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05 저녁]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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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만 죄악 가운데 우리를 건지시고 다시 살리신 삼위하나님의 은혜를 높여 드립니다. 무능하고 부족한 죄인들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여 삼위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며 주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갑니다. 주님 이 시간 드리는 주의 종들의 경배를 받아 주옵소서.
그러나 주님, 이 시간 하나님이 베푸신 크신 은혜 앞에서 우리의 지난 날들을 돌아봅니다. 정말이지 어느 하나 잘한 것도 없고, 내세울만한 것도 없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온갖 악행들에 적극적으로 행하였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에는 무관심했고 외면했던 우리였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크신 은혜를 입었음도 잘 알고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보이셨는지도 알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삶을 요구하시는지도 아는데, 이러한 지식들이 우리의 삶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연약하고 완악하여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나약함을 애통해하며 이 시간, 오직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고통 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지하며 간절히 간구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삼위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쏟아 부어 주옵소서. 죄사함의 확신을 허락하시고, 측량할 수 없는 그 사랑 안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애통하는 자들을 위로하시며, 세상 속에서 여러 문제들로 인해 괴로워하는 자들의 마음에 평안함을 허락하시고, 마음이 상한 자들을 고치시며, 우리 가운데 죽은 영들을 소생케하여 주시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셔서 날마다 우리를 넘어지게 만드는 죄의 소욕을 꺾어주시옵소서. 우리를 주의 피값으로 사셔서 주의 몸된 교회로 부르셨사오니 또한 은혜를 베푸셔서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귀한 사명들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더하여 주옵소서.
하늘본향을 바라보며 이 땅을 살아가지만, 주님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물질의 결핍으로 인하여 고통중에 있는 가정들을 돌보시사 하늘의 창고를 열어 주옵소서. 여러 막히고 얽힌 문제들로 고통스러워하는 가정들에 은혜를 더하사 모든 얽히고 섥힌 문제들을 형통케 하여 주옵소서. 크고 작은 어려움으로 고통 중에 있는 지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고, 관계들로부터 입은 상처들을 주께서 위로하시며, 질병으로 고통중인 환우들과 주님 뵈올 날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마음을 주님께서 붙들어 주시어 주님 뵈올 그 날까지 믿음의 담대함을 지키게 하여 주옵소서. 소망을 품기 어려운 환경에서도 주로 인하여 다시 소망을 품게 하시고, 도저히 꿈을 꿀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그들의 꿈과 비전이 되어 주옵소서. 넘어진 자를 일으켜 주시고, 지친 자를 위로하시고 새롭게 하시며, 힘겨워하는 자를 북돋아주셔서 이 신앙의 경주가 마칠 때까지 주를 위하여 달려가게 하옵소서.
지금도 전 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붙들고 주의 교회 건설을 위하여 수고하는 모든 주의 일꾼들을 기억하여 주시고, 그 땅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워질 수 있도록 사탄의 권세를 막아주시오며, 여러 핍박과 박해 중에 있는 교회를 긍휼히 여기사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 주옵소서.
이시간 주일 저녁예배로 모인 종들의 마음을 붙들어 주시어, 지극히 높으신 주님의 위엄을 바라보게 하시고, 영광의 임재를 누리는 이 시간 되게 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준비시켜 주시고, 선포되는 말씀이 잘 심겨질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경작하여 주시며, 주님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 말씀의 씨를 뿌리실 때에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이 맺혀 농부이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우리가 되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눅15:11-32(신p.121)
오늘 우리가 살펴볼 누가복음 15장은 많은 성경 주석가들이 누가복음의 핵심이자 복음의 정수라고 부를만큼 매우 중요하고도 방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누가복음 15장은 3편의 비유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3편의 비유가 서로 동떨어진 비유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으로 핵심 주제를 명확하게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자, 우리가 ‘탕자의 비유’로 잘 알고 있던 이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앞서 말씀하신 두 비유와 연결해서 말씀을 상고해 보고자 한다.
먼저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자.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하여 수많은 인파가 몰려왔다. 거기에는 세리들과 죄인들이 있었고, 또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었다. 함께 읽진 않았으나 눅 15:1-2 은 이 장면을 보다 생동감있게 전달하고 있는데, 한글번역에는 잘 나타나지 않으나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점점 구름떼와 같이 몰려오고 있다. 계속해서 인원이 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와 비례하여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수군거림도 함께 커지면서 이제는 대놓고 불만을 표출한다.
저들이 주님을 책망하고 불만을 표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님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는 이유였다. 왜 저들은 주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하심에 대해 불만을 갖는가? 랍비의 교훈 중에 “토라에 죄인들을 가까이 데리고 오지 않는 것처럼 이러한 죄인들과 사귀지도 말지니라” 라는 자신들만의 규정과 전통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정한 규례와 전통을 지금 따르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이 배경 속에서 예수님은 3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데, 곧 잃어버린 양 비유, 잃은 드라크마 비유, 그리고 오늘 본문인 탕자 비유였다.
간략하게 정리하면서 넘어가자면, 먼저 잃어버린 양 비유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공통으로 기록하고 있는 비유인데, 여기서 핵심은 무엇이냐, 마태복음에서의 잃어버린 양과 누가복음에서의 잃어버린 양이 서로 다르다라는 것이었다. 마태복음에서의 잃어버리다 라는 단어는 ‘플라나오’ 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길을 잃어버리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누가복음에서의 잃어버리다 라는 단어는 ‘아폴뤼미’ 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멸망과 파멸’ 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마태복음에서는 양이 스스로 길에서 벗어나 길을 잃어버린 것이라면, 누가복음에서는 양이 처음부터 길을 알지 못하여 결국 멸망과 파멸의 길로 들어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각 복음서의 대상들을 고려해서 해석해야 하는데, 마태복음의 대상은 유대인이었고, 누가복음의 대상은 이방인이었다면, 결국 이 비유는 복음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실족한 자들, 그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되찾기 위해 목자가 나서는 것이고, 복음에 대해 처음부터 알지 못하여 멸망과 파멸의 길로 들어선 이방인들, 그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되찾기 위하여 목자가 나선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침내 목자가 그 잃은 양을 되찾았을 때에 너무나도 기뻐하여 벗과 이웃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이게 된다.
드라크마 비유도 마찬가지였다. 노동자 하루 품삯에 불과한, 오늘날 단위로 환산하면 7만원 정도 되는 비교적 작은 액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되찾은 그 기쁨으로 인하여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이게 된다. 양 한 마리의 가치가 대단해봐야 얼마나 하겠는가? 심지어 드라크마의 가치는 그보다 훨씬 낮을텐데, 이거 찾았다고 동네 사람들 모아서 잔치를 벌인다? 여러분 아무리 생각해도 수지타산이 안맞는 이 일을 왜 하는건가? 그것은 잃었다가 찾는 그 기쁨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이 세 가지 비유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그리고 동일한 주제로 오늘 본문의 말씀이 시작된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동일한 주제로 엮여있지만 결코 그 주제만을 말하지 않고, 총체적인 핵심을 담고 있다. 잃어버린 한 마리와 남은 99마리,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와 남은 아홉 드라크마, 잃어버린 아들과 남아있는 아들. 숫자들을 다시 생각해보라. 1:99, 백 마리 중에 하나이다. 당시 고대근동 사회에서 이렇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목자가 길을 떠나는 것은 종종 있었던 일이기에 이 비유를 듣던 자들은 "그래 그럴 수도 있다" 생각 했을 것이다. 두번째 비유, 1:9, 열 개 중에 하나이다. 한 드라크마가 오늘날로 말하면 7만원 정도 되는 가치인데, “아니 이거 하나 찾았다고 동네 잔치를 벌이나?” 약간 의구심이 들게 된다. 마지막 비유, 1:1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읽을 때에는 참 은혜롭다고 여길 수 있지만, 사실 이 비유는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던 개념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이해가 되지 않았을까? 이 부분은 오늘 본문의 비유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그동안 이 비유를 "돌아온 탕자 비유"로 알고 있었다. 탕자, 즉 둘째 아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서 주일학교부터 이렇게 들어왔다. 그리고 최근들어서 이 비유의 초점이 첫째 아들에게로 옮겨갔다. 둘째 아들은 저렇게 해서 돌아왔는데, 첫째 아들은 돌이키는 장면이 없다. 그래서 진정한 탕자가 둘째 아들이 아니라 첫째 아들이라는 식의 해석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심에 서 있으면서 나머지 앞의 두 개의 비유와 관통하고 있는 한 사람, 그 사람이 누구일까? 바로 “아버지"이다. 당시 이 비유를 듣던 많은 유대인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바로 그 한 사람, 바로 이 아버지였다. 이 비유 속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참으로 특이한 아버지였고, 당시 사회 통념상으로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던 아버지였다. 그렇다면 이 아버지의 어떠한 면이 특이했을까?
첫째로, 주저하지 않고 재산을 나누어주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 11-12절을 보라.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더니” 당시 유대인 위경 ‘벤시락’이라는 책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아들이나 아내나 형제나 친구에게 네가 살아있는 동안 네 재산을 주지 말라’ 라고 되어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그가 살아있을때 재산을 나누어 준다면 아버지는 그의 명예, 위치, 생활보장, 재산관리권을 모두 빼앗기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 아닌가? 부모의 유산 문제로 형제들 간에 얼마나 많은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는가? 또한 이 재산을 미리 받게 되자 부모를 더이상 공경하지 않고 방치해버리는 사례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사람은 누구나 악하기에 오늘날이나 그 당시나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본문속의 ‘아버지’는 두 아들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각각 나누어주었다. 둘째만 받은 것도 아니고 첫째도 함께 받았다. 둘째 아들의 말도 안되는, 폐륜적인 요구에 첫째 아들은 중재하지 않고 그도 역시 자신의 분깃을 받았다. 이처럼 재산 분할 요청도 수용되기 어려웠지만 아버지는 주저하지 않고 주었다. 당시의 법적 관습으로 보면 아버지가 재산관리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상속받을 재산을 분할 받았다 할지라도 이를 아들이 자기 마음대로 되파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재산들을 소비할 수 있게까지 허락하였다. 13절 말씀을 보면, “그 후 며칠이 안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라고 기록되어 있다. 자신이 아버지께로 받은 재산들을 다 현금화하여서 그 돈을 다 긁어 모아가지고 이방 땅으로 가서 탕진하기 시작한다.
당시 주님의 말씀을 듣던 유대인들은 이 비유 속에 등장하는 아버지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어떻게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재산을 아들들에게 나누어 줄 수가 있는가? 이해되지가 않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어떤 아버지’는 하나님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어떤 목자 역시 하나님이다. 잃어버렸던 한 드라크마를 되찾은 기쁨으로 동네 잔치를 벌이는 이 여자도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아들에게 주저하지 않고 재산을 나누어주는 이 아버지가 어떻게 하나님을 가리키는가? 다시 12절을 보라.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 을 각각 나눠주었더니” 둘째 아들의 요청에 따라 아버지는 그 살림을 나누어준다. 그런데 여기서 ‘살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βίος’인데, 이 단어는 ‘재산’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지만, ‘삶, 생명’ 이라 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 아버지는 망나니 같은 아들을 위하여 자신의 삶,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고 있다.
이 망나니같은 아들은 어떤 아들인가? 아버지에게 경거망동히 행동하여, 아버지가 살아계신대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할당된 유산을 요구했던 불효자식이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지만 죽은 것처럼 취급하여 자신이 상속받을 분량을 미리 내놓으라 했던, 못된 아들이다. 이방 땅으로 가서 받은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소진해버린 아들이다. 30절 말씀을 보니, ‘창녀들과 음탕하게 노는 일’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허비해 버렸던 밑바닥 인생을 살던 자식이다. 이런 음행한 아들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삶,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주었다.
비유 속의 “어떤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키고, 이 아들은 곧 저와 여러분을 가리킨다. 창녀들과 함께 영적 음행을 저지르던 자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었다. 갈 곳을 알지 못하여 기진하게 쓰러졌던 그 한마리의 양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었다. 도대체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며, 살아계시나 죽은 자로 취급하던 그 악랄했던 탕자가 바로 우리였다. 그리고 이처럼 패역한 우리를 위해 하늘 아버지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다. 그리고 영적으로 음란했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마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나누인 것처럼 그 몸을 쪼개셨다. 과연 성경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셨다. ‘삶’이 라는 것이 무엇인가? 과거부터 살아왔고, 또한 지금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모든 순간들을 말한다. 그런데 그 “삶”을 그리스도께서는 잃어버린 자녀들을 위하여 단번에 아낌없이 쏟아내셨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잃어버린 자식을 향한 ‘어떤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특이한 모습, 두번째는 돌아온 둘째 아들을 적극적으로 맞아주었다는 것이다. 이 탕자같은 아들이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보라. 창녀들과 놀아나며, 방탕한 삶을 살았던 둘째 아들은 가진 재산을 모두 허비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진 재산을 모두 허비하였을 때에 그 나라에 큰 흉년이 임한다. 마치 하나님 날개 품을 떠난 나오미 가정이 만났던 그 흉년처럼 말이다. 이 둘째 아들은 14절 말씀과 같이 궁핍해졌다. 여기서 ‘궁핍하다’라는 단어가 롬3:23 에서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로마서의 본문을 보면, 모든 사람이 범죄하여 하나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던 인류의 상황과 연결시키고 있다. 둘째 아들 의 방탕한 삶이 아버지의 영광에 결코 이를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음을 말씀한다.
결국 가진 것이 바닥난 이 불쌍한 아들은 15절 말씀처럼, 이방인 중 한 사람에게 빌붙어 살게 된다. 당시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서 이방 땅에 살더라도 꼭 자신들끼리만 모여 살곤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저주받은 백성들로 여겼고, 오직 자신들만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으로 여겼다. 그런데 어쩌다 비유 속의 둘째 아들이, 그것도 유대 문화권에서 자라서 누구보다 유대인들의 사상을 잘 아는 이 아들이, 타국에서 이방인에게 빌붙어 살게 되었는가? 당연히 이 아들이 타국에 나가서 살았더라도 뜻이 있었더라면 유대인 공동체를 찾아서 그 안에서 함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아들이 어려움에 봉착하자 유대인들을 찾지 않았던, 아니 못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가 많은 재산을 가진 채로 타국에서 사는동안 단 한번도 유대인 공동체와 접촉을 안했을 것이다. 유대인 스러운 모든 종교의식과 경건생활과는 동떨어진 채로 이방인들과 아무 구별없이 방탕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러니 무슨 낮짝으로 이제와서 유대 공동체를 찾아가 도움을 구하겠는가?
결국 그는 이방인들을 찾아갔고, 거기서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된다. 유대법 상 그토록 부정한 짐승이던 돼지를 기르는 일을 맡았다. 유대인으로서의 자존감이 무 너지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돼지들이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려까지 하게 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까지도 무너지는 순간이다. 이 불쌍한 아들은 인생의 밑바닥까지 추락하고 만다. 그리고 그제서야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된다. 17-19절 말씀을 보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 아들이 뭐라고 고백하는가?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아버지를 떠나 살았던 모든 순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문란한 삶이었음을 인정하며, 자신이 행했던 모든 행동들이 아버지께도 몹쓸 짓이었음을 회개하고 있는 것이다.
자.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 아들이 회개하여 아버지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패배자처럼 터덜터덜 고향 땅으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주렸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지금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과 비참함 가운데 울먹이면서, 예전에는 많은 돈을 거머쥔채로 당당하게 걸어갔던 길을 초라하게 되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20절에 “아직도 거리가 먼데....” 즉 이 아들은 아직 아버지의 집에 도착하지 못했다. 아직도 아버지 계신 곳까지 거리가 한 참이나 남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먼저 보고 달려나왔다. 갈길이 아직도 태산인데, 아들이 회개의 발걸음을 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버지가 먼저 찾아나와 그를 맞이한 것이다.
이에 아들이 아버지께 뭐라고 말하는가? 21절 말씀을 읽어보자.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니” 우리가 앞서 19절의 말씀을 읽었다. 19절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면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했던 내용인데, 막상 만나뵈었을 때, 21절에서는 말씀드리지 못한 내용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찾으셨는가? 바로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21절에서 그 고백이 빠져있다. 그는 왜 이 말을 못했는가? 내가 죄를 짓긴 했지만 차마 품꾼으로 삼아달라고는 말 못할 것 같아서? 그렇지 않다. 이것은 아들이 미처 그 지은 죄들을 전부 아버지 앞에 고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겼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들은 분명 이 모든 것을 말씀드리려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미 아들의 마음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옷, 가락지, 신발 이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신분의 회복이다. 돼지가 먹는 열매나 줏어 먹던 그 아들의 처지가 어떠했겠는가? 정말로 비참해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가장 좋은 옷과 가락지와 신을 신겼다는 것은, 다시 이전의 영광스럽던 "아버지의 아들"로 신분을 회복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본문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으나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찾아가 안아준 것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물론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또 다른 아주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이 아들이 마을 사람들로부터 수치를 당하지 않게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당시 유대 공동체는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누군가 범죄하거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을 했을 때에는 가차없이 그 손상된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노력했다. 지금 이 아들의 행위는 마을 사람들을 분노하도록 만들었고, 누구든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이 아들의 모습을 봤다면 그 아들을 때리고 손가락질 하며 수치를 주기에 합당하였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아들을 맞아주고 신분을 회복하게 한 이후에 살찐 송아지를 잡아 마을 잔치를 열어서 마을 사람들과 아들이 화해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당시 이 비유를 듣던 많은 유대인들은 비유속의 ‘아버지’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아버지를 모욕하고 가볍게 여긴 이 불효자식을 어찌 아버지가 언제 돌아오려나 노심초사 마을 아귀만을 쳐다보고 있었으며, 또한 아들이 찾아왔을 때 그 반가움과 애틋함으로 인하여 달려 나갔으며, 혼을 내거나 벌을 주지 않고 바로 신분의 회복과 더불어 화해의 잔치를 베풀 수 있단 말인가? 이 이상한 아버지는 100마리 양 중에 한 마리만 잃어버려도 온 동네를 뒤져서라도 찾기까지 찾으시는 아버지였다. 하찮은 동전 하나를 잃어버려도 그것을 부지런지 찾아내고, 그 찾은 기쁨으로 인하여 그 되찾은 동전의 값어치와는 비교도 안될만큼의 큰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이시며, 또한 32절 말씀과 같이 “아버지의 품을 떠나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 잃었다가 다시 얻은 그 기쁨으로 인하여 체면이나 주변상황에 아랑곳하지 않는 아버지이다. 이상한 아버지이다.
그런데 그 아버지께서 오늘날에도 잃어버린 자녀들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계신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언제쯤 나의 품으로 돌아올런지, 계속해서 기다리시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이다. 언젠가 회개한 자녀들이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며 돌아올 순간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아버지이다. 회개하며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려는 자녀들이 아직 아버지의 품까지 거리가 많이 남았을지라도, 그들에게로 먼저 달려가시는 아버지이시다. 죄로 오염되어 여기저기 죄의 악취가 나며, 제대로 말씀을 먹지 못하여 더럽고 추한 몰골로 찾아올지라도,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가장 좋은 옷과 가락지와 신을 신겨주심으로, 또한 송아지의 흘린 피와 같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히심으로써 ‘영광스러운 아버지의 아들’ 이라는 놀라운 신분을 회복시켜주시는 아버지이다. 세상 어떤 아버지가 이러한 사랑을 나타내시는가? 이 아버지는 세상의 시각으로 결코 이해되지 않는 아버지이다.
이 ‘아버지’의 특이한 모습, 마지막은 첫째 아들까지도 사랑으로 품어주셨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도로 얻은 그 기쁨으로 인하여,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의 화해를 위하여 잔체를 열었다. 마침 그 때 큰 아들이 집으로 돌아온다. 이 때 큰 아들은 한 종을 불러서 자초지종을 듣게 되는데, 이 때 큰 아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28절 말씀을 보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만든 화해의 잔치에 큰 아들은 입장을 거부하고 있다. 둘째 아들의 회복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 아들은 왜 이를 거부하며 노하고 있는가? 그 역시도 12절에서 “아버지의 분깃”을 함께 받았던 악랄한 아들이 아니었던가? 그가 동생과 다를 바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런데 이 모습을 본 아버지는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28절 말씀 후반부를 보니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라고 말씀한다. 이 비유를 듣던 많은 유대인들은 이 부분만큼은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는다. 어떻게 아버지가 이토록 패역한 장남을 달래러 밖으로 나와 권할 수가 있는가? 고대 유대법에 따르면 아버지는 배반한 아들을 최악의 경우 사형까지도 시킬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다른 마을 사람들을 대접하기를 멈추고 분노한 큰 아들을 달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온 행동은 둘째 아들을 향하여 달음질한만큼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아버지가 결정한 사항이고, 아버지의 재량으로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아버지를 거부하는 것이요, 아버지를 배반하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아주 괴씸한 아들이다. 자기가 노할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31-32절을 함께 읽 어보자. “이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괴씸한 큰 아들에게 이 이상한 아버지는 직접 찾아나와서 “얘야” 원어로는 매우 사랑스러운 표현이다. 그러면서 죽었다 살아난 이 아들을 다시 얻음으로 아버지만 기뻐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그를 권한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것으로 끝마친다. 큰 아들이 아버지의 권면을 듣고 다시 뉘우치고 돌이켰는지 결론이 없다. 우리는 이 비유를 흔히 ‘탕자 비유’ 라고 부른다. 두 아들 중에 누가 탕자인가? 첫째일까? 아님 둘째일까? 그리고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강하게 강조하시는 부분이 ‘두 아들들’에게 있는가? 아니면 ‘아버지’에게 있는가?
이 이상한 아버지는 자신을 배반하고 거역한 첫째 아들에게까지 극진한 사랑의 표현을 베푼다.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것이 다 네 것이다” 큰 아들은 한번도 아버지의 품을 떠난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둘째 아들의 방황이 그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큰 아들도 둘째 아들과 우열을 가릴 수 없을만큼 질 나쁜 아들이라는 것이다. 둘째 아들이 자기 분깃을 요구할 때, 그 말도 안되는 요구를 들으면서도 중재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이 자 기 분깃을 받을 때에 거절했어야 마땅할 큰 아들도 함께 받았다. 둘째 아들이 다시 돌아와서 죄를 뉘우쳤을 때에 아버지는 잔치를 베풀면서 화해의 장을 마련하였지만 첫째 아들은 그 은혜 마저 거부하였다. 단 한순간도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둘째 아들보다 먼저 아버지의 품을 떠나버렸던 아들이 바로 첫째 아들이었다.
이 비유를 놓고 볼 때, 큰 아들은 누구를 의미하느냐, 그리고 둘째 아들은 누구를 의미하느냐. 물론 큰 아들은 당시 유대인들을, 둘째 아들은 복음의 외인이었던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은 아들들이 아니라 바로 아버지이시다. 두 아들 다 질이 떨어졌고, 두 아 들 다 아버지를 배반하였으며, 두 아들 다 아버지를 떠났다. 그러나 이 이상한 아버지는 끝까지 아들들을 붙잡으셨고, 돌이키도록 말씀으로 권면하시면서 부르신다. “사랑하는 얘야...”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격없는 자녀들을 말씀으로 권면하시며 돌이키게 하신다. “돌아와 돌아와 집에 돌아오라 모든 것 풍성한 아버지 집으로 집을 나간 자여 어서와 돌아와 어서와 돌아오라(찬525)”
이 이해되지 않고 납득조차 할 수 없는 이상한 아버지께로부터 한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여러분, 세상은 이 아버지를 이상한 아버지요, 미련한 아버지라고 손가락질하지만, 은혜받은 사람은 그 은혜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아는 법이다. 사랑받는 자는 그 사랑의 너비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아는 법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99마리를 제쳐두고 그 한 마리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나시는 아버지,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으로 동네방네 기쁨의 잔치를 열 정도의 수지타산을 할 줄 모르는 것 같은 미련한 아버지, 두 아들놈들 다 아버지의 편에 선 적이 없는 것 같음에도 끝까지 용서하시고 두 아들을 다 맞아주시고 용서하신 그 바보같은 아버지가 바로 여러분의 아버지이심을 믿으시길 바란다.
저희 집 딸이 화요일이면 100일이 된다. 뒤늦게 얻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요즘 딸바보로 살고 있다. 여러분, 아버지로서 어떤 순간이 가장 감격스러우셨던가? 저는 개인적으로 이 딸이 아빠의 음성을 알아듣고, 아빠의 얼굴을 바라보며 빵긋 웃어줄 때, 그렇게 아빠의 품에 안겨서 제 손가락을 잡을 때가 정말 행복하고 감격스럽더라. 세상의 모든 부모가 그렇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 하늘아버지께서는 어떤 때 가장 기뻐하실까? 어쩌면 우리가 매일 그분의 사랑 안에서 감격하며, 아버지의 말씀에 반응하며, 아버지의 손을 붙잡을 때가 아닐까?
그러므로 오늘 교회당 문을 나서며 이제 시작될 한 주 동안 더욱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며 간구하는 우리가 되자. 이 험한 나그네 인생길 가운데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 외에 의지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 광야와 같은 인생길 가운데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 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매일 매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 속에서 더욱 아버지의 사랑을 의지하며, 그 사랑을 경험하시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함께 기도하자. 주여, 우리의 나그네 인생길 가운데 나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더욱 알아갈 수 있길 원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운데 우리를 향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더욱 경험하길 원합니다. 날마다 그 사랑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사 그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덮으시고 어떠한 환경과 역경도 초월하시며 모든 것들로 합하여 마침내 선을 이루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매순간마다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이해와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는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아둔하고 무능하며 더러운 우리는 도저히 거룩하신 아버지의 아들들이라 일컬음받기에 합당하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오직 우리를 거룩하게 씻으시고 정결하게 회복하시며 무한한 영광 가운데 영접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뿐임을 고백하며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바라옵기는 우리의 평생에 이 위대하신 사랑을,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매일 우리를 향해 부어지는 놀라우신 자비하심을 더욱 깨달아 알길 원합니다. 더욱 경험하며 살길 원합니다. 그 은혜와 사랑에 온전히 사로잡힌 채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우리가 앞서 찬양했던 고백처럼, 나 사는동안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며 송축하는 삶을 살도록, 주의 종들에게 은혜를 부어 주옵소서.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