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 삶의 태도와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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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 삶의 태도와 방향
[학개 1:1-11]
1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3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4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5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6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9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10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11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
제가 말씀 한 구절을 더 읽겠습니다.
레위인 도망
[스8:15-20]
15 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 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 일 동안 장막에 머물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 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
아인슈타인
오늘 말씀의 제목은 ‘관점: 삶의 태도와 방향’입니다.
관점은 말 그대로 사물이나, 현상을 생각하는 태도와 방향을 의미합니다.
저는 아직 부모가 되어보지 않았지만,
한 아이를 키워내는 데에 있어서도 관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이야기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관점이
아이의 미래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시사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어려서부터 발육이 느리고, 어딘가 엉성했습니다.
그는 4살이 될 때까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9살이 되어서야 간신히 글을 깨우친 ‘지진아’였습니다.
아인슈타인 사후에 그의 뇌를 연구한 옥스퍼드 연구팀은
아인슈타인이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았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자폐증과 비슷한 발달장애의 한 유형입니다.
어딘가 이질적이었던 아인슈타인은, 주변 사람들과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무시를 받아왔고,
그 누구도 그의 가능성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달랐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넌 남들과 다른 특별함을 갖고 있단다. 남들과 같아서야 어떻게 성공하겠니?”라고 하며
따뜻한 말로 그를 격려하곤 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아인슈타인을 실패자로 보았지만,
어머니 만큼은 그를 실패자로 보지 않고, 사랑받기 합당한 아름다운 한 존재로 본 것입니다.
후대에 위대한 과학자가 된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남깁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오직 두 가지 방법 밖에 없다.
하나는 아무것도 기적이 아닌 것처럼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 저와 성도님들의 삶도 이 관점 안에 머물러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것, 호흡 하는 것, 살아 숨쉬는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적임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자리에서 함께 예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기적임을 믿고 누리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이야기
아인슈타인에게는 자신을 사랑의 관점으로 봐주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 속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한결 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학개 말씀을 아주 간략히 요약, 정리해서 말씀 드리자면 이런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후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짓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 속에서 다양한 방해를 받고, 이내 성전 짓기를 포기해버립니다.
그렇게 성전 건축을 포기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집만 멋있게 지어 놓고 천하태평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학개 선지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몇 부분 발췌하여 읽겠습니다.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학개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전은 엉망진창이 되었는데,
너희는 왜 주님의 성전에 관심도 쏟지 않고,
오직 너희 먹고 사는 문제에만 몰두해 있느냐고 백성들을 지적하고 규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에서 귀환한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께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행한 이유도 나름대로 있는 것 같습니다.
에스라 8장 15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 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 일 동안 장막에 머물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 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
예배를 책임져야 하는 레위인들이 다 도망가고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시대적 순서는 학개 선지자의 사건이 먼저이고, 그 뒤에 에스라의 사건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우린 이 대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70년이라는 세월동안 포로 생활을 하며 예배를 전혀 드리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배와 성전 건축에는 무관심한 체, 오직 자기 먹고 사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었고
레위인들은 예배가 무너지고 백성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먹고 살 길을 찾아 사명을 버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이 사건을 대하는 저의 첫번째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간 레위인들의 잘못인가?
아니면
자기 먹고 살기 바빠서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었던 백성들의 잘못인가?
다시한번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이 시대에 교회가 무너져 가는 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오래 고민하지 않고 질문의 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레위인들은 도망갈만 했고, 백성들 역시도 십일조를 하지 않을 만도 했습니다.
레위인들 입장에서 사명을 지키는 것은 곧 굶어 죽는 것을 의미했고,
백성들 입장에서 성전 건축은 곧 자기 삶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상황 속에서 다시 하나님을 주목해 보았습니다.
레위인도 백성들도 그 누구도 복음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마치 하나님 없는 듯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시대 가운데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본문의 상황속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돌아보니,
하나님은 레위인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고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포기하고 버릴 만도 한데,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민족을 사용하셔도 괜찮을텐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학개와 에스라를 통해 자신의 백성들을 다시 불러 모으십니다.
그 누구도 버리지 않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레위인들과 백성들이 하나님을 포기했던 것처럼,
그들을 포기하실 수 있으셨을텐데 그리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고,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택하신 리더들에게 당신의 마음을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던 에스라는 흩어져 있던 레위인들을 불러모아 예배를 회복했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던 학개는 자기 먹고 살기 바빴던 백성들을 규합해 성전을 건축하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렇게 주님이 택하신 리더들은 주님이 포기하지 않으신 주의 백성들을 통해 무너졌던 이스라엘의 예배와 성전을 회복시켰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가진 사람이 교회를 회복시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또한 하나님은 오늘 저와 성도님들을 교회와 세상의 리더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저와 성도님들은 우리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관점을 회복함으로써 세상을 회복시켜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예수님의 관점 사진
그렇다면 저와 성도님들이 가져야 할 하나님의 관점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제가 학부 때 예술을 전공했는데, 저의 전공을 살려서 이 시간에는 두 개의 예술 작품을 통해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보고자 합니다.
📷1. 앞에서 본 피에타
📷2. 위에서 본 피에타
1번 사진
이탈리아 로마에 가면 성베드로 성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베드로 성당 내부에는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것으로 알려진 ‘피에타’ 조각상이 있습니다. ‘피에타’라는 말의 뜻은 ‘슬픔’, ‘비탄’입니다.
몸이 축 늘어진 체로 여성에게 안겨 있는 사람은 십자가에서 운명을 다 하신 예수님이고,
예수님을 안고 있는 여성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사람의 관점에서 피에타 조각상을 보게 되면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심정이 깊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 조각상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다르게 해석 됩니다.
2번 사진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조각할 때 일부러 앞에서 봤을 땐 마리아의 모습이 더 많이 보이도록 했고, 위에서 봤을 땐 예수님의 모습이 더 많이 보이도록 의도 했습니다.
사람의 관점과 생각은 예수님의 처절한 고난을 다 이해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시선 만큼은 생명 다해 세상을 사랑하신 독생자 예수님께 머물러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관점이라 함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보길 원하실까요?
다시, 그림 하나를 보고 오겠습니다.
📷이 그림은 ‘제임스 티소’가 그린
[우리 구세주가 십자가 위에서 내려다 본 것은]이라는 작품입니다.
📷그림의 중앙 아래를 자세히 보시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발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는데,
예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니, 고통받는 주님의 어린 양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분명 누구보다도 아프신데,
주님은 그 극심한 고통 가운데에서 신음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의 이 처절한 간구가 바로 오늘 저와 성도님들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와 방향입니다.
예배고 백성들이고 다 버리고 도망갔던 레위인들을 끝까지 포기 하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마음,
성전이고 하나님이고 관심도 없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마음,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셔서 이 땅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던 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그 하나님의 마음을 본 받아 목숨으로 세상을 사랑하셨던 우리 예수님의 마음,
우리의 관점과 삶이 그 마음에 닿아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께서 그리 살고, 그리 죽으셨듯
이제 저와 성도님들의 인생 속에도 크고 작은 주님의 십자가가 세워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더이상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지 않고,
오직 복음 위에 살아 숨쉬는 생명력이 있는 교회, 생명력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으로 교회를 보고,
예수님의 시선으로 사람과 공동체를 보고,
예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긍휼과 애통의 마음으로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간구하는
저와 모든 원일의 성도님들이 되시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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