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응의 법칙은 견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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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욥 4:1-21
제목: 보응의 법칙은 견고하다
오늘 본문인 욥기 4장부터 욥기 27장까지 욥과 세친구의 대화가 등장합니다. 욥기에서 가장 긴 분량을 할애하는 부분인데요. 이 부분에서 흥미로운 것은 세 친구가 다같이 욥과 자유롭게 대화하는 형식이 아니라, 친구 한 사람씩 욥과 일대일로 대화하는 듯한 형식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엘리바스가 말하면 그 말에 대해 욥이 답합니다. 또 빌닷이 말하면 그 말에 대해서 욥이 대답합니다. 이어서 소발이 말하면 욥이 대답합니다. 이런 사이클이 욥기 21장까지 총 두 번 진행됩니다. 세 번째 사이클인 욥기 22장부터 27장까지는 엘리바스가 말하면 욥이 답하고, 빌닷이 말하면 욥이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소발의 세 번째 발언이 빠져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동일한 사이클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 이 시간에는 본문 말씀인 욥기 4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볼텐데요. 이 말씀은 전적으로 엘리바스가 욥에게 하는 말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성경 66권이 성령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특별계시의 말씀인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66권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단순하게 맹신해서는 안 됩니다. 잠시 후에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만, 오늘 본문에서 엘리바스가 욥에게 하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내용 자체가 틀렸다기보다, 적용하는 대상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틀린 것입니다. 욥기를 묵상할 때에는 이러한 점을 주의해서 묵상해야 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 내용을 살펴볼텐데요. 욥기 4장 1절 말씀을 보시면,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등장합니다. 구약학자들에 따르면, 엘리바스는 욥의 세 친구 중에서 리더와 같은 역할을 하며, 세 친구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엘리바스가 가장 먼저 발언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욥기 4장에 등장하는 엘리바스의 발언은, 욥을 찾아오자마자 하고 싶은 말을 한꺼번에 쏟아낸 것이 아니라, 욥기 3장에서 욥이 가슴 깊이 탄식하는 말을 듣고 나서 깊이 생각한 후에 대답한 것입니다.
욥은 욥기 3장에서 누구에게도 말을 건네지 않았습니다. 옆에서 세 친구가 자리를 지키며 함께 애통해하고 있었지만, 욥은 세 친구에게도, 하나님께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강렬하게 내적으로 느낀 온갖 감정들과 생각들을 혼자서 분출할 뿐입니다. 자기 자신이 왜 태어났을까. 태어날 때 죽었으면 오히려 좋았을텐데. 이런 식으로 죽음을 휴식처럼 생각하면서 탄식하는 것이죠.
그러나 욥은 자신의 입술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처절한 고난을 당한 후에 그가 의문을 품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깊은 낙심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숨 쉬며 살아가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극심한 고난을 당한 사람들을 살아가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런 부분들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바스가 욥의 탄식을 다 듣고 나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욥기 4장 3절과 4절 말씀 보세요.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엘리바스가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 욥은 과거에 믿음이 강한 사람이었으며,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가르치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했고, 넘어지는 자를 도왔습니다. 여기서 엘리바스는 지혜로운 사람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엘리바스에 따르면,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롭지 못한 사람에게 조언하는 위치에 있으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역할을 합니다. 이 말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지혜로운 사람은 선생님이고,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학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5절 말씀 보세요.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 욥이 과거에 지혜로운 선생님이었는데, 그가 고난을 당하자, 지혜롭지 않은 학생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엘리바스가 말하려는 진짜 문제는, 과거에 지혜로웠던 욥이 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4장 6절부터 11절까지 그의 신학적인 사상이 담긴 주장을 펼치는데요. 여기서부터는 분별하면서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엘리바스의 주장은 욥이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 하나님께 마땅히 받을 만한 고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4장 6절과 7절 말씀 보세요. 시작. “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 /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있는가”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이 말은 엘리바스가 신자와 고난의 관계를 잘 몰라서 욥에게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답을 정해놓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 없이 망한 사람이 없으며, 정직한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엘리바스는 여기서 처음으로 고난에 대한 자신의 주관을 밝힙니다. 엘리바스에 따르면, 하나님 앞에서 믿음이 온전한 사람,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고난 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상을 인과응보 사상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이런 엘리바스의 인과보응 사상은 끔찍한 고난을 당해서 깊은 슬픔에 빠져있는 욥에 대해서 색안경을 끼게 만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사상에 따르면, 의인은 절대로 고난 당하지 않습니다. 이 사상을 욥에게 적용하면, 욥은 어떤 사람입니까? 가축과 종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자녀들도 한날 한시에 집이 붕괴되어 모두 사망하지 않았습니까? 이를 인과응보 사상으로 해석하면, 욥은 지금 당장 지옥불에 떨어져도 모자를 악한 죄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욥이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으면 하나님께 이렇게 끔찍한 벌을 받겠습니까? 벌을 한번 받는 것으로도 족한데, 욥은 이런 벌을 심지어 네 번씩이나 받았습니다. 그러니 인과응보의 시선으로 욥을 바라보면, 과거에 욥이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이었든,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왔든,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욥기 4장의 시점에서 욥은 죄인으로써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을 이런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욥기 4장을 처음 읽는 성도님들의 경우에는, 엘리바스가 욥을 칭찬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나오기 때문에, 어? 엘리바스가 좋은 사람인가? 이렇게 착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실제로 그의 사상을 깊이 들여다 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 엘리바스가 욥을 진심으로 위로하는 하나뿐인 친구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 이유인즉슨 엘리바스가 욥기 4장에서 말하는 핵심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이런 끔찍한 일들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의 신앙과 사상은 철저하게 인과응보 사상을 따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무조건 벌을 받고, 죄를 짓지 않으면 절대로 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바스의 기계적인 인과응보 사상은 완전히 잘못된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고, 죄를 미워하는 분이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인을 무작정 죄의 정도에 따라 처벌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때에 공의와 정의로 심판하십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함부로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이렇게 기계적인 인과응보 사상은 신학적으로나 성경적으로나 잘못된 것이 분명합니다만, 이론이 아닌 실생활에서도 기계적 인과응보 사상의 모순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저보다 연배가 한참 높으신 우리 성도님들은 인생에 대해서 저보다 훨씬 더 잘 아시겠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인생은 굉장히 복잡합니다.
예컨대 믿음이 연약한 시절에, 분별력 없이 죄책감 하나 느끼지 않고 남들과 비슷한 정도의 죄를 짓고 살던 시절에, 누구보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경쟁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성공 가도를 달린 분들이 계실 겁니다. 이런 경우에, 인과응보 사상을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적용할 수 없죠. 왜냐하면 인과응보 사상에 따르면,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이면, 모든 일이 원하는대로 풀리지 않고, 망해야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은총에 따르면 그렇지 않죠. 죄인이더라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허락하신 기본적인 재능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이런 다양한 재능을 갈고 닦으면서 미래를 위해 투자하면, 본인이 노력한 만큼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인과응보 사상과 관계없이 어느정도의 열매는 충분히 맺을 수 있는 것이죠.
또 반대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잘 풀린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무리 거룩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해도, 성화의 삶을 살아가려 발버둥 쳐봐도, 본인의 신앙생활과 관계없이 하는 일이 이상하게 안 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과응보 사상을 적용할 수 있을까요? 적용할 수 없죠. 인과응보 사상에 따르면, 하나님을 잘 믿으면, 모든 일이 잘돼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우리가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건 사고들을 다양하게 만날 수 있으며, 우리가 목표하던 바와 전혀 다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할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자의 인생이며,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시간 함께 나눈 욥기 4장 말씀을 묵상하면서 결과적으로 우리가 분별해야 하는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엘리바스가 욥을 바라보며 지적하는 기계적인 인과응보 사상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려고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 가운데,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른 나이에 하나님께 부르심 받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질병으로, 교통사고로, 자연재해로, 전쟁으로, 흉악범죄의 희생양으로 하나님의 품으로 일찍 돌아가는 경우는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그런데 인과응보 사상은 이런 모든 경우의 수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둘째, 인과응보 사상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지만, 부분적으로 지혜롭게 적용하면, 진리의 말씀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욥기 4장이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말이 아니라, 엘리바스가 하나님 앞에서 본인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 악한 죄인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면, 그 말은 옳은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욥기 4장 8절 말씀 보십시오.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뿌린대로 거둔다는 것이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를 영적으로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으로 밭을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악과 독을 추수한다는 것입니다. 악으로 밭을 갈았는데 어떻게 선을 거둘 수 있겠습니까? 악을 심으면서 선을 거두길 원한다면, 그것은 텅빈 하늘을 바라보면서 입벌리고 사과가 떨어지길 바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인과응보 사상을 조금 더 확장해서 지혜롭게 적용하면, 얼마든지 영적인 유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셋째, 결국 성경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말씀을 깊이 깨달아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엘리바스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둔다고 우리에게 말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마땅하겠습니까? 내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죄의 문제가 무엇이 있는지 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문제를 발견하면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며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하나님 앞에 낱낱이 고하며, 가슴을 찢고 회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엘리바스의 기계적인 인과응보 사상이 틀렸다는 사실과 더불어, 성경이 말하는 일반적인 인과응보 사상이 얼마든지 우리 삶에 적용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욥기 4장 말씀을 묵상하실 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축복의 손길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모습이 악으로 밭을 갈고 있는 모습은 아닌지, 깊이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악취가 나는 죄인에 대해 오래 참으시고, 죄인이 하나님께 온전히 회개하기를 기다려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며, 살리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상하게도 하시며 낫게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이시며 전지전능한 하나님과 미천한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의 간극을 말씀을 통해 깊이 통감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영적으로 바라보되, 먼저 우리 삶을 정돈하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평가받지 않도록, 매일 매일 주님 앞에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고하게 하시며, 이를 통해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올바른 믿음에서 비롯되는 거룩한 행실이 우리 삶에 나타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더욱 드러나는 우리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주기도문으로 마친 뒤에 교회를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개인의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시다가 귀하시면 되겠습니다. 주기도문하시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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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bt 욥기
기분 나쁜 엘리바스의 점잖음(4-5장)
욥기 3장에서 엘리바스는 욥의 저주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는 친구들에게 무고한 고난에 대한 이해력이 없음을 금방 알게 됨. 응보 원칙에 대한 그들의 해석은 순진하고 기계적임. 모든 사람은 자기가 짓는 각각의 죄에 대해 금방, 그리고 죄에 딱 맞게 고통받는다는 것. 욥이 처음 입을 열었을 때 엘리바스는 아마도 욥이 자신의 비극을 설명해 줄 만한 어둡고 나쁜 행실을 고백하리라 기대했을 것. 욥기 저자는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욥의 세 친구가 욥을 방문한 진짜 이유는 욥을 도와 회개시키기 위함이었음(욥 2:11 –13). 그들이 줄 유일한 위로는 비난이었음.
이러한 점에서 엘리바스는 창조 세계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욥의 울부짖음에 충격을 받아 혼란에 빠진 것 같음. 왜 욥은 쓸데없이 이렇게 간단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가? 욥은 과거에 다른 넘어지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회복하도록 도운 적이 있음. 그러나 지금 그것이 욥에게 찾아왔고, 욥은 이상하게도 완전히 실패했음(5절). 엘리바스는 예의상 이런 말을 하지는 못하나 5절에 나오는 그것이 분명 1-2장에 대한 재앙이라 생각함. 죄 없는 사람은 절대로 망하지 않으므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온전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호의를 되찾고 그로 말미암아 다시 복을 받는 길이라는 것이다. 결국 뿌린대로 거두지 않는가?(8절) 특히 악인들은 아무리 사자처럼 강하다 해도 금방 죽어 없어지게 된다(9-11절). 엘리바스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직접 보았다(8절).
엘리바스의 목회적 충고는 겉으로는 그럴듯하며 심지어 마음에 끌릴 정도임. 1-2장이 없었다면 독자는 히스테리처럼 보이는 욥의 반응에 맞서 엘리바스의 편을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의 깊은 독자라면 6절에서 엘리바스가 권고하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온전함”이 사실 1장 1절에서 욥이 가지고 있던 영적 자질이었음을 발견하게 됨. 따라서 엘리바스는 잘못 생각한 것. 욥이 고난받은 이유는 그에게 이러한 자질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자질을 매우 깊이 보여주기 때문. 엘리바스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욥의 상황을 완전히 잘못 파악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