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에 함께 구해야 할 기도
Notes
Transcript
잠언 30:7-9
저는 기도하면 구약에서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한 가지 있습니다. 성도님들도 잘 아시는 다윗왕인데요. 다윗은 참 정치도 잘하고 여러 가지로 좋은 면이 많았는데, 인생에 딱 하나 오점을 남기지 않습니까? 그냥 할 일 없이 왕궁 옥상을 어슬렁거리다가 미모의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 앞에서는 물론이고 도덕적으로도 범죄하는 일을 저지르더니 그것을 또 은폐하려고 여자의 남편이자, 자기의 충직한 신하였던 우리야를 전쟁터에 음모를 꾸며서 죽게 만드는 그런 비열한 짓을 벌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시작된 불륜의 관계에서 아들 하나가 태어나는데,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선지자 한 명이 달려와서 끔찍한 경고를 하게 되는데요. 사무엘하 12:14 혼자
14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여러분, 다윗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 나단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진짜로 낳은 아들이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합니다. 다윗의 그 심정이야 자식을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다 이해할 것입니다. 절박하게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지 않습니까? 사무엘하 12:16-17 합독
16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17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지금 이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식음을 전폐하고 자기 아이를 위해 금식하며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금식하며 기도하기를 일주일이 되었을 때 불행하게도 다윗의 기도는 응답 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일주일 만에 그 아이를 데리고 가십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는 것이 다윗의 태도입니다. 사무엘하 12:20 합독
20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그렇게 일주일 동안 금식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던 다윗인데, 그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금식 딱 끝내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목욕하고 의복 갈아입고 음식 가져오라고 해서 평소에 모습으로 돌아가는 다윗을 모습을 보십시오. 무서운 사람 아닙니까?
이게 얼마나 강한 인상을 주었는지, 그 주변의 신하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사무엘하 12:21-23
21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어떻게 이렇게 태도가 변할 수 있느냐고 질문을 하니까 다윗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22-23절]
22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23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이 놀라운 다윗의 답변 속에 저는 기도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두 가지의 태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첫 번째는 미래지향적인 태도입니다.
여러분, 다윗인들 왜 마음이 무너지지 않았겠습니까? 자신의 범죄로 아들을 죽음을 맛보았는데, 다윗인들 왜 고통이 없었겠어요? 아마도 이 죄책감으로 절망의 구렁텅이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아버지로서의 고통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몰아넣는 그런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어떻게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었을까요? 다윗의 굳은 의지 속에는 되돌이킬 수 없는 것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되돌이킬 수 없는 과거 때문에 나 자신을 망가뜨려서는 안 된다는 철저한 마음의 의지가 그를 일으켜 세우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의지가 얼마나 단호합니까?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내가 아무리 울고불고 식음을 전폐한다고 할지라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면 거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기도하는 사람은 이런 미래지향적인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이런 미래지향적인 사람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 사무엘 선지자가요. 백성들 앞에서 은퇴 설교를 하는데, 과거에 자신이 이런 일을 했고 저런 일을 했고 그렇게 연설을 끝내지 않습니다. 사무엘은 그 은퇴 설교 마무리에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이렇게 선포합니다. 사무엘상 12:23 합독
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않겠다. 내가 힘이 남아 있는 한 끝까지 기도하겠다” 사무엘의 아주 비장한 각오가 보이지 않습니까? 나이가 많지만, 그는 여전히 힘을 가지고 미래형으로 기도하기를 쉬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하는 노(老)선지자의 비장함을 보십시오. 정말 멋있는 분 아닙니까?
올해 초에 우리 성도님들이 제출해 주신 <신년 기도 제목 카드> 있잖아요? 한 원로 권사님의 기도 제목이 저를 정말 감동하게 했는데요.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기도의 불쏘시개가 되겠습니다” 이런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나오셔서 기도하시는 모습에 제가 힘이 나더라고요. 담임목사인 저는 더욱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면 안 되지요. 여러분, 교회는 이런 기도하는 어른들이 많이 계셔야 합니다.
저는 제가 원로 목사가 되어도요. 이런 모습이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교회 원로 장로님들, 권사님들이 이런 사무엘과 같은 분들이 되시기를 정말 꿈꿉니다.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않겠노라”
그래서요. 여러분, 우리가 옛 추억보다 꿈이 더 커야 합니다. 왕년에 기도 안 해본 사람 있습니까? 헌신 안 했던 분들 계십니까? 아무리 연세가 많으셔도요. 우리는 과거의 사람이 아닙니다. 꿈이 추억보다 더 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꿈이 과거에 받았던 상처와 아픔보다 커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오늘 예배하는 가운데 성령님께서 정말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주시길 원합니다. 막 깨워주셨으면 좋겠어요. 과거에 내가 이런 일들을 했다거나 아니면 뭔지는 모르지만, 내가 과거에 받은 상처 때문에 여전히 머뭇머뭇하고 계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오늘 성령님께서 그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꿈이 과거보다 크다고 말씀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말 이럴 때는 우리 성도님들이 “아멘!”으로 다 받으셔야 하는데, 우리 성도님들은 워낙 점잖은 분들이셔서 쉽지 않으신 것 같아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정말 축복하며 권면해 드리길 원합니다. 여러분들 인생에 추억보다 꿈이 더 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그 힘들고 어려운 현실 앞에서도 다윗이 시편 57편에서 노래하는 것처럼, 그의 고백을 보세요. 시편 57:7-8 합독
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다윗 주변의 환경이 다 풀리고 순탄대로여서 이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닙니다. 현실은 암담하고 막막하지만, 이런 현실 속에 내가 함몰되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적인 결단이 그를 노래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주시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기도하는 다윗의 태도를 보면 하나님 뜻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무엘하 12장을 꼼꼼히 읽어보세요. 거기에 자기의 어린 아들을 데려가신 것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토를 달거나 질문을 던지는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미 다윗의 관심은 미래에 가 있고 과거에 자신이 저질렀던 죄악의 결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런 징계를 하신 것을 수용하는 거예요. 이게 믿음 없는 사람과 믿음 있는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은 되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연연해서 누군지도 모르는 막연한 대상을 향하여 불평을 쏟아놓고 자기 인생을 비관하고 저주하고 그러고 세월을 보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은요. 되돌이킬 수 없는 과거는 하나님께 맡겨 둡니다. ‘내 생각에는 하나님이 아직 살려주시면 좋겠는데, 이 정도 회개했으면 용서해주시면 좋겠는데’ 내 자아로는 수용이 안 되지만, 하나님의 뜻에 내 자아를 굴복시키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요즘 저는 하나님이 저보다 크신 분이라는 사실을 날마다 날마다 마음으로 자꾸 다짐하려고 애를 씁니다. 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내 이성으로는 이해가 안 되어도 ‘하나님이 결정하셨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이런 태도가 기도하는 사람의 태도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다윗의 균형 잡힌 기도를 살펴보는데, 오늘 본문인 잠언 30장에서 아굴이라는 사람이 드린 기도 역시 다윗의 기도와 맥락이 똑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더라는 것이죠.
이 아굴이라는 사람은 솔로몬 시대의 사람인데, ‘현자’라고 불렸던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 아굴이라는 사람이 드렸던 기도가 다윗의 기도와 어떻게 이렇게 똑같을 수 있는가? 감탄하게 되는데요.
오늘 잠언 30장의 아굴의 기도 역시 크게 두 가지로 균형이 잡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잠언 30:7 합독
7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간절한 기도 제목 두 가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응답 여부도 자신이 결정하고 응답 기한도 자신이 결정하고 ‘하나님, 내 기도 이렇게 들어주셔야 한다’라는 억지 기도가 아닙니다. 기한을 못 박지 않습니다. “하나님, 하실 수만 있다면 언제라도 내가 죽기 전에 응답해 주시길 원합니다” 그 기도 속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주는 아굴의 모습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아굴의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강렬한 열망과 소원을 가지고 드리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는 하나님의 뜻을 세워드리고 주권을 인정해 드리는 의미도 있지만, 또 다른 맥락에서 살펴보면 “내가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자기 일생을 걸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런 의지가 담긴 표현 아닙니까?
사실 우리가 기도를 안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기도 내용도 문제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 기도가 꼭 하루살이 살아가는 것 같아요. 여러분, 지난 한 주간 기도하신 내용을 한 번 돌아보세요. “한 적이 없는데요” 설마 그러신 것 아니죠?
저만 하더라도요. 제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한 주간 기도했던 제목들을 이렇게 돌아봤거든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지금 고3 수험생인 제 아들이 요즘 수시 지원을 해서 이 학교, 저 학교 실기시험을 치르고 있는데, 걔를 위한 기도가 가장 많더라고요.
성도들을 위해 더욱 간절한 기도를 해야 하는 목사가 고3 수험생이 집에 딱 있으니까 걔 기도가 먼저 나오는 거예요. 애가 마음을 비워야 하는데, 머리를 비워가지고요. 뭐 어떻게 합니까? 부모로서 할 수 있는데 기도밖에 없더라고요. 여러분들은 지난 한 주간 어떤 기도를 많이 하셨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당장 필요한 것, 당장 부족한 것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지만, 우리의 이 가정, 이 가정이 유지되는 그 날까지 우리 가문이 유지될 때까지 구해야 할 큰 기도 제목 중에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아이가, 손주가 좋은 대학도 가야 하겠고, 좋은 직장에 취업도 되고 시집 장가도 잘 가야 하겠고 일도 잘 풀려야 하겠지만, 자녀를 두고 기도할 때, 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자녀의 믿음을 두고 기도하겠다는 그런 절박한 기도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 아굴의 기도 속에서 강렬한 자기의 의지와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기도하는 그런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살이할 때도 이런 엄청난 집중력과 열정 없이 되는 일은 없잖아요? 목회도 그렇고 사업도 그렇고 요즘 ‘아이돌’같은 연예인들 보십시오. 이 어린 친구들이 음악과 춤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엄청난 집중력과 열정이 없이는 되는 일이 없더라는 거예요.
예레미야 20장을 보니까 예레미야의 사명이 무거워서 고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예레미야 20:8 합독
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지금 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죽을 지경입니다. 그 강퍅한 동족들을 향하여 “너희들 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나라가 망한다. 회개해야 한다” 막 그러는데, 강퍅한 이스라엘이 말을 듣습니까? 조롱하고 모욕당하니까 예레미야가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9절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예레미야 20:9 혼자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저는 목사된 입장에서 이 예레미야의 그 심정이 너무도 이해돼요. 담임목사로서 이렇게 존중받으며 목회하는 것도 무게감이 만만치 않은데, 말하는 것마다 핍박받고 공격받으면서 예언자로서 활동하는 게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래서 이해가 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 안한다” “내가 이제 이 짓 안 한다” 이렇게 선포하는데, 그런데 20장 9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면은요. 기가 막힙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이것이 사명을 향한 예레미야의 열정입니다. 쉬운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화면)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지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이게 열정의 사람 아닙니까? 그래서 죽을 때까지 욕 얻어먹고 핍박당하고 오죽하면 예레미야의 별명이 눈물의 선지자였겠습니까? 누구보다도 불행한 인생을 살았을 것 같은데, 제가 성경을 가만히 보니까요. 예레미야가 전혀 불행해 보이질 않더라고요.
여러분,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지만, 편안한 삶이 꼭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편한 것’과 ‘평안한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명 때문에 고통이 있고, 사명 때문에 절박한 마음으로 “나는 이것을 다시는 못하겠다.” 할 때, 그 심령의 복음을 향한 열망 때문에, 내가 다시 항복해서 이것을 선포하겠다고 할 때, 핍박은 있지만, 예레미야의 인생 가운데 그 눈물 속에 오히려 행복이 발견되더라는 겁니다.
오늘 이런 아굴의 기도, 오늘 이런 예레미야의 절박한 기도, 오늘 이런 다윗의 절박한 기도가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길 바랍니다.
그렇다면은요. 아굴이 지금, 무슨 문제가 있길래 이렇게 인생을 걸고 기도할까요? 말씀을 살펴보니까 두 가지를 놓고 절박한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는 뭡니까? 바로 정직입니다. 정직! 8절 말씀
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여러분, 이거 좀 의외 아닌가요? 당장 지금 다음 달까지 3억을 안 막으면 회사가 부도날 지경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겠어요? “3억을 주시옵소서! 부도를 막아주옵소서” 이렇게 절박하게 기도하는 게 맞잖아요? 당장 수능이 한두 달밖에 남질 않았는데, 공부도 안 하는 이 애를 어떻게든 대학에 보내기 위해 매달리는 이게 절박한 기도지, 갑자기 무슨 정직을 위해 일평생 기도를 해야 합니까? 이건 너무 의아한 것 아닌가요?
여러분, 한 주 내내 저도 모르게 고3짜리 수험생 아들을 위해 절박한 기도가 나왔던 저처럼, 우리는 어떤 기도가 절박해야 할 기도인지 잘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아굴을 보니까요. 하나님 앞에서 이 ‘정직’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이걸 두고 목숨을 걸고 기도하더라는 거예요.
저는 요즘 연말이 다가올수록 교회에 대한 고민을 정말 많이 하고 있는데요. 제가 하름교회 담임목사로서 기도해야 할 제목이 뭐겠어요?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이 땅을 품은 아름다운 하늘 공동체”가 될 수 있을지,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을지, 목사다운 목사가 될 수 있을지 그 본질적인 것을 두고 절박하게 기도하면 나머지 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부수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왜 아굴처럼 정직을 두고 기도해야 합니까? 오늘 이 시대가 부정직의 시대이기 때문 아닙니까? 오늘 한국 교회가 불행하게도 비기독교인들 눈에 정직의 문제만큼만은 낙제점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에서 지난 3월에 발표한 2023년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민의 5명 중 1명만 한국 교회를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지난 2020년 1월 조사 결과와 비교했을 때 신뢰도가 무려 10.8%가 더 낮아진 결과입니다. 그때도 이미 바닥권을 형성해서 더 내려갈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여겼는데, 결과는 예상과 다르게 더 하락한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미국에 가기 위해 대사관에서 비자 발급에 관한 심사를 받는데요. 황당하게도요. 직업란에 ‘Pastor’ ‘목사’라고 기재한 것 보고 떨어뜨리더래요. 우리 생각에 ‘목사’라고 하면 신뢰가 되니까 오히려 통과되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떨어뜨리더라는 거예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알고 보니 그동안 몇몇 목사님들이 6개월 비자 받아서 미국 가서는 거기서 교회를 개척하고 영주권 신청해서 눌러앉더라는 거예요. 물론 그 목사님들이 다 이유가 있으시겠죠. 그런데 미국 대사관 입장에서 보면, 목사님들이 정직하지 못한 거예요. 왜냐하면 6개월 안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가 뭐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저 자신도 마찬가지죠. 제가 강단에서 허튼소리 안 하려고요. 저는 설교 원고대로 하려고 그대로 읽습니다. 그런데도요. 유튜브에 올라간 제 설교를 다시 들어보면,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조금 그런 것 가지고 얼마나 또 과장을 하는지, “아~~주 많이 그랬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서 ‘내가 왜 그랬지?’ 그러는 대목이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안 해도 되는 과장을 쓸데없이 하고 있더라고요. 그러니 여러분, 제 설교를 다 ‘아멘’으로 듣지 마시고 걸러서 잘 들으세요. 저 혼자 “와~” 이러면 ‘저 인간이 또 과장하는구나’ 그렇게 걸러 들으세요.
여러분, 이게 죄성을 지닌 인간의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침에 눈 뜨자마자 ‘하나님, 오늘도 헛된 것과 거짓말을 버리게 하여 주옵소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나님, 오늘 하루, 저도 모르게 과장하고 없는 말 만들고 헛된 것과 거짓이 있었다면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걸 언제까지요? 죽을 때까지요. 아굴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것 한가지는요. 정직의 문제는 도덕이나 윤리나 인격의 문제가 아니더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보셔야 할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8:44 합독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거짓을 말할 때마다 거짓의 아비가 된다고 합니다. 거짓의 문제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런가하면 잠언 14:2 합독
2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하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정직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살짝 섞어서 살아간다면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패역하게 행하는 자” 새번역 성경을 보니까 “그릇된 길을 걷는 사람”이라고 나옵니다. 이 그릇된 길을 걷는 사람은 여호와를 경멸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부정직한 문제, 내 안에 과장이 심한 생활 습관에 대해서 뼈를 깎는 고통으로 매일 하나님께 나오는 저와 우리 성도님들 다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아굴이 절박하게 구한 기도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자족’입니다. 자족. 8절 하반절을 보세요. (화면)
8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는 우리가 날마다 하는 기도 아닙니까? 그러나 “부하게도 마옵시고”는 우리가 쉽게 구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바로 ‘자족’입니다.
저는 이 아굴의 기도를 보면서 출애굽기의 만나가 생각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내려주신 그 만나가 얼마나 영양가가 있고 맛있었겠습니까? 기약 없이 광야 생활하는 백성들 아니었습니까? 그러다보니 ‘내일은 만나를 안 주시면 어떻게 하나?’ 워낙 내려주신 만나가 많으니까요. 내일 먹을 것도 조금 챙겨갑니다. 그런데, 어김없이 저녁이 되면 다 썩어서 부패해 버리더라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광야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시키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자족 훈련’입니다. 디모데전서 6:6 합독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우리의 영성이 오히려 풍족해진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잖아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 자족과 관련해서 중요한 한 말씀을 드리고 이제 말씀을 정리하려고 하는데요. 빌립보서 4:11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여러분, 자족은요. 제가 화면에 표시해두었죠. 배우는 겁니다. 저를 한 번 따라 하시겠어요? “자족은 / 배우는 것이다” 기질이나 성격의 문제가 아니에요. 원래 욕심이 없어서 자족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또는 나는 성격이 원래 예민하고 욕심이 많은 편이라 자족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족은 훈련이래요. 배우는 겁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 많은 학습과 훈련이 필요할 거예요. 이미 오랜 세월을 살아오신 분들도요. 자족을 다시 배우시길 바랍니다. 자족을 습득하는 거예요. 자족을 배우기 위해 몸부림치는 거예요. 그런 과정에서 상황과 현실을 뛰어넘는 자족의 평안이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추수감사절이 이제 3주 남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감사하고 자족할 수 있을까요? 추수감사절만 되면 “무조건 감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니까 억지로 감사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 제가 비록 지금 상황이 편하지도 않고 자족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닌 것 주님이 다 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하는 비결을 배우는 훈련의 시간으로 삼게 하여 주옵소서!”
“저의 평안한 얼굴을 보고 우리 자녀들이 자족을 배우길 원합니다. 제가 아이들의 거울이 되게 해 주십시오. 저의 정직한 삶과 영성이 작은 씨앗이 되어 우리 하름교회가 한국 교회가 다시 신뢰를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펼쳐가는 복된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 우리가 이 가을에 한 번 이런 기도 제목을 가지고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기도 제목으로 이 가을을 그저 그런 똑같은 날로 보내버리는 게 아니라,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천국을 당겨쓰고 천국을 가불하면서 그 어느 가을보다도 풍성한 은혜로 자족이 넘치는 평안을 가지고 내 가족과 이웃들에게 흘려보내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저는요. 제가 한 가지 꿈이 생겼어요. 여기 하계동에 교회가 많잖아요? 예수 안 믿고 교회 안 다니시는 분들이요. 우리 하름교회 성도님들을 보면서 ‘이상하게 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얼굴이 참 밝아. 얼굴이 참 평안해’ ‘목사는 그저그런 것 같은데 사람들이 좀 달라’ ‘뭔가 비결이 있는 것 같아’ 이런 소문이 하계동에 확 퍼지 기를 저는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려면 하름교회로 가보라고. 그러면 이해가 될 거라고‘ 그런 소문이 확 퍼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여튼 우리 성도님들은 너무도 점잖으셔서 ‘목사님만 정신 차리면 돼요’ 그런지는 몰라도요.)
여러분, 저는 정말 그런 꿈을 꿉니다. 그래서 우리 하름교회가 이 지역사회를 ‘정직’과 ‘자족’으로 싹 다 품었으면 좋겠어요. 이 가을에 우리가 그런 꿈을 함께 꾸며 기도하자고요.
저는 막 이런 마음을 주시면은요.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하름교회 교인들은 얼굴 표정이 달라’ 이런 자부심을 가지고 이 가을에 하나님과 더욱 풍성한 추억 많이 만드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 : 선한 능력으로
❙합심기도
여러분, 우리 이제 함께 기도하시는데요. 여러분들은 추억이 더 크신 분들입니까? 꿈이 더 크신 분들입니까?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꿈이 더 크신 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다윗의 기도가, 아굴의 기도가 제 기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꿈을 주시옵소서. 정직과 자족으로 이 하계동 땅을 품는 하늘 아래 아름다운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오늘 주신 말씀의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한 번 크게 부르시고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마침 기도
살아 계셔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 하름의 성도들께서 다윗처럼 미래지향적인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추억보다 꿈이 더 큰 믿음의 사람이길 원합니다. 지금 내게 당장 필요한 것도 구해야 하겠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서 내 자녀에게 어떤 신앙의 유산을 물려줘야 할지를 고민하고 간구하길 원합니다.
우리 하름의 성도님들이 부정직과 불평불만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아굴과 같이 정직함을 구하고 자족함을 구하면서 선한 영향력을 이 땅 하계동에 흘러보내는 하늘아래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믿음과 힘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이 가을에 하나님께서 주실 풍성한 은혜를 기대하며 하루하루 정직과 자족으로 살아가는 저희들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감사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오늘 말씀으로 미래지향적이고 꿈을 소유한 백성으로서, 정직과 자족으로 살아가길 다짐하는 사랑하는 교우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