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29주일예배_마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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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변화를 보며

본문: 마태복음 16:1-4
마태복음 16:1–4 NKRV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참 신기하게도 어떤 일이 있어도 계절의 변화는 어김없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가을이 코앞인가 싶었는데 이제 가을도 더욱 깊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계절이 바뀌면 만물 또한 바뀝니다. 특별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계절의 변화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며 변화합니다. 물을 머금고 뜨거운 햇볕을 받는 여름철에는 밖으로 성장하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서늘한 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보이지 않게 안으로 성숙해져 갑니다. 옷을 벗어 제치기만 하던 사람들도 주섬주섬 하나씩 옷을 껴입으며 스스로의 몸을 보호합니다. 사람은 스스로 몸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정신 자세 또한 새롭게 가다듬습니다. 찬 바람이 이니 이제 정신 바짝 차리고 한 해 살이의 결실을 거두기 위한 태세를 갖춥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순리입니다. 생명이 성장과 성숙을 거듭해가는 순리입니다. 성장의 한 마디를 매듭짓고, 또 그 다음 마디를 준비하고 다시 매듭짓는 순환의 과정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다면 생명은 존속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의 삶이 자연의 순환궤도를 급속히 이탈하고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그 기본적인 순환의 원리를 영영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그 순환 궤도에서 완전히 이탈시켜버릴 것 같은 삶의 양식이 지배하고 있어 무척 걱정스럽습니다만, 그러기에 더더욱 그 순리를 따르는 길의 소중함을 절감합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요즈음, 여러분은 어떤 마음가짐을 하고 있습니까?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정인 듯하지만, 사실은 지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새로운 계절을 우리는 또 어찌 맞이해야 할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예수님께서 맞이한 매우 논쟁적인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예수님을 걸어 넘어뜨리려고 시도를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들은 예수님께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 표적이란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으로서 기적을 말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눈에 보이는 어떤 표적으로 그 사실을 믿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요청을 거절하십니다. “너희는, 저녁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일기의 분별, 그것은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쉽게 드러나는 객관적 법칙에 대한 이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름이면 덥고 가을이면 선선하다는 것을 아는 것, 한 여름에는 열매가 자라고 가을이면 무르익는 것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 자연의 이치를 아는 사람들이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질책하고 계십니다. 시대의 징조란 역사적 현상을 말하는 것이요 또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인간사에 관한 현상입니다. 자연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마땅히 인간사의 이치 또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일기를 분별할 줄 알면서, 제법 똑똑한 척 하면서 사람의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의 표적이 무엇입니까? 요나가 물고기 뱃속의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 있다가 빠져나와 마침내 돌이켜 하나님의 뜻을 따른 사건을 말합니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인간이 자기의 세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세계를 깨달은 거듭남의 전형적 사건입니다. 한 인간의 진정한 성장, 나아가 성숙을 말해 주는 전형적 사건입니다.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표적 이외에 어떤 표적이 더 필요하냐는 이야기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요구하면서도 진정한 표적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바로 자신들 앞에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낡은 존재를 버리고, 새로운 존재, 진정한 인간으로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변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손 하나 까닥 않고도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 자신이 변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변화하는 그 기적을 체험할 수 없다면 어떠한 변화도 기적도 기대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도 인생의 이치를 모르는 헛똑똑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일갈하십니다. 자기 스스로의 변화, 진정한 성숙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인간 삶의 변화란 많은 경우 환경에 의해 좌우되기도 합니다. 타고난 능력이 있어도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아 좌절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그렇고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환경 탓에 도드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어떤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역할을 말할 때나 해당되는 것이지, 인간 자체의 됨됨이나 그 성숙함을 말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 자체의 변화나 성숙함은 인간의 깊은 내적 차원을 말합니다. 인간 삶이 결단코 환경과 무관할 수 없지만, 인간은 저마다 환경적인 요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내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됨됨이는 그 내적 정체성을 말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얼 바라는지, 내가 무얼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지금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있는 셈입니다. 그 모든 것을 스스로 알고 있을 때, 스스로의 변화 가능성, 그리고 더욱 성숙해질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높습니다. 자기를 잘 아는 길, 그것은 자기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길 외에 다른 왕도가 없습니다. 끊임없는 자기성찰만이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밝힐 수 있습니다. 요나가 거듭나기 전에는 불평불만투성이의 어린아이와도 같았습니다. 자기는 이러고 싶은데 하나님은 어째 저러라고 하느냐고 짜증을 냈습니다. 자기는 원수의 나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싶지 않은데 하나님은 전하라고 하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자기세계 안에 자기를 가둬두고 변화를 거부하는 요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기 몫을 담당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입니다. 날씨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다면, 인간 삶의 변화 또한 예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깊게 들여다보고 자신의 변화 가능성을 믿음으로써 가능합니다. 요나의 표적을 보고 깨달으라고 예수님께서는 촉구하십니다.   이제 정말 서늘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우리의 마음가짐 또한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그야말로 심기일전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열매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각자가, 그리고 우리의 교회가 그렇게 더욱 성숙해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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