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이 판치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진실을 찾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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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스포츠 스타가 어떤 사기꾼에게 당해 난리가 났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 바보같이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작정하고 누군가를 속이려들면 어느 누구도 그 피해자가 될수 있습니다.
제 주변에는 보이스피싱을 당해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그뿐입니까?
요즘 SNS를 봐도 우리를 속이려는 거짓 뉴스가 넘쳐납니다.
팩트를 채 확인하기도 전에 거짓뉴스는 빠지게 퍼져갑니다.
참과 거짓을 분별하며 살아가기 힘든 세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을 제대로 안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최소한 그것을 아는데 있어 장애물들이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그러한 장애물들 몇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거짓이 판치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진실을 찾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찾을지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론]
첫째, 명분보다는 동기입니다
1-4절입니다.
시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에는 세 해동안이나 전쟁이 없었다. 그런데 삼년째 되는 해에,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이스라엘 왕을 찾아갔다. 이스라엘 왕은 자기의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길르앗에 있는 라못은 우리 땅인데도, 우리가 그 땅을 시리아 왕의 손에서 다시 찾아올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소. 경들은 이것을 알고 있었소?”그리고 그는 또 여호사밧에게도 말하였다. “길르앗의 라못을 치러 나와 함께 올라가시겠습니까?”
앞서 시리아와의 2번의 전쟁에서 모두 이스라엘이 승리했습니다.
그때 아합왕은 마치 아량을 베풀듯 시리아의 왕을 살려줍니다.
그러자 그 대가로 시리아 왕은 아합왕에게 전에 빼앗았던 땅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그 땅의 일부가 바로 요단 동편의 길르앗 땅입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나도록 시리아는 약속을 지켜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합왕은 자신을 찾아온 남유다 왕 여호사밧과 함께 시리아를 칠 생각을 합니다.
남유다의 여호사밧왕이 아합왕을 찾아온 이유는 서로 사돈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사밧의 아들이 아합의 딸인 아달랴와 혼인했습니다.
아합왕은 시리아를 칠 계획을 먼저 신하들에게 묻습니다.
‘경들은 이것을 알고 있었소?’라는 말의 의미는 알면서 아직까지 왜 아무 말도 안했느냐는 것입니다.
그의 질문은‘답정너’입니다.
‘답은 정해져있고, 너는 대답만해’입니다.
신하들이 시리아를 치려는 계획에 동의해주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시리아 벤하닷왕이 땅을 돌려준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땅을 반환받는게 맞습니다.
이 점에서 보면 전쟁을 할 명분은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가진 명분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동기입니다.
아합이 시리아와의 전쟁에서 2번씩이나 승리할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힘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시리아의 군사력은 이스라엘과 비교하면 사자 대 염소 싸움정도입니다.
절대로 이길수 없는 전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언자를 보내셔서 아합을 도우셨습니다.
그로 인해 아합은 이길수없는 전쟁에서 승리할수 있었습니다.
절대 아합 자신의 지혜와 능력때문이 아닙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그는 마치 자신의 능력으로 이겼다고 여기며 교만해졌습니다.
자신이 여호사밧과 협력하면 시리아를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동기가 잘못된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다행히 이 일에 대해 제동을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아합을 찾아온 여호사밧왕입니다.
5절입니다.
그러면서도 여호사밧은 이스라엘 왕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먼저 주님의 뜻을 알아봄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을 보면 여호사밧은 아합왕과 달리 신앙이 있는 인물로 보입니다.
그는 아무리 전쟁의 명분이 충분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다를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여호사밧은 자기 군사들이 모두 아합의 것이라며 아합을 매우 존중합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아합의 말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신중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그의 모습이 이 세상가운데 살아가는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가 아닐까요?
어떤 선택이나 행동에 있어 우리의 명분이 분명할지라도 우리의 숨은 동기까지 살펴 하나님의 뜻을 찾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명분말고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은 또 있습니다.
둘째, 예스맨보다는 노맨입니다
6절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왕은 예언자 사백명 가량을 모아 놓고서, 그들에게 물었다. “내가 길르앗의 라못을 치러 올라가는 것이 좋겠소, 아니면 그만두는 것이 좋겠소?” 그러자 예언자들은 대답하였다. “올라가십시오. 주님께서 그 성을 임금님의 손에 넘겨 주실 것입니다.”
여호사밧의 충고에 따라 아합왕은 예언자 400명을 데려 옵니다.
그들에게 전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대답이 모두 동일합니다.
전쟁에 나서면 하나님이 승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400명이 동일한 소리를 한다는게 무슨 의미일까요?
진짜 하나님의 음성이기 때문에 같은 말을 하는 것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전부 거짓말하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둘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어쩐지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나라에서 고용한 예언자들이니까 왕의 의견에 맨날 예스만 할거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는 이런 의심을 당연히 신앙이 있는 여호사밧도 합니다.
7절입니다.
여호사밧이 물었다. “이 밖에 우리가 물어 볼 만한 주님의 예언자가 또 없습니까?”
여호사밧이 의심스러워하면서 또다른 예언자가 없는지 찾습니다.
자신도 왕이어서 국가 공무원인 예언자들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경험해본 것입니다.
그러자 아합왕이 또다른 예언자 한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8절입니다.
이스라엘 왕은 여호사밧에게 대답하였다. “주님의 뜻을 물어 볼 사람으로서,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라고 하는 예언자가 있기는 합니다만, 나는 그를 싫어합니다. 그는 한번도 나에게 무엇인가 길한 것을 예언한 적이 없고, 언제나 흉한 것만 예언하곤 합니다.”여호사밧이 다시 제안하였다. “임금님께서 예언자를 두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됩니다.”
아합왕은 미가야가 맨날 안 좋은 예언만 한다며 불평합니다.
미가야는 그만큼 다른 예언자들과 달리 왕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임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아합왕이 미가야를 깎아내리자 여호사밧은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여호사밧의 신앙이 얼마나 돋보입니까?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아합과 굉장히 대조적인 인물입니다.
이제 신하들이 미가야를 데리러 가는 동안 예언자 한 사람이 나와 왕들 앞에서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그의 이름은 시드기야입니다.
그는 두 왕들 앞에 철뿔을 들고 나와 이 철뿔들이 시리아를 모두 파멸시킬 것이라고 말합니다.
두개의 철뿔은 아마도 아합왕과 여호사밧을 의미하는듯 합니다.
예언자들이 많이 하는 상징행위를 보여준 것입니다.
400명의 예언자들이 한 목소리로 전쟁을 지지하고, 상징행위까지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말뿐만 아니라 이미지까지 보여주면 더욱 믿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다수의 뜻에 휩쓸리기 매우 쉽습니다.
특히 내가 높은 위치에 있으면 다수의 목소리는 더욱 크게 들립니다.
내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주변에서 해주기 때문입니다.
모두 ‘예스’를 말하는데 혼자 ‘노’를 말하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미움을 받거나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주변에 대부분 예스맨들만 남게 됩니다.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망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주변에 예스맨들만 남게되어 팩트와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스맨들과 달리 그렇지 않은 예언자가 있습니다.
13-14절입니다.
미가야를 데리러 간 신하가 미가야에게 말하였다. “이것 보시오. 다른 예언자들이 모두 한결같이 왕의 승리를 예언하였으니, 예언자께서도 그들이 한 것 같이, 왕의 승리를 예언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오.”미가야가 대답하였다. “주님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나는 다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만을 말하겠습니다.”
신하가 미가야에게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좋은게 좋은것이니 그냥 똑같이 예언하라는 것입니다.
다수의 의견이 정해졌으니 그것에 따르라는 일종의 압박입니다.
왕의 생각이 이미 정해졌으니 혼자 다른 얘기해서 분위기 해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이런 압박을 느낄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그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그에게는 다수의 압박도, 자신의 손해도, 중요한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어디서든 예스맨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는 예스맨, 세상의 거짓에 대해서는 노맨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물론 노맨으로 살아가는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만한 각오와 대가지불이 필요합니다.
노맨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외로워지기 쉽고, 손해도 감수해야만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위해 명분보다는 동기, 예스맨보다는 노맨을 추구해야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데 있어 또한가지 방해물이 있습니다.
셋째, 듣기 좋은 말보다는 불편한 말입니다
15절입니다.
그가 왕 앞에 나아가니, 왕이 그에게 물었다. “미가야는 대답하시오. 우리가 길르앗의 라못을 치러 올라가는 것이 좋겠소, 아니면 그만 두는 것이 좋겠소?”미가야가 대답하였다. “올라가십시오. 승리는 임금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곳을 왕의 손에 넘겨 주실 것입니다.”
아합왕 앞에 불려나온 미가야는 놀랍게도 다른 예언자들과 똑같은 예언을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겠다고 했는데 왜 이러는 것일까요?
미가야는 아합왕과 400명의 예언자들을 조롱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너희들이 듣고싶은 말이 이거지, 그럼 그렇게 해줄께”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합왕은 미가야가 거짓말 하는줄 알아차리고 곧바로 진실을 말하라며 다그칩니다.
평소의 미가야 태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미가야는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17절입니다.
미가야가 대답하였다.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이산 저산에 흩어져 있습니다. 마치 목자없는 양 떼와 같습니다. ‘나 주가 말한다. 이들에게는 인도자가 없다. 제각기 집으로 평안히 돌아가게 하여라’하십니다.
여기서 목자는 아합왕이고, 양떼는 백성들입니다.
전쟁에 나가게되면 아합왕은 죽고 백성들은 흩어질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아합왕이 뭐라고 합니까?
18절 보시면 여호사밧왕에게 “내가 그럴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거짓말하면 거짓말한다고 뭐라고 하고, 참말 하면 참말한다고 뭐라고 합니다.
이게 바로 아합왕과 같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참말인지 거짓말인지가 중요한게 아닙니다.
단지 듣고싶은 말을 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아합왕의 반응에 대해 미가야는 그 근거를 좀더 분명히 밝힙니다.
그가 말하는 근거는 시드기야가 보여준 철뿔쇼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19-23절입니다.
미가야가 말을 계속하였다. “그러므로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내가 보니, 주님께서 보좌에 앉으시고, 그 좌우 옆에는 하늘의 모든 군대가 둘러 서 있는데,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누가 아합을 꾀어 내어서, 그로 길르앗의 라못으로 올라가서 죽게 하겠느냐?’ 그러자 그들은 ‘이렇게 하자’ 또는 ‘저렇게 하자’하며, 저마다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데, 한 영이 주님 앞에 나서서 말합니다. ‘제가 가서, 그를 꾀어 내겠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에게 물으십니다. ‘그를 어떻게 꾀어 내겠느냐?’그러자 그는 대답합니다. ‘제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아합의 모든 예언자들의 입에 들어가서, 그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도록 시키겠습니다.’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를 꾀어라.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다. 가서, 곧 그렇게 하여라.’그러므로 이제 보십시오. 주님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여기에 있는 임금님의 예언자들의 입에 들어가게 하셨으니, 주님께서는 임금님께 이미 재앙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미가야는 환상가운데 자신이 본 하늘 회의를 들려줍니다.
그 회의의 안건은 어떻게 아합을 꼬셔서 전쟁에 나가게 하여 그를 죽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한 영이 나서서 예언자들 입에 들어가 거짓예언을 하도록 만들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한 영은 문맥상 천사들중 하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런 미가야의 이야기는 400명의 예언자들이 한 예언이 모두 거짓이라는 말입니다.
오직 자신만이 진짜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순간 미가야는 400명을 적으로 돌린 것입니다.
마치 450명의 바알예언자들과 대결을 벌인 엘리야처럼 말입니다.
그는 거짓 예언자들과 누구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인지 대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의 의미도 엘리야와 비슷합니다.
미가야란 이름의 의미는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굉장히 독특합니다.
미가야의 이야기에 따르면 거짓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거짓말을 하도록 하나님이 시킨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들을 고발하는 미가야는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합왕을 속이는 것이라면 미가야는 최소한 입을 닫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미가야는 하나님의 뜻을 아합에게 모두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진짜 의도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미가야를 통해 아합왕에게 또다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또한 옆에 여호사밧이라는 신앙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옆에서 듣고 아합왕을 제지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24-28절입니다.
그러자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다가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면서 말하였다. “주님의 영이 어떻게 나를 떠나 네게로 건너가서 말씀하시더냐?”미가야가 대답하였다. “네가 골방으로 들어가서 숨는 바로 그 날에, 너는 모든 것을 알게 될것이다.”이스라엘 왕은 명령하였다. “미가야를 잡아다가 아몬 성주와 요아스 왕자에게로 끌고 가거라. 그리고 내가 명하는 것이니, 이 자를 감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빵과 물을 죽지 않을 만큼만 먹이라고 하여라.”미가야가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정말로 평안히 돌아오실수 있으면 주님께서 나를 시켜서 이런 말씀을 하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미가야는 한마디 더 붙였다. “여기에 있는 모든 백성은 나의 말을 잘 기억하여 두시오!”
예언자들중 철뿔로 상징행위를 했던 시드기야가 나서 미가야의 뺨을 후려칩니다.
그리고 아합왕은 자신이 평안히 돌아올 것을 확신하며 그때까지 미가야를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합니다.
문제는 여호사밧입니다.
그는 옆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아합왕이 미가야에 대해 함부로 말할때 그것을 책망하던 여호사밧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중요시하던 여호사밧은 어디에 있습니까?
협박과 폭력 앞에서 진실은 갇혀버렸고 여호사밧 또한 타협하고 만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듣고싶어 하는 말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아닐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위로와 격려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무조건 긍정적인 말을 해야한다고 강박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이 옳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듣기 좋은 말보다 불편하고 싫은 말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일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진짜 유익이 되는 말일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 이야기의 결론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내일 묵상하시면 아시겠지만 아합왕은 어떻게든 죽음을 피해보려 꾀를 씁니다.
미가야의 예언이 내심 두려웠기에 그는 왕의 복장을 하지 않고 평범한 군인처럼 변장합니다.
대신 여호사밧은 아합왕의 부탁으로 왕의 복장으로 전쟁터에 나갑니다.
아합왕이 혹여라도 자신이 죽을까봐 자기 대신 여호사밧을 죽게하려는 계략입니다.
어떻게든 미가야의 예언이 이뤄지지 못하도록 머리를 굴린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결국 아합과 타협했던 여호사밧도 혼쭐이 납니다.
그리고 아합이 꾀를 썼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됩니다.
이상하게 시리아 병사들이 여호사밧이 아닌 아합만 노립니다.
그리고 한 무명의 병사가 무심코 쏜 화살이 아합왕 갑옷 가슴막 그 좁디 좁은 틈 사이를 뚫고 들어가 아합왕은 괴로워하다가 결국 죽고 맙니다.
미가야의 예언대로 하나님이 아합왕을 죽이시려고 시리아 군대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의 죽음은 비참했습니다.
사람들이 아합왕이 죽은 마차와 그의 갑옷을 연못에서 씻을때 개들이 몰려들어 그의 피를 핥아 먹습니다.
심지어 그곳은 창녀들이 목욕하는 부정한 곳이었습니다.
이는 21장 19절에 나온 엘리야의 예언이 이뤄진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심판을 통해 진짜 예언자가 누구인지, 진짜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든 백성들이 알게 된 것입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참과 거짓도 분별하기 쉽지 않은 세상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짓에 속아 피해를 보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참 쉽지 않습니다.
많은 유혹과 장애물들이 존재합니다.
여호사밧처럼 잘하다가도 결국엔 넘어지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은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성취됩니다.
무심코 쏜 화살이 작은 틈 사이에 꽂혀 아합이 죽은 것처럼 하나님의 뜻에는 빈틈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는 노력을 그치지 말아야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시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 삶의 불편함과 손해도 감수할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