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새롭게 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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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 교회의 배경
에베소 교회의 배경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있을 때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앞으로 되실일을 계시해주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말세에 일어날 종말에 대해서 설명하기에 앞서 교회의 상태를 진단하십니다. 그리고 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앞으로 있을 수 많은 교회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 예수님은 먼저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말씀해주십니다. 모든 교회가 특별하지만 이 에베소 교회는 또 여러가지 측면에서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선교할 때에 거점 요충지로 삼았다는 것이며, 후에 사도 요한이 오랜 시간 목회를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 도시는 매우 국제적인 교류가 활발한 항구 도시였으며, 여러 나라가 오가는 과정에서 문명이 발달함과 동시에 수 많은 종교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중에는 유명한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고, 에페수소 극장도 있습니다. 당시에 이렇게 큰 규모의 신전과 극장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이 도시가 얼마나 발달한 도시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렇게 다양한 종교와 문명이 발달한 곳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자주 핍박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 황제 숭배도 이루어졌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해야하는 일도 종종 일어났을 것입니다. 지금은 무신론이 만연하지만 고대 근동에서는 수 많은 신들이 만연했고, 서로 물물 교환하듯 신들의 형상을 만들어 교환하고 자랑하고 소유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서 자기의 신을 무시한다는 것은 자신의 전 삶이 부정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고대 근동에서 직장을 갖고 공동체 생활을 하며 사이좋게 사회생활을 하려면 고대 근동의 수 많은 신들과 교류하고 숭배하고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는 진리보다는 세상에서 살아가며 관계맺는 것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에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되며,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우상들은 전부 거짓이며 오직 참 되신 유일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그가 보내신 메시야를 믿어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당당하게 선포하고 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칭찬
예수님의 칭찬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이런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경건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칭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수고'는 헬라어로 ‘κόπος’라고 하는데 이는 ‘괴롭게 피를 흘릴정도의 수고'를 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사회에서 배척되었고, 미움받고, 핍박받고, 가난했고, 피흘려 죽기까지 수고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말씀하시는 ‘인내'는 헬라어로 ‘ὑπομονή’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신앙과 관련된 인내를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이들은 아주 견고한 땅과 성읍과 같이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믿음을 지켜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그렇게 했다는 것을 이미 모두 아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도 칭찬하십니다. 여기에서 악한 자들은 비윤리적인 사람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늘 경건함과 정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여기에서는 ‘용납하지 아니했다’라고 나와있지만 헬라어로 보면 ‘βαστάζω’라는 말의 어원을 지닌 ‘바스타사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적극적으로 쫓아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온 사람이 비윤리적이라고 쫓아내는 것이 쉬울것 같나요? 때로는 그 사람과 단절할 생각으로 그렇게 행동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쫓겨난 사람들이 원한을 갖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더욱 괴롭히고 모질게 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거룩한 사명감으로 그 일을 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는 진리와 거짓에 대한 올바른 분별력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단자들을 시험하여서 걸러내었습니다. 그중에는 ‘니골라당'도 있었는데 이 니골라당은 영지주의자이거나 종교혼합주의자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교묘하게 속이면서, 세상과 타협할 수 있는 편리한 길을 제시해주었습니다. 즉, 마음없는 우상 숭배는 괜찮다는 것등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우상을 미워하십니다. 오직 하나님만 찬양과 영광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가장 맞는 것입니다. 분명히 에베소에서 수고하고 고통받고 있던 성도들에게 이런 이단 가르침은 달콤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이단적 가르침을 무찌르고 오직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예수님의 책망
예수님의 책망
친구들 지금까지 에베소 교회를 보면 어떻나요? 어떤 문제가 있나요? 만약에 현재 과거 에베소같은 교회를 본다면 모든 성도들이 칭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범적인 교회에 예수님께서 단 한 가지를 책망하십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이 없어져 있던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것이 도대체 어디에서 없어진지 알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이것은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결혼반지와 같은 것입니다. 아니 이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천국 티켓'이었습니다. 이것만큼은 어떻게해서든 지켜야 했을 것인데 이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 말을 듣자마자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것같이 벙쩠습니다. 지금까지 계속 잘해왔었고 잘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이제 예수님 앞에서 평가받을 때에 가장 높은 점수로 합격점수를 맞을 줄 알고 큰 기대를 하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니 이게 뭡니까! 답안지를 한 칸씩 밀려 쓴 것이 아닙니까? 전쟁터에 뛰어나갔는데 총을 놓고 왔지 뭡니까! 부랴부랴 집밖을 나왔는데 알몸으로 나왔지 뭡니까! 아니 사실 저는 이런 비유들로는 도저히 이 마음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등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쩔쩔매고 큰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짧았지만 강력했고 위엄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 이제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져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길 것이다.”
지금까지 앞서했던 수고와 인내와 시비분별과 진리수호와 정결함을 위한 모든 노력들이 완전히 없던 일로 되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디에서 ‘사랑'을 잃어버렸는지 회개하고 성찰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했던 지나친 행동들이 떠올랐습니다. 충분히 사랑과 은혜로 덮어줄 수 있는 것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며 쫓아낸 일들을 생각했습니다. 죄악을 미워할지라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을 생각해냈습니다. 냉철한 이성과 합리적인 생각에 치우쳐 마음의 따뜻한 열정이 식고 있는 줄을 몰랐다는 것을 떠올려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과 사랑에 힘 입어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세상의 기교와 기술과 방법들로 하고 있었음을 생각해냈습니다. 믿음으로 나아가기보다 계산기를 먼저 두드렸고, 사랑의 실천보다 현실적인 것을 먼저 봤던 것을 생각했습니다. 비록 이들은 이런 여러가지 방법으로 이단과 세상으로부터 교회를 지켰지만, 성령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교회는 내가 일하는 곳이 아니라 성령께서 일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지금의 교회를 보십시오. 교회에서 부흥과 발전을 위해서 각종 세미나를 개최하고 수 많은 서적들이 나오고, 강사님들을 초빙합니다. 여러가지 복잡한 시스템들을 만들어 놓고 풍부한 물적 자원들을 확보해놓습니다. 사람들은 이것들을 보며 마음이 든든하고 아주 흡족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기억하십시오. 이런 교회에는 성령께서 역사하실 자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일하시고 공급하시는 것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본인들이 일을 계획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에 마음을 두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랑이 무엇입니까?
처음 사랑이 무엇입니까?
처음 사랑, 듣기만해도 설레지 않습니까? 처음 사랑은 말 그대로 처음에 받았던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처음 사랑을 받았을 때에는 성령께서 사랑 그 자체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안에서 그 어떤 세속적이거나 계산적이거나 무능력함을 찾지 못했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충만한 행복만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세상에 처음나와 사랑하고 사랑받는 모습을 보십시오. 어린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기는 옷을 원하지도, 장난감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아기는 오직 엄마를 원합니다. 엄마로부터 공급되는 모유와 보살핌과 사랑만을 원합니다. 만약 그것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아기는 죽을 뿐입니다. 아기는 자신의 생사를 엄마에게 맡겼으며 또 그럴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오직 그 한 사람만을 순수함으로 바라보며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처음 사랑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처음 사랑을 하게 될 때에는 모두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가장 무능력하고 보잘 것 없을 때에 예수님께서 불러주십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온전히 예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갓난 아이와 같이 예수님께로부터만 구원을 바라며 공급하심을 기다리게 됩니다. 주시면 받고, 주시지 않으면 받지 않습니다. 이것이 처음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은사와 선물을 받고, 하나님의 회복하심을 입고 난 뒤에 마음이 변해버렸습니다. 이전에는 마음이 가난해서 예수님만 바라봤는데, 먹고 살만해지고 세상것들을 두루 즐기다보니까 예수님 찾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상것들 배워보니까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보다 더 효율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수단인데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세상의 기교와 기술과 시스템들을 익혔고, 이제는 성령께서 기어드실 틈이 없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잘한 일이 이렇게 많은데 처음 사랑 잃어버렸다고 촛대를 옮겨버리신다고?
잘한 일이 이렇게 많은데 처음 사랑 잃어버렸다고 촛대를 옮겨버리신다고?
세상을 크기와 수량으로 측정하는 우리가 봤을 때에는 하나 때문에 많은 것들을 버린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언제 크기와 수량에 연연해하신 적이 있습니까? 세계에 사람이 많았는데 홍수 때에 구원한 사람은 고작 8명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구원한 사람은 고작 3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그곳에 들어간 1세대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2명 뿐이었습니다. 자 여러분, 하나님께서 물량에 아쉬워하신 분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를 얻더라도 정금을 얻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양보다는 질을 따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단 한명일지라도 그 단 한 사람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봤을 때, 수고와 인내와 시비분별과 진리의 수호에 큰 가치와 비중을 둘 수도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그 부분을 칭찬하시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큰 가치, 절대로 아무것과도 바꿔서는 안되는 단 한 가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을 소멸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사랑이며, 사랑은 성령입니다. 성령과 사랑, 하나님과 사랑, 예수님과 사랑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나눠부를지 몰라도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사랑은 동일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천국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제 아무리 성경을 공부하고, 교회를 열심히 다녀도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 이 말은 애초에 아직 신앙이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믿고, 사랑할 것인데 ‘알지도 못’합니다. 그는 신앙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저 혼자 자기만족하며 빨빨거리며 돌아다녔을 뿐이지 하나님과 아무 상관 없는 사람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애초부터 처음부터 번지수가 잘 못 되었습니다. 시작전부터 목적지 번지수가 잘못되었는데 어찌 천국에 도착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의 존재 이유가 ‘하나님' 이신데, 그 하나님께서 사랑이 없는 곳에 계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면 도대체 교회가 왜 있어야 합니까? 지금 이렇게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헌금하고 교제하는 이 모든 것들이 전부다 부질없는 짓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사랑이 없으면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도 그렇게 열심을 내었지만 ‘촛대를 옮기겠다' 라는 경고를 들었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지금 매우 놀라야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지 너무 오래되지 않았나 생각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촛대를 옮기겠다'라고 하신 것은 성령을 거두시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교회존립의 존재 이유를 없애겠다는 것입니다. 즉, 완전한 제거이며 버림입니다. 그러니 당시에 이 편지를 받은 에베소 교인들이 울고불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처음 사랑의 열정을 회복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합니다. 사랑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뒤에 하시는 말씀에 단서가 붙습니다. 사랑을 말 한뒤에 바로 성령을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령과 사랑을 동일시하는 말씀입니다. 사랑이 주어진 곳에 성령이 주어지고, 성령이 주어진 곳에 사랑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영으로 말하자면 ‘성령'이라고 말할 수 있고, 사랑이 사람안에 있는 것을 두고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전12 증거할 때에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되 성령의 가장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였고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또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말할 때에도 우리는 처음에 ‘사랑'이 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성령의 열매 중 첫번째이며 성령 그 자체인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자리에 있는 여러분, 처음 성령으로부터 받았던 처음 사랑을 지금도 가지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회개하여 다시 되찾으십시오. 아직 성령의 처음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앞으로 주실 성령의 사랑을 결코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성령의 사랑은 관리하기 귀찮다고 여기는 사람은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이 사랑이 천국에 가기 위한 단순한 보증수표로만 생각해서도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사랑이 내게 임한 바로 그 순간이 천국이며 지극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처음 사랑의 순수함과 열렬한 열성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죽기까지 사랑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십시오. 이로써 사랑이 내게 있음이 확증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