을 만드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진노의 그릇을 만들어서 왜 죄에 대한 그분의 진노를 보이려고 하실까? 바로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만일 아담과 그의 후손이 온전히 순종했더라면 하나님이 결단코 진노의 그릇을 세우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죄악에 빠져 있는 이상 진노의 그릇이 세워지기 마련이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분의 진노를 쏟으신다. 그리고 진노를 보이실 때에 그분의 능력이 동시에 수반되어 나타난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성도들에게도 나타나지만 진노의 그릇으로 세워진 자들에게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도들에게는 사람을 세우고 살리는 능력으로 나타나지만, 진노의 그릇에게는 파멸시키고 죽이는 능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진노의 그릇들은 멸하기로 준비된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들을 대하실 때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인간들은 죽어 마땅한 죄인들을 보면 보통 그가 빨리 죽거나 망하기를 기대한다. 아주 지독한 살인마나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중죄를 범한 죄인들을 보면 그렇지 않는가? 그들이 하루 속히 법의 심판을 받았으면 좋겠고, 하루 빨리 이 땅에서 사라지길 바랄 때가 있다. 오래 참거나 관용하기 보다는 하루 빨리 그런 악인들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22절 후반부에서 보듯이 멸하기로 준비된 그들을 대하여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는 분이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앞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진노의 그릇을 세우신 목적은 그분의 진노와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함임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단순히 그들이 파멸되기를 기뻐하는 마음에 그렇게 하시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실 필요가 없다. 바로 당장 진노의 그릇들을 쓸어버리시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신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특별히 23절과 연결시켜 보면 한가지 분명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모든 사람을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으로 대비시킨다. 그런데 이 두 종류의 그릇은 서로가 존재할 때만이 그 의미를 가진다. 생각해보라. 흑이 있어야 백이 의미가 있고, 죽은 자가 있어야 산 자가 의미가 있는 것처럼, 긍휼의 대상은 진노의 대상이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모든 사람을 다 심판하여 멸망시키시거나, 모든 사람을 다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신다면 사랑과 은혜, 공의와 진노의 개념이 사라질 것이다.
내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그 이면에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두가 은혜를 받고 구원에 이르는 긍휼의 그릇이라면, 죄인은 누구라도 때가 되면 구원에 이를 것이기 때문에 은혜와 사랑의 긴박성이 사라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긍휼히 여김을 받아 구원에 이른 상태에서 그렇지 못한 죄인들을 보면서 감사하고 기뻐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극적으로 출애굽을 경험한 이스라엘을 상상해보라. 그들이 엄청난 고통 속에서 해방되어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넜을 때에 그토록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단지 고통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들을 대적하던 진노의 그릇인 애굽 바로 왕과 그의 군대가 바다 속에서 파멸되는 것을 생생히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진노의 그릇인 그들을 세우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은혜와 긍휼을 더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정리해보면,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참으심으로 관용하실 때에 하나님은 일차적으로 당신의 백성인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신다. 애굽 왕 바로의 경우에서처럼, 진노의 대상을 오래 참으실수록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더욱 크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진노의 그릇들을 향해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품으신다. 하나님이 그들을 지켜보시고 오래 참으시면서 그들에게 예정된 파멸을 즐겨보시는 것이 아니다. 가룟 유다를 두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라. 그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자신에게 좋을 뻔 했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파멸로 예정된 가룟 유다의 상황을 안타까워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이제 긍휼의 그릇을 만드신 목적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23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자.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려지는 거룩한 속성인데, 황송하게도 그것을 긍휼의 그릇들에게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기 위해는 긍휼의 그릇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부요한지,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아야 한다. 바로 이것이 긍휼의 그릇을 만드신 목적이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의 그릇을 만들어서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그들을 만드셔서 무엇을 가장 알리고자 하신다고 말씀하시는가? 이미 읽으신대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함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것이며, 그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 알기를 힘써야 한다. 바로 이것이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의 주된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24절을 함께 읽어보자.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보시다시피 긍휼의 그릇은 바로 저와 여러분이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관계없이 하나님이 부르신 모든 자들을 가리킨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과 제가 바로 하나님이 만드신 긍휼의 그릇이라는 것이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새벽의 시간에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 지으신 목적에 대해 생각해보길 바란다. 지금도 교회 밖에서 멸망을 향하여 달려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그들과 내가 본질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길래 나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저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는가?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이다. 내가 저들과 아무런 구분없는 자이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이 은혜의 자리에 앉히셨으니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것이라고는 그 은혜에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것 뿐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의 풍성함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 구별하셨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그 영광을 사모하며 살아가시는가? 세상 어느 부귀 영화보다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하신 영광을 갈망하며 살아가시는가? 진흙덩어리 같은 우리와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토기장이이신 그분의 존재를 더욱 묵상하며 살아가시는가? 우리에게 더 큰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진노의 그릇들을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말씀을 기억하며 함께 기도하실 때,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토기장이이신 그분의 풍성하고도 측량할 수 없는 영광을 조금이라도 깨닫기를 간구하자.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로 이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게 해 달라고 주여 한번 외치고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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