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9_칭의

강웅산 교수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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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 Justification: 하나님과 원수였던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

1. 죄와 심판의 현실

죄인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칭의가 필요한 이유는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심판주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심판은 모두의 앞에 놓이게 될 현실이다. 타락의 결과로 죽음을 내다보는 상태에서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의인으로 거듭난다는 칭의의 복음은 죄인들에게 위로가 되었다. 죄에 대한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구원의 복음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늘 다가올 심판에 대한 긴장이 반영된 설교를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심판이 이미 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칭의란 그리스도께서 심판을 받으심으로 다가올 심판에 대해 우리는 이미 의롭다고 선언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미래의 심판에 대한 현재적 선언이 칭의이다.
칭의는 선포지 과정이 아니다. 칭의는 사람을 의롭게 변화시키지 않고 의인을 의인이라고 선포하는 법정적 선언이다.

2.“법정적”의 의미

2.1. 법정적 의미

판사는 증거에 근거하여 유죄 또는 무죄를 선고한다. 이때 판사의 선고가 피고 안에 증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외적으로 피고가 유죄 또는 무죄의 신분이 된 것을 선고하는 것이다.

2.2. 칭의가 법정적인 이유

“최후의 심판” 최후의 법정에서 의인이라고 선언될 것이 칭의를 통해 이미 지금 나에게 선언되었다는 의미에서 법정적이다.
“율법이 충족됨"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고 의를 이루신 것을 우리가 그와 연합함으로써 우리도 함께 충족하여 율법에 대해 의롭다고 인정받기에 법정적이다.
“신분상의 변화" 죄인이 내면적으로 의로워지는 것(로마 가톨릭)이 아니라 신분상 의인이 되는 것이기(종교개혁)에 법정적이다.
“외적 선포” 외적으로 의롭다고 고려하거나 간주하거나 부르거나 인정하거나 입증하는 자체가 법정적 동작이다.
“정죄와 대비" 정죄란 죄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법정적 동작, 칭의는 정죄의 대칭이 되는 개념으로 사용되므로 똑같이 법정적 동작이다.

3. 성경에 나오는 칭의 동사

칭의 개념으로 사용하는 대표적 동사는 “짜다크”와 “디카이오오”다.
칭의 동사는 내적 상태의 변화로 볼 수 없다. 법정적 차원에서 신분상의 죄인과 의인의 대비를 볼 때 상태적 변화가 아니라 선언되는 인정을 말한다.

3.1. 짜다크(대부분 히필, 때로 피엘)

(신 25:1) “의인은 의롭다 하고" 의인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 칭의이다. 법정적 개념의 동사 “정죄하다"와 대비를 이룬다. 구약에서 짜다크가 법정적으로 사용될 때, 사람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닌, 선언적인 의미 즉 그냥 그렇다고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정죄의 개념과 대비를 이루며 법정적 의미를 확대한다.

3.2. 디카이오오

(마12: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여기서 “의롭다 함을 받다"는 미래시제 수동태 형태로 법정적 개념을 나타낸다. 구조적으로 짜다크와 마찬가지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는 법정적 동사와 대칭을 이루며 그 의미가 더 확대되고 있다. (눅7:29)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에서 능동태 “의롭다 하다"가 법정적 칭의 동사인데, 목적격이 하나님이다. 이 문장의 의미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므로 당연히 그분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의로우심을 근거로 의롭다고 칭하는 법정적 칭의를 말한다. (행13:39)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다" 여기서 칭의 동사는 수동태로 쓰였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스스로 의롭게 만드는 게 아니라 선언되는 것이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칭의되었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하다"(저자 직역) 칭의 결과로 우리에게 평화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와 대조되는 말씀이다. “의롭다 하심을 받아" 원수에서 의인의 신분이 됨을 선언하는 법정적 칭의다.

4. 네 가지 칭의 경우

4.1. 성경에 없는 가상의 아담의 칭의

그에게 걸린 조건: 선악과 금지 준수(행위 언약) 아담의 경우 칭의의 근거는 행위 언약에 의해 설정되어 있기에, 아담이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세웠다고 판단되는 순간에 하나님은 그의 순종을 의롭다고 칭의하셨을 것이라는 게 아담의 가상 칭의다.

4.2. 하나님을 칭의하는 경우

하나님이 의로우시기에 의롭다고 하는 것. 하나님을 의롭다고 부를 수 있는 근거가 하나님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그 근거에 준해 얼마든지 하나님을 의롭다고 부를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이 법정적 칭의이다.

4.3. 그리스도를 칭의하는 경우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칭의 되신 사건이다. 성부께서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구속사역을 의롭게 여기신 사건으로 법정적 칭의 개념이다. 부활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것은 영원하신 성자가 부활 사건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확인되었고 천명되었다는 의미로서 이것도 법정적 칭의 개념이다.

4.4. 죄의의 칭의

죄인을 “구원하는 칭의”

5. 칭의의 근거: 의의 전가

5.1. 칭의의 근거: 오직 그리스도의 의

칭의에 관해 루터의 공로는 로마 가톨릭 신학에 반대하여 우리의 칭의 근거는 우리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임을 세운 데 있다. 우리 내면의 의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우리 칭의의 근거가 된다.

5.2. 언약 신학에서의 의의 전가

언약 신학에서 의의 전가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것이 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 전가가 칭의의 사실적 근거가 되는 것은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연합이 언약 안에서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사실이며, 우리는 이것을 언약적 실제라고 부른다. 이 언약적 실제를 통하여 믿음은 연합을, 연합은 의의 전가를 실제적/사실적으로 일으킨다. 칼빈은 우리가 칭의되는 의가 끝까지 남의 의가 아니라, 언약의 실제성 아래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을 말하며 연합 안에서 그리스도의 것이 실제로 우리의 것이 됨을 밝혀 주었다. 우리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의(언약적 실제)에 근거한 우리의 사실적 칭의이다.

6. 그리스도의 의의 구속사적 의미_"구속사적 의"의 의미

6.1. 발단: 아담에게 주신 행위언약의 명령은 아담이 충족시켜야 했던 하나님의 법이었다. 법은 두 가지를 요구한다.

첫 번째는 긍정적인 의미로서 법의 조항을 말하고, 두 번째는 부정적 의미로서 법을 어길 경우에 오는 형벌이다.
언약 대상자가 법의 조항에 순종한다면(지킨다면), 그는 긍정적 요구를 충족시켜 의로 여겨진다(의가 선언된다).
그러나 아담은 법 조항을 지키지 못했고, 그 결과 행위언약의 두 번째 요구인 형벌이 요구되었다.

6.2. 전개: 아담 이후 모든 인류는 아담과 함께 행위언약의 형벌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아담에게 주셨던 법이 담보하고 있던 하나님의 의는 반드시 세워져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실패한 계명 대신 아담에게 주셨던 행위언약을 담보하는 율법을 주셨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담보했다.

6.3. 위기: 하지만, 아무도 율법을 순종하는 방법으로 충족시킬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아담이 성취해야 했던 일과 동일한 일을 누군가는 해야 했다.
아담을 대신할 다른 언약의 대표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를 대표로 하는 언약이 은혜언약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셔야 하는 법의 요구는 아담이 실패한 행위언약, 즉 율법에 대한 순종(긍정적 요구)과 율법 아래에서의 죽음(부정적 요구)이다.

6.4. 절정: 그리스도는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의를 세우셨으며, 율법 아래에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감당하셨다.

그리스도는 이 두 가지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기 위해 오셨다.

6.5. 결말: 그리스도는 두 가지 요구를 모두 충족하셨다. 그의 완성된 중보사역이 우리에게 전가될 수 있는 의가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는 구속사역을 통해 완성하신 구속사적 의다.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를 위해 단번에 이루시고 영원한 의이다.
영생은 의를 획득하는 데 근거한다. 의인이 영생에 들어간다. 그래서 칭의가 필요하다.

7. 칭의의 결과

그리스도는 자신을 위해서 필요하지 않았지만, 우리와 공유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우리와 같은 인성이 되셔서 구속사역을 완수하시고 획득하신 의이다.
율법을 지키시기 위해 죄 없이 사신 것도 순종이고, 율법의 요구대로 죄를 지고 죽으신 것도 순종이다. 전자를 능동적 순종, 후자를 수동적 순종이라고 불러왔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율법의 긍정적 요구, 죽으심은 부정적 요구에 따른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인성이 되시고 율법 하에서 사신 생애와 죽으심 전체를 하나의 순종으로 본다. 성육신에서 죽으시기까지 전 생애를 통해 획득한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하나의 순종을 통해 얻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애가 긍정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켰다는 말은 전 생애를 통한 순종이 공로(긍정적 의)가 되어 하나님의 의를 벌으셨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부정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의를 충족하였다는 말은 죽으심이 훼손된 하나님의 의에 대한 보상(부정적 의)이 되었다는 말이다.
긍정적 의, 부정적 의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부활을 통해 받으신 의가 구체적으로 성도의 칭의의 이중적 효과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죄인에게 부정적 의는 모든 죄 값에 대한 보상이 된다.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부정적 의이다. 긍정적 의는 죄인이 순종으로써 이루었어야 했던 공로가 된다. 의인의 신분을 받을 수 있는 근거는 긍정적 의에 있다. 즉 죄인이 율법의 긍정적, 부정적 요구에 대해 직접 성취했어야 했을 의를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우리의 것으로 누리게 된다. 이것이 전가다.
구속사적으로 획득한 의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전가됨으로써 죄 용서와 의인의 신분이라는 칭의를 가져 오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만이 우리를 위한 것이다.
우리의 구원이 단회적이고 한 번 받은 구원은 다시 상실하지 않는 근거는 바로 칭의가 우리에게 단회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칭의가 단회적 사건이 아닌 논리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가 단회적 전가가 아니라 지속적 전가로 보는 경우가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의가 아직도 지속적으로 완성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전가 자체가 지속적인 것으로 보는 것인데 이것은 믿음의 정의에 문제가 있는 경우이다. 전가의 경우 그리스도가 현재도 우리의 중보가 되시는 의미가 아직도 그리스도의 의가 지속적으로 완성되는 중으로 이해된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단회적 완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좁게는 앞서 말한 히브리서 신학을 부인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믿음의 단회적 성질을 부인하여 전가 자체가 지속되어야 한다면, 믿음이 구원의 확신을 주지 못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8. 칭의의 도구

8.1. 로마 가톨릭

: 세례가 칭의의 도구적 동인이 된다. 세례 이후의 믿음은 소위 사랑으로 형성되는 믿음, 즉 일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선한 일을 함으로써 의가 입증되는 구도로서, 최종적으로 전자보다는 후자가 칭의의 근거가 된다.

8.2. 항변파

:참된 믿음은 진지한 순종을 수반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진지한 순종이 완벽한 순종은 못 되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의롭게 받아주신다는 것이다. 결국 믿음이 유일한 도구가 아니라 순종의 유무가 사실상 칭의의 근거가 된다.

8.3. 새관점(세미-펠라기안적)

: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이방인이더라도 믿음으로 언약공동체에 들어가게 했다고 말하지만, 이 언약백성의 정체성은 순종에 의해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이들은 믿음에 더하여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구도를 가지고 있다.

8.4. 복음주의 알미니안(세미-펠라기안적)

: 전작 타락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던 하나님 중심 메시지에서 인간의 가능성과 잠재려을 부추기는 인간 중심의 메시지로 옮아가는 모든 형태를 말하는데, 이들은 정도와 표현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전젹인 은혜를 타협한다는 문제가 있다.

8.5. 종교개혁과 WCF

: 종교개혁의 “오직 믿음”이 WCF에서 믿음이 칭의의 유일한 도구라는 표현에 반영되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될 때, 전가를 통해 객관적 의가 주관적 차원에서 나의 의로 간주되어 칭의가 된다. WCF가 믿음을 유일한 도구라고 부르는 데에는 위에 있는 그릇된 사상에 대한 변증적 의도가 있다. 종교개혁과 WCF가 믿음의 유일한 도구적 기능을 강조한 것은 “오직 믿음으로"가 구원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유지하기 때문임을 각인할 필요가 있다.

9. 칭의된 삶

칭의만 있고 성화는 없는 구원은 구원이라고 할 수 없다. 칭의된 자는 칭의된 자의 삶에서 거룩이 발견되어야 한다. 칭의되었기에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고 선을 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칭의된 사람의 선한 행실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까닭은 그 행실의 주체인 사람이 칭의되었기 때문이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행실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칭의는 그의 행실에 대해서도 성립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해서 그의 행실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인간의 행실은 스스로의 가치와 노력으로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킬 수 없으며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신분에 대해서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함에 대해서도 전가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칭의된 자의 행실을 받으실 만한 것으로 여기시고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칭의된 자의 모든 것을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보신다.
상급 역시 오직 은혜로 주어진다. 행위의 가치가 아니라 전가된 의에 근거하여 상급을 주신다. 상급이 은혜인 것은 칭의 은총 때문이다. 상에 부합하는 가치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 근거한다. 순종에 대해 축복을 약속하신 언약 자체가 은혜이다. 우리가 하나님꼐 드리는 봉사와 헌신이 상을 받을 만한 것으로 여겨지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울은 어떻게 칭의되느냐에 대해 말했다면, 야고보는 칭의된 자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에 대해 말한다. 바울은 죄인이 칭의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에 힘 입는 것이라는 방법 면에서 칭의를 말했고, 야고보는 삶 속에서 보이는 의의 행실이 가시적 증거가 되므로 칭의된 줄 알 수 있다는 논리를 취한다.
칭의된 자에게는 칭의된 삶이 따른다. 개혁주의 구원론은 칭의를 성화와 명확히 구분해야 하면서 동시에 유기적으로 떨어트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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