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널 수 없는 깊은 골(Cha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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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몇년전, 전 세계에 내노라는 리더들이 한 자리에 모인 적이 있습니다. 일부러 모으기도 힘든 정재계 인사들이 모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모임이 다보스 포럼이나, G7과 같이 공적인 모임이 아닌 한 사람의 결혼식 하객으로 모였다는 것입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과 토니 블레어 전 영국총리, 순다르 피차이 구글 최고경영자(CEO),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MS) 최고경영자, 인도 최고 인기 배우 아미르 칸 등이 참석했다. 그리고 삼성 이재용 부회장은 인도 전통복장을 입고 참석 했습니다.축가는 비욘세 등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들로 채워졌습니다. 인도의 최고 부자 이자 아시아 최고 부자인 무케시 암바니 인도 릴라이언스 그룹 회장의 장남 결혼식 이었습니다. 일반인들의 결혼식도 조금만 신경 써서 해도 돈이 많이 드는데, 총재산 61조의 부자에게는 이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사는 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전혀 다른 세계 처럼 느껴집니다. 원하는 것은 모두 돈으로 할 수 있는 저 사람들의 세상에서 자유와 평화 박애와 같은 인류 공통의 가치와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처절한 러브스토리가 어떻게 다가갈까요?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아주 크고 깊은 골이 존재 합니다.빈부격차의 깊은 골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나라와 나라, 사상과 사상 그리고 종교와 종교 간에는 넘을 수 없는 깊은 골짜기가 존재 합니다. 오늘은 이 극복할 수 없는 크고 깊은 간극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건널 수 있던 골(Chazm)
1. 건널 수 있던 골(Chazm)
오늘 읽으신 본문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주시는 비유의 말씀 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는 실제 있었던 인물들인지 알 수 없지만 천국과 지옥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 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에는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간략히 요약해보자면 이렇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화려한 자색옷과 베옷을 차려 입고 매일 연회를 즐기며 매일 호화롭게 인생을 즐깁니다. 요즘 길을 걷다보면 쉽게 볼 수 있는 자카란다 색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여담으로 여기서 자색 옷은 아주 고가의 옷이며 높은 신분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영어 표현에도 ‘Born in the purple’
우리 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라는 표현과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생에서 가질 수 있는 풍성한 것을 최대한 누렸습니다.
반면에, 나사로 라고 하는 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음식 찌거기를 얻을까 하여여 그 부자의 집앞에 상주 하였습니다. 몸도 성치 않아 온 몸이 헐었고 그 헌데를 거리의 개들이 핥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렇게 이 두사람은 죽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2절의 표현에 따르면, 이들의 죽음은 이승의 삶 만큼이나 극단적으로 갈립니다.
부자의 몸은 그저 죽어 장사되었습니다.
대조적으로, 나사로는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 라고 말씀 하십니다.
저의 모교회 존경하는 어르신 께서 항상 하시던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인생은 마라톤이고 죽음은 한순간 전능자가 나타나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뒤로 돌아갓!” 그 순간 꼴지가 선두가 되고 선두가 꼴지가 되는 것이 죽음의 순간 이다.
초라하고 비참한 삶을 살던 나사로는 영광스러운 천국에 갔는데 세상에서 떵떵데며 잘 살던 부자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두 사람의 입장이 완전히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이 부자의 몰락을 바라보며, 그저 1차적으로는 통쾌해 할 일만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진정한 교훈은 부자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왜 나사로는 천국에 갔고 부자는 지옥에 갔을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결론 부터 말씀 드리자면,
오늘 설교의 제목 처럼, 이 부자는 크고도 깊은 구렁텅이를 생전에 넘지 못했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인생의 연수는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고 하는데, 이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 입니다. 참 진리를 깨닫기 위한 순례의 길이며, 영생의 답을 찾는 여정 입니다.
예수께서 오늘, 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하시게 된 계기는 바로 앞 단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 때문이었습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서 얻은 재물은 나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재물은 친구를 사귀”는데 써야 한다고
또한 죄의 빚진 자들을 예수께 인도하는 일에 이 불의한 재물을 써야 하고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동참하는데 써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바리새인들은 비웃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비웃다' 에크묵 떼리죠 라는 단어에는 그저 비웃는 것이 아니라 조롱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를 걸쳐 가장 많은 구원의 기회와 가르침의 기회를 받은 사람들 중에 하나였던 바리새인들이 왜 그 당시까지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못하고 비웃고 대적하는지
예수께로 오지 못하게 하는 넘을 수 없는 골, 구렁텅이가 무엇인지 그 근본적인 이유를 말씀 해주십니다.
그것은...
“돈을 좋아 하는 자들"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주님은 부자를 바리새인에 비유 하신 것입니다.
부자가 지옥에 이른 것은 단순히 그가 부를 누리고 즐겨서가 아닙니다. 자색옷을 입고 고운 베옷을 입어서도 아닙니다. 그는 그 부에 취한 사람이었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에 크고 깊으며 건널 수 없는 골을 만들었기 때문 입니다. 그 골은 너무 넓고 건너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리적인 거리는 그저 내 집 안방에서 현관문 까지의 짧은 거리였지만 영적인 거리는 어마어마 했습니다. 내 눈앞에서 누군가가 굶어죽어가고 있고 온몸이 헐어 개들이 핥는 지경이 되도 알 수 없는 영적 상태이며 동정심이나 공감능력이 마비된 상태는 곧 영적으로 죽은 상태와도 같았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자신의 배를 불리고 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재물을 축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던 자들이 바로 당시 종교지도자 였고 정치인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그들의 종교적, 사회적 위력 앞에 나사로 처럼 무력했습니다.
또한 말씀과 제사에 열심을 가졌던 그들이 아무런 성찰도 없이 스스로를 의롭게 여긴 것에 대한 예수님의 통렬한 지적 입니다.
로마서 10:1–2 (KRV)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열심은 있으나, 하나님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느냐 보다 종교적 열심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겸손해지는 것인데, 종교적 의무를 열심히 함으로서 스스로 의롭다 착각하고 더 나아가, 세속적인 부를 누리려고 악을 행하고 18절의 말씀 처럼 성적인 문란함 까지 범한 것으로 보입니다.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들의 돈을 좋아함과 스스로 옳다 함은 절대로 복음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복음과 그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크고 깊은 골이 존재 했습니다.
적용
:우리는 어떻습니까?
현대 기독교를 진단하는 많은 말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이 있습니다.
복음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분리
복음과 삶의 분리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이 말하는 복음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성찰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의 삶처럼, 사랑하고 용서하고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야 합니다.
우리는 돈의 노예가 아닌, 예수님 처럼 댓가 없이 베풀고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야 합니다.
부자와 나사로, 바리새인과 예수님 그 사이에 넘을 수 없어 보였던 그 골은 사실은 열려 있고 다리를 놓을 기회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죽기전 까지 우리는 기회를 부여 받았습니다.
그 크고 깊어 보이는 골은 사실 저승에서 만나는 천국과 지옥 사이에 넘지 못하는 골에 비할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시기 전까지 주님을 만났고 깨달음을 얻을 기회를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도 오늘을 살면서 값진 기회를 얻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돈을 열심히 벌되 좋아하면 안될까요?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찌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돈의 습성 때문 입니다.
돈은 처음에는 아주 작은 영향력을 갖고 있지만 그 돈에 한번 마음을 빼앗기면 우리의 모든 가치관과 삶의 태도가 송두리채 변질 되기 때문 입니다.
돈의 습성은 절대적 만족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독수리 처럼 날아가 버립니다.
돈은 바닷물과 같아서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나보다 더 많은 사람을 보면 금새 불행해집니다. 오늘 본문에 악인이 받는 음부의 징벌이 묘사 되어 있습니다. 멈추지 않는 불꽃 가운데 타들어가는 목마름은 부자로 하여금 천국을 향해 도움을 청하게 만듭니다.
폴 메튜 주석에서는 “저주 받은 영혼들이 음부에서 느끼는 고통 중의 상당부분은 자신들이 현세에서 멸시하고 깔보고 학대하였던 사람들이 자신으로 부터 받은 고난을 발판으로 삼아 저 복된 곳으로 신속하게 가서 지극한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으로 부터 생겨난다"
자신이 멸시하고 무시 하던 사람들이 천국 간 모습을 보고 땅을 치고 후회하는 것이 가장 고통으로 다가 온다는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가치관은 신앙생활도 경쟁으로 만듭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고린도 교회는 로마시대의 가장 번성한 도시 중에 하나니인 코린토스에 있었습니다. 고린도 전서가 인사말을 마치자 마자 그 시작을 아주 강력한 권고로 시작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만큼 강력한 세속의 도전에 직면 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워낙 코린토스가 경제적으로 번성하였던 메트로 폴리스 였기에 당시 세속적인 경제 논리와 경쟁논리가 교회 내에서도 나타나고 있었고 이것을 경고 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고린도 전후서 입니다.
누가 더 힘이 더 쎄냐 돈이 더 많냐에서,
이제 교회 내에서 누가 방언을 받았냐 누가 예언을 하냐 누가 높으냐 누가 더 신령하냐 등등으로 경쟁하는 변질 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씀이 그중에 제일은 ‘사랑' 이라는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누구 장로 아들이 서울대를 갔다더라 누구 집사 딸이 부잣집에 시집을 갔다더라 강남에 얼마짜리 아파트를 샀다더라 등등의 대화에서 더 나아가, 누가 방언기도를 더 오래 하나? 누가 예언의 은사가 있나? 누구 한테 기도를 받더니 사업이 잘됐다더라 등등 이건 세속적인 대화인지 영적인 대화 인지 헷갈리는 상황이 고린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형제 간에도 서로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어느 자식이 더 잘사나 경쟁하고 더 나아가 교회에서 누가 중직을 맡나로 경쟁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결국은 그 근본에는 욕망이 있었고 그 욕망을 신앙으로 잘 버무린 이상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 당시 고린도 교회 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자의 관심사는 오늘 연회에 입을 옷과 무슨 음식을 먹고 누구를 초대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대한 관심은 없었습니다.
돈은 사람들로 하여금 중요한 영적 감각기관을 마비 시킵니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것이 최상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하지만 가장 행복한 것은 사랑에 둘러 싸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내 마음 대로 나를 위해 쓰는 것이 무엇이 문제 인가요?
내 자식들 편하게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 인가요? 반문 할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정당한 노동의 댓가와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리는 것이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내것이라 생각하고 나만을 위해서 쓰는 것이 문제 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것에 대해 오늘 본문 25절 에서는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왜 하필 아브라함 일까요?
주석에서는 예수님이 굳이 아브라함을 비유에 등장 시킨 이유에 대해
아브라함은 성경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가장 많은 물질적 축복을 받은 인물 중 한 명입니다. 반면에 그는 베푸는 삶을 산 사람으로도 유명 합니다. 베풀기에 인색했던 부자에게 본보기가 되는 인물 입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말합니다.
“얘...”
이 호칭은 아주 친근한 호칭 입니다.
부자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었거나,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는 교회의 지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주석에서는 설명 합니다.
부유하게 살고 경건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구원 받을 기회가 많이 주어졌는데도 구원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는 부자에게 엄청난 고통 이었습니다.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나사로는 아마도 “나쁜 것들"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향해 살았을 것입니다. 당연히 “고난" 자체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기 때문 입니다. 고생하면 다 구원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반대로 부자는 “좋은 것들"을 받았지만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알고 스스로 옳게 여기고 그것을 즐기는 것에만 치중하여 인생을 살았으니, 그 결과 선을 행하거나 하나님의 뜻데로 살 생각 조차 하지 못하고 복음의 반대편 골자기에서 살아가다가 넘어올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부자는 건널수 있는 구렁텅이를 건너지 않은 것입니다.
2. 건널 기회가 지나가면...
2. 건널 기회가 지나가면...
이제 27절 부터는 부자가 자기를 내려 놓고 그나마 뒤늦은 회심을 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음부의 고통을 통해, 사랑하는 가족들만은 자신 처럼 고통 받지 않기를 바라는 선한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학교는 답을 가르쳐 주고 시험을 치루지만
세상은 시험을 치루고 답을 알려 준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쩌면 지옥은 주어진 기회를 허비한 사람이 가는 곳일지도 모릅니다.
이미, 하나님은 수 많은 기회를 주었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그것은 모세와 선지자들 입니다. 즉,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들과 목회자 그리고 내 주변의 수 많은 사람들을 통해 수없이 전파 되었다고 말씀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왜 자비의 하나님이 사람들을 지옥에 보냅니까 라고 반문 합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 하여도 인간을 사랑하다면 모든 사람을 천국에 보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질문 합니다.
부자도 안타까운 마음에 아브라함에게 간청 합니다.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천국을 본 자를 다시 이 땅에 보내면 많은 사람이 회개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음부에서 회심한 부자의 대화를 끝으로 이 비유는 마치게 됩니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결론
결론
요한 크리스토퍼 아놀드의 책 “Why Forgive” 라는 책에서 뉴욕에서 경찰로 일하던 스티브 맥도날드 라는 사람의 체험담을 읽었습니다.
그는 한 소년이 쏜 총에 맞아 그 해의 절반 이상을 병원 침대에서 생사를 넘나 들었지만 그 소년을 용서한다는 기자회견을 합니다. 왜 그 소년을 용서 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의야해 하자 스티브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오직 사랑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나에게 일어난 잘못된 일을 그냥 흘려 보낼 수 있다면, 모든 것이 변할 것입니다. 우리의 태도와 우리의 감정체계와 인간관계, 전반적인 우리의 인생에 대한 접근법 등이 변할 것입니다. 또한 원수 맺고 증오하는 사람 보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이야기 더 많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용서 한다는 것은 절대 약하다는 표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승리를 의미 합니다.”
스티브 맥도날드의 용서의 이야기는
오늘 말씀처럼 타인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크고 깊은 골자기를 넘어 가는 용기를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은 분명 때가 늦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보여주지만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자세하게 말해주지는 않습니다. 큰 주제는 우리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을 말하지만 저는 오늘 이말씀을 통해 오랫동안 묵혀둔 증오의 관계와 미처 보지 못했던 나의 이웃의 어려움을 돌아보라는 하나님의 메세지 라고 확신 합니다.
칼 포퍼의 책 <인생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
역경 앞에서 취하게 되는 태도 두 가지
1.문제를 묵인하고 외면하는 것
2.문제를 직시하고 해결점을 찾으려고 시도 하는 것
“문제를 묵인하고 외면하는 태도는 반드시 불행으로 이어진다"
부자의 후회를 교훈 삼아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 라는 기회를 헛되이 보내지 말고, 크고 깊은 골 사이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성찰 해보시기 바랍니다.
반목하고 증오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외면하거나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내 이웃의 어려움일지도 모릅니다.
또한 내가 놓쳐버린 깨달음의 기회, 하나님의 메세지와 사명은 무엇인지 깊히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 하십시오. 그리고 용기 내어 그 크고 깊은 골을 기회가 있을 때, 뛰어 넘어 보시기 바랍니다.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넓으신 은혜와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하심과
성령의 감동감화 역사 하심이
우리교회와 주님의 귀한 자녀들과 그들의 생애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함께 있을찌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