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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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2017년에 ‘재심.’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영화 주인공은 15살 때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뒤집어 씁니다. 형사들의 고문에 못 이겨서 거짓 자백을 하고 10년이라는 시간동안 감옥생활을 합니다.
청소년 시절에 감옥에 들어가 청년이 되어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나왔는데도 그 주인공의 인생은 감옥과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감옥에 사는 것 같았습니다. 살인자 누명을 쓰고 평범하게 살아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어느 한 변호사를 만납니다. 그 변호사는 주인공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사법부에 재심을 신청합니다.
이미 세상에 대해 깊은 상처를 받은 주인공은 재심이 통과도 안될 것이고, 설령 재심에 들어간다 해도 자신의 무죄를 밝혀낼 수 없을 것이라고, 변호사에게 울분을 토합니다.
계속 숨고, 도망치려고만 합니다.
그런데 변호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 주인공의 무죄를 밝혀내고, 주인공에게 자유를 선물해 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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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재심은 죄가 없는 사람에게만 효과가 있는 겁니다.
만약 억만가지 죄가 있는 사람을 위해 재심을 신청하면 시작도 못 할 것이고, 무죄 판결은 더더욱 받을 수 없습니다. 받아서도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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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죄인을 위해 재심청구를 하시고 죄인에게 무죄 판결을 선포해 준 변호사가 한 분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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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감옥에 갇힌 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갇혀 있었던 감옥을, ‘죄의 속박.’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우리는 죄의 속박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름도 없이 죄수번호로 불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가 갇힌 감옥에 찾아오셔서 죄수번호가 아닌 우리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재심이 열리는 재판장으로 데리고 가 주십니다.
재판장에 들어가니 재판장석에 하나님이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우리에 대한 변호를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변호를 들어보니 너무 기가 막히고 터무니 없는 이야기인 겁니다.
억만가지 죄를 지은 우리더러 이제 죄가 없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이,,, 하나님이 그 변호를 받아들이시고 재판봉을 땅! 땅! 땅! 내리치시는 겁니다.
우리의 변호인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 손목의 포승줄을 풀어주시고, 우리 발목의 차꼬를 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손목과 발목에 그것들을 메고 감옥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다 짊어지신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는 모든 죄를 다 사함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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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죄의 속박'이라는 감옥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사람은 인생의 고난을 만날 때마다 그 고난의 순간들을 감옥으로 여깁니다.
조금만 인생이 답답하고 힘들면 자기 스스로 포승줄을 차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아무도 등 떠민적이 없는데 스스로를 감옥에 가둡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속박에 갇히시고!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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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게 되면, 어떤 고난이 찾아와도,,, 감옥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기도와 찬송으로 그 고난들을 이겨냅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과 실라가 그러했습니다.
본론
본론
우리 함께 오늘 본문 2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25절입니다. 시작.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바울과 실라가 지금 큰숲홀과 같은 예배 공간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고 찬송했다고 합니다.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면 어떤 소리가 나올까요?
완전 탈진한 상태로 흐느끼며,,, 찬송했을까요?
25절의 후반절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25절 후반절에 ‘죄수들이 듣더라.’라고 나오죠? 여기서 ‘듣더라’ 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읽으면 ‘에파크로아오마이.’ 라는 말입니다. 전체 성경을 통틀어서 이 본문에 딱 한 번 나오는 단어인데요?
이 단어는 일상 대화를 할 때 듣는 정도가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경청한다는 뜻입니다.
그 감옥에 있는 죄수들이 바울과 실라의 기도 소리, 찬송 소리를 온 마음 다해 경청했습니다.
그럼 바울과 실라의 찬송이 어땠겠습니까? 믿음과 용기로 가득찬 힘 있는 소리였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바울과 실라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지만, 그 곳을 감옥으로 여기지 않았던 겁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감옥이란 예수님을 모르고 지냈던,,, “과거”였습니다. 죄의 속박에 묶여 있었던 그 시절이,,, “감옥”이었습니다.
지금 갇혀 있는 감옥은 그들에게 감옥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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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와 찬송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우리 2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26절입니다. 시작.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하나님은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감옥문이 열리고 메인 것이 다 풀어졌습니다.
여러분들도 이처럼 어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심으로,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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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자고 있던 간수는 깨어나서 감옥문이 다 열린 것을 보고 자살 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그런 간수를 말립니다.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우리가 다 여기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여기 있다는 건, 바울과 실라뿐만 아니라 다른 죄수들도 도망가지 않고 다 그 자리에 남아있다는 뜻이겠죠?
바울과 실라는 그렇다고 쳐도, 다른 죄수들은 왜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25절에서 이미 그들은 바울과 실라의 찬송 소리를 들으며 하나님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감옥문이 열리고 발의 차꼬가 풀린 것을 보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인 줄 알고 완전히 압도된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가 고난을 만나도, 그 고난을 감옥으로 여기지 않으면 기도가 터져나옵니다.
고난을 만나도, 하나님이 놀랍게 역사하실 것을 믿으면 찬송이 터져나옵니다.
그리고 그 기도와 찬송은 성도의 말과 행동이 됩니다. 그 언행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분명히 선한 영향력으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교구와 셀에 그런 수많은 간증들이 나오는 겁니다.
나는 고난 중에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 복음의 영향력을,, 전한 귀한 간증들 말입니다.
(충분히 텀을 주고…)
결론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간수는 감옥 밖에서 죄수들을 지키고 있었지만, 사실 간수의 인생이 감옥에 갇힌,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죄의 속박이라는 감옥에서 완전히 구원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은혜가 그의 집에도 임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전히 여러분의 삶 가운데 고난이 많이 남아있습니까? 오늘은 또 어떤 고난이 내 숨을 조여올까 두려우십니까?
죄의 속박에서 우릴 구원하신 예수님께, 모든 염려를 맡겨드리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고난은 더 이상 감옥이 될 수 없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고난은 전망대입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바라보는 전망대 말입니다.
오늘 하루, 그리고 일평생토록 여기 계신 모든 성도님들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아름답게 펼쳐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