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08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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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323 부름받아 나선 이 몸
본문 요3:22-30 (p.146)
사랑이 충만하신 주님, 오늘도 우리에게 복된 하루를 열어주심에 감사합니다. 하루가 시작하는 이 시간에 단잠을 깨워주시고, 이렇게 기도하러 나아온 성도들을 기억하사 오늘도 주의 뜻대로 살아가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고 날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닮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말씀을 듣습니다. 주의 교훈으로 우리를 친히 가르쳐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요3:1-21 까지의 내용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니고데모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22-36절의 내용은 세례요한의 이야기이다. 요한복음 3장은 의도적으로 니고데모와 세례요한을 함께 엮고 있다. 그 이유는 니고데모가 예루살렘의 유대 지도자들을 대표하고 있다면, 세례요한은 유대 선지자들을 대표한다. 니고데모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례요한은 예수께서 위로부터 오신 분임을 증거하는 증인이 된다. 따라서 요3장 전체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 즉 하늘로부터 임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요3:22-30 까지의 내용은 세례 요한이 예수그리스도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로서의 자신의 역할과 관련된 증언의 내용을 기록한다. 그 배경을 보면, 이미 세례 요한의 제자들 가운데에도 세례요한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생겨나던 때 였고, 더 나아가 유대교 무리들 가운데에서도 예수의 추종자들이 생겨가기 시작하는, 즉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점점 늘어가던 분위기였고, 이에 시샘을 느끼고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무리들을 시기하던 무리들 또한 함께 늘어가던 때였다.
그 무리 중 하나가 바로세례요한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세례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며 불만을 터트렸다. 저들은 자신들의 스승인 세례요한이 예수보다 먼저 세례를 베풀었으니 세례요한의 세례가 우선이라는 주장으로 논한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저들의 불평을 일축하며, 예수님의 사역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현상에 대해 오히려 기뻐한다. 그 이유는 세례요한이 자신의 역할에 대해 분명하게 직시하였기 때문이고, 자신은 종일 뿐이기에 감히 주인되시는 그분과 경쟁관계에 설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31-36절을 통해 여전히 예수를 반박하고자 하던 사람들의 반응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의 탁월성과 그분에 대한 믿음만이 영생을 가져옴을 선포한다. 그렇다면 이 새벽의 시간에 우리는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첫째로, 주님의 일꾼에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끝까지 충성하는 자세라는 것이다. 23절을 보면,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 베푸는 일을 계속하였음을 기록한다. 그리고 24절을 보니 그가 아직 옥에 갇히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세례 요한은 하늘로부터 임하신 예수님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증거한 이후에도 자신이 옥에 갇히기까지 계속해서 자신의 맡겨진 사명을 다하였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소명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서 그만하라 하시기 전까지는 이 일을 결코 그만 둘 수가 없었다.
여러분, 축구경기를 생각해보라. 선수가 전후반 45분씩 총 90분이 다 지났다고 해서 경기를 멈출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축구에는 루즈타임이라는게 있어서 전광판의 시계와 상관없이 주심의 휘슬이 울려야만 경기가 종료된다. 아무리 90분의 시간이 다 지났다고해도 주심의 휘슬이 울리지 않는 한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주님의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내 임의로 판단할 수 없다. 종말의 날이 가까웠음을 알리는 여러 징조들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내 뜻대로 주님을 섬기는 일을 멈출 수 없다. 때와 기간을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만 순종해야 한다.
머지않아 세례요한은 투옥이 되고, 또한 사형을 당함으로 그의 사역이 완전히 끝을 맺게 되리라는 것에 대해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아직 그는 투옥이 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예수님께서도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신 후였다. 따라서 지금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는 것과 세례요한이 사역하는 그 짧은 기간이 서로 중복되던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을 따르던 많은 제자들이 자신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다. 또한 세례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던 그 대상들도 예수께로 돌아서고 있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만일 여러분들께서 교회의 중요한 봉사의 자리를 맡아 오랫동안 수고하셨는데, 어느날 갑자기 제3의 인물이 등장하더니 모든 교회의 이목이 오직 그 사람에게만 집중되어 내 수고는 알아주지도 않고 오직 그 사람만 인정해준다면 어떨까. 물론 우리가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며 봉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적인 생각으로 서운한 마음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구약에서 오시리라 약속하셨던 그 메시아이시니 당연히 그 자리를 내어드려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이 될 수 있지만, "그래 이제 내 역할은 끝이니까 나는 그만해야겠다" 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나 세례요한은 달랐다. 23절 말미를 보면 한글번역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문법적으로 보면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았다"는 이 구절이 과거부터 끊임없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동작을 표현한다. 다시 말해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등장하셨고, 또한 그분의 공생애가 시작되었음에도 변함없이 계속적으로 그의 사역을 감당했다는 것, 즉 모든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의 휘슬이 울리기까지 계속해서 많은 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했던 것이다.
여러분, 신앙 및 인생의 경주자로 달려가는 우리들은 주님께서 그만 쉬라고 하시는 순간까지 우리의 달림질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맡은 자에게 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충성이다. 충성은 무엇인가? 일을 맡긴 이가 원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다. 간혹 우리 중에 내가 그동안 이 정도나 충성했으니 이제는 좀 고만해도 안되겠나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를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우리로 달려가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섬길 수 있도록 인도하신 것도 하나님이시다. 내 인생의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멈추라 하시는 그 날까지 주신 사명에 충실히 감당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축원한다.
둘째로, 주님의 일꾼에게 가장 어울리는 자세는, 언제든지 주인공은 예수님이요, 나는 엑스트라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29-30절을 보면 예수께서 흥하게 되시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는 세례요한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는 예수님을 역사의 무대의 중심에 세우고 자신은 서서히 무대 뒤로 모습을 감추려 한다. 그는 이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알았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조금의 불만도 없었다. 간혹 교회 안에서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을 마주하게 된다. 하나는 자신이 주인공의 자리에 앉고 예수님을 엑스트라의 자리에 앉히는 경우이다. 이런 류의 유혹은 매우 강렬하여 누구라도 쉽게 빠질 수 있고, 실제로 이런 분들도 적지 않다. 이런 죄에 넘어지게 되면 예수의 이름을 자기를 세우기 위해 이용하게 된다. 예수를 팔아 자신의 기득권을 챙기고, 예수를 팔아 이득을 거두려 한다. 우리도 이런 유혹을 받을 것이다. 어쩌면 중직자일수록 이런 유혹은 더욱 거세게 다가올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그분을 따르는 가장 첫번째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엑스트라로 내모는 자들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긴 하지만, 실제로 예수께서 자신의 삶 전체에 주인이 되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종의 호칭에 불과하다.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가? 정말로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는가? 나의 모든 권한과 가진 것들을 온전히 그분께 내어 놓는가? 아니면 주님을 위해 섬기고 봉사하고 헌신한다 하면서도, 예수 이름을 팔아가며 내 이득을 취하려 하거나, 기득권을 놓치 않으려 하거나, 사람들 사이에서 군림하려고 하는, 내가 주인공이 되려하는 모습들로 살아가지는 않은지 돌아보라.
교회 안의 또 다른 부류는 예수를 주인공으로 세우고 자신은 엑스트라로 빠지는 것으로 만족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진실로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며, 세례요한이 그러하였고 사도바울도 그러하였다. 바울은 언제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 자신을 통하여 오직 예수의 이름만이 존귀하게 되기를 원할 뿐이었다. 그는 예수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였고, 주님을 존귀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사양하지 않았던 신실한 일꾼이었다. 오늘 본문 29-30절에 이러한 세례요한의 자세가 잘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세례 요한은 모든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유대인의 결혼풍습을 비유로 하여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 설명인즉, 예수님이 교회의 신랑이 되시고, 또한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묘사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신부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기쁜 혼인잔치의 주인공은 세례요한 자신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며 자신은 그저 주님의 친구로서, 신부가 신랑을 만난 것만으로도 이미 기쁨이 충만하다는 것이다. 신부를 취하는 것은 신랑이지 신랑의 친구인 자신은 아니라는 그의 말을 감안할 때,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에게 얼마나 큰 기쁨과 소망이 있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겸손하게 신랑되시는 주님을 맞았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특히 29절 말미에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다’라고 말하는데, ‘충만하다’ 라는 단어는 수동태로 쓰였다. 즉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기쁨을 충만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신랑의 친구라는 위치에서 신부와 신랑 사이의 중매자로서의 역할, 곧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는 점차 무대 뒤로 물러가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30절에서 잘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흥하여야 한다...는 말은 원어의 의미를 살리자면 예수님은 더 위대해지셔야 한다는 것으로,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개될 구원사역을 가리킨다. 세례요한은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임을 알고 있었다. 반면 그는 자신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라는 말의 의미는 ‘작아지는 것, 감소하는 것’등을 의미하는데, 자신의 명성이 점차적으로 작아지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도 점차적으로 감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직 예수만이 주인공이 되셔야 하고, 자신은 엑스트라일 뿐이라는 그의 신앙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언젠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 우리는 영광의 주님을 알현하게 될 터인데, 그 날 그 때에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실까. 너의 인생의 휘슬이 아직 울리지도 않았는데 어찌 너의 시간을 그토록 허투루 낭비했더냐 하고 책망하실까. 아니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 휘슬이 울리기까지 최선을 다하여 달려왔구나 이제 편히 안식을 누리거라 라고 말씀하실까. 또한 너의 평생 하나님만 존귀하게 여김받도록 엑스트라로서 잘 살아왔구나 칭찬하실까, 아니면 하나님이 받아 마땅한 영광을 네가 다 가로챘구나 꾸중하실까… 성도 여러분, 날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되어 오직 예수의 이름만 드러내며, 오직 예수의 이름만 존귀하게 하며, 또한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 날까지, 우리 인생의 휘슬이 울리기까지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길 축복한다.
기도하자. 우리의 삶 속에서 나는 사라지고 오직 예수만이 주인공이 되시고, 예수만이 높임 받으시고, 예수만 영광받아 주옵소서. 주님 부르시는 그 날까지 주어진 자리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살아낼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더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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