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초월하는 것입니다.

수요예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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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 6:33(신약 9쪽)
Matthew 6:33 NKRV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서로를 축복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당신 때문에 참 행복합니다.’
# 축복후
감사합니다.
우리 성도분들은 어떠셨는지 모르겠는데요. 지난달 마지막 주 수요예배에 제가 설교하고 나서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우리 성도분들께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려고 마트에서 가서 장을 보러 가요. 입맛을 돋을 여러 신선한 재료를 사고요. 이왕 사는 김에 유기농으로 좀 더 몸에 좋은 재료를 사서 왔어요. 그리고 요리하는데요. 저의 칼질이 엉성해서 재료가 삐뚤빼뚤 해지고요. 조리실력이 부족해서 설익기도 하고 태우기도 하고 그래요. 그래서 그 신선하고 좋은 재료가 제 손을 거치면서 망가지는 거예요.
지난주 수요예배 설교가 저에게 그런 느낌을 줬어요. 뭔가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는데요. 생각만큼 잘 준비되지 않고 생각보다 제 실력이 부족함을 느꼈어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죄송한 마음이 많이 들었는데요. 어쩌면 어떤 분은 이 수요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일을 마치자마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 자리에 나올 수 있는데요. 그러한 분에게 힘을 주고 위로가 되며 신앙생활에 새로운 결단을 이룰 좋은 말씀을 전하지 못한 것 같아 못내 아쉬움이 컸어요.
그러면서 또 제 머리에 떠오르는 성경 구절이 있었는데요. 신약성경 사도행전 26장 24절에 나오는 거예요.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제가 어떤 것에 마음이 쏠리면 온통 거기에 신경을 쓰게 되는데요. 지난달에 마음을 두고 있었던 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주제였어요. 책도 보고 강의도 듣고 하면서 사실 저는 이 주제를 공부하면서 말 그대로 너무 행복했는데요. 너무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접한 까닭인지 막상 설교로서 녹여내는 것은 참 부족했던 것 같아요. 참 좋은 주제였는데 그것을 잘 살려내지 못한 것 아쉽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주 설교를 준비하면서요. 부담도 됐고요. 또 어떻게 좋은 말씀을 잘 전달할까를 고민했어요. 이번에는 책 얘기는 하지 말고 제가 생각하고 묵상한 내용을 잘 풀어보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저는 근래에 신앙 또는 신앙생활에 관해 고민하고 생각했는데요. 일전에 제가 맡은 새벽기도회 시간에 이에 관해 이런저런 고민과 생각을 짧게 나눴어요. 그것에 관해 오늘은 좀 더 길게 얘기를 나누려고 해요. 이번에는 사실상 참고한 책이 없어서요. 다소 깊이 있는 얘기는 하지 못할 것 같지만요. 조금 더 제 안에서 소화되고 나름 숙성된 얘기를 하게 될 것 같아서요. 어쩌면 더 편안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 1. 신앙생활은 이기적인 선택입니다. >
한번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조금은 거친 질문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여쭤볼게요. ‘여러분은 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까? 혹은 나는 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까?’ 제가 이러한 생각을 놓고 깊이 고민해 봤어요. 처음엔 간단한 걸 괜히 깊이 고민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뭔가요? 간단히 생각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또 우리의 주인으로 구원자로 믿는 것 아니겠어요. 결국 예수를 주로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의 주된 내용이지요.
그런데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에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거나 할 필요가 없는가 하고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일종에 사업상의 거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건 왠지 거룩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치 서로 어떤 물건을 사고파는 식의 세속적인 거래와 같다고 생각되니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결국 구원받기 위한 수단으로 또는 일종의 거래에 따른 것으로 보일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신앙생활이 이 세상에서 물건 사고파는 것과 과연 무엇이 얼마만큼 다른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순수하게 하나님에 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혹시 우리의 죽음 이후에 영원한 생명을 또는 천국을 향한 일종의 보험은 아닌가 하고요. 우리 성도분들은 어떠신가요? 오늘 내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그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진정으로 주님에 관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나요? 아니면 미래에 관한 혹은 죽음 이후에 관한 불안으로 일종의 미래를 위한 보험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인가요?
사실 저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제 신앙을 또는 제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됐어요.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또 이렇게 목사가 되어서 교회에서 일하는 것이 어떤 이유 때문인지를 말이지요. 솔직하게 저도 마냥 예수님을 사랑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하겠더라고요. 그러면서 깨닫기를 결국 나도 어떤 원함과 바람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보다 더 좋고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이고요. 신앙생활을 통해 그것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저의 아니 우리의 신앙생활은 사실은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내가 그것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통해 어떤 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선택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이기심을 꼭 나쁘다고만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기심이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마냥 덮어 놓고 나쁘다고 말할 종류의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사실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일단 생존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먹는 것 아니겠어요. 이 먹는다는 행위는 우리가 이기적인 존재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지요.
먹기 위해서는 식물이든 동물이든 희생이 되어야 하잖아요. 우리가 마트에서 가공된 식재료를 사고 또는 음식점에서 조리된 음식을 먹어서 잊고 있지만요. 그 안에 들어 있는 식물과 동물은 본래 살아 있던 생물이었지요. 그것이 우리의 필요에 따라 우리의 생존을 위해 죽임당하고 우리에게 먹히는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 우리의 먹는 행위는 다른 생명체를 해하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있는 한 또는 살기 위해서 이 행위를 멈출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이 거북스러워서 먹는 행위를 멈추면 우리는 죽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이기적입니다.
그러니 이기심을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본래 그런 존재이고 그렇게 살도록 일종의 프로그램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기심 자체는 문제 삼을 수 없다고 봅니다. 이게 말장난 같지만 정말 문제는 이기심이 아니라 이기주의에 있습니다. 나밖에 모르고 나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우리가 이기적인 존재라고 해서 무조건 나만을 생각하며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로 나를 위해서 남을 돕기도 하고 그 과정을 통해 더 잘살게 되기도 합니다. 이른바 공생이라는 관계를 생각해 보면 더욱더 잘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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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의 여러 생물 중에서 여러 공생 관계가 있지만 하나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예전에 인기를 끌었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 중에 제목이 ‘니모를 찾아서’라는 영화가 있었는데요. 영화 속의 니모는 주황색과 흰색의 화려한 줄무니를 가진 물고기인데요. 본래는 흰동가리라고 불리는 물고기입니다. 이 흰동가리와 말미잘은 공생관계를 가진 생물인데요. 말미잘은 촉수에 독이 있어서 가까이 오는 물고기들을 촉수의 독으로 공격해서 물고기를 잡아먹습니다. 그런데 말미잘은 물고기처럼 움직이질 못하니까요. 물고기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는데요. 물기기도 말미잘이 독을 가지고 있어 위험한 것을 알아 쉽게 접근하지 않죠.
그런데 흰동가리가 말미잘 속에 살아가면서 주변에 물고기들을 말미잘로 유인하고 자신은 큰 물고기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아요. 또 말미잘 몸에 떨어진 물고기 일부분을 먹이로 먹으면서 흰동가리와 말미잘이 서로가 공생 관계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한편 말미잘은 꽤 무서운 독을 가지고 있으니 사실 마음만 먹으면 흰동가리와 같은 작은 물고기는 바로 사냥할 수 있죠. 그러나 함께 살기 위해 절대로 흰동가리를 죽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서로 각자에게 이익이 됨을 통해 이기적인 생물은 이타적인 관계를 맺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타심도 결국은 이기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쉽게 말해 자신에게 유리하고 좋으니 이타심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신앙생활이 이기적이라고 했을 때요. 이런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머리로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보다 본능적이고 아주 자연스럽게 신앙생활을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이기적인 선택이라고 했을 때, 이기적이 존재인 모든 살아 있는 것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앙생활은 내가 만든 신을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기에 우리가 원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해주셔야만 가능한 것이죠. 그래서 성경에서 믿음을 ‘선물’이라고 표현합니다. 같이 화면을 보고 읽어봅시다.
에베소서 2:8 / 새번역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믿음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선물을 받는 것은 나 자신 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지 않고 나의 선택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요.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지지만 결국 우리가 좋아서 또는 우리가 원해서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신앙생활을 우리가 좋아하고 원하게 되는 것일까요?
< 2. 신앙은 초월하는 것입니다. >
잘 알고 계시지만, 요즘에 교회는 각 공동체 단위로 심방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만 해도 월요일을 제외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어떤 날은 두 공동체를 오전 오후로 나눠서 심방 했습니다. 저는 이제 이러한 심방을 경험하는 것이 이번이 세 번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심방 자체가 낯설거나 막 새롭거나 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요사이 느끼는 감정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좋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방으로 공동체 식구들이 모입니다. 공동체의 상황과 각 개인의 상황이 나이와 지역과 삶의 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교제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사실 본래부터 다른 사람을 돌보거나 다른 사람에 관심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최소 1년에 1번 이상은 작은 모임으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고 또 매 주일 예배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릅니다. 적어도 그렇게 얼굴을 마주할 때는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서로를 돌아볼 수 있으니까요.
만약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모임을 이루고 여러 사람을 만나는 일이 쉽거나 편하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오랫동안 살아온 삶의 터전이니 주변 이웃들도 있고 친구들도 있고 서로서로 친근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또 분명히 있을 줄 압니다. 그런데 딱 거기에만 머물 수 있을 겁니다. 활동반경에 있는 사람과 주로 만나고 주로 얘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과 갈등이라도 생기면 우리의 삶은 더욱더 외롭고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으로 서로 잘은 몰라도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요. 또 미약하나마 오늘 설교의 시작에 인사했듯이 서로의 안부를 묻곤 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런 생각을 하며 문득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이 참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다시 한번 화면을 보고 신약성경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신약 9쪽)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에게 익숙한 성경 구절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기도에 관해 가르치셨습니다. 앞선 이야기를 놓고 그 교훈을 말해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먹고사는 문제만 기도하는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마땅히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실 것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는 기도의 교훈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살아야 함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이로부터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결코, 나만 잘먹고 잘사는 것에만 힘쓰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일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저는 그것을 오늘 설교의 제목을 통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신앙은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눈앞에 처한 현실의 상황에만 마음을 두지 말라는 것이고요. 우리의 이기적인 본성을 넘어서 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약성경 마태복음 5장과 7장에서 우리에게 엄청나게 난감한 말씀을 많이 쏟아내십니다. 화면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를 도울 때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생색내지 말고 하라고 말씀하시고,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내밀라고 하시고 더 나아가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체 이것이 보통의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조차 있는 것인지를 의문스럽게 합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분명 우리가 그것을 해낼 수 있음을 전제하고 말씀하시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당장 우리의 생각에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당황스럽다 못해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은 모두를 향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우리 곧 신앙인을 향한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니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러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과연 누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하고 누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을 하겠습니까. 본래부터 이기적인 우리로서는 도무지 그 일을 흔쾌히 해낼 수 없는 법이지요.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보통의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아주 특별한 사람임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초월하는 것입니다.
화면을 보시겠습니다. 마지막 그림을 띄워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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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기독교 역사에서 이른바 성인으로 일컬어지는 성 프란체스코입니다. 그가 설교를 할 때면, 새와 동물들이 찾아와서 그의 설교를 들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요. 이 그림은 아마도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는 13세기 이탈리아에서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창설한 인물입니다. 그는 본래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우리로 치면 재벌 2세쯤 되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공부에는 뜻이 없어 당시 십자군 전쟁의 영향으로 십자군 기사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꿈에 그리던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게 되었으나 그 원정을 향하던 중에 이러한 주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거기에서 네가 할 일을 가르쳐주겠다.’
그리하여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주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입고 있던 옷가지도 모두 나눠주었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집안의 가산을 허비하는 아들 프란체스코를 법원과 교회에 고소하기에 이릅니다. 그러자 프란체스코는 자신이 입고 있던 모든 옷을 벗어 아버지에게 건네며 ‘이제부터는 하늘에 계신 유일한 아버지 한 분만을 섬길 것’이라며 가족들과 결별합니다.
그렇게 프란체스코는 맨발에 누더기를 걸치며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 병자와 빈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그는 그와 뜻을 같이하는 형제들과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만들어 평생을 탁발로 가난하게 살아가면서요.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고 가장 낮은 자들을 위로하며 주님의 평화를 설파하며 그 생을 마칩니다.
그것이 별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가 만약 포목상의 아들로 그 지위를 유지하고 살았다면, 그는 더 오래 안락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 안에서 그것을 넘어서 세상을 초월한 삶을 살아갑니다. 더 이상 물질이 주는 안정이나 그것의 만족하며 살아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 너머의 삶을 살았고 우리에게 그러한 삶이 가능하다는 비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신앙은 우리의 한계를 넘어 우리를 초월하게 만듭니다.
< 3.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
저는 신앙의 이러한 면모들로 인해 신앙생활이 참으로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실수합니다.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이에서 벗어난 이들에게 험한 말을 쏟아놓곤 합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된다, 그건 신앙생활이 아니다’라고 쉽게 정죄하고 판단해 버립니다. 저는 그것이 상대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말했지만요. 실상 돌아보면 나의 한풀이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리고 뒤늦게 그것이 얼마나 폭력적인 말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믿음이 없는 말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은 결국은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삶을 구원하시고 그분이 우리를 초월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을 믿으며 말입니다. 그러려면 내가 스스로의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고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기대함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당장에는 눈에 보이는 현실이 답답한 순간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은 한 분들의 삶이 왜 저럴까 하는 아쉬움과 서글픔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변화를 이룩하신다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내가 그것을 잔소리하고 참견하기 시작할 때, 나는 어쩌면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리에 놓게 됩니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평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때가 반드시 도래할 것을 기대하며 끝까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신약성경 마가복음 4장 30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 나라가 겨자씨에 비유되어 나타납니다. 그것은 매우 작은 것이지만 땅에 심겨저 자라면 공중의 새들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나무가 됩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것에 불과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크고 왕성하게 자라나게 될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이 신앙이 보여주는 우리의 비전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내 성에 차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 친구 이웃이 바로 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를 이룩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내가 변화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를 대하게 될 때 이미 변화는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뀐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바뀌면 그에 따라 세상도 달리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함에 있어서 우리 태도와 자세는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황무지와 같은 저들의 마음이 반드시 변화할 것을 믿고 기대함으로 기다리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만족스러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요? 어쩌면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나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성에 차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매우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내치거나 야단치 않으시고 끝까지 인내하시며 기다려주십니다. 우리의 변화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 함에 있어서 절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킬 것이고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존재로 세상을 초월한 존재로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이고 나의 주변 사람입니다. 바라건데 오늘 우리가 그 믿음 안에서 이 신앙을 잘 지켜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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