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04 양청] 95문

소요리문답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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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우리는 세례란 무엇이고, 세례가 어떻게 무엇을 상징하며, 세례가 어떻게 우리에게 은혜를 미치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외적 수단인 세례를 누구에게 베풀어야 하는가, 세례의 대상에 대해 배워볼 것이다.
95문. 세례는 누구에게 베풀어야 합니까?
답. 세례는 보이는 교회 밖에 있는 자들에게 베풀어서는 안되고,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순종을 고백할 때 베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보이는 교회 회원들의 유아들도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안에 머물며,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며, 생각보다 줏어듣게 되는 것들도 많고, 어깨너머로 배우는 것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체계적으로 혹은 정확하게 아는 거는 의외로 드물다. 하물며 신학적으로 조금 어려울 수 있는 주제에 대해서는 두말할 것도 없겠다. 이런 면에서 전체 성경을 잘 요약하고 있는 교리를 배우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과정일 것이다. 오늘도 조금 어려운 주제를 다루는데 이를 잘 정리해두는게 좋겠다.
먼저 우리가 이해해야 할 개념이 하나 있는데, 교회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보이는 교회, 신학적으로는 가시적 교회라고 한다. 여러분 교재 1번의 A에서 가시적 교회가 무엇인지 대요리문답의 설명을 함께 읽어보자. “가시적 교회란 어느 시대나 세상의 모든 지역에서 참된 종교를 고백하는 자들과 그들의 자녀로 구성된 사회이다[대요리62문]" 즉, 하나님의 눈이 아닌 사람의 눈에 보이는 교회이다. 눈에 보이는 교회당에 모여 같은 신앙을 고백하며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모임이다. 대표적으로는 우리 양문교회도 가시적 교회에 속하고, 16-17세기를 살았던 우리의 신앙선배들도 가시적 교회에 속했으며, 오늘날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곳에서 같은 하나님을 고백하며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도 가시적 교회에 속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이는 교회를 구성하는 조건이 바로 고백이라는 점이다. 신앙고백이다. 그래서 대요리문답의 설명을 보면, “참된 종교를 고백하는 자들” 이라고 표현하는데, “참된 종교" 라는 표현 자체가 조금 오래된 개념이다.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냐 아니면 종교냐 이렇게 구분을 한다. 오늘날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왜? 종교는 사람이 신에게 뭔가를 드리고, 이에 신이 감동을 받아서 우리에게 빚진 바를 갚는 것이 종교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언제나 먼저 주도권을 가지고 사람에게 찾아오셔야 뭐가 시작이 된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뭘 드려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갚게 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이 뭔가를 하셔야 우리가 반응하는 것, 바로 이것이 기독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이 얘기하는 대표적인 종교인이 바로 바리새인들이다. 물론 그들은 “나는 이것을 추구한다" 라고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결국 종교인들이 추구하는 결과는 “자기 의"이다. 자기가 의롭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개명을 지키고 종교의 행위들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인이 가는 길이다. 그러나 복음은 그것이 아니다. 복음은 나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는 종교인이 되느냐, 신앙인이 되느냐 하는 것을 구별할 때가 많다. 하지만 이런 개념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개념이고, 웨스트민스터 문건들이 만들어지던 16세기만 하더라도, 참된 종교를 고백하는 것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여서 같은 신앙을 고백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의 모임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교회당에 모여 예배드렸다. 그들의 모임의 기준은 늘 신앙고백에 있었다. 여러분, 고백의 진정성은 참된 믿음에 기초한다. 물론 우리가 같은 고백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지만, 우리의 고백은 늘 두 가지 측면에서 불완전하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 공동체 안에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알곡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미숙함 가운데 있는 미성숙한 신앙이 있다는 것이다. “아니 믿음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행동할 수가 있지?” 하는 부분이다. 우리의 믿음이 미성숙할 때 그럴 수 있다. 오히려 가라지더라도 종교인의 모습을 띄고 있는 가라지라면 대단한 수준의 종교적 의의를 추구하고 도달한다. 왜?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추구하는 바는 도덕이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가 도덕주의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얘야! 너는 청년부 회장이면서도 왜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 다니니? 얘! 너는 안수집사님 딸이면서 왜 그렇게 못된 말만 골라 하고 다니니?” 그러나 교회는 도덕주의로 규정되기 시작한다면, 교회는 더이상 교회가 아니라 도덕 학교가 되고야 만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행실을 통해 우리 안의 도덕적 수준을 한참이나 끌어올린다 할지라도, 그러한 수준조차도 하나님 앞에서는 정말 불결한 걸레 조각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의 의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도덕적 삶으로 나를 증명할 수 없다. 종교인의 특징은 자신의 도덕적 행실로 자기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은 자기를 증명하는데 관심이 없다. 왜? 나를 증명하려 하면 할수록 드러나는 것은 나의 죄성 뿐이니까. 나를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더럽고 추악한 면들 뿐이니까. 따라서 참된 신자라면 그가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고 선하시다는 것 뿐이다. 나와 같이 천박하고 버러지같이 더럽고 추악한 존재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
그런데 이런 유혹들은 생각보다 우리 깊숙히 찾아올 수 있다. “우리 청년부 중에서는 내가 가장 예배 잘 드리지 않을까? 우리 청년부 중에서는 내가 그나마 경건생활 잘 하고 있지 않나? 쟤를 봐도 그렇고, 쟤를 봐도 그렇고, 그나마 우리 청년부 중에서는 내가 가장 신앙생활 잘 하는 것 같아. 내가 가장 탁월한 것 같아" 이런 생각을 품는다면 그 사람은 참된 신자가 아니라 종교인에 가깝다. 그 사람은 그야말로 버러지 같은 죄인에 대한 자기 인식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비가시적 교회, 혹은 불가시적 교회는 무엇인가? 여러분 교재의 1번의 B를 함께 읽어보자. “불가시적 교회란 머리이신 그리스도 밑에 모였고, 모여지고 있으며, 모여지게 될 택함받은 자들의 총수이다[대요리64문]” 이것이 무슨 말인가? 창세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택하신 백성들 가운데 제외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다 구원을 받는다. 이런 의미에서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구원받게 되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그 마지막 사람까지 모두 모인 것이 불가시적 교회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교회로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쳐 존재하는 모든 참된 신자들의 모임이다. 여기에는 가라지가 포함될 수가 없다. 여러분들이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에 대해서 정리가 분명하게 되셨길 바란다.
그렇다면 외적 은혜의 수단으로 제정하신 세례는 누구에게 베풀어야 하는가? 여러분 교재 2번을 보면, 가시적 교회를 구성하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기준이 바로 “신앙고백"이라 했다. 가시적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바른 신앙고백이 절대적이다. 따라서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하는가? 바른 신앙고백을 한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순종을 고백한 자들이다. 교회 밖에 있는 자들에게 마구잡이로 세례를 베풀어서는 안된다. 단지 교회에 호기심으로 방문하여 등록카드만 제출한 사람이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이 신앙고백을 분명하게 하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바른 신앙고백에 기초하여 보이는 교회에 속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
둘째로, 세례는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야 하는가? 95문을 보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순종을 고백하는 자”에게 주어야 한다 했다. 여러분, 이 부분을 잘 들어야 한다. 말로만 고백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세례를 받을 사람은 믿음에 대한 고백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 순종을 고백하는 자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순종” 이라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된다면 율법주의에 빠지기 쉽다.
어떤 사람에게 세례를 주어야 하는지를 두고 그 사람을 살펴보고 있다면, 이 사람이 얼마나 순종을 해야 그 자격을 갖출 수 있을까? 아니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순종으로 세례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면 그 누구도 세례를 받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연약한 자들을 구원하시는 은혜를 우리가 축소시켜버리게 되는 격이다. 그리고 그 반대로, 순종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입으로는 예수를 주로 시인은 하는데, 행동으로는 순종의 열매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이 사람의 믿음이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따라서 우리는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여러분 교재 2번의 C, 참고를 보라. “세례받은 당사자들이 엄숙히 보이는 교회에 가입하게 되고 전적으로 주께만 속한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서약에 들어간다" 여기서 엄숙이라는 말의 의미는, 세례가 가볍게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전적으로 주께 속했다는 공개적인 고백을 통해서 내가 이제 교회의 참 회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지난 주에 세례의 정의에 대해 설명할 때 일부분 다루었기도 했는데, 문제는 이것이다.
세례가 가지는 중요성과 함께 세례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고, 그렇게 주님과 하나를 이룬 수 많은 다른 지체들과 내가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에베소서 4:16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내가 교회의 지체가 되었다, 내가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가 되었다는 것은, 내가 한 몸된 지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받고, 그들도 나에게 어떤 영향력을 주고 받는 하나의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장기간 배탈이 나면 탈수현상이 오고 두통에 온 몸이 아픈 것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력을 준다는 것이다. 이는 곧 서로에게 책임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세례이다.
그래서 세례를 베풀고, 집례자가 선언할 때 “송진영! 이 사람은 이제 영원한 천국의 세례교인이 된 것을 선언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 보통 어떻게 하는가? 이 사람은 세례를 받은 그 교회의 세례교인이 된 것이다. “이 사람은 충주양문교회의 세례교인이 된 것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하노라" 이렇게 보통 한다. 그렇다는 것은 이 사람이 충주양문교회에서 책임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례를 생각할 때 한가지 논점이 있다. 앞에서는 성인 세례를 다루었다면, 이제 다룰 부분은 개혁주의를 따르는 침례교와 장로교 사이에서 가장 첨예한 이슈라고도 할수 있는 “유아세례"에 대한 부분이다. 침례교는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두살 밖에 안되는, 자기 의사표현도 제대로 안되는 유아들이 스스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가? 없지. 그러면 이 아이들은 자기 신앙을 고백하지 않았으니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자들이냐? 하는 부분이다.
부모가 다 예수를 믿는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결혼을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이 아이를 주셨다. 그러면 이 아이는 자기가 성장해서 10살이 되든, 20살이 되든, 혹 80살이 되든, 자기가 자기 입으로 신앙고백을 하기 전까지는 구원의 언약 바깥에 놓여있는 이방인인가? 이 아이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자 저주받은 이교도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창세기 17 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으시는데, 그 언약을 누리는 대상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속한 모~든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미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유아세례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만일 이를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침례교회가 가르치는 바와 같이 이 자녀가 20살이 되든, 100살이 되든, 자기 입으로 자기 신앙고백을 하기 전까지 이 사람은 언약 바깥에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언약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구약의 할례는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표징으로 주신 것으로,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시행했다. 난 지 8일된 아이가 뭘 알겠나? 지금 우리 딸이 담주 화요일이면 100일인데, 100일 되어도 아무 것도 모르는데, 8일된 아이가 뭘 알겠나? 그런데 부모가 그 아이에게 언약의 표시를 준다는 것은 이런 것을 의미한다. “지금 너의 자녀가 아무것도 모르고 동서남북 아무것도 분간하지 못하지만 너에게서 난 자들을 내가 언약 아래로 부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3번의 작은 2번을 보면, “구원의 근거는 우리의 능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있으며, 하나님의 언약 아래 들어온 믿는 부모의 유아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우리가 너무나도 쉽게 오해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믿고, 내가 예배하고, 내가 신앙고백을 해서 구원을 받는다, 물론 이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충분한 설명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나의 고백, 나의 신앙, 여기에만 방점이 찍힌다. 우리가 성경이 설명하는 구원을 이해할 때,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라는 사실을 놓치기가 쉽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이를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야곱을 사랑하셨고 에서를 미워하셨다 함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 아래 들어온 유아들은 그 아이들은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그 부모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믿기에,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유아세례를 베푸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믿는 부모 아래에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나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으나, 나는 아무 것도 모를 때에, 부모님의 믿음으로 인해 내가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안다면 내가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 것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하고, 또한 여러분들도 믿음의 아버지, 믿음의 어머니가 되도록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
교재 작은 3번을 보라. “성인은 신앙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음을 나타내고, 유아들은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주어짐을 나타낸다" 아까도 잠시 언급했지만, 침례교와 장로교는 둘다 칼빈주의를 따르고 있지만, 몇몇 교리에서의 차이점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유아세례이다. 성경을 보면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하는 말씀도 없고, 또한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지 말라고 금하신 명령도 없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구약의 할례가 가진 언약적인 특성에 근거하여 어린 아이들에게도 세례를 베풀라고 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무엇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세례를 베풀라고 하였고, 우리 웨스트민스터 신앙의 선배들도 무엇 때문에 유아세례를 꼭 베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는가?
첫째로, 세례는 가족 모두에게 베풀었다. 사도행전 16:14–15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성경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았다고 말씀한다. 이는 그 집에 속한 모든 가족원들이 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루디아 부인 혼자만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집에 속한 모든 사람들, 어린 아이들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16:29–33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바울과 실라를 가두었던 간수가 어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이에 바울이 말하기를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고, 주님의 말씀을 간수장의 온 집 사람들에게 전파하였다. 그리고 간수장은 가족원들을 데려다가 세례를 받게 하였다. 루디아의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간수장의 집에서도 어린아이들까지도 모두 세례를 받았다.
사도 베드로도 말한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베드로가 긴 설교를 하게 되는데, 행2:38-39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여기서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라고 하면서 자녀들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고린도전서 7:14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이냐면, 불신자 부부가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을 했다. 그러다 배우자 중 한 사람이 예수를 영접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라. 불신자와의 결혼이 합당하다는 것을 말하는게 아니다. 둘다 불신자였다. 그렇게 결혼을 했는데 예를 들어 아내가 전도를 받아 예수를 영접했다. 그러면 불신 남편에게 “당신은 예수를 믿지 않으니 이혼하자!” 이렇게 말할 것이 아니라, 믿는 아내를 통하여 불신 남편과 불신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흘러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유아세례를 받음으로 자녀가 구원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니다. 부모의 믿음으로 자녀가 구원받는게 아니다. 남편의 믿음이 좋아서 아내가 구원받는게 아니다. 그러나 부모의 믿음이 자녀에게 믿음을 갖게 하도록 역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영접한 아내의 믿음이 불신남편에게 믿음을 가지도록 역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이 주님께 오는 것을 영접해 주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주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어린아이가 가지는 어떤 특성을 말씀하신 것인가? 그들이 가진 순진함이 아니다. 어린 아이는 순진하다, 세속의 때가 묻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어린아이들의 의존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이가 부모 없이 홀로 살아갈 수 있나? 스스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목도 제대로 못 가누는데, 지가 배가 고프다고 혼자 기어가서 물을 끓여서 분유를 타 먹겠는가? 대소변 묻은 기저귀를 혼자 갈겠는가? 부모의 손을 떠나서 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신뢰할만한 교리서 중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있는데, 여기서도 유아 세례의 근거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교재 3번의 작은 5번을 함께 읽어보자. “어른들처럼 유아들도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기 때문이고, 죄의 구속과 믿음을 작동시키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부모 못지 않게 유아들에게도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들도 언약의 표지인 세례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해야 하고, 불신자의 자녀들과 구별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구약에서는 할례로 이루어졌고 신약에서는 세례로 대치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언약의 관점에서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 합당하다. 이로서 유아들은 부모의 믿음을 통해 언약 안에 받아들여지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믿음의 부모가 되는 것도 중요하다. 불신부부가 살다가 어느 한 쪽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는 일들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불신자와의 결혼을 하는 것은 결코 합당하지 않다.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했다. 불신자와의 결혼은 성경에 반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불신결혼을 하는 자와 그의 부모를 치리했던 것이다. 교회의 순결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적용이다. 세례를 무분별하게 남용하고, 혹은 세례를 별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 속에서 세례의 성경적 의미를 알고 성경대로 시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 가운데 쉽게 일어날 수 있는 관행들을 몇가지 꼽자면, 믿음과 고백이 없이 세례를 일단 주면 구원받는다는 식의 생각이다. 이런 식의 개념들, 세례를 줘서 교인 만든다는 개념들은 성경적이지 않다. 세례는 격려용이 아니다. 두 번째 관행도 비슷하다. 세례를 주어서 신앙생활을 잘하게 되면 좋은게 아닌가? 이것도 같은 맥락이겠다. 세 번째로 중직자의 자녀인데 세례를 베풀어야 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들… 이게 한국교회 가운데 많이 작용하고 있는 잘못된 관행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유아들의 구원을 반대하는 것에 대해서도 고민해 봐야 한다. 오늘날에도 적잖은 부모들이 말한다. “똥오줌도 못가리는 애에게 유아세례를 베푼다고 이 아이가 언약 백성이 됩디까?” 그러나 여러분, 이런 태도는 교만한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똑똑해서 하나님을 분별하고, 진리를 깨달아 구원을 받은 것인가? 우리의 구원은 지식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세례는 분명한 믿음과 순종의 고백을 근거로 베풀어야 한다. 이 부분을 여러분들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고백하지 않는 자에게 고백문을 막 가르쳐 외우게 하고, 이렇게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세례문답할 때 어떤 것들을 고백하는지 함께 읽었었지만, 이거 줄줄 외운다고 세례받을 요건을 갖추는 것도 아니다. 세례는 분명한 믿음과 순종의 고백을 근거로 한다. 다시 말해서 가장 중요한 기준, 고백이다. 신앙 고백.
그런데 여러분들이 소요리문답을 처음 배울 때 느낀 분들도 계실런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배워왔던 것 중의 70-80% 이상 처음듣는 것이다. 전체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모르는데 그 사람이 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있을까? 바른 신앙고백이 없는데 세례를 주어서는 되는가? 이런 내용들을 들어본 적도 없고 배워본 적도 없는데 이 자리에 입교하신 분들, 세례받으신 분들 이거 문제 있는 것은 아닌가?
따라서 여러분이 전체 성경을 가르치는 교회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성경을 가르치고, 교리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단지 성경을 윤리도덕적으로만 가르쳐서는 결코 바른 믿음의 고백으로 나아갈 수 없지 않겠나? 지금 우리가 소요리문답의 마지막 부분을 공부하고 있지만, 소요리문답은 초신자 혹은 아이들 교육용이다. 우리는 전체성경을 공부함에 있어서 이제 막 첫걸음을 뗀 것에 불과하다. 이런 내용들이 여러분의 신앙생활 가운데 도전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머물며 그분의 언약의 울타리 안에서 말씀의 꼴을 받아먹으며 바른 믿음의 고백으로, 장성한 믿음의 분량까지 나아가도록 계속해서 정진하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란다. 그래서 여러분들 한 명 한 명이 믿음의 청년들 되시고, 그렇게 믿음의 배우자를 만나서 언약 자손들을 낳고 그들을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세우는 이 일들이 일어날 수 있길 축복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가 참된 신앙과 그 고백 위에 세워지게 하시고, 바른 신앙고백을 토대로 세례를 베품으로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교회에 교인이 되고 그렇게 하나님의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져 가는 일들을 우리 양문교회와 우리 양청 가운데 많이 일어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날마다 주님을 바르게 고백하는 우리 양청 되게 하시고, 부모의 신앙을 잘 물려 받고, 이제는 부모의 신앙을 더 뛰어넘는 믿음의 계보를 이루는 우리 모든 청년들 되도록 복을 더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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