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28 양청] 94문

소요리문답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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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연초에 종교개혁사를 통해 배웠지만,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열린 것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개혁된 하나의 교회 건설”이라는 목표 때문이었다. 그 결과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만들어진 표준문서들, 신앙고백서와 이를 기초로 작성한 대소요리문답, 예배모범, 교회정치, 권징조례, 이 다섯가지가 표준문서라고 불리는데, 이를 다른 교리서들과 구분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라는 이름을 붙여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이라고 부른다.
이 문서들은 나라와 교파를 구분하지 않고, 장로교회라고 한다면 어떤 장로교회든지 그들의 신앙고백 문서로 받아들인다. 이 말을 바꿔서 말한다면, 오늘날 한국 안에 장로교회 교단만 200개가 넘는다고 한다. 분명 장로교회라고 간판에는 써 있는데 그 교회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받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장로교회가 아니다. 이를 잘 판가름해야 한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이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이것 또한 모순 아닌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간 한국교회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이것들을 거의 가르치지 않았다. 장로교회의 장점 중 하나는 세계 어느 교회를 가든지 이 표준문서 하나로 다 비슷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만큼은 장로교회마다 교회의 분위기가 다르다. 이는 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역사적 신앙고백 가운데 세워진 장로교회로서 공통점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들을 가르치질 않으니 공통점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예배 순서도 다 다르고, 예배의 구성도 다 다르고, 예배의 중요포인트도 다 다르다.
이 표준 문서들은 세상의 방식으로 얘기한다면 교과서와 같다. 학습지라거나 다른 참고서적들은 다 제각기 특성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교과서는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적인 부분들을 다룬다. 물론 교과서 중의 교과서는 성경이다. 그러나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전체 성경이 말하는 바를 명료하게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교리이고, 종교개혁의 흐름 가운데 만들어졌던 핵심 교리서들 중 우리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지금 우리는 배우고 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 양문교회 청년부가 우리 시대 다른 장로교회들과 같은 신앙을 이루어가며, 뿐만 아니라 16-17세기 앞선 성도들과도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오늘날 채널만 돌리면 유명한 교회의 목사들의 설교가 나온다. 인터넷좀 보다보면 설교듣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야말로 설교의 홍수시대를 살아간다. 우리가 이렇게 설교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만큼 분별력이 없다면 그 셀 수 없이 많은 설교들이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분별력이 없다면 그 많은 설교들 가운데 바른 복음의 설교를 가려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성경을 바르게 공부할 수 있는 교과서가 필요한 것이고, 1년이 끝나가는 이 시점에 교과서 거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어주시길 바란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외적 은혜의 수단에 대해 배우고 있다. 말씀에 대해 배웠고, 지난 주부터는 성례에 대해 배우고 있는데, 오늘은 성례 중 하나인 세례에 대해 배울 것이다. 여러분 교재의 94문이다.
94문. 세례란 무엇입니까?
답. 세례는 성례로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을 가지고 씻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되는 것을, 우리가 은혜언약의 유익들을 취하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 속한다는 서약을 상징하고 인치는 것입니다.
교재 1번을 보라. 먼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라고 설명한다. 성삼위 하나님의 성호, 거룩한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이다. 마태복음 28: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성삼위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세례의 근거를 밝히는 것이다. 우리 중 누구라도 유명한 목사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는다. 어떤 유명한 연예인의 이름으로 세례받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성삼위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을 이루셨고 그러므로 그 사역에 근거해서 우리는 세례를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공로를 세우거나, 나의 어떤 업적, 혈통, 신분, 가진 것으로 인해 세례를 받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이루신 구원 그것에 근거해서 세례가 주어진다는 의미로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두번째는, 세례를 받음으로서 이제 우리의 소속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께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내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지만 이제 삼위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서,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 선언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와 같은 믿음을 소유한 자라는 것을 선언하는 측면도 있지만, 불신 세상을 향한 선언이기도 하다.
초대교회를 생각해보라. 로마의 네로 황제를 다들 아실 것이다. 그의 노년에 정신이 미쳐서 로마의 궁정에 스스로 불을 지르고, 그것을 기독교인들이 저질렀다는 거짓증언을 함으로서 본격적인 기독교박해가 시작되었다. 군인들은 기독교인들을 닥치는대로 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때로는 사형을 시켰고, 기독교인들은 사회에서 존재해서는 안될 부정한 존재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너도 나도 이웃 그리스도인들을 신고했고, 혹 저 사람이 그리스도인은 아닌지 서로의 행동을 감시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 세워진다는 것은 엄청난 검증과 교육과 결단이 요구되었다.
교회에 새신자가 들어오면, 이 사람이 우리를 고발하기 위해 찾아온 것은 아닌지 그 사람의 신앙을 면밀히 관찰해야 했고, 이 사람이 검증되기까지 교인들은 이 사람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세례교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 사람의 신앙이 제대로 검증되었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내가 세례받은 저 사람과 같은 신앙을 가진 한 형제 한 자매임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세례받은 사람은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심지어 죽음까지도 각오하겠다는 결단을 요구했다.
세례받은 여러분들, 여러분들은 세례를 받을 때 이런 과정들을 겪으셨는가? 내가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로 받아들여졌음에 감격했던 적이 있는가? 또한 여러분이 세례를 받음으로 수천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앞서갔던 주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내가 한 몸을 이루고 한 형제를 이루었다는 사실에 감격했던 적이 있는가? 이제 내가 교회의 지체가 되고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이전의 죄악들과 단절되고, 세상으로부터 밀려오는 온갖 불이익이나 어려움까지도 감수하겠다고 결단한 적이 있는가?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세례”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또한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나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표현들이 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혹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 이런 표현들이 등장하는데, 성부나 성자나 성령의 한 윗격만 언급되었다 할지라도 다른 두 위격들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중요한 원리이다. 세례는 삼위하나님의 이름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례의 수단은 무엇인가? 여러분들 교재 2번 보시면, “물" 이라는 수단을 활용하신다 했다. 일반적으로 물이라는 것은 정화의 의미를 가진다. 깨끗하게 씨는 것이다. 따라서 세례를 물이라는 수단을 통해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씻음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면 구약에는 물 세례가 아니었다. 구약 시대에는 이방인들이 개종할 때 세례를 주긴 했지만, 주로 유대인들에게는 물세례가 아닌 피뿌림이 있었다. 피를 뿌리는 것. 한번 상상해보라. 여러분에게 제사장이 피를 가득 담은 그릇을 가져와서 잎사귀들을 적셔 여러분들에게 그 피를 뿌린다 생각해보라. 제사장이 여러분 주변을 돌면서 계속해서 피를 뿌린다. 온 몸이 피로 적셔진다. 얼마나 잔혹하고 공포스러운가? 여러분,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로 우리 죄를 씻어주셨다고 할 때,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콸콸 쏟으시는 그 피를 그릇에 담아 여러분 머리 위에 붓는다 생각해보라. 이것이 얼마나 끔찍한가? 그런데 이것이 가리키는 의미는 아주 분명하고 명료하다. 이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성경을 찾아보자.
레위기 17:11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사람의 생명이 피에 있다고 하셨다. 따라서 이 피를 흘림은 생명을 잃는 것, 죽음을 상징한다. 로마서 6:23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의 삯, 곧 죄의 댓가는 사망이라고 말씀한다. 죄인들의 죄값을 지불하려면 죽음 밖에 없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9:22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피흘림이 없은즉, 죽음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택하신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친히 담당하신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님의 대속적 죽음을 신약의 교회와 연결시키는 구절이 있는데, 히브리서 10:22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라고 했다. 주님의 피뿌림을 마음에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우리의 몸에도 물로 씻음을 통해, 즉 세례를 통하여 더러운 죄악을 씻어내고, 우릴 정결하게 하고 깨끗한 사람이 되게 하는 의미로 물세례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세례는 단지 이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재 3번을 보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되는 것” 이라고 설명한다. 여러분, 혹시 초등학교때 접붙임 실습으로 해본 분 계신가? 얼마나 신기하던지. 마른 막대기 같은 것을 가지에 갖다붙였는데 나중에 이것이 이어져서 뿌리로부터 영양분을 공급 받고, 잎이 나고 열매가 달리더라는 것이다. 애초 잘렸던 막대기는 뿌리에서 끊어졌기에 사실 죽은 것이다. 생명이 없다. 그런데 이 죽은 것 같은 막대기에 생명이 연결되고,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자라간다. 마찬가지로 세례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아서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리스도의 피와 그리스도의 숨결과 그리스도의 능력을 공급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접붙임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세례를 설명하기에 좋은 상징이다.
그래서 택한 백성들은 이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되는데 세례 의식은 바로 이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는 끊임없이 그리스도께로부터 생명력을 공급받는다. 말하자면 내가 이제는 살아서 살았다 이게 아니고, 그리스도께로부터 지속적으로 힘을 받아야만 사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내가 죽은 자이기에 늘 그리스도에게 의존해야 된다는 것이다. 내 영이 살기 위해서는,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하고, 그리스도로부터 양분을 공급받아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놓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풍성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4번을 보면, 세례를 통해 “은혜 언약의 유익을 취한다” 했다. A를 보시면,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을 통한 구속의 획득”이라 했다. 은혜 언약의 유익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 죄의 값을 주님이 다 지불하셔서 우리 구원의 기초를 놓으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B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이 그리스도가 획득하신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 하신다는 것이다. 즉 성령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우리를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양자됨을 선언하시며, 성화의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하시며, 양심의 화평이나 성령 안에서의 기쁨이나 은혜의 증가나 견인 등 이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것들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C를 보면, 이러한 유익들은 세례를 받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증인인 성도들 또한 세례를 통해 주어진 은혜언약의 유익들을 묵상하며 함께 은혜를 받는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세례는 절대 비밀스럽게 집례자와 세례받는자 단 둘이서 진행되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 함께 증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례식이 거행된다. 따라서 삼위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세례식을 통해서 단지 세례를 받는 사람만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모든 성도들이 “그렇구나! 나도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을 완성하셨고 보장해주시는 구나!” 하며 은혜를 함께 받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의 세례식이 거행될 때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인가? 아니면 그들만의 세례식이겠거니 하며 불참하는 것이 맞는가? 참여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이다.
교재 5번을 보라. 세례는 일종의 서약이다. “내가 주님께 속했다" 라는 서약.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94문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가 주님께 속한다는 서약을 상징하고 인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는 삼위하나님과 내 세례를 지켜보는 수많은 증인들에게 하는 다짐과 약속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세례를 받는 사람은 신앙을 고백한다. 서약을 하는 것이다.
여러분, 여기에 결혼하신 분 계신가? 한번 다녀오신 분? 물론 아직 여러분들 나이가 어려서 결혼식에 많이 참여 안해보셨겠지만, 하나님 앞에 예식으로 드리는 결혼에는 결혼하는 두 당사자의 서약식이 있다. 이는 혼인예식으로 드리는 두 당사자가 하나님 앞에서와 수많은 증인들 앞에서 “앞으로 우리는 이러이러하게 살겠습니다!” 하며 서약을 하는 것이다. 세례도 마찬가지이다. 세례를 받는 자는 서약을 한다. 내가 앞으로는 주님께 속한 자답게 살겠다 하는 다짐과 서약을 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4:22–24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세례의 서약이 가진 의미가 이렇다. 나는 이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답게 살겠다는 선언이다. 그렇기에 교회에 등록카드만 작성했다고 해서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세례를 통해 바른 믿음을 고백하며, 다짐과 서약이 있을 때 참된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례받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와 증인들 앞에서 어떤 서약을 하는가? 서약을 통해 증인들은 무엇을 확인하는가? 이 사람이 앞으로 예수 잘 믿겠다고 서약하는 것이지 않나? 그러면 그 사람의 믿음을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서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여러분, 우리가 진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어떤 누군가가 세례를 받겠다고 할 때, 그 사람의 믿음을 잘 살펴서 세례를 베푸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교회의 책임이다. 그러나 일개 사람이 그 사람의 믿음의 진실성을 어떻게 완벽하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서 xx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의 믿음이 여전히 연약하여 쉽게 넘어진다. 그러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정죄한다. “너 믿음이 없어서 그런거야! 너는 아직 멀었어! 너는 아직 세례 받음 안돼!”이렇게 판단하기 쉽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로 위험한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위험한 일들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자행하더라는 것이다. 또한 이런 경우도 있겠다. “xx야. 교회 등록한지 1년도 넘었는데 이제는 세례 받을 때 안됐냐? 이번에 신청해!” 이런 것들도 문제이다.
따라서 교회는 세례받는 사람의 믿음을 매우 엄격하게 검증해야 한다. 나랑 친하니까 혹은 내 가족이니까 마구잡이로 베풀 수 없다. 교회 등록한 지 제법 되었으니 의례식으로 그냥 주어서도 안된다.
어쨌든, 세례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서약"이다. 이 사람이 진정성을 가지고 이 서약을 고백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믿는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의미에서 보통 세례식이 있기 직전에 문답식을 한다. 세례를 집례하는 목사가 먼저 묻고 세례받는 사람이 “네" 라고 대답을 한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요즘 결혼식에도 보통 주례자가 “검은 무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서로를 사랑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으면 신랑신부가 “네" 라고 말한다. 이게 옛날 방식이다. 그런데 이것보다는 되도록이면 본인들이 본인들의 표현대로 자신들의 사랑에 대한 서약을 증인들 앞에 선포하는 것이 더 의미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1-4번까지 한번 바꿔봤다.
원래대로라면 1번을 에로 들어서 “당신은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과 그 진노를 면치 못할 줄을 알고 그의 크신 자비하심으로 구원받는 것 외에 소망이 없는 줄을 믿으십니까?” 라고 물으면 “네" 라고 대답하는 것이 끝이었다. 그니까 “네" 라고만 잘 대답하면 끝이다. 하지만 이것을 바꿔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자기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조금 더 의미가 있지 않겠나 싶어서 다른 교회에서 이렇게 바꿔 세례문답을 하는 것을 인용해 보았다.
1-4번까지 함께 읽어보자. “첫째,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과 그 진노를 면치 못할 줄을 알고 그의 크신 자비하심으로 구원받는 것 외에 소망이 없는 줄을 믿기로 서약합니다. 둘째, 나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죄인의 구주가 되신 줄 믿으며 복음에 말한 바와 같이 구원하실 이는 오직 예수 뿐인 것을 믿고 그만 의지하기로 서약합니다. 셋째, 나는 성령의 은혜만 의지하여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가 되고 모든 죄악을 버리고 그의 가르침과 본을 따라 살기로 서약합니다. 넷째, 나는 교회의 관할과 치리에 복종하고 교회의 덕과 화평을 이루는 일에 힘쓰며 교인된 의무와 권리를 바르게 행사하기로 서약합니다.” (넷째, 관활이 아니라 관할) 이 서약들이 세례의 의미를 아주 잘 설명해 준다. 이 모든 것들을 자신의 고백으로 이 고백을 서약하게 되면 우리는 그 서약에 근거해서 그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고 그가 예수 믿는 자의 무리 교회에 연합된 것을 가입한 것을 축하하고 환영하며 또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교재 6번을 보라. 세례는 상징하고 인치는 것이다. 인침이라는 것은 “도장 인” 짜를 사용하는데, 쉽게 말해서 낙인을 찍는 것이다. 이제 이 사람이 주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도장 짝는 것. 또한 “물”에 담긴 상징을 이해하지 못하면 물로 씻는 예식으로서의 세례는 효력 없는 의식과 율법 행위에 불과하게 되고 미신적 신앙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세례 자체가 상징이다. 상징이 보여주고 있는 실체를 우리가 놓치면, 본래의 의미를 모르면 이것은 미신이 돼버리는 것이다. 중세시대의 세례가 미신적이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의미를 가르쳐주질 않으니.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모르니.
적용이다. 오늘날 세례가 가볍게 여겨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깟 세례 안받으면 뭐 어때? 예배만 잘 드리면 되었지… 라고 여기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 속에서 교회는 세례자의 신앙고백, 그 진정성을 확인하고자 애써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지나치게 몸집이 비대해진다면 그 진정성을 확인하는 것도 어렵고, 제대로 된 교육조차 어려워진다. 따라서 우리는 바른 교회건설이 무엇인지를 늘 고심해야 한다.
두 번째로 세례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자신이 삼위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받았다는 사실을 매일의 삶속에서, 특별히 사탄의 영적 공격을 받을 때 되새기라는 것이다. 종교개혁을 진행하면서 마르틴 루터가 너무나 많은 영적 공격을 받고, 또한 그를 두렵게 할만한 일들, 이를테면 살해협박과 테러와 같은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다. 하루는 루터가 발트부르크성인가 하는 곳에서 말씀을 묵상하던 중이었나, 눈 앞에 마귀가 아른아른 거리니까 잉크병을 집어던졌다 한다. 그 잉크자국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하는데.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은 사탄이 이처럼 훼방을 놓을 때 옆에있는 물건을 집어던지라는게 아니라. 루터가 이처럼 사탄의 훼방과 공격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나 예수께 속한 사람이다! 이것은 결코 변개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 날 건들지 마라!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 우리의 주관적 믿음은 약해질 때도 있고 탄탄할 때도 있다. 늘 왔다 갔다 한다. 그러나 내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 내가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라는 사실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살아가시면서 세례를 받으신 분들은 내가 세례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때에만 공개적으로 고백할 것이 아니라 내 삶의 모든 자리에서 내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것, 세례받은 사람이라는 것,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살아가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세 번째로 세례의 유익을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 세례를 받긴 했으나 이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 채로 받았다. 그러나 이제 교육을 통해 알았다.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으며,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혀졌다. 이러한 사실이 엡2 장과 롬6 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러니까 복음의 은혜, 내가 세례를 받음으로 로마서 6장에서 이를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라고 표현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합하여졌다,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다, 어떻게? 그리의 죽으심 안에 내가 죽었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 안에 내가 살았고, 그리스도의 승천하심과 그리스도의 하늘보좌 우편에 앉으심 가운데 나도 앉혀졌고, 따라서 내가 그리스도와 동일한 운명이 되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세례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고난의 자리에서 또는 우리 인생에서 참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에도,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장하신 유익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단지 세례를 받은 것은 과거 언젠가 세례를 받은 사실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세례를 받음으로써 내게 변개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는 여전히 세례를 받은 나에게도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놓치지 말라.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아직 세례를 받지 않으신 분들이 있다면, 이번 기회를 통하여 세례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발견하길 바란다. 행2 장을 보면, 베드로의 복음 설교를 들은 청중들이 “이제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묻자, 베드로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받을 것을 권하였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세례를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세례를 받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귀한 것이며, 또한 세례의 서약 이 네가지대로, 내 믿음이 참으로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내가 이 믿음 가운데 나아가길 원하며 주님께서 나를 잡아주시기를 바라는, 그 태도 그 자세가 중요하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례를 명하셨다. 따라서 세례를 받되, 바른 세례가 무엇인지, 내가 어떻게 이를 순종해야 하는지, 세례의 의미가 무엇이며, 세례를 통해 내가 어떤 유익을 누리는지, 어떤 각오와 결단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고 받는 것이 중요하겠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세례라는 수단을 통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정결하게 됨을 의식으로 보여주시고, 또한 그 의식 속에 나타난 의미를 통하여 저희의 평생의 은혜를 받게 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다 세례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청년부가 되게 하시고,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양문교회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구원받는 역사가 많이 일어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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