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눈으로 바라봅시다.
Notes
Transcript
성경본문: 창세기 1:1(구약 1쪽)
설교제목: 믿음의 눈으로 바라봅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서로를 축복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당신 때문에 참 행복합니다.’
# 축복후
오늘은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언뜻 믿음은 종교적인 이야기 같아 보이지만요. 사실 믿음은 우리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 관계된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생활하는 모든 것은 사실 믿음에 따른 일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성도 분들은 지금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마음속으로 이 의자가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만약 그런 생각을 했다면 이 의자에 쉽게 앉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은 이 의자가 우리의 몸을 충분히 지탱해 줄 수 있다고 믿고 그 믿음 아래서 의자에 자신의 몸을 내맡기고 있을 것입니다.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해 볼까요. 오늘 집에서 교회로 오는 길은 어땠습니까? 길이 무너진다던지 강도를 만난다던지 하는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혹시 그럴 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은 그런 일은 없을 것을 믿고 이 자리에 나오셨을 겁니다.
이렇게 오늘 우리가 교회에 모여서 예배하기 위해 집을 나서고 또 이 공간에 편히 있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믿음에 따른 일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는 교회에 와서 의자가 튼튼한지 정밀검사 하지 않았고 집을 나서면서 도로 상태를 확인하거나 주변에 수상한 인물이 있는지를 면밀하게 관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염려와 근심하지 않고 이 자리에 편히 나와 있을 수 있는 것은요. 전적으로 믿음에 따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만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럴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없이는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믿음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면 어떤 일을 경험하게 될까요? 우리는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 내게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고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에 관해 신경쇠약이 걸릴 정도로 의심하며 살아야 할 테니 말입니다. 가령, 오늘 우리가 이곳에 올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리셨습니까? 거리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지만, 대부분은 하루가 꼬박 걸리진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주변의 모든 상황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내가 확인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돌 다리리도 두들겨’보는 심정으로 이곳에 왔다면 하루로도 충분히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 없이 살아간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며,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은 믿음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은 결코 종교적인 영역에만 속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에 따른 믿음은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믿음과는 차이를 보입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믿음은 현실 세계에 속하여 있다면 우리의 신앙에 따른 믿음은 현실 너머에 있습니다. 그와 같은 차이를 우리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 1. 믿음으로 보는 세계는 다릅니다. >
창세기 1:1(구약 1쪽)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1-1. 현실 너머를 봅니다. >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여서 아마 대부분은 암송하고 있는 말씀일 줄 압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친숙한 것 이상으로 신비롭고 깊이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아주 놀라운 믿음의 이야기를 증언합니다. 우선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이 구절에 나타난 단어입니다. ‘태초, 하나님, 천지, 창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단어 중 어느 하나도 우리는 사실 제대로 아는 것이 없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인류는 태초라는 시간의 시작을 알아냈습니까?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천지로 대변되는 세상 만물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보았습니까? 이처럼 ‘태초, 하나님, 천지, 창조’ 어느 것 하나도 우리가 속 시원히 밝혀낸 것이 없습니다. 아마 앞으로 그것은 미지와 신비의 영역일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창세기 1장 1절은 그 낯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1장 1절은 현실 너머의 세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에 따른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신앙에 따른 믿음은 현실 세계를 넘어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막연한 상상의 영역은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을 때, 그것은 적어도 내겐 믿을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다시 우리가 앉은 자리를 봅시다. 이것이 만약 낡아서 부서질 것 같고 나사가 풀렸거나 위태로워 보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의자가 나를 충분히 받쳐줄 것을 믿으며 이 자리에 맘 편히 앉을 수 있습니까? 물론 우리가 지금 앉은 자리를 자세히 따져 본 것은 아니지만, 아마 대부분은 우리가 이 의자에 앉을 때 대략 안전하다고 믿을만해서 이 자리에 편히 앉은 것이지요.
그러니 믿음은 무턱대고 덮어 놓고 믿으라 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그것이 내게 믿을 만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신앙의 영역이라고 해서 다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만한 분으로 여길 때 그로부터 우리의 믿음이 온전히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사도 바울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을 온전히 믿게 됩니다. 그리고 사사 기드온은 심지어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하기까지 하며 믿음에 이릅니다. 더 나아가서 성경은 믿음을 가리켜 하나님의 선물(엡 2:8)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의 기록자는 그냥 상상으로 아무런 생각 없이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닐 겁니다. 그가 이와 같은 고백을 한 것은 아마도 하나님께 선물 받은 믿음에 근거하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도무지 인간이 알 수 없는 세계에 관한 것 곧 ‘태초, 하나님, 천지 창조’를 이야기하고 그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 가운데 여전히 믿음이 약하다고 여겨지시는 분은 하나님께 믿음을 달라고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을 통해 우리는 이전과 다른 이 세상 너머의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 1-2. 소망을 봅니다. >
구약성경 창세기는 성경의 첫 번째 책이지만, 창세기가 맨 처음 기록된 책은 아닙니다. 학자들의 견해 차이가 있긴 하지만, 아주 분명한 사실은 창세기의 기록자가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 아니라 그 후대의 인물임이 분명합니다. 보통 역사의 기록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니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역사는 우리의 후 세대가 기록하고 정리할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일기를 쓸 때도 하루의 시작이 아니라 하루의 마지막에 씁니다. 일어난 일을 기록하는 것이지 미래에 있을 일을 기록하진 않으니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창세기의 이야기도 그 후 시대를 살았던 이가 기록한 것입니다.
창세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그 기록 배경은 이렇습니다. 당시는 고대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끌려가서 살던 시절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로 치면 일제강점기 정도에 해당이 될 것입니다. 당시의 창세기 기록자가 처한 시대적 상황이라는 것이 결단코 좋을 수 없습니다. 나라는 망했고 유대인들이 가장 소중히 생각하던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나라의 유력자들은 타국에 포로로 끌려와 비루한 생활을 이어갑니다. 그렇게 어둡고 암울한 시대 속에서 창세기는 소망을 보여줍니다.
창세기의 기록자는 창세기 1장 1절을 통해 당시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소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처한 폭폭한 현실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바벨론 제국의 황제는 결코 세상의 주관자가 아니고 참 신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고백을 담고 있는 것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고백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나왔고 주님 손에 붙들린 바 되었으니 우리의 운명은 바벨론 제국의 황제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창조주가 되신 하나님께 속하여 있다는 고백입니다.
저는 이것이 또한 우리의 신앙에 따른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현실의 문제만을 놓고 생각하면, 넘을 수 없는 벽이 가득합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있어서 우리는 능력이 모자라서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우리는 현실 속에서 좌절하고 낙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에 따른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소망을 품게 됩니다. 왜냐하면 현실에 속한 내게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지만 현실 너머에 살아 계신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 얘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추석 명절과 한글날이 있었습니다. 제게 이번 명절과 한글날은 개인적으로 뜻깊은 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약혼자를 추석에 가족들에게 소개했고요. 한글날에는 양가 부모님과 가족들이 상견례를 했습니다. 다행히도 모두 아름답게 잘 마쳤습니다. 아마 제가 중간중간에 틈틈이 광고했기 때문에 아시는 분은 아실 겁니다. 제가 이번에 가족들을 만나고 상견례를 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참 놀라우신 분이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저의 가족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마 저는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제가 아직 결혼한 것은 아니지만요. 현재로서는 내년 초에 결혼하게 될 것 같습니다. 사실 가족들의 생각과 제 생각이 지금의 약혼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의 나이는 올해 마흔이고 저의 경제 상황과 직업적 특수성을 고려할 때, 저는 결혼 못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보다 앞서 연애도 못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연애와 결혼이 지금 제 곁에 다가와 있다는 것이 참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 현실에 속한 제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실 너머에 계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저는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저만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창세기 기록자는 가장 어둡고 우울한 시기에 하나님을 믿음으로 소망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삶에 그와 같은 어둠이 덮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의 믿음이 그 어둠을 물리치고 우리를 오늘도 소망 가운데 인도하여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통해 우리가 소망을 꿈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 1-3. 하나님을 봅니다. >
오늘 우리는 고대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더 하나님을 믿기 좋은 환경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종교로 인정하고 그것을 국교로 받아들이기까지 고대 기독교인들은 많은 수모와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오죽하면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카타콤이라고 불리는 이른바 지하 무덤에서 모여 예배해야 했습니다. 그 속에서 이뤄진 성만찬은 흉흉한 소문이 되어서 사람의 몸과 피를 먹는 것으로 오해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고대 기독교인들에게 싸이고 싸여 큰 고초를 당했습니다.
아주 끔찍한 고대 기독교인들의 박해 이야기 중에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을 잡아다 로마 도시를 밝히는 횃불로 썼다는 것입니다. 또 당시 로마에는 콜로세움이라는 원형 경기장이 있었는데 거기에 맹수를 풀어놓고 붙잡아온 기독교인들을 잡아먹히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렇게 무섭도록 잔인한 박해 가운데서도 기독교인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더 강성해져 갔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죽음에 직면하는 과정 곧 순교의 과정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에 큰 감동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앞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통해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감화받았습니다. 결국 기독교는 어느 날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고 오늘날 세계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과연 초대 기독교인들에게 그와 같은 모습과 삶을 가능하게 했던 것일까요? 저는 그것이 믿음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단지 현실에만 눈을 두고 있었으면 죽음을 넘어서기 힘들었을 겁니다. 현실에서 보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볼 때, 죽음 너머를 또 현실 너머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 2.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을 잘 아실 겁니다. 믿음은 한편으로 큰 위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래서 믿음에는 대상이 중요합니다. 누구를 믿는가에 따라 또 그 대상이 가진 영향력에 따라서 믿음은 치명적인 위협이 되기도 합니다.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그 이유는 잘 아실 겁니다. 가장 큰 고통은 가까운 관계에서 일어나는 배신입니다. 불행하게도 모든 인간관계는 그 배신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은 인간과 달리 신실한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래서 언젠가 이러한 말을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되고 사람은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믿을 이는 하나님밖에 없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에 따른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 2-1. 하나님은 변화를 이루십니다. >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대로 계속되기를 바라시는 분이 있습니까? 다시 말해 발전이나 성숙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현재가 충분히 만족스러운 분은 그렇게 여기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현재 상태에 머물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멈춘다면 몰라도 발전이 없는 것은 사실상 낙오되고 도태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대부분은 변화를 꿈꿀 것이고 변화를 이루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러한 이유로 또 오늘 우리가 이곳에 모여서 예배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변화가 내가 바라고 기대하는 것에 부응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저는 바라는데 세상이 평화롭고 정의로웠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실상은 최근까지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혹 그렇게 거대한 변화가 아닐지라도 우리 교회 성도 분들이 우리 가족들이 또 저 스스로가 어제보다 오늘 한 뼘이라도 더 발전하고 성숙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변화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것은 변화를 꿈꾸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창세기의 기록자는 나라가 망하고 타국에 포로로 끌려와 생활하는 암울한 현실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현실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절망하거나 낙망하지 않고 오히려 바벨론 제국의 질서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참 신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의 현실이 언젠가는 새롭게 변화될 날을 꿈꾸고 그것을 이루실 분은 바로 하나님밖에 없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배신당하지 않았음을 역사 속에서 봅니다. 이스라엘은 70년의 포로생활 이후에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다만, 나의 기대와 생각보다 그것은 더딜 수 있습니다. 또 나의 방법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셔서 반드시 그분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지금의 삶이 계속되지 않고 새로운 삶이 우리에게 펼쳐질 것을 소망하게 합니다. 어쩌면 우리 중에는 차마 말할 수 없지만 현재의 삶이 너무 고통스럽고 하루라도 빨리 이 삶을 마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오늘도 주어진 삶을 오롯이 견뎌내야 합니다. 주께서 새롭게 하실 그날이 반드시 올 것을 고대하면서 말입니다.
저는 그러한 삶의 모습이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프랑스 작가 장 지오나가 1953년에 발표한 유명한 동화입니다. 우리말로 ‘나무를 심은 사람’입니다. 아마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분들은 1987년에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로 익숙하게 보셨을 겁니다.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황량한 골짜기에 양을 치는 한 사람이 그 황량한 땅에 약 50년 동안 꾸준히 나무를 심습니다. 주변에서는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일을 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황무지가 숲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렇게 변화를 고대했던 이를 통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룩하실 변화를 믿으며 우리가 살 때 우리는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를 기대함으로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한 이들에게는 현실 세계 너머의 소망을 꿈꿀 수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현실을 너머의 소망을 꿈꿀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당장에는 큰 성과를 내보이지 않을지라도 언젠가 황량한 골짜기가 나무로 뒤덮인 숲을 이루듯이 무성하게 자라고 변화될 것을 믿으십시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와 같은 변화를 이루실 것입니다.
< 2-2.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사랑 때문이라 믿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그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믿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아비가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좋은 것을 주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게 좋은 것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 안에서 우리는 오늘의 삶을 다르게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내게 없는 것에 관해 하나님께 원망하고 슬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게 그것을 허락하시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또는 그것이 내게 필요가 없어서입니다.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게 필요한 것을 반드시 주시고 내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믿음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쩌면 내게 닥친 어려움으로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원망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게 좋은 것 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킬 것을 믿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닙니까?
저는 우리가 오늘 어떤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크게 달라질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 안에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닌 것이 되고,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보다 능력 많으신 하나님께서 변화시키실 것이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게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저는 우리 성도 분들의 삶이 신앙 가운데 소망으로 가득 찼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기대하면서 끝까지 그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 귀한 성도 분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