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합을 향한 아합의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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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왕상 20:35-43
제목: 아합을 향한 아합의 판결
우리는 열왕기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하나님께서 온우주만물을 통치하시고 이끌어가시는 방식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본문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열왕기상 18장에서 20장까지의 스토리를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연결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서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기손 시냇가에서 그들을 모두 처형합니다. 이어지는 19장에서 이세벨은 자신이 엘리야를 내일 이맘때에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말하죠. 그러자 엘리야는 브엘세바 광야 길로 들어가 로뎀 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의 간구를 듣지 않으시고, 엘리야를 호렙산으로 인도하신 뒤에 그에게 세 가지의 사명을 주시는데요. 첫 번째 사명과 두 번째 사명이 오늘 말씀과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사명 첫 번째는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서 아람 왕이 되게 하라는 것이고요. 두 번째 사명은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엘리야의 후임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열왕기상 19장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막중한 사명을 받습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20장 말씀을 보면, 뭔가 좀 이상합니다. 20장 1절 말씀을 보시면, 아람의 벤하닷 왕이 그의 군대를 다 모으니. 열왕기상 19장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받은 첫 번째 사명은,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서 아람의 왕이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20장 1절에서 아람의 왕은 아직도 벤하닷입니다. 여기서 벤하닷이라는 말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애굽의 왕을 바로라고 부르듯이, 아람의 왕을 벤하닷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점에서 20장 1절의 벤하닷은 아람 왕의 이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20장 1절에 등장하는 벤하닷은 벤하닷 2세로 추정됩니다.
다시 열왕기상 19장과 20장을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주시는 마지막 사명인 것처럼 보였는데, 20장에 등장하는 아람의 왕은 벤하닷입니다.
여기서 또 아이러니한 것은, 20장에서 아람과 전쟁하는 대상은 북이스라엘인데, 20장에서 등장하는 북이스라엘의 왕은 아합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설명해드렸듯이, 엘리야가 호렙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두 번째 사명은,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서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20장에서 북이스라엘의 왕은 여전히 아합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열왕기상 20장에는 엘리야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열왕기상 19장 마지막 단락을 보면,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하는데요. 그렇다면 열왕기상 20장에서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가 함께 활동하는 모습이 등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20장에서는 엘리야와 엘리사 모두 등장하지 않고, 선지자 무리 중의 한 사람, 이름도 없는 선지자 한 사람이 등장해서 아합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20장이 끝이 납니다.
마지막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열왕기상 16장 29절에서 등장한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이 열왕기상 19장까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악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합 왕이 열왕기상 20장에서 전쟁을 두 번씩이나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6장 29절부터 열왕기상 19장까지의 흐름을 볼 때, 20장에 등장하는 아람과의 전쟁에서 아합이 전사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역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열왕기상 20장의 아이러니, 성경을 볼 때 모순처럼 보이는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겠습니다.
첫 번째 모순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대로 하사엘이 아람 왕이 되고, 예후가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하는데, 그 말씀이 성취되지 않고, 여전히 악한 자들의 힘과 권력이 이 세상을 쥐고 흔드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역사하시는 분이라고 하는데, 실상은 악한 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실 때, 보이셔야 할 때에는 보이시고, 은밀하게 행하실 때에는 은밀하게 행하십니다.
이어서 두 번째 모순은, 아합 왕의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들 중의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 엘리야 선지자가 열왕기상 20장에 등장하지 않고, 21장에서 나봇의 포도원 사건에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열왕기상 17장부터 등장하는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왕 시대의 주인공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하며, 아합 왕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이 엘리야가 북이스라엘에 홀로 남아있는 선지자이며 유일한 희망처럼 보였는데, 정작 아람과의 전쟁에 관해서는 선지자 무리 중 한 사람이 등장해서 이 사건을 종결시킵니다. 가뭄이나, 불이 떨어지는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만천하에 증명함으로써 사건을 종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비유를 통해, 그리고 아합 왕이 자신의 입으로 스스로 판결내리는 방식으로 사건을 종결시키는 것이죠.
이러한 내용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방법이 우리의 지혜와 생각으로는 감히 측량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이 당장 성취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벤하닷이나 아합 같은 사람들이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권력을 쥐고 전쟁을 일으키고, 자신들의 판단으로 전쟁에 나선 군인들을 죽음에 몰아넣고. 이게 말이 되는가? 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런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높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역대급으로 악한 왕인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을 산의 신이라고 비난한 아람을 박살 낼 때, 아합의 손을 통해 박살 내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이며, 이 사건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아합이 심판의 메시지를 받게 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인 겁니다. 이렇게 우리가 감히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하심이 이 세상에 편만합니다. 예를 들어, 이 세상에 일어나는 수많은 전쟁들? 흉악한 범죄들? 굶주림과 결핍과 질병의 문제들? 수많은 문제들이 즐비하고,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우매하여 보지 못하는 것일 뿐,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셔서 역사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러한 지혜를 열왕기상의 문맥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내용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42절과 32절 말씀을 살펴보고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4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가 왕께 아뢰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아멘.
선지자 무리 중 한 사람이 아합 왕에게 하나님의 판결문을 전합니다.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너의 손으로 놓아주었으니 너의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너의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할 것이다.”
여기서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직역하면, 나의 진멸의 사람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물건이나 짐승이나 밭을 하나님께 드리면,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사용할 것을 우려해서 불사르거나 진멸하는데요. 이것을 히브리어로 헤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말로는 “진멸하다”라고 표현하죠.
본문에 등장하는 아람의 왕 벤하닷은 하나님께서 진멸해야 할 사람으로 정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사람이 바꿀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여호수아 7장에서 아간이라는 인물이 진멸해야 할 물건에 손을 댔다가 자신의 목숨과 자기 가족과 가축까지 모두 진멸 당하지 않았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아람 왕인 벤하닷은 하나님께서 진멸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정해 놓으셨는데, 아합이 자신의 뜻대로 살려주었으니, 벤하닷의 목숨을 아합의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선지자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아합에게 심판의 말씀을 전하자, 아합왕은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43절 말씀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그의 왕궁으로 돌아가려고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로부터 심판 선고를 받은 아합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했을까요? 그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찢으며 회개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심판 선고를 받자 근심하고 답답함을 느낍니다. 이를 원어로 읽으면, “언짢고 화가 나서”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아합이 선지자에게 노골적으로 화를 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만, 그렇다고 그가 두려워서 떨며 회개한 것도 아닙니다. 아합은 그저 선지자의 말 때문에 언짢아했으며, 기분이 상했을 뿐입니다.
왜요? 본인은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구걸하는 사람을 잔인하게 처형시키는 것이 무엇이 좋겠습니까? 어차피 전쟁은 두 번씩이나 대승했고, 아람 왕은 자신의 선조들이 빼앗은 모든 땅을 돌려주기로 약속했으며, 다메섹에서 아합을 위한 거리를 만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이런 사람을 죽여서 무엇 하겠습니까? 살리는 것이 정치적으로 훨씬 더 이득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아합이 벤하닷을 살리는 것이 표면적으로는 대단히 지혜로운 선택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명확했습니다. 벤하닷은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 나의 진멸의 사람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스라엘 왕은 어마어마한 국익을 누릴 수 있는 선택에 대해 하나님을 위해서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 하나님께서 진멸하라고 말씀하신 것만큼은 철저하게 지켜야만 하는 것이죠. 비록 천문학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기회라고 하더라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악인 한 사람을 처형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는 것과, 악인 한 사람을 처형하지 않음으로써 수많은 굶주린 자녀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 이 둘 중에 무엇을 선택해야겠습니까?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아합은 벤하닷을 처형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였으며, 선지자를 통해 받은 말씀을 불편하게 느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아합이 말씀을 듣고 언짢아하고 화를 내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은 과연 아합과 같지는 않은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 66권의 말씀을 살펴보면, 축복의 말씀보다 저주 또는 심판의 말씀이 훨씬 더 많습니다. 또한 좋게 좋게 권유하고 권면하는 말씀보다, 단도직입적인 명령형, 다소 강압적인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그런 명령형의 어조를 선택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좋은 일을 하라고 할 때에도 명령형이 사용되죠.
이러한 점에서 우리가 균형 잡힌 영적인 양식을 먹으려면, 축복의 말씀이든, 심판의 말씀이든, 명령형의 말씀이든, 어떤 말씀이든지 간에 아멘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하며, 아합과 같이 말씀에 대한 반응을 보일 때, 언짢아 하거나, 화가 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말씀을 들을 때, 본인 마음에 들지 않고 불편해서 짜증이 날 수도 있고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런 상태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화가 난다? 그럼 그 화를 스스로 조절해야 합니다. 내가 말씀을 듣고 왜 화가 나는지. 나의 영적인 상태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계속 언짢아하고 화를 내는 상태로 지낸다면,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아합 왕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화평의 성도님들, 오늘 나눈 말씀을 정리하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첫째로, 악한 자들의 즉각적인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나약함 때문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악한 자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승리를 경험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악한 사람이라고 해서 하는 일이 전부 다 예외 없이 실패하고 망하는 것? 그런 일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크신 뜻과 계획에 따라 악한 자들이 당장에 심판 받을 수도 있고, 반대로 그런 악한 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일이 밝히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의 수를 충분히 열어놔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기적을 통해서도 역사하시지만, 아무런 기적이 없이도, 유명하지 않은 사람,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도 충분히 역사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북이스라엘에 엘리야가 있는데, 엘리사도 있는데, 이름도 등장하지 않고, 출신성분조차 분명하지 않은 선지자의 무리 중 한 사람이 아합 왕에게 심판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선택하시고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실 때, 사람의 안목과 식견으로는 감히 판단할 수 없는 방식을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언제든 갈급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아멘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합왕은 선지자에게 심판 선고의 말씀을 듣고 언짢아 했으며 분노를 참아내지 못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반응을 보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사람이기 때문에 up and down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때에는 차갑고, 어떤 때에는 뜨겁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씀에 대해 반응할 때, 언짢아하거나 분노의 반응을 보이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합리화할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실 때에나, 말씀을 받으실 때,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거나, 마음이 불편하시다면, 영적인 건강 상태가 위급하다는 싸인으로 이해하시고, 당장 하나님께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오늘 함께 나눈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일하심이 어떠한지, 그리고 말씀을 받을 때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하는지 묵상하시면서, 우리 주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아멘.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피조물이 감히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일하심을 묵상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때에 따라 악인에게서 크신 뜻을 드러내시는 주님,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주님,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고,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은 순간도 발생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지몽매한 신앙생활이 아닌, 성숙하고 깊이 있는 신앙생활을 통해, 입술로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의 심령을 붙잡아 주시며, 오늘도 어김없이 우리와 동행하시며 선한 길로 인도하실 하나님 한분만을 의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주기도문으로 마친 뒤에 교회를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개인의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시다가 귀하시면 되겠습니다. 주기도문하시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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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C (p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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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 주해 – 김진수 (pp.239)
하나님을 모욕한 자와 조약을 맺는 것은 하나님을 이중으로 모욕하는 것과 같은 행위임. 그러므로 아합이 벤하닷과 조약을 맺은 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음. 이 단락은 아합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선지자적인 상징행위와 비유를 통해 생생하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음. 이 이야기는 세 가지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의 에피소드는 하나로 연결되어 아합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드러내도록 의도된 것으로 보임. 처음 두 에피소드는 아합이 지은 죄의 성격을 드러내며, 세 번째 에피소드를 준비함.
처음 두 에피소드를 살펴보자. 선지자 무리 중의 한 사람, 문자적으로는 선지자의 아들들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 친구 한 사람과 또 다른 한 사람에게 한 일이 각각 소개됨. 이 선지자의 아들은 두 차례 모두 상대방에게 “너는 나를 치라”라는 특이한 요구를 함. 물론 이 요구는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것이었음. 따라서 이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따라야만 하는 요구였음. 그러나 불행히 첫 번째 사람은 이 요구를 거절하여 사자에게 공격 받아 죽음. 두 번째 사람은 이 요구에 응하여 불행을 피함. 그는 선지자의 아들을 상하도록 쳤음.
이 에피소드는 벤하닷을 살려준 아합의 행위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 올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줌. 하나님은 벤하닷을 아합의 손에 넘겨 심판하고자 하셨는데, 아합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벤하닷을 살려주었음. 그러므로 아합이 벌을 받아야 함. 아합의 죄는 선지자로부터 나를 치라는 말을 듣고도 치지 않은 사람의 죄와 동일함. 따라서 아합은 사자의 공격에게 죽은 사람처럼 죽게 될 것.
동시에 이 에피소드들은 세 번째 에피소드를 위한 준비 역할을 함.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선지자는 전장에서 온 자로 행세하며 아합을 만남. 상처 입은 몸으로 아합을 만날 경우 아합이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게 하는 극적인 효과를 얻게 될 것이고, 그 결과 그가 뜻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게 될 것은 자명함.
세 번째 에피소드의 내용.
그가 전장에서 한 사람으로부터 어떤 사람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그만 자신도 모르게 맡겨진 사람을 놓쳐버렸으며, 그 결과 자기 생명으로 맡겨진 자의 생명을 대신하든지 아니면 은 한 달란트를 대가로 지불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는 것. 한 달란트는 대략 3천 세겔에 해당함. 출 21:32에 따르면, 구약 이스라엘에서 노예 한 사람의 값어치는 30세겔이었음. 따라서 은 한 달란트는 노예 100명의 값어치였음.
이 말을 듣고 있던 아합은 너무 단순한 문제라고 생각했는지,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라고 간단하게 대답함. 그러나 선지자가 한 말은 생각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었음. 그것은 바로 아합 자신과 관계된 이야기였던 것. 이는 선지자 나단이 밧세바와 동침한 다윗의 죄를 폭로하기 위해 비유를 꾸몄던 것과 유사함. 선지자가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을 놓쳤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내놓아야 할 입장이라고 말한 것은, 마땅히 심판받아 죽어야 할 벤하닷을 놓아준 아합이 자기 생명으로 벤하닷의 생명을 대신해야 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였던 것.
선지자는 자신의 의도대로 전개되자, 자신의 정체를 드러냄. 그가 변장하고 아합을 찾은 것을 보면, 아합과 일면식이 있었던 사람이 분명함. 어쩌면 그는 앞서 아람 전쟁과 관련하여 아합에게 말했던 선지자였을 지도 모름. 이 선지자는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 42절.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은 벤하닷을 헤렘(진멸)의 대상으로 간주하심. 헤렘의 대상을 아끼는 자는 자신이 헤렘의 대상이 되어 진멸당하게 된다는 것은 정복전쟁 당시 아간의 일화가 주는 교훈이기도 함(수 7장).
선지자로부터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선고받은 아합의 심정은 어떠해야 마땅한가? 통회하며 회개해야 했다. 그러나 열왕기 기자가 알려주는 그의 모습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름. 개역개정에는 “근심하여 답답하여”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원문의 의미는 “언짢고 화가 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아합이 노골적으로 선지자에게 분노를 표출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그가 두려워 떨며 회개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선지자의 말 때문에 언짢아하며 기분이 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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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찬(여호와의 날개 아래 약속의 땅을 향하여 – 834)
왕상 19장에서 하나님은 하사엘에게 기름 부어 아람 왕을 세우라고 하셨고, 엘리사를 선지자로 세웠다면 그쪽으로 역사가 빠르게 진행되어야 할 것 같으나, 실제로 왕상 20장에서 아직 아람 왕은 벤하닷임. 게다가 19장에서 아합은 거의 끝장난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보였으나, 20장에서는 2번씩이나 벤하닷의 군대를 이기고 벤하닷까지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음. 19장에서는 엘리야 외에 여호와의 선지자가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20장을 보면, 엘리야는 물론 엘리사도 등장하지 않고, 선지자의 무리 중 한 사람이 등장함. 결국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조용한 방식으로 왕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고 가심을 보여줌.
결국 전쟁에서 북이스라엘이
승리하였음. 그러나 벤하닷이 아합에게 목숨을 구걸하자 아합이 조약을 맺고 아람 왕을 살려주었음. 이는 여호와의 뜻을 어긴 것. 이에 따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아합에게 선포함.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직역하면 ‘나의 진멸의 사람’임. 물건이나 짐승이나 밭이나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면, 나중에 이를 사람들이 사용할 것을 우려하여 불로 사르거나 진멸함. 이를 헤렘(진멸)이라고 부름. 벤하닷은 하나님이 진멸해야 할 사람으로 정하셨음. 이렇게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에 손을 대면 손을 댄 사람이 여호와께 전적으로 바쳐지게 되고 진멸당하게 되는 것(수 6:18). 우리는 여호수아서에서 여리고 성의 진멸할 물건에 손을 댔다가 자신은 물론 가족과 가축까지 진멸 당하는 모습을 보았음. (수 7장)
하나님께서 벤하닷을 진멸할 대상으로 정해 놓으셨는데, 아합이 살려 주었으니, 그 결과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음. 벤하닷 대신 아합이, 벤하닷의 백성 대신 아합의 백성이 진멸되어야 하는 것.
우리는 여기서 시간이 걸리지만 하나님은 왕들과 선지자들을 동원하여 그분의 뜻을 이루어가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음. 아합의 죽음에 대한 예언은 엘리야나 엘리사가 전하지 않았음.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전했음. 엘리야가 여호와의 선지자가 다 죽고 자기만 남았다고 말한 것이 옳지 않음을 알 수 있음.
한편 아합 역시 단순히 근심하며 돌아갈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누구이신지 몇 번이나 경험하였으니, 그에 맞게 회개하거나 삶의 경로를 바꾸면 될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음. 아합은 그저 근심하며 답답한 마음으로 사마리아로 돌아온 것이 전부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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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C(pp.325)
벤하닷이 목숨을 구걸했고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졌음. 여기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합이 두 번이나 자신과 자신의 백성을 초토화시키려고 했던 오래된 숙적과 조약을 맺는다는 것. 아합이 얻는 모든 이익은 “포획된 성읍들의 반환과 다메섹에 치외법권을 갖는 시장을 세우는 권리”임. 왕상 15장 18-22절에서 점령된 성읍들은 이스라엘에 반환될 것. 그러나 그것은 열성적인 적을 살려 주기로 보장하고 받는 비싼 대가임. 아합은 평화와 우정을 사고 싶어 함. 그는 앗수르인들을 주시하고 있는지도 모름. 그러면서 아합과의 조약으로 자신의 힘이 강해져서 이 위협적인 동부 세력에 맞서기를 바랬을지도 모름. 아합은 실제로 BC 853년에 살만에셀 3세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기 위해 아람과 함께 카르카르로 출정함. 아합은 자신이 자비를 베푼 이점이 무엇이 될 것이라고 상상했든, 곧 자신이 지불할 대가를 알게 될 것.
이름 없는 선지자가 아합에게 비유를 들어 말을 하는데, 아합은 다윗과 같이 자기 스스로에게 판결을 내림. 선지자는 아합에게 하나님이 특별한 상황을 통해 아람 사람들을 넘겨주었을 때, 벤하닷을 놓아주었기 때문에 그가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열왕기상 20장 29-40절에서 사실이 됨. 그의 판결을 들은 왕은 시무룩하고 화가 나서 왕궁으로 돌아갔음. 이런 뾰루퉁한 성향은 생애 마지막 두 주요 에피소드에서 아합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