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05주일예배_렘31: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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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을 가능으로 믿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믿는
본문: 예레미야 31:31-3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인간이 다른 생명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점이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호모사피엔스, 생각하는 인간, 거기에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특이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특별한 지능을 갖고 있고, 그 지능을 따라 이성적인 사고를 합니다. 세계 현실과 자신에 대해 논리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능력을 그와 같이 이해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이해가 전적으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지적 능력이라는 것은 논리적 이성적 능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다른 동물들과 더더욱 확연하게 구별되는 인간의 능력은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상상력에 있습니다. 세계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 세계를 바꾸고 자기 자신을 바꾸어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이성적 사유의 능력에 있다기보다는 그 이성의 법칙을 뛰어넘는 상상력에 있습니다.
그 상상력을 환상이라 해도 좋습니다. 그 환상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지레 단정짓고 선을 그어버리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비교적 확고부동하게 정해진 어른들과 달리 어린이나 청소년은 꿈이 많습니다. 만화가가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가, 화가가 되는 꿈을 꾸기도 하고, 음악가가 되는 꿈을 했다가, 과학자가 되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그렇게 꿈을 꿀 때 불가능의 영역은 없습니다.
물론 실제 현실에는 그와 같은 꿈을 제약하는 많은 조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아는 어른들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조언을 합니다. '그 모든 꿈을 다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어떤 꿈을 선택해야만 하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러이러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단다.' 하고 가르쳐 줍니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두 가지 정신적 능력이 있습니다. 어른들의 지혜가 합리적 이성을 대변한다면, 어린이의 꿈은 그것을 뛰어넘는 상상력을 대변합니다. 어느 것이 우월하고 어느 것이 열등한지를 따지자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무엇이냐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아마도 상상력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환상으로, 희망으로, 때로는 욕망으로 불리는 인간의 근원적인 힘입니다.
그것이 억제당할 때 인간은 괴로워 합니다. 신체적 자유가 억제당하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정신적인 자유가 억제당하는 것은 더더욱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인간이 신체가 자유롭지 못할 때 고통을 느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자기의 꿈을 펼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신체 그 자체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그것이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장애를 넘어,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다면 신체의 고통은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그러나 신체의 한계가 자신의 꿈의 장애가 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런 한계를 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합니다. 한계를 넘으려는 누군가의 의지와 정신력은 본인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삶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이 인간 되는 것은 그처럼 현재의 조건과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의지와 희망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을 갖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열망의 절정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열망의 궁극적 지점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달리 표현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 궁극적 지점을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를 기다리는 믿음,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다스려 주시기를 바라는 믿음은 그 열망의 최종적 목표입니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그 믿음을 다시 환기시켜주신 것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요한계시록은 그 믿음, 그 환상을 이렇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계시 21:1-3)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사라진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환상이며 믿음입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열망입니다. 그 열망, 그 믿음 때문에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예레미야서의 말씀 또한 그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새 언약' 곧 '신약'이라는 말이 유래하게 된 근거가 되는 본문입니다.
내용상으로는 성서의 말씀 가운데 가장 희망적이며 감동적인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멸망한 이스라엘과 유다를 보고 위로와 희망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죄값을 치른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그 나라를 회복시켜주겠다는 말씀에 이어 옛 계약과는 다른 새로운 계약을 맺으리라는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실 새 계약이 모세의 계약과 다르다는 사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고 합니다. 이어, "그 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를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약속이 과연 어떤 점에서 모세와 맺은 계약과 차이가 난다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은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를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 말씀이 그 차이를 드러냅니다.
모세의 시내산 계약은 돌판에 새겨졌습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의무감으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그 계약의 내용은 다른 자세한 설명과 함께 명문화 문자화되어 있기에 해석을 필요로 하고, 그 해석에 따라 악용되기도 합니다. '율법주의'는 그 율법의 정신이 악용된 결과입니다. 지키지 않아 파기되고, 악용됨으로써 사실상 파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 돌판에 새겨진 계약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계약은 "가슴속"에 "마음"에 새길 것이라 했습니다. 형체가 없습니다. 그것을 전해 주는 돌판이나 문서와 같은 매체가 없습니다. 곧바로 마음에 새겨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쿵저러쿵 따질 필요가 없어지고, 자신의 마음 가운데서 깨닫는 사람이 알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무감을 따라 억지로 지키는 약속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지키는 약속입니다. 다시 말해 하고싶은 대로 해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경지입니다. <공동번역>의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다시는 이웃이나 동기끼리 서로 깨우쳐 주며 야훼의 심정을 알아 드리자고 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우리가 굳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 뜻을 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물론 개별 사람들의 마음만이 그렇게 바뀔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세상 자체가 그렇게 바뀐다는 뜻입니다. 너의 뜻이 나의 뜻이 되고, 우리 모두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 되는 세계입니다. 그러기에 더 이상의 고통이 없는 세계입니다.
예언자는 지금 도대체 불가능한 꿈을, 불가능한 환상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불가능한 꿈이요 환상입니다. 그렇게 많은 예언자들이 외쳤고, 예수께서 오셔서 심지어는 "지금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졌다"고까지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는 바로는 그런 세계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세상 돌아가는 것을 봐도 그런 세계가 도무지 이뤄질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해보이기 때문에 환상을 갖는 것입니다. 당장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열망하는 것입니다. 절망스럽기 때문에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허망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세계가 바뀌고 인간 스스로가 바뀌는 사실을 우리는 새삼 유념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기를 기도하고, 끝내 우리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 되기를 꿈꾸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이치입니다. 믿음은 이미 존재하여 사라 없어질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존재하지 않기에 사라지지 않을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기다리는 대림절 셋째 주일, 우리 모두가 그 믿음을 굳게 다짐하기를, 이 시간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