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고데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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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여러분 바닷가재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고계시나요?
흔히들 랍스터라고 불리는 바닷가재는 탈피를 하며 성장한다고 합니다.
속살을 보호해 주던 단단한 껍질을 벗어버리고 더 커다란 새 껍질을 가지기 위해 이전의 단단한 껍질을 벗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낡은 껍질을 벗어버리는 과정을 ‘탈피’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닷가재에게 탈피는 너무나 고통스럽고 위험하고 성가신 일입니다.
바닷가재는 탈피를 할 때 가장 많이 죽는다고 말합니다. 일종의 사고사를 당하는것이죠.
왜냐하면 낡은 껍데기에서 외피가 생길 때까지 얼마 안되는 시간이지만 외부 환경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상태로 지내야 하기에
이 시간만큼은 그 강한 집게발로 공격을 할 수도,
단단한 외피로 방어를 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단단한 외피를 벗어버리는 힘든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전보다 단단한 외피와 커다란 몸을 가지게 됩니다.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바닷가재처럼 새롭게 태어난 인물이 등장합니다.
본문주해
그 사람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입니다.
먼저 니고데모가 누구인지 소개해야겠네요
요한복음3:1에서 니고데모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바리새인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바리새인은 유대교에서 가장 유명한 4개 종파 중 하나인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바리새파는 유대교 종파중에서도 유독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엄격하게 지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뭔가를 하시면 지적하던 사람들이 대부분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이런 유대교의 전통은 오늘날에도 볼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의 백성호 기자가 예루살렘에서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만난 유대인이 내게 경고해주었다. 정통파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갈 일이 있다면 반드시 명심하라고 했다.
“혹시 안식일에 운전할 일이 있으면 조심하세요.”
“자칫하면 돌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안식일에 운전하는 걸 못마땅해 할 수도 있거든요.”
“그럼 유대인은 안식일에 운전을 하지 않습니까?”
“안 합니다. 운전도 일이거든요. 유대인은 안식일에는 절대 일을 하지 않아요.”
“그럼 밥도 안 해먹나요?”
“성경에는 ‘안식일에는 너희가 사는 곳 어디에서도 불을 피워서는 안 된다’(출애굽기 35장 3절)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음식은 하루 전에 이튿날 음식까지 미리 장만해두지요. 안식일에는 요리를 하지 않고 먹기만 합니다. 안식일에는 비가 와도 우산을 펴지 않고요.”
“그럼 흠뻑 젖나요? 왜 그러는 거죠?”
“안식일에는 천막을 치는 일이 금지돼 있거든요. 그래서 우산도 펴지 않지요.”
우리가 생각하기엔 너무나 이상하죠? 아무리 유대교의 전통이라고 하지만 너무 지나친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에도 이 정도인데 예전에는 얼마나 심했을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잘 준수하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율법을 잘 준수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이런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
여기서 지도자라는 단어는 ‘산헤드린 공의회’의 의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그 당시 유대인의 최고 종교 회의 기관으로 그 구성원의 수는 71인으로 구성되어져 있고, 고위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이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니고데모는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율법 교사들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니고데모는 국회의원이자 판사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대단한 사람이 보잘것없는 시골출신 젊은 청년인 예수님께 찾아온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요한은 그냥 찾아왔다고 말해도 되는데 유독 밤이라는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요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이때의 밤은 요즘같은 밤이 아니라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흙같은 밤입니다. 본문에서는 이런 밤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을 아무도 알 수 없는 칠흙과 같은 밤...
니고데모는 왜 이 칠흙과도 같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을까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던 것일까요? 아니면 무엇을 숨기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히 낮에는 다른 일을 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밤에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니고데모가 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에 찾아왔는지 이해하려면 앞의 내용을 살펴봐야합니다.
요한복음 2장 13절이하에 보면 우리가 잘 알고있는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건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면 이때는 유월절기간입니다.
유월절에는 많게는 220만명이상의 사람들이 모인다고 할 정도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 예배드리러 온 많은 사람들에게 성전 입장료를 받습니다.
사람들은 이 성전 입장료를 내기 위해 성전에서만 통용되는 거룩한 성전 화폐로 바꿔서 내야만 했습니다.
또한 제사를 드리길 원하는 사람들은 집에서부터 짐승을 끌고왔습니다.
이 짐승을 상하지 않게 끌고오는 것은 너무나 번거롭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편의상 성전에서 제사드릴 수 있는 짐승들을 팔기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순수한 의도로 성도들과 하나님에 대한 마음으로 시작된 것이 이로인해 엄청난 수익금이 생기자 종교지도자들에게 욕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더 많은 수익을 얻기위해 이방인이 예배드리길 원할 때 들어가는 이방인의 뜰을 시장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짐승을 팔았습니다.
예배당이 시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또한 성전화폐로 환전 차익을 발생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지독한 방법은 사람들이 집에서부터 구별하여 많게는 몇 달 동안 겨우겨우 가져온 짐승들로 제사를 지내려하면 갖은 이유를 대며 막았습니다.
대신 비싼 값에 성전에서 파는 짐승들을 사서 제사를 지내려 하면 그 재물의 상태가 어떻든 눈감아 주었습니다.
이런 성전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화를 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성전보다 예루살렘 성전이 중심이 되어 유지되던 유대사회의 거짓된 천국관, 거짓된 하나님관, 거짓된 구원관을 부수신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이런 상황을 지켜봤고 함께 겪었습니다.
자기 주변의 산헤드린공의회 의원들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속에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면 위험했기에 자신을 숨겨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소문이 도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산헤드린의 의원이었던 니고데모는 누구나 아는 유명인이었고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는 자신의 모든것을 잃을 수 있었습니다.
잃는 정도가 아닌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할 수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구원을 못받는다는 것이기에 더욱 두려웠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니고데모는 밤이라는 시간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절입니다.
요 3:2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니...
니고데모는 동문서답과도 같은 이 대답에 너무 당황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거듭나다라는 말의 의미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거듭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노텐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전혀 다른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다시”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위로부터, 하늘로부터”라는 뜻입니다.
니고데모는 “다시”라는 뜻으로 생각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위로부터,하늘로부터”라는 뜻으로 이야기하셨는데 말이죠
우리나라말에도 동음이의어라고 불리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밤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해가 진 늦은 시간에 밤이다.
라고 하는 것과 밤나무에 열린 밤송이를 가리키며 밤이다라고 하는 것 같은 밤이다라고 말하는 것이지만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죠
그런데 늦은 밤에 산속에서 위를 가리키며 밤이네 라고 말하면 헷갈릴 수 밖에 없을거에요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상황과 이성적 판단하에 예수님의 말씀은 위로부터 또는 하늘로부터라는 뜻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이상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니고데모는 4절 말씀처럼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요 3: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이 말은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이 실제로 가능할 수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종교적 한계를 드러냅니다.
내가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는 이건 불가능한데???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조금 더 자세히 대답해주십니다.
요3:5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건 또 무슨 뜻일까요? 아마 니고데모는 더 미쳐버렸을 겁니다. 머리를 쥐어뜯었을지도 모릅니다.
물과 성령으로라니... 우리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니고데모에게는 이건 더 이해하기 힘든 뜻이었습니다.
그나마 율법에 정통한 니고데모 입장에서 물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습니다.
물은 유대인의 전통과 풍습에서 너무나 익숙한 단어였기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물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바로 정결, 다시 말해 깨끗해지는 것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29장 4절에 보면
4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회막 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
출애굽기 30:17-21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8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19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20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
21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이처럼 유대인의 삶에서 물로 씻는 것은 더러운 것으로 오염되어 부정해졌을 때 다시 거룩을 회복하는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첨가해서 예수님은 한 말씀을 더 하십니다.
요 3:6-7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니고데모야! 네가 어머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나야 된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육신으로 태어나는 것이지만 나는 영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거야!
다시말해서 너는 육으로 태어났을 뿐 영으로는 아직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반드시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만해!
그러니까 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까지 붙이시며 거듭남에 대해 진지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거듭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나라에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찬양있죠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나라
거듭나면 가는나라 하나님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적용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을까요?
첫째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물론 밤에 찾아온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그럼에도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보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기위해 그는 움직였습니다. 그는 정말 예수님이 메시야이신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 밤중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린 한 청년을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1장9-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 11:9-10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그리고 니고데모는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요한복음 7장과 19장에 보면 점점 변해가고 있는 니고데모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는 두려웠음에도 예수님을 계속해서 찾았을 것입니다.
7장에서는 예수님을 옹호하는 숨은 제자로서 19장에서는 커밍아웃한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시신을 수거하여 장례를 치르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성경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친구가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카똑카똑, 까똑왔셩~ 계속 울려요! 웅웅웅 하면서 진동도 계속 울려요.
심할 때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번 씩 울려요. 하도 울려서 무음으로 해놓을 때도 있었죠.
어느날 문득 메시지가 왔다는 것을 깨닫고 확인해보니 카톡에 숫자가 +999가 찍혀있어요 친구가 계속해서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는 거죠 .
우리가 이 메시지를 보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 그 친구가 무슨메시지를 보냈는지 알수 없습니다.
그 메시지가 나에게 도움이 되는 메시지인지, 급한 메시지인지… 알 수 없어요 성경을 읽는 것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가득 담은 성경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3:16-17절을 보면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쓰셨다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내놓으셨어요.
우리는 그 메시지를 읽기만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는거에요.
근데 우리가 메시지를 읽고 답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흔히 말하는 읽씹을 당하면 우리도 속상하듯 하나님도 속상하실거에요
메시지를 읽었으면 답장을 해야합니다.
그 답장이 뭘까요?
기도에요. 우리는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으면 기도해야돼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뜻대로 우리가 답장할 때 하나님은 다시 답장하실거에요? 그러다 답답하시면 가끔씩 음성메시지로도 보내주세요~
사랑한다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이런 메시지 받으신분 계실거에요 저도 예전에 이런 메시지를 받았었어요~
친구들과만 메시지를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도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말씀처럼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통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시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31장 7절이하에서 새 언약에 관한 말씀을 하시고
에스겔 37장에서 마른뼈들이 소생하는 사건을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니고데모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처음듣는 이야기 같았지만 이것은 결국 니고데모가 알고 있던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도우심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메시야가 오게 되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천국으로 들어가는 새 시대가 시작된다는 예언을 다시 상기시키며 자신이 그 메시야라고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물과 성령의 “과”는 헬라어로 kai라고하는데 이것은 그리고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곧이라는 뜻으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이 곧 성령이라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한것이죠. 구약에서 죄 용서를 의미하던 물은 곧 성령의 역할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말해, 성령님을 통해 죄를 깨닫고 용서를 구할 수 있게된 우리는 새롭게 태어나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님을 통해 죄 용서를 구하려면 먼저 성령님을 우리 마음속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령님을 마음속에 받아들이면 우리가 죄를 깨닫게 되고 그로인해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성령님이 싫어하는 것을 하나씩 버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좋아하시는 것으로 채우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어둠인 죄 가운데있던 우리가 빛되신 하나님께로 걸어가게 되는것입니다.
셋째, 니고데모처럼 믿지 못해도 믿어야 합니다.
9절에 보면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열심히 설명했음에도 이렇게 반문합니다.
요3: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님은 이런 니고데모에게 액기스중의 액기스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이죠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입니다.
다함께 읽어볼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니고데모는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침묵합니다.
아마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것이라 생각합니다.
이후 니고데모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아까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니고데모는 요한복음 7장 끝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7장에서는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간에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 갈등이 점점 고조되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의도나 시도들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죠.
그러면서 49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요 7: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이때 니고데모는 간접적으로 반박을 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말을 듣기 전에 그 사람이 행한 것을 알아보기도 전에 그가 죄있다고 말할 수 없다.’
비록 간접적으로 옹호한 것이지만 니고데모는 바뀌고 있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내면의 탈피가 한번씩 한번씩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죠.
니고데모는 19장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나서 갑자기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함께 커밍아웃을 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두사람은 빌라도에게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밝히고 예수님의 장례를 치러야 하기에 시신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사실 유대인들에게 시신은 부정한 것입니다.
다음날이 유월절이기에 더더욱 시신을 가까이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받아서 장례를 치릅니다.
게다가 이것은 단순히 부정한 시신을 가까이 하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이 유대교에서 출교당해도 좋다는 고백입니다.
아니 더이상 바리새인이자 유대인 지도자이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너희들은 죄를 짓지 않은 메시야를 죽인거야! 나는 이제 유대인이고 싶지 않아! 나는 예수님의 제자야! 라고 간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도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삶은 변했습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난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니고데모에 대해 보았습니다.
그는 사회의 기득권층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였고 율법교사였으며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재산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표적은 단순히 기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표적이라는 것은 그것을 행하는 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증명하는 도구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말씀하시거나 주장하시고자 할 때 한 표적을 보이셔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이나 언약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3장의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메시야라는것을 표적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믿을 수 없었죠.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진 이성과 지식으로는 도저히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는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께 붙어있을 때 그는 변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던 니고데모는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처럼 사실 것입니까?
3장의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을 알지만 믿지 못하며 사시겠습니까?
7장의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다른 사람의 눈이 무서워 숨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19장의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의 제자로서 당당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으로 사시겠습니까?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말씀은 듣지만 습관처럼 나와서 말씀만 듣고 변하지 않는 삶을 사는 3장의 니고데모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19장의 니고데모처럼 사시길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가 19장의 니고데모처럼 살기 원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의 유익과 만족과 생명까지도 주님을 위해 내려놓을 수 있는 자들이 되기 원합니다. 은혜를 부어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들이 변화되어 하나님나라를 위해 삶의 방향을 두고 살아가는 성도님들 다 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