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05 주일 저녁설교: 사귐; 말씀과 성례로 하나님과 사귐을 경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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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늦은 저녁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서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을 축복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전하는 자나 듣는자나 은혜받고 삶이 변화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0. 서론: 보고 만지지 않으면 잘 믿지 못하는 우리

오늘로서 정한이가 태어난지 이제 51일이 되었습니다. 앞에 보이는 이 사진은 정한이가 뱃속에 있을 때 사진인데요. 한 5개월쯤 되었을 때입니다. 병원에 가서 초음파로 정한이의 심장소리와 손가락 발가락 얼굴 모양을 보여줄 때마다 정말 신기하고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정말 내가 아빠가 되는 걸까? 이 녀석이 정말 태어나긴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9월이 되고 정한이가 태어나기 전날인 14일에는 밤 12시가 가까이 됐을때 아내가 제게 양수가 흐르는 것 같다고 말을 했지만 저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예정일이 한달이나 남아 있기도 했고, 그 전주에 저희 매형이 저희에게 ‘애가 나올 때가 가까이 올수록 침착해야 한다. 절대 당황해서는 안된다’고 말해줬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건 변명이고 이 얘기는 아내가 약간 서운할 수도 있겠지만 솔찍히 그 때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았습니다. 아내에게 ‘괜찮을거야 아직 한달이나 남았잖아?’라고 말하며 그녀를 달랜 뒤 잠을 잤는데 그 다음 날 아침에 아내가 저를 깨우면서 ‘계속 양수가 흘러내려서 병원을 가봐야할 것 같다’고 말하자 저는 반 수면 상태로 짐을 챙겨서 병원으로 갔습니다.
병원에 가서 입원 수속을 밟고 아내와 저는 분만실로 들어갔는데요, 그 때도 긴장은 됐지만 크게 실감이 나진 않았습니다. 분만 대기 시간이 꽤 길었는데,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기다리다가 화장실을 잠깐 다녀왔는데, 그 사이 아내는 소리를 지르고 있더라구요. 분만실을 들여다 보니 아이의 얼굴이 조금 나와 있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서서히 실감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뒤 아내의 엄청난 비명과 함께 정한이가 나오고 아이의 탯줄을 자른 뒤 아이를 안게 되자 ‘아, 내가 진짜 아빠가 되었구나!’ 하며 그제서야 실감이 났습니다.
지금은 너무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고 있고 이렇게 귀여운 척도 할 줄 알며, 또 이렇게 잠도 잘 잡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정말 피곤한 일이지만 저보다 더 피곤하고 고생하는 아내를 생각하며 부족하지만 힘을 내서 내가 더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없는지 신경쓰며 지내고 있습니다.
저의 이야기처럼 대부분의 사람은 감각에 많은 의존을 합니다. 어떤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그 일에 대해 보지 못하면 쉽게 믿지 못합니다. 정한이가 아내의 뱃속에 존재하고 있지만 제 눈으로 직접 보기까지 이 아이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도 요한이 편지를 쓸 때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지 한 세기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성도들 중에는 ‘그분이 정말 오셨는가? 그게 사실인가? 거짓말 아닌가’ 하며 의심을 품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교회에 거짓을 퍼뜨리며 ‘예수님은 실제로 오시지 않았다. 그분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지 않으셨고, 환상이었다’, 또는 ‘영으로 존재하셨다’ 는 식으로 성도들에게 거짓 증언을 했습니다. 교회 성도들 또한 예수님을 실제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설득 당해서 ‘예수님이 실제로 이 땅에 오시지 않았을 수도 있겠구나,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지 않으셨겠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탄생과 존재가 부인된다면, 교회는 존재목적을 잃어버립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세워진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을 알게된 사도 요한은 이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셨으며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고 증언하며 그들의 잘못된 믿음을 교정시키고자 합니다.

1. 요한의 증언; 성육신한 예수님을 경험함

요한이 본문을 통해 증언하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세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며 창조 사역에 동참하셨고, 창세기 3장 아담의 타락 이후 메시야에 대한 약속으로부터 구약의 모든 약속들을 성취하시며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당시 요한의 증언은 교회 성도들에게 매우 믿을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였으며 이 편지가 기록되었을 1세기 후반까지 살아있는 사도 중 한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육신한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그의 말씀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그를 만지기도 했을 것이며, 심지어 그를 포함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만지기도 했습니다. 이에 요한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보고 듣고 손으로 만진 생명의 주님을 교회 성도들에게 전했고, 그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자 이 땅에 성육신하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며 삼일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면합니다.
요한은 그들을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으로 초대하며 이 사귐을 통해서 자신이 누리고 있는 기쁨을 함께 누리자고 말합니다.

2. 구약시대 때 하나님께서 보이신 친밀한 사귐

사실 요한과 동료 제자들이 성육신한 예수님과 가졌던 친밀한 사귐은 그들만 경험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였습니다. 우리가 구약시대를 떠올리면 거룩하고 위엄있는 하나님의 모습과 그분의 말씀을 철저히 지켜야하는 딱딱한 시대로 기억하기 쉽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친밀한 사귐을 가지셨습니다.
특별히 출애굽한 이후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시고, 당신의 임재를 보여주시고, 당신의 은혜를 직접 손으로 만지고 심지어 맛보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천둥과 같은 당신의 음성을 직접 들려주셨고, 당신의 손으로 직접 십계명 돌판을 써주셨으며, 또한 그들에게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당신의 임재를 매일 같이 보여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를 맡고 입으로 맛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보살핌을 경험하며 그분과 친밀히 교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때에도 그들과 함께 하셨으며, 나라를 세웠을 때에도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은 이 놀라운 임마누엘의 축복을 누리며 하나님과 교제하였습니다. 그들은 오실 예수님을 기대하며 하나님과 사귐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당신께서 약속하신 때에, 약속하신 장소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임마누엘의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들의 백성들과 함께 하심으로 임마누엘, 그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과 친밀히 교제하며 사귐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셨습니다.

3. 우리 시대에 성례와 말씀으로 친밀히 다가오시는 하나님,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며 땅에 있는 제자들을 향해 ‘내가 너희에게 성령을 보내서 너희와 항상 함께 하겠다’는 임마누엘의 축복을 보존하셨습니다. 기록된 말씀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이 초대 교회 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는 그분과 교제하며 임마누엘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며 그분과 사귐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적인 은혜로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종종 연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출애굽 백성들과 같이 믿음이 연약해져서 ‘하나님이 어디계시는냐고’ 따질 때도 있고, 그분이 정말 나와 함께 하시는게 의심이 들고 불안해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하나님, 당신이 저와 정말 함께 하고 계시다면 저에게 어떠어떠한 싸인을 보여주세요. 이렇게 해주세요. 아니면 저렇게 해주세요’라는 식의 원망섞인 기도를 할 때도 있습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경험에 상당히 의존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고백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연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이 직접 보여지고, 귀에 그분의 음성이 확실히 들려진다면, 심지어 그분의 몸을 만져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바다위를 걸을 수 있을 만한 믿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성육신하신 예수님과 그분의 죽음, 그리고 부활을 믿는 것쯤이야 너무나 쉬운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은혜를 분명히 경험하고 누릴 수 있도록 제정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례, 즉 세례와 성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돕기 위해 교회에 성례를 허락하셔서 하나님을 느끼며 성육신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난주 3부 예배때 진행했던 세례식을 통해 세례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나의 것이 되었다, 내가 그분과 함께 죽고 살았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세례의 방식은 물에 잠기거나, 물을 붓거나, 물을 찍거나 하는 식으로 다양하지만 의미는 모두 같습니다. 물로 몸을 씻는 것처럼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가 구원을 받았음을 알려줍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물에 잠겨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시켜 줍니다.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세례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세례식을 통해서 우리의 감각으로 그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 확신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오늘 함께 참여한 성찬예식을 통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성도님들이 잘 알고 계시는 것처럼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이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직접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곳에 예수님의 몸이 실제적으로 임하는 것도 아니죠.
성찬 예식을 통해 빵과 포도주를 마시면서 성찬에 참여한 우리는 예수님의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가 기억하고 그 분의 죽으심이 우리의 죄를 위함이었음을 다시 한번더 기억하며 참회하게 됩니다. 포도주의 쓴 맛은 우리의 쓰라린 죄를 상기시킵니다. ‘나의 죄가 이렇게나 썼구나’ 라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포도주의 단 맛은 ‘예수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쓰라린, 더러운 나의 죄가 씻겨지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어졌다’는 기쁨을 상기시키고 감사하게 됩니다. ‘내가 주님의 희생으로 죄사함을 얻고 구원받았구나’를 확신하며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빵과 포도주가 우리 몸에 들어와 양분이 되는 것처럼,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떡, 생명의 피가 되셔서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시고 우리의 믿음을 더 자라나게 하신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그분의 육신을 눈으로 직접 보고, 그분의 음성을 귀로 듣고, 그분의 몸을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없지만 이 거룩한 예식을 통해 빵과 잔을 먹고 마시며 그분의 몸과 피를 기억하며 영적으로 보고, 느끼면서 우리의 오감으로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찬은 이토록이나 우리에게 유익하며 귀한 예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눈으로 보고 맛본 것처럼 우리는 이 예식의 빵과 피를 먹고 마시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맛보게 됩니다.
이 정도만 해도 성찬예식이 너무나 감격스러운데 이 예식은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초대합니다. 예수님의 떡과 피를 먹은 우리는 우리 각자의 몸에 예수님께서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통해 구원받은 우리 몸에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임재해 계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님이 나에게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떡과 포도주를 마신 옆에 앉은 성도들에게도 임재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성찬예식을 통해 나뿐만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지체에게도 성령께서 함께 계심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게 됩니다. 이 거룩한 예식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하나임을 다시 한번더 기억하고 믿게 됩니다. 나뉜 주님의 몸이 우리 각자의 몸에 있고, 그런 우리가 머리 되신 주님 안에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성찬예식을 통해 경험합니다.
이를 통해 사도 요한이 누렸던 하나님과의 사귐을 우리가 누리게 되고, 또한 그가 교회 성도들에게 권했던 사귐을 우리 교회 안에서 누리게 됩니다.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사귀고, 성도과 더불어 사귀며 기쁨과 감사를 누립니다.
우리 구주께서 베푸신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믿고, 또한 그 사랑 안에서 우리가 한 몸을 이룬 형제 자매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장이 바로 이 성찬예식의 현장입니다. 이런 놀라운 메세지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성찬예식을 매주일 예배 때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사정상 그렇게 진행하지 못하는 교회가 대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찬식을 매주 진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예배를 통해, 이 예배에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 구약의 약속들을 따라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며 그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우리의 죄가 씻겼고,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며, 그분께서 심지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허락하신 은혜의 방편 중 또 다른 하나는 바로 ‘말씀’입니다.
기록되어지고 선포되어지는 이 말씀은 성찬과 동일한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성찬의 메세지가 복음이듯이 신구약66권의 메세지 또한 복음입니다. 이 둘이 서로 다른 메세지를 말하지 않고, 또한 이 둘이 각각 다른 은혜를 주지 않습니다. 동일한 메세지를 주며 동일한 은혜를 줍니다. 다만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보다 더 효과적으로 우리에게 이 복음의 은혜를 맛보게 해주는 것이 이 성찬입니다. 어떤 방법이 더 우월하다고 어떤 방법이 더 낮다고 비교할 수 없습니다. 동일합니다.
오늘은 참 감사하게도 제 결혼 기념일입니다. 이제 저는 예배가 마치면 아내에게 줄 선물과 케잌을 준비해서 집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지금 영상으로 예배드리고 있을 아내를 향한 선전포고입니다. 저는 아내가 좋아할 선물들을 준비해서 그녀에게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기념일을 기억해서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해준다고 해서 아내를 향한 제 사랑의 크기가 이전보다 더 커진다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동일하게 사랑합니다. 다만 제가 이 날을 거룩히 기억하여 지켜서 기념일 선물을 아내님께 기쁘게 감사히 드리므로 제가 가지고 있는 사랑을 아내에게 더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겠죠. 그리고 이 선물을 받을 아내는 그 분위기와 선물로 인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사랑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말씀과 성례의 관계가 이렇습니다. 동일한 메세지와 은혜를 담고 있지만, 그 방식이 다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주일 선포되는 말씀과 전반기와 후반기에 시행되는 성례의 시간을 사모하며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주실 은혜를 기대해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처럼 함께 신앙을 고백하는 옆의 지체에게도 있음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한 공동체, 한 가족입니다. 그렇기에 사도요한은 자신의 편지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으니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고,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자들인데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너무 마땅한 일이 아닌가!’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영원한 생명을 받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서로 사랑하는게 마땅할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편지에서 이렇게나 더 적극적으로 말합니다.
1 John 3:16 NKRV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도 그 사랑을 힘입어 형제를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자! 말로 고백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를 알았던 요한은 성도들에게 다시 한번더 촉구합니다.
1 John 3:18 NKRV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과 함께 사도 중 한명이었던 바울은 자기자신을 너무나 사랑하고 자신을 높이며 스스로를 자랑하는 일에 심취했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고린도 후서 10장 13절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2 Corinthians 10:13 NKRV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우리가 분수이상의 자랑을 하지 말자.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범위의 한계에 맞게 자랑하자’ 이 말은 우리가 가진 분수만큼만 자랑하자, 우리가 가진 범위에 맞게 자랑하자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게 된 성도들의 분수와 한계는 어디일까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목숨으로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분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하고 위대합니다. 우리 자랑의 한계는 무한대입니다. 우리의 분수와 한계가 너무나도 위대하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의 분수가 무한할 정도로 크고 놀라우니 스스로를 한 없이 높이도록 해라’ 가 아니라 ‘너희가 세상이 측량 못하고,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 할 수 없이 존귀한 자들이니 세상적으로 자랑하지 않더라도 너희는 이미 존귀한 자들이다. 그러니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더 낮추고 섬기도록 해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자신의 편지에서 함께 증언하듯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우리의 분수는 이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습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분수이며, 무한한 한계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너희는 이 땅에서 약간 비굴해져도 그것들이 너희를 너희의 존재를 손상시킬 수 없다. 그러니 너희의 형제 앞에서 너희가 가진 분수대로 너가 가진 범위의 한계만큼 더 겸손하도록 하라’ 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저는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과 사도 요한이 말하는 것이 같은 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말한 자랑을 사랑으로 바꿔서 이해해 본다면 어떨까요? 우리가 가진 사랑의 분수가, 우리가 가진 사랑의 범위가 무한하다면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그 사랑으로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가족과 교회의 형제와 자매들을 더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감히 말하건데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사귐을 통해 하나님의 기쁨을 누려라; 이것이 복음전도, 이것이 종말의 시대에 누릴 은혜이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가장 근본적이며 건강한 사랑의 모습을 정삼각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의 화면을 보면, 위에 계신 하나님과의 사귐이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자연스럽게 이웃과의 사귐 또한 친밀해 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삼각형이 줄어들겠지요. 그러다 더 친밀해진다면 이렇게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지향점입니다. 교회의 하나됨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그분과 더욱 친밀해질 때 비로소 이뤄질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오늘 본문을 통해 성도들에게 권하는 ‘사귐’이 우리 교회에도 풍성해지길 소원합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누리는 사귐이고,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그 사귐을 누리고 있는 형제 자매들과의 사귐이며, 그 다음은 그 사귐을 누리고 있는 교회와 세상과의 사귐입니다.
이 사귐을 통해서 우리 교회 안에 기쁨이 충만할 때 저는 자연스럽게 복음이 전해지리라 생각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우리의 사귐을 통해 풍성해질 것입니다. 교회 안에 복음이 주는 기쁨과 감사가 충만해질 때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통해 세상과는 다른 특별함과 새로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하림교회가 다가오는 추수감사절 복음 초청을 통해 새롭게 오거나, 또는 오랜만에 오는 사람들에게 그런 복음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는 교회가 되길 소원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충만하고, 그래서 성도들간의 사귐이 충만해서 그 사귐으로 들어오고 싶어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충만한 교회,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교회, 그래서 복음의 향기가 퍼지는 교회, 성도들이 섬기는 이 지역과 깊고 친밀하게 사귀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선포되어지는 말씀과 성례를 통해 그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들려주신, 그리고 맛보게 해주신 이 말씀과 성례를 통해 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확신을 가지며 또 그 사랑으로 서로 교제하는 우리 모든 하림의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침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늘 돌보시는 아버지되신 하나님. 우리의 인생 속에서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당신께서 보여주시고 들려주시고 직접 경험케하시는 말씀과 성례를 통해 당신의 은혜를 경험하고 당신께서 우리와 늘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해주십시오. 당신과 사귐이 기쁨입니다. 당신과의 사귐을 통해 우리에게 허락하신 형제들과 사귀며, 더나아가 이웃들과 교제하며 그들에게 교회 안에서 누리는 사귐의 기쁨을 전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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