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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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25
마태복음 5장 33-37절
우리는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함께 살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인과 간음 그리고 이혼에 대한 말씀을 살폈고, 오늘은 맹세에 관한 말씀입니다. 살인, 간음, 이혼의 문제는 이웃들 곧,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합니다. 살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해치는 일입니다. 간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순결의 문제이고, 이혼은 하나님의 짝지어주심을 전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오늘 살필 맹세에 관한 문제도 마친가지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신의 말의 신빙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맹세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못 사용하면 하나님을 욕보이는 행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들은 말씀을 언급하시는데,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라는 말씀은 성경의 어느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 20장 7절, 레위기 19장 12절, 민수기 30장 2절, 신명기 23장 21-23절의 말씀을 요약해서 사용한 표현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맹세는 긍정적으로 사용된 경우가 있고, 거짓된 맹세나 서원에 관해서는 형벌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구약에서 맹세가 언급될 때는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맹세했다면 반드시 지킬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거짓 맹세를 하지 말고 맹세한 것을 지키라는 말은 역시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후 하신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유대인들은 맹세를 지키지 않으려고 헛맹세했거나 맹세에 있어서 어떤 꼼수를 부린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인들 사이에 맹세에 대한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킬 생각이 없는 맹세를 너무나 쉽게 하였고, 곤란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회피의 목적으로 맹세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맹세와 관련해서 유대인들이 저지른 큰 실수를 설명하면 좀 더 이해되실 겁니다.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강조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저속한 곳에 사용하거나 천박하게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계명을 다르게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강조점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가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에만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대신에 여호와와 관련된 것들을 사용해서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만 부르지 않았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대신에 여호와가 지으신 하늘과 땅으로 맹세했고, 여호와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3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당시에 맹세가 일반적인 행동이었기에 맹세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충격적인 표현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절대로 맹세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서원이라는 일종의 맹세를 허락하셨고, 사도들도 맹세하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7장 20-22절을 보면 하나님이 맹세하셨다는 말씀이 있고, 고린도후서 1장 23절이나 로마서 1장 9절을 보면 바울도 맹세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맹세를 완전히 금지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특정한 맹세를 완전히 금지하신 것인데, 자신의 신뢰를 담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것을 내세워 맹세하는 것과 맹세를 지키지 않으려고 꼼수를 부렸던 것을 금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곧장 “하늘로도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늘로 맹세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입니다. 35절에서는 땅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발등상”은 “발판”을 의미합니다. 땅을 하나님의 발판이라고 말한 것은 땅의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은 땅을 발판으로 사용할 권한이 있으시다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은 땅을 자기 마음대로 할 권한이 없습니다. 설령 땅의 주인이라고 해도,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서의 약속 가운데 땅의 주인일 뿐이지, 실제 땅을 만들고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늘과 땅의 주인도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하늘과 땅을 사용해서 맹세하는 것은 불법이 됩니다.
이사야 66장 1절에서 하나님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하늘과 땅을 마음대로 이용하실 권리와 권한이 있는 겁니다.
예루살렘으로도 맹세하지 말아야 할 것은 크신 임금의 성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은 시편 48편 2절에서 “큰 왕의 성”이란 말씀을 예수님이 인용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임재를 허락하신 곳이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그러니 이곳을 이용해서 맹세하는 것도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것처럼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하늘과 땅과 예루살렘의 주인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용해서 맹세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은 사람이 자신을 이용해서 맹세하는 것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36절에서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자기 머리로 맹세한다는 것은 자신이 맹세를 지키지 못했을 때, 목숨을 주겠다는 의미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 머리카락의 색깔도 마음대로 바꿀 결정권도 없습니다. 머리카락이 희고 검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결국 사람은 자기 목숨의 주인이 아니며, 목숨도 하나님의 것이지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맹세와 관련해서 언급하신 것을 보면, 하늘 그리고 땅 그리고 예루살렘 마지막으로 사람의 머리입니다. 이 순서는 점점 크기나 가치가 작아지는 순서인데, 이것은 귀한 것이든 가벼운 것이든 어떤 것도 맹세의 도구로 삼지 말라는 겁니다.
유대인과 예수님의 관점이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은 사용하지 않고 하늘과 땅과 예루살렘과 자신의 머리를 맹세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사용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진실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맹세할 때 보증이 될 만한 것을 앞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유대인들은 바로 그런 보증이 될 것들로 하늘과 땅과 예루살렘을 사용했고, 만약에 자신이 맹세를 이행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자신이 보증으로 내세운 하늘과 땅과 예루살렘이 모욕당하게 되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만 망령되이 일컫지 않으면 되니까 그 외의 것들은 어찌 되든지 상관이 없다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점은 다릅니다. 하늘과 땅과 예루살렘과 사람의 머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니까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것을 마음대로 사용해서 맹세하는 것도 죄라고 가르치고 계신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질 자세를 37절에서 설명하고 계십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맹세를 하고 담보를 내세워야만 말의 진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고 솔직한 삶을 살아서 “예” 또는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으로도 진실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지나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에서 “악”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악한 자”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악한 자로 번역하면 이것은 마귀를 지칭하는 것으로 진실된 말을 지나쳐서 하는 말은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겁니다.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하지, 그것을 증명하겠다고 맹세에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선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맹세를 통해서 상대방에게 자신이 신뢰할만하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이것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러한 맹세를 당시의 사회가 요구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회였다는 겁니다.
구약에서 맹세는 자주 등장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도 일상에서 맹세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신명기 6장 13절과 10장 20절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연관해서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을 사용해서 맹세하는 것이 더 겸손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맹세를 하면서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을 언급하는 것은 그것들 뒤로 숨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에게 다른 속마음이 더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는 말씀이 있지만, 유대인들은 그것을 못 지킬 가능성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맹세를 했던 겁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맹세는 덜 중요하니 반드시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과 예루살렘으로 맹세를 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으려는 의미도 있었지만, 본인들이 맹세를 지키지 못했을 때를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른 것을 사용했던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3장 16절과 18절에서는 성전과 제단으로 하는 맹세도 언급되는 겁니다.
하지만 하늘이든 땅이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다른 무엇으로 맹세하더라도 결국 하나님과 연관되게 되어 있습니다. 맹세한 것을 지키지 않을 핑계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맹세한다는 것은 사람의 꼼수지만,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 인해서 결국 사람은 맹세한 것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보면, 당시 유대인들의 행동은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라는 말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던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그런 유대인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무엇이든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진실한 삶을 보여주고, 성실함을 보여줘야 함을 가르쳐주고 계신 겁니다.
우리의 말은 맹세 없이도 항상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직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확실히 악으로부터 나는 겁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마귀에게 속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맹세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약속한 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세, 그리고 맹세가 없더라도 상대방을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회와 자세는 예나 지금이나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짓의 아비인 사단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거짓과 속임이 판을 치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무엇인가를 보증으로 맹세를 일삼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이 그렇게 하더라도 우리는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을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약속한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신명기 6장 13절과 10장 20절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했던 것은 맹세하는 사람의 진실됨을 강조하고 말한 것을 반드시 지키고 해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런 말씀의 의도를 부정하거나 금지하신 것이 아닙니다. 원래 구약의 가르침과 동일하게 진실한 말을 할 것과 말한 것을 반드시 지키라는 겁니다. 맹세를 지나치게 사용하는 사람의 말은 진실성에 대해서 의심받게 됩니다.
맹세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는 맹세 없이도 진실함을 증명할 수 있는 삶에서 나오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따라 생각해보면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과 죄악됨을 다시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할 능력도,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능력도 부족합니다. 여전히 우리는 거짓된 맹세를 일삼고, 굳게 약속했지만 지키지 못해서 거짓말쟁이가 되는 때가 허다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경우들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우리의 무능력과 타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장 생각에는 내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맹세하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1분 1초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또 내가 생각했던 일들이 내 생각과는 다르게 진행되어서 약속을 못 지키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을 내 생각대로 이끌 능력이 없기에 맹세를 온전히 지킬 수 없는 겁니다. 오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옳다, 아니다를 하는 겁니다.
맹세를 했다가 지키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거짓말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평상시 했던 모든 말들에 대한 신빙성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가진 복음의 말씀도 사람들에게는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까지도 거짓말쟁이의 신이 되고,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까지도 손가락질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맹세가 필요 없는 존재여야 합니다. 자신의 진실함은 우리를 부르신 그리스도 안에서 삶으로 드러나야 하고,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진실함을 나타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예라는 말과 아니오라는 말로도 사람들에게 믿음직한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진실한 삶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삶입니다.
이제 시선을 돌려서 생각을 해봅시다. 성경에서 맹세를 철저하게 지키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에게 계속해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성실히 이행해 오셨습니다.
아담에게 하신 약속을 노아를 통해서 아브라함에게로 이어가셨고,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25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 이삭이 태어나면서 지켜졌습니다. 사람의 기준에서 시간이 좀 걸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전체에게 다시 선포되었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속 그 약속을 언급하고 확인시켜주시면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고, 십자가에서 죽도록 만드시고,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헛된 맹세와 거짓된 맹세를 일삼을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거짓된 맹세를 하지 말고, “옳으면 옳다, 아니면 아니다”라고 말하라는 겁니다.
교회에서 헛맹세를 하도록 만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작정헌금이나 작정기도회와 같은 것들이 그에 해당합니다. 물론, 내가 헌금을 얼마 내야겠다고 생각하거나, 기도회와 모임에 잘 참석하겠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사실 교회들이 작정헌금이나 작정기도회를 만든 것은 헌금이 잘 걷히지 않기 때문이고, 기도회에 사람들이 잘 참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만드는 것도 문제지만, 이런 것을 만들어야만 교회에서 무엇인가를 하려는 성도들도 문제입니다.
교회에 성도가 등록하고, 교인으로 가입이 된다면, 교회에서 헌금생활에 충실하고, 예배와 교회 모임에 성실히 참여하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이것도 어떻게 생각해보면 일종의 맹세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약속을 잘 지키지 않아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작정하도록 만드는 것이라면 성도의 잘못이 매우 큰 겁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정교인 서약을 합니다. 정교인 서약을 여러분은 잘 지키고 있습니까? 정교인 서약서를 두 장 서명해서 교회에 한 장 남기고, 한 장은 여러분에게 돌려드립니다. 그 서약서를 보면서 여러분의 신앙과 신앙생활을 잘하고, 교회 앞에서 했던 서약을 지키라고 그렇게 한 겁니다.
만약에 서약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옛길교회에 등록하기 위한 과정 중의 하나로만 생각했다면, 여러분은 헛맹세하며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악으로부터 난 행동과 생각을 하신 겁니다. 정교인들은 여러분이 했던 서약을 기억하고 지키기로 힘쓰십시오.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 여러분! 맹세를 해야만 사람들이 믿어주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아는 사람들의 입에서 그 사람은 진실하고 믿음직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나오도록 사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진실하고 믿음직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이끌고, 진실한 존재가 되어가도록 이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말을 꾸미기 위해서 맹세를 사용하는 일을 버리십시오. 우리는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과 행동이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온갖 화려한 말들로 꾸미는 맹세가 아니라, 신실한 말과 그에 따른 행동을 보여야 할 신자들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헛된 맹세로 넘쳐나는 삶이 아니라, 신실한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 앞에 온전함을 나타내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태복음 강해 25
마태복음 5장 33-37절
우리는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함께 살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인과 간음 그리고 이혼에 대한 말씀을 살폈고, 오늘은 맹세에 관한 말씀입니다. 살인, 간음, 이혼의 문제는 이웃들 곧,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합니다. 살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해치는 일입니다. 간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순결의 문제이고, 이혼은 하나님의 짝지어주심을 전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오늘 살필 맹세에 관한 문제도 마친가지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신의 말의 신빙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맹세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못 사용하면 하나님을 욕보이는 행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들은 말씀을 언급하시는데,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라는 말씀은 성경의 어느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 20장 7절, 레위기 19장 12절, 민수기 30장 2절, 신명기 23장 21-23절의 말씀을 요약해서 사용한 표현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맹세는 긍정적으로 사용된 경우가 있고, 거짓된 맹세나 서원에 관해서는 형벌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구약에서 맹세가 언급될 때는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맹세했다면 반드시 지킬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거짓 맹세를 하지 말고 맹세한 것을 지키라는 말은 역시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후 하신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유대인들은 맹세를 지키지 않으려고 헛맹세했거나 맹세에 있어서 어떤 꼼수를 부린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인들 사이에 맹세에 대한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킬 생각이 없는 맹세를 너무나 쉽게 하였고, 곤란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회피의 목적으로 맹세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맹세와 관련해서 유대인들이 저지른 큰 실수를 설명하면 좀 더 이해되실 겁니다.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강조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저속한 곳에 사용하거나 천박하게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계명을 다르게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강조점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가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에만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대신에 여호와와 관련된 것들을 사용해서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만 부르지 않았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대신에 여호와가 지으신 하늘과 땅으로 맹세했고, 여호와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3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당시에 맹세가 일반적인 행동이었기에 맹세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충격적인 표현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절대로 맹세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서원이라는 일종의 맹세를 허락하셨고, 사도들도 맹세하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7장 20-22절을 보면 하나님이 맹세하셨다는 말씀이 있고, 고린도후서 1장 23절이나 로마서 1장 9절을 보면 바울도 맹세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맹세를 완전히 금지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특정한 맹세를 완전히 금지하신 것인데, 자신의 신뢰를 담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것을 내세워 맹세하는 것과 맹세를 지키지 않으려고 꼼수를 부렸던 것을 금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곧장 “하늘로도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늘로 맹세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입니다. 35절에서는 땅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발등상”은 “발판”을 의미합니다. 땅을 하나님의 발판이라고 말한 것은 땅의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은 땅을 발판으로 사용할 권한이 있으시다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은 땅을 자기 마음대로 할 권한이 없습니다. 설령 땅의 주인이라고 해도,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서의 약속 가운데 땅의 주인일 뿐이지, 실제 땅을 만들고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늘과 땅의 주인도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하늘과 땅을 사용해서 맹세하는 것은 불법이 됩니다.
이사야 66장 1절에서 하나님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하늘과 땅을 마음대로 이용하실 권리와 권한이 있는 겁니다.
예루살렘으로도 맹세하지 말아야 할 것은 크신 임금의 성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은 시편 48편 2절에서 “큰 왕의 성”이란 말씀을 예수님이 인용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임재를 허락하신 곳이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그러니 이곳을 이용해서 맹세하는 것도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것처럼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하늘과 땅과 예루살렘의 주인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용해서 맹세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은 사람이 자신을 이용해서 맹세하는 것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36절에서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자기 머리로 맹세한다는 것은 자신이 맹세를 지키지 못했을 때, 목숨을 주겠다는 의미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 머리카락의 색깔도 마음대로 바꿀 결정권도 없습니다. 머리카락이 희고 검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결국 사람은 자기 목숨의 주인이 아니며, 목숨도 하나님의 것이지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맹세와 관련해서 언급하신 것을 보면, 하늘 그리고 땅 그리고 예루살렘 마지막으로 사람의 머리입니다. 이 순서는 점점 크기나 가치가 작아지는 순서인데, 이것은 귀한 것이든 가벼운 것이든 어떤 것도 맹세의 도구로 삼지 말라는 겁니다.
유대인과 예수님의 관점이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은 사용하지 않고 하늘과 땅과 예루살렘과 자신의 머리를 맹세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사용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진실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맹세할 때 보증이 될 만한 것을 앞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유대인들은 바로 그런 보증이 될 것들로 하늘과 땅과 예루살렘을 사용했고, 만약에 자신이 맹세를 이행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자신이 보증으로 내세운 하늘과 땅과 예루살렘이 모욕당하게 되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만 망령되이 일컫지 않으면 되니까 그 외의 것들은 어찌 되든지 상관이 없다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점은 다릅니다. 하늘과 땅과 예루살렘과 사람의 머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니까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것을 마음대로 사용해서 맹세하는 것도 죄라고 가르치고 계신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질 자세를 37절에서 설명하고 계십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맹세를 하고 담보를 내세워야만 말의 진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고 솔직한 삶을 살아서 “예” 또는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으로도 진실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지나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에서 “악”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악한 자”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악한 자로 번역하면 이것은 마귀를 지칭하는 것으로 진실된 말을 지나쳐서 하는 말은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겁니다.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하지, 그것을 증명하겠다고 맹세에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선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맹세를 통해서 상대방에게 자신이 신뢰할만하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이것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러한 맹세를 당시의 사회가 요구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회였다는 겁니다.
구약에서 맹세는 자주 등장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도 일상에서 맹세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신명기 6장 13절과 10장 20절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연관해서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을 사용해서 맹세하는 것이 더 겸손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맹세를 하면서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을 언급하는 것은 그것들 뒤로 숨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에게 다른 속마음이 더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는 말씀이 있지만, 유대인들은 그것을 못 지킬 가능성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맹세를 했던 겁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맹세는 덜 중요하니 반드시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과 예루살렘으로 맹세를 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으려는 의미도 있었지만, 본인들이 맹세를 지키지 못했을 때를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른 것을 사용했던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3장 16절과 18절에서는 성전과 제단으로 하는 맹세도 언급되는 겁니다.
하지만 하늘이든 땅이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다른 무엇으로 맹세하더라도 결국 하나님과 연관되게 되어 있습니다. 맹세한 것을 지키지 않을 핑계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맹세한다는 것은 사람의 꼼수지만,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 인해서 결국 사람은 맹세한 것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보면, 당시 유대인들의 행동은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라는 말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던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그런 유대인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무엇이든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진실한 삶을 보여주고, 성실함을 보여줘야 함을 가르쳐주고 계신 겁니다.
우리의 말은 맹세 없이도 항상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직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확실히 악으로부터 나는 겁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마귀에게 속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맹세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약속한 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세, 그리고 맹세가 없더라도 상대방을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회와 자세는 예나 지금이나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짓의 아비인 사단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거짓과 속임이 판을 치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무엇인가를 보증으로 맹세를 일삼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이 그렇게 하더라도 우리는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을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약속한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신명기 6장 13절과 10장 20절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했던 것은 맹세하는 사람의 진실됨을 강조하고 말한 것을 반드시 지키고 해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런 말씀의 의도를 부정하거나 금지하신 것이 아닙니다. 원래 구약의 가르침과 동일하게 진실한 말을 할 것과 말한 것을 반드시 지키라는 겁니다. 맹세를 지나치게 사용하는 사람의 말은 진실성에 대해서 의심받게 됩니다.
맹세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는 맹세 없이도 진실함을 증명할 수 있는 삶에서 나오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따라 생각해보면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과 죄악됨을 다시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할 능력도,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능력도 부족합니다. 여전히 우리는 거짓된 맹세를 일삼고, 굳게 약속했지만 지키지 못해서 거짓말쟁이가 되는 때가 허다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경우들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우리의 무능력과 타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장 생각에는 내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맹세하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1분 1초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또 내가 생각했던 일들이 내 생각과는 다르게 진행되어서 약속을 못 지키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을 내 생각대로 이끌 능력이 없기에 맹세를 온전히 지킬 수 없는 겁니다. 오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옳다, 아니다를 하는 겁니다.
맹세를 했다가 지키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거짓말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평상시 했던 모든 말들에 대한 신빙성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가진 복음의 말씀도 사람들에게는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까지도 거짓말쟁이의 신이 되고,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까지도 손가락질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맹세가 필요 없는 존재여야 합니다. 자신의 진실함은 우리를 부르신 그리스도 안에서 삶으로 드러나야 하고,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진실함을 나타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예라는 말과 아니오라는 말로도 사람들에게 믿음직한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진실한 삶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삶입니다.
이제 시선을 돌려서 생각을 해봅시다. 성경에서 맹세를 철저하게 지키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에게 계속해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성실히 이행해 오셨습니다.
아담에게 하신 약속을 노아를 통해서 아브라함에게로 이어가셨고,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25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 이삭이 태어나면서 지켜졌습니다. 사람의 기준에서 시간이 좀 걸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전체에게 다시 선포되었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속 그 약속을 언급하고 확인시켜주시면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고, 십자가에서 죽도록 만드시고,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헛된 맹세와 거짓된 맹세를 일삼을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거짓된 맹세를 하지 말고, “옳으면 옳다, 아니면 아니다”라고 말하라는 겁니다.
교회에서 헛맹세를 하도록 만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작정헌금이나 작정기도회와 같은 것들이 그에 해당합니다. 물론, 내가 헌금을 얼마 내야겠다고 생각하거나, 기도회와 모임에 잘 참석하겠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사실 교회들이 작정헌금이나 작정기도회를 만든 것은 헌금이 잘 걷히지 않기 때문이고, 기도회에 사람들이 잘 참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만드는 것도 문제지만, 이런 것을 만들어야만 교회에서 무엇인가를 하려는 성도들도 문제입니다.
교회에 성도가 등록하고, 교인으로 가입이 된다면, 교회에서 헌금생활에 충실하고, 예배와 교회 모임에 성실히 참여하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이것도 어떻게 생각해보면 일종의 맹세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약속을 잘 지키지 않아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작정하도록 만드는 것이라면 성도의 잘못이 매우 큰 겁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정교인 서약을 합니다. 정교인 서약을 여러분은 잘 지키고 있습니까? 정교인 서약서를 두 장 서명해서 교회에 한 장 남기고, 한 장은 여러분에게 돌려드립니다. 그 서약서를 보면서 여러분의 신앙과 신앙생활을 잘하고, 교회 앞에서 했던 서약을 지키라고 그렇게 한 겁니다.
만약에 서약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옛길교회에 등록하기 위한 과정 중의 하나로만 생각했다면, 여러분은 헛맹세하며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악으로부터 난 행동과 생각을 하신 겁니다. 정교인들은 여러분이 했던 서약을 기억하고 지키기로 힘쓰십시오.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 여러분! 맹세를 해야만 사람들이 믿어주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아는 사람들의 입에서 그 사람은 진실하고 믿음직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나오도록 사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진실하고 믿음직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이끌고, 진실한 존재가 되어가도록 이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말을 꾸미기 위해서 맹세를 사용하는 일을 버리십시오. 우리는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과 행동이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온갖 화려한 말들로 꾸미는 맹세가 아니라, 신실한 말과 그에 따른 행동을 보여야 할 신자들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헛된 맹세로 넘쳐나는 삶이 아니라, 신실한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 앞에 온전함을 나타내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