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수학공식이 아닙니다

욥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32 views
Notes
Transcript
신앙은 수학공식이 아닙니다
[서론]
우리는 주변에서 수많은 간증들을 듣습니다.
기독교 tv프로그램에는 연예인들의 간증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하는 대부분의 간증들은 어떤것들 인가요?
그들의 간증들은 이렇게 신앙생활을 했더니 하나님께서 이런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는 선한 일을 했더니 혹은 주님께 열심히 헌신했더니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간증들은 과장이 조금 섞여 있을지언정 대부분 사실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복들을 충분히 주실수 있는 분이십니다.
잠언은 분명 뿌린대로 거둔다는 인과응보의 원리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잠언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어떻습니까?
이런 간증들과 잠언이 말하는 공식들이 잘 들어맞습니까?
우리의 현실은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너무 잘 보여줍니다.
교회오빠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실제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거기보면 교회에서 정말 신실했던 청년 둘이 결혼을 했습니다.
예쁜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산후조리원에서 퇴원하는 날에 남편이 대장암 4기 판정을 받게 됩니다.
그때 갑자기 어머니도 돌아가시게 됩니다.
그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내 역시 4기 혈액암에 걸린 것을 알게 됩니다.
아이도 어리고, 남편은 암환자인데 아내를 다시 간호해야하는 기막힌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나 많은 질문들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이 될걸 아시면서 하나님은 왜 아이를 주신 것이며, 아이를 주셨다면 왜 부모에게 감당하기 힘든 병을 주신 것이며, 왜 한 사람이 아니고 둘다에게 이런 병을 주셨냐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난다면 우리는 과연 선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할수 있을까요?
조금은 극단적인 경우를 말했지만 우리 주변에 이런 이해할수 없는 고난을 겪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이런 인과응보의 원리가 잘 적용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욥기는 이런 현실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리 단순하지 않고, 공식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욥기를 묵상하며 우리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본론]
오늘 말씀은 욥이 두번째로 사탄의 시험을 받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을 우리가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욥이 어쩌다가 사탄의 시험을 받게 되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욥은 매우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7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낳았고, 넓은 땅과 가축들, 종들을 데리고 있습니다.
남부러울게 없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이런 복을 받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잠언의 가르침 그대로입니다.
물론 하나님도 경건한 욥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때 사탄이 하나님께 욥의 신앙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욥의 신앙이 진실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가 하나님을 잘 믿는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복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뭔가 바라는 마음때문에 잘 믿는 것이지, 순수한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복들을 다시 걷어가시면 그가 하나님을 저주하며 떠날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해 주십니다.
그의 신앙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보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1장에서는 사탄의 첫번째 시험이 일어납니다.
사탄은 욥이 가진 모든 소유를 빼앗습니다.
먼저 갑자기 강도들이 나타나 욥이 가진 가축들을 모두 빼앗고 종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또 곧바로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양떼와 목동들도 죽였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또다시 강도들이 낙타 떼를 모두 빼앗아가고 남은 종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이 뿐인가요?
설상가상으로 강풍이 불어 집이 갑자기 무너졌고 그 안에 있던 아들 7명 딸 3명이 모두 죽었습니다.
평생동안 한번 겪기도 어려운 일을 욥은 한꺼번에 모두 겪은 것입니다.
그의 재앙은 모두 갑자기 일어났고, 욥이 컨트롤 할수 없는 일이 아닙니다.
강도들을 어떻게 막겠으며,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강품이 부는 것을 어떻게 막겠습니까?
욥은 이유도 알지 못한채 이런 일들을 당한 것입니다.
그럼 이러한 일을 당한 욥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놀랍게도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게 모든 것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니 다 가져가셔도 주님을 찬양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지 못하는데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런 나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면 패닉상태가 됩니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나한테‘마’가 끼었나 고민할 것입니다.
굉장히 분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컨트롤할수 없는 상황에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욥은 달랐습니다.
욥은 복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지만 그것을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면 과연 우리는 욥처럼 반응할수 있을까요?
그런데 욥의 고난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사탄의 2차 시험이 있습니다.
1차 시험을 통과한 욥을 보며 하나님은 사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절입니다.
너는 내 종 욥을 잘 살펴 보았느냐? 이 세상에 그 사람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 없다. 네가 나를 부추겨서 공연히 그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은 1차 시험을 잘 통과한 욥을 대견해 하십니다.
욥이 그런 고난을 겪으면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사탄은 또한번 제안을 합니다.
2차시험은 1차 시험보다 더 어려울수 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불행총량의 법칙이 있다고 하던데 그게 욥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불행한 일이 많이 일어나면 그 다음에는 행복한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데 욥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이 정도면 고난이 끝나겠지 했는데 더 심해지는 경우도 자주 일어납니다.
4-5절입니다.
가죽은 가죽으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키는 일이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립니다. 이제라도 주님께서 손을 들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시면, 그는 당장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하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가죽은 가죽으로 대신한다’는 말은 그 당시 격언으로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문맥을 보면 이것이 욥의 건강을 건드리는 일임을 알수 있습니다.
욥이 가진 모든 것을 잃었어도 자기가 건강하기 때문에 신앙을 유지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욥의 뼈와 살을 쳐서 그의 생명을 위협하면 주님을 저주하게 될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사탄의 두번째 시험을 허락하시면서도 그의 생명만큼은 건들리지 말라고 한계를 지어주십니다.
7-8절입니다.
사탄은 주님 앞에서 물러나 곧 욥을 쳐서,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에까지 악성 종기가 나서 고생하게 하였다. 그래서 욥은 잿더미에 앉아서, 옹기 조각을 가지고 자기 몸을 긁고 있었다.
1차 시험때 가지고 있던 것 다 잃어버리고, 가족까지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2차 시험때는 사탄이 직접 욥의 몸을 건드립니다.
차라리 죽는게 더 나을법한 고통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이 있었을때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가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히려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하마스에게 고문을 당하며 고통당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는 것보다 죽는게 차라리 낫습니다.
지금 욥이 겪는 고통은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온 몸이 너무 가려워서 못견디는 고통입니다.
현대 의사들은 이런 욥의 질병을 천연두나 한센병 혹은 당뇨병으로 추측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의 질병이 무엇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차라리 죽는게 더 나을만큼 견디기 힘든 질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욥에게는 한가지 고통이 더 추가됩니다.
바로 아내의 충동질입니다.
사탄의 1차 시험때 집이 무너졌는데 그때 자식들만 죽고 아내는 살아남았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욥만큼이나 아내도 몹시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는 욥에게 이렇게 요구합니다.
9절입니다.
“이래도 당신은 여전히 신실함을 지킬 겁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서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이런 아내의 반응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남편도 고통가운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일을 할수 없으니 혼자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녀야 합니다.
누군가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며 남편을 돌보았을지 모를 일입니다.
아내 생각에는 남편인 욥이 경건한 사람임에도 이런 일을 겪고 있는게 너무 부당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때로는 내가 겪는 고난이 너무 부당하다고 느껴 하나님께 분노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항소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아내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신앙의 공식을 깨뜨리신 것입니다.
재판장이 법에 따르지 않고 불공정한 재판을 한 것입니다.
그럼 아내의 이런 반응이 충분히 납득되지 않습니까?
“에이, 아니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돼죠?”
혹시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까?
그럼 욥은 어떻습니까?
스스로도 견디기 힘든 상황인데 아내처럼 옆에서 낙담시키는 사람이 있으면 더 힘듭니다.
욥의 고통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욥은 가진 것을 다 잃고 병까지 얻어 사회적으로 매장되었을 것입니다.
세상 어느 누가 빈털털이가 되고, 심각한 병까지 얻은 사람을 상대합니까?
그 당시 사람들은 이런 재앙과 병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가 임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욥의 고통은 육체적 고통, 사회적 고통, 정신적 고통 모두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욥이 자신의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영적 고통도 매우 컸을 것입니다.
그것이 3장부터 드러납니다.
그런데 아무튼 오늘 말씀에 나타난 욥의 반응은 놀랍기만 합니다.
10절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까지도 어리석은 여자들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 이렇게 하여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말로 죄를 짓지 않았다.
욥은 아내를 타박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르는 어리석은 여자들처럼 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욥은 아내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주신 고난도 인내해야하지 않겠느냐는 의미입니다.
욥 조차 자신이 겪는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하늘에서 일어난 일을 욥이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나 아내와 욥 모두 인정하는 사실은 이 일에 하나님이 관여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겪는 많은 고난은 우리의 욕심과 죄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야고보서 1장 14절은 윌가 시험을 당하는 이유는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고난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유를 당사자가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고난들도 많습니다.
또한 분명 내 죄때문이라고 깨닫게 되는 경우에도 이해할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나보다 더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 많은데 왜 나만 이런 일을 겪어야하냐고 항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럴때 우리는 손쉽게 고난의 원인을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야 그 고난을 받아들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숨겨진 죄가 있다고 믿던지, 아니면 모든 것을 사탄의 탓으로 돌리고 맙니다.
욥은 어땠을까요?
욥은 이런 말도 안되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말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이 말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욕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분명 3장부터 보면 욥이 굉장히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항의하는 모습도 볼수 있습니다.
무엇이 욥의 진심일까요?
저는 둘 다 욥의 진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욥의 신앙은 분명 본받을만 합니다.
그의 이런 온전한 신앙을 따르는게 힘든 일이지만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사탄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3장부터 나오는 욥의 모습도 그의 진심입니다.
이유도 알수 없는 계속되는 고난 속에서 욥이 의지할 사람은 하나님 뿐이지만, 또한 욥이 원망할 분도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런 욥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요?
오늘 말씀에는 세명의 친구들이 등장합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입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잃고 질병가운데 있는 욥을 찾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징계와 저주를 받는다며 다른 이들을 욥을 멀리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훌륭한 점은 또 있습니다.
12-13절입니다.
그들이 멀리서 욥을 보았으나, 그가 욥인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한참 뒤에야 그가 바로 욥인줄 알고, 슬픔을 못이겨 소리 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또 공중에 티끌을 날려서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들은 밤낮 이레 동안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으면서도, 욥이 겪는 고토잉 너무도 처참하여, 입을 열어 한 마리 말도 할수 없었다.
한참 뒤에야 친구들이 욥을 알아볼 정도이니 욥은 굉장히 큰 고통을 당하고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욥을 보며 친구들은 슬픔을 표시하며 땅바닥에 앉아 함께 고통스러워 합니다.
얼마나 훌륭한 친구들입니까?
심지어 이런 경우에 어떻게 위로해야하는지도 아는 친구들입니다.
7일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고 단지 옆에 있어 줬기 때문입니다.
섣부른 위로나 격려는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킬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뒤에 가면 우리는 이 친구들의 침묵이 결코 좋은 의도만은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침묵했던 이유는 욥이 그만한 고난을 받을만한 죄를 지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은 여전히 인과응보의 공식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욥이 뭔가 잘못한게 있으니 하나님께 벌을 받는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말 하지 않고 기다린 것입니다.
우리도 말은 하지 않지만 속으로 이런 생각할때가 있지 않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많이 겪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거야, 그 가족들중에 이유가 있을지 몰라.
스스로 이해가 잘 안되니깐 그 이유를 어떻게든 찾으려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이유없이 재앙을 주신다고 말하기에는 하나님께 탓을 돌리는것 같아 불편하니깐 그렇게 못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 사람에게서 이유를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혹시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역시 세 친구들과 다를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삶에도 여러가지 고난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여러가지 고난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고난들 앞에서 보일 반응은 무엇일까요?
욥처럼 입술로 죄를 짓지 않는 것일까요?
욥의 아내처럼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일까요?
과연 이유도 없고 의미도 없는 고난이 있을까요?
고난을 내가 생각하는 신앙 공식속에 넣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 신앙 공식을 언제든지 벗어나실수 있는 분이십니다.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우리는 고난의 이유를 다 알지 못하지만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사탄조차도 하나님의 통제 아래에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볼 욥기를 통해 내 신앙 공식을 깨뜨리고 진짜 주님을 대면할수 있는 시간이 되길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