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사_영국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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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전개

헨리 8세의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무어의 아들
10세에 즉위 / 외삼촌 서머셋 공작 에드워드 시무어가 섭정
본격적인 종교개혁 착수: 크랜머(토마스 크랜머), 리들리, 라티머가 주도
에라스티안주의(Erastianism): 국가가 교회를 관리 감독 “국가는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신적인 권능을 받은 국가는 중요하다.” 이후에 비판, “국가의 수장이 선봉하여 개혁을 이끌고 종교를 이끌어가는 것은 옳지 않다.” 청교도
공동기도서 출판, 1549(1552) / 수도원 타파와 성상파괴 운동 “미사하지 말고 예배드려라” _ “예배 그러 어떻게 드립니까?” _ “이거(공동보고서) 보고 그냥 읽어라(기도도 있고 설교도 있음)”
종교개혁자 영입 대학을 보니 개판임, 로만 카톨릭의 잔재들이 남아있는 듯하여 개혁자 배치, 원래 대학생들이 난동을 잘 부림.
부처 캠브리지(1552년 공동기도서2 출판에 도움을 줌)
버미글리 옥스퍼드(원래 스위스에 있었음, 크랜머가 연락서 오게 됨)
라스코 런던교구
녹스 잉글랜드 북부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위기

1553년 에드워드 6세가 병으로 죽음
섭정 노섬랜드 공작 더들리가 며느리 제인 그레이를 즉위 시도
로마 가톨릭임에도 불구하고 캐더린의 딸 메리가 즉위
메리는 즉위 직후부터 추기경 폴과 함께 로마 가톨릭 복원 정책을 추진 - 인문주의적 개혁 성향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재개

엘리자베스 1세의 Via Media - 중도적 종교개혁 왕권 강화가 목표 <-> 그런데 청교도들 자꾸 말 안 들음(“아니 왕이 어떻게 교회의 수장이 될 수 있냐!”)
“Supreme Governor”라는 호칭을 사용
감독제도 수립: 39개조 채택과 공동기도서의 복구
주교 주얼의 Apology & 후커의 국교회 정당화 신학
망명 후 귀국한 개혁파 인사들과 복구를 기대하는 로마 가톨릭 인사들이 모두 반대
국교회 정책에 대한 반대로 청교도 등장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쟁점

교회론 논쟁

공동기도서의 수용 여부 초판은 개혁신학 지향, 정치적으로 로마 가톨릭적 의식과 절차 보존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화체설)를 주장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음 투옥 중이던 주교 가디너가 조장해서
성복 논쟁
두 가지 쟁점 - 성직 임명에 있어서 서약해야 하는 우월한 권위 가운데 성인들을 언급하는 것 - 목사들이 성직자 옷을 입는 것
에드워드 6세는 전자를 직접 폐지했지만, 크랜머와 리들린는 후자를 계속 주장함
로마 가톨릭의 잔재 철폐(청교도) vs 국가 공권력을 통한 교회 개혁 추진(국교도) 엘리자베스가 결혼 안 한 이유가 한 쪽과 결혼해서 다른 쪽에 공격당하지 않도록, 로마 가톨릭 측의 사람과 결혼해서 가톨릭 측에 힘을 실어주지 않기 위해
후퍼는 자신이 글루스터 감독 임직 시 두 가지를 다 거부함
존 녹스의 “흑주 사건" “성찬을 받을 때 꼭 무릎을 꿇어야 하는가?” - 1552년 개정된 공동기도서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 떡과 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흑주가 첨가되어 출판됨.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의의

국가 주도의 종교개혁으로서의 한계 :정치 성향 변화에 따른 부침
종교 개혁의 실제적 적용에 대한 심화된 논의 전개 - 정통교리에 대한 신학적 논의 + 실제적 개혁의 적용에 대한 치열한 논쟁 - 마틴 부처의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하여"
17세기 이후 개신교 개혁 확산에 기여 - 스페인 무적함대 격퇴(1588) 후 대서양 해상권 장악 - 웨스트민스터 문서들(1647)이 이제까지의 개혁신학을 집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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