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01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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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305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본문 몬 1:1-14
자비와 긍휼의 아버지 하나님, 이 땅을 살아가며 복음을 소유한 자로서 용서와 자비의 삶을 살아가기보다, 늘 쉽게 성을 내고 분노에 사로잡혀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아주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고, 아주 보잘 것 없는 허물도 들춰내고 지적해야만 풀리던 우리의 죄성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원수되었던 우리를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거룩하신 주님의 형제들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녀들로 용납하여 주신 사랑과 자비를 기억하며 우리도 복음 안에서 용서의 너그러움을 살아내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빌레몬서는 주후60년 경에 바울이 로마에 연금되어 있을 때에 기록한 편지이다.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은 당시 골로새 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던 성도였던 빌레몬이었다. 빌레몬은 바울의 전도여행 중 복음을 접하고 믿음을 갖게 된 것같다. 골로새 교회가 2절에 '네 집에 있는 교회'라고 기록된 바와 같이 그의 집에서 모였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빌레몬은 부유한 성도였으며, 자신의 집을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으로 제공하며 섬기고 헌신했던 것을 통해 그가 신실하고도 성숙한 성도였음도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빌레몬을 바울은 1절에서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 라고, 그리고 7절에서는 '형제'라고 부른다.
바울은 비록 골로새 교회로부터 멀리 떨어져 감옥에 감금된 상태이지만 빌레몬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음을 밝힌다. 왜냐하면 4-6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빌레몬의 “예수님과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에 대하여 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의 교제는 단순히 세상을 살아가는 정을 의미하거나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만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 안에서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 실제적으로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며, 함께 신앙을 세워가는 만남들을 뜻한다. 바울 역시도 7절에 기록된 대로 빌레몬의 사랑을 통해 많은 기쁨과 위로를 경험하였으며, 이러한 믿음의 교제들을 통하여 빌레몬이 성도들 가운데 있는 선한 것을 깨달아 그리스도께로 이르기를 원했다.
그런데 이제부터 중요한 내용이 시작된다. 바울에게는 빌레몬을 향한 아주 중요하고도 도전적인 부탁할 것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이 부탁할 것은 바울의 영적 스승의 입장으로서 빌레몬에게 일방적으로 명령, 지시할 수도 있었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위치와 자격을 내려놓고, 자신이 바라는 것을 사랑으로 간구한다. 왜냐하면 빌레몬에게 성숙한 순종이 이루어지길 원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부탁을 말하기 전에 다시한번 자신의 상황을 언급한다. 9-10절을 보면, 그는 현재 로마에 감금되어 있는 갇힌 자이며, 나이 또한 적지 않았다. 바울이 이렇게까지 자신의 상황을 덧붙여 말하는 것은 이제부터 이어지는 바울의 부탁이 그만큼 간절하고도 중요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빌레몬에게 부탁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10-12절의 말씀을 보면 바울의 부탁이 오네시모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네시모를 다시 빌레몬에게 보내겠으니 그를 벌하지 말고 용서하여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본래 오네시모는 16절에 기록된대로 빌레몬의 종이었다.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가 어떻게 바울이 있는 로마 감옥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본문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18절 말씀을 보면 바울은 오네시모가 불의한 일을 하여 빌레몬에게 물질적 피해를 준 것이 있다면 다 자신이 보상하겠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아마도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재산에 불의한 일을 행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행한 경우 종은 주인에게 심하게 처벌을 받을 수 있었고, 심지어는 사형까지도 시킬 수 있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입장에서 무익한 종이었을 것이다. 본래 “오네시모” 라는 이름의 의미는 "유익하다"인데 적어도 빌레몬에게 있어서는 무익한 종이었다. 그러나 복음을 만난 이후로는 어떻게 되었는가? 11절에 보시면 바울은 오네시모를 가리켜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처럼 유익해진 오네시모를 바울은 뭐라고 말하는가? 12절에 보면 "그는 내 심복이라" 라고 말한다. 여기서 심복 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위'나 '창자'와 같은 장기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의 각주 부분을 보면 모든 장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심장' 이라는 의미로 제안하기도 한다. 그 어떤 단어로 번역하든지 바울이 감옥에서 전도한 오네시모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아마도 감옥에 매인 몸인 바울에게 있어서 오네시모는 곁에 두고 있는 것이 훨씬 편했는지 모른다. 오네시모의 섬김이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모를 원래의 주인이던 빌레몬에게 돌려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의 덕을 위해서도, 또한 로마의 법에도 합당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것을 요청한다. 바울은 자신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빌레몬의 자발적인 승낙으로, 억지가 아닌 자발적 순종으로 그 요청이 받아들여지길 원했던 것이다.
이 부분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서로 자발적으로 용서하고 용납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교회의 덕을 위해서. 사도바울은 분명 자신의 사도직분으로 강압적으로 화해시키고 용서하게끔 명령하였어도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 오직 민족과 혈통과 언어와 문화와 사상과 이념을 뛰어넘는 복음을 통해, 복음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하길 원했다. 그것이 교회의 덕을 세우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전해듣고 그 복음을 소유한 자라면, 복음이 주시는 자유함 가운데 서로를 용납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의를 드러내고 나의 가진 것을 자랑하기 위하여 남을 정죄하고 비난하며 헐뜯을 것이 아니라,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으로, 특별히 사랑 가운데에서 서로 용납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이것이 아주 쉬운 일이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상 나에게 피해를 주고 나를 헐뜯는 사람들을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이 쉽지 않다. 용서는 어떻게 어떻게 한다 치더라도 다시 예전처럼 사랑하던 관계로, 다시 나와 한 몸된 지체로 품어주고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가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다. 더군다나 빌레몬에게 있어서 오네시모를 용서하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까? 서로 대등한 신분도 아니라 주인과 종의 관계였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에게 회개하고 돌이킨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기를 부탁한다. 그 용서가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인 의지로 이뤄지길 원했다.
그렇다면 성도의 삶에 있어서 용서와 용납의 범위는 어디까지이어야 할까? 우리는 성경 속에서 용서와 용납의 범위에 대해 발견할 수 있다. 마18장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한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이때에 주님은 대답하신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베드로는 '일곱 번 용서하여야 합니까?' 라는 질문으로 자신의 의를 높이고자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용서의 범위가 무한대라고 말씀하신다. 끊임없이 계속해서 용서하고 용납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듣는 우리는 어떠한가? 아주 작은 해꼬지에도 발끈하고, 아주 작은 피해도 용납하지 못하여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진 않던가? 쉽게 분노에 사로잡혀서 누구든 걸리기만 해보라는 식으로 성을 내며 살고 있진 않은가? 교회 안에서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해주기는 하되, 예전의 관계로는 못돌아간다며 못본 척하며 지나가고, 없는 사람 셈 치고, 그저 껄끄러운 관계로 남아있지는 않은가? 정작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작은 것 하나 용서하지 못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는 커녕 여전히 나의 이름과 나의 의를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기적인 모습만 보게 된다.
우리의 인생이 이처럼 주님 앞에서 볼품이 없고 초라하며, 교회의 덕을 위한 용서와 거리가 너무나도 먼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용서는 무한의 용서임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는 보복하고 복수하였던 우리이지만 이제 주님을 만난 우리는 달라져야 한다. 때로 참으로 힘이 들 수도 있고 괴로운 시기를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무한대의 용서가 도무지 감당하기 어렵게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어떠한 은혜를 입었는지를 생각하라.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십자가 사건을 생각하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도무지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위하여 낮고 천한 이 땅까지 내려오셨고 선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 주셨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몸소 보이신 사랑이 아니겠는가?
신랑되시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받은 여러분, 주께서 자신의 핏값으로 세우신 교회를, 그 귀한 몸 아끼지 아니하시고 수치와 멸시를 당하시며 채찍에 찢기시고 나무 위에 달려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친히 담당하심으로서 세우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주님이 겪으신 것과는 결코 견줄 수 없는 작은 불이익으로, 작은 피해로, 용서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하며,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기는 커녕 내 스스로 와해하고 분열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자.
우리는 서로를 용서해야 한다. 주님 안에서 한 형제로, 나와 한 몸을 이루는 지체로 용납해야 한다. 주님은 이를 주님의 권한으로 명하시지 않고 사랑과 자비로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권하신다. 교회의 덕을 위하여. 교회 안에 불편한 사람들이 있는가? 용서하기 어려운 지체들이 있는가? 허물을 용서해 주기는 하지만, 껄끄러운 관계로 남아있는 성도들이 있는가? 주님께서 몸소 보이신 용서와 사랑을 기억하며 그들을 사랑으로 품어주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기도하자. 주여. 내 안에 참 사랑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내 안에 정말 사랑이 없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님의 사랑과 용서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의 덕을 위하여, 우리 지체를 사랑하는 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불편하고 껄끄러운 관계들이 있겠지만,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