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비 소리와 엎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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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왕상 18:41-46
제목 : 큰 비 소리와 엎드림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 끝날까지 전지전능한 창조주로서 친히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의 통치 행위에는 “작정”이라는 개념이 담겨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하나님의 작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그의 뜻대로 정하신 영원한 계획인데, 이로 말미암아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장차 일어날 모든 일을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 설명에 따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지식이나 하나님의 능력에 있어서 그 어떠한 결점이나 결핍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은 예상치 못한 어떤 변수로 인해 불가피하게 변경되는 일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분의 의지로 작정하신 일을 변경하시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진실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 그래서, 하나님의 작정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통치라는 개념에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대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대로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진행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하심 아래에 있는 것이라면,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이 굳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일들을 고군분투하면서 해내려고 노력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대로 일이 진행되도록 이끌어가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그냥 팔짱끼고 하나님일하시는 것 구경만 해도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네. 이러한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들은 신적인 작정으로서 작정하신 모든 내용이 피조물에게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으며, 피조물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미리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이나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개념을 성경을 통해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 존속되어있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일하심, 그리고 인간의 책임을 구분해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성경 말씀이 열왕기상 17장과 18장 말씀인데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신자의 기도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볼 때, 열왕기상 17장과 18장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 지를 살펴본 뒤에, 신자의 기도가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왕기상 17장 1절 말씀 보세요. (in)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out)
엘리야는 구약 선지자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선지자입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다시 엘리야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했으며, 누가복음 9장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실 것을 말했습니다.
이토록 중요한 인물로 조명되는 엘리야가 열왕기상 17장 1절에서 등장하는데, 그의 등장은 굉장히 소박합니다. 엘리야의 아버지가 누구이고, 그의 신분이 어떻고, 이런 설명은 하나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하나님의 목소리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런 엘리야가 성경에서 등장하자마자 가뭄을 선언합니다. 갑자기 뜬금없이, 앞뒤 설명 하나 없이 가뭄을 선언한 것이죠.
그런데 엘리야의 가뭄 선포는 시대에 합당한, 적실성이 있는 선포였습니다. 열왕기상 16장 30절에서 33절 말씀 보세요. (in)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out)
아합은 북이스라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악한 왕으로 평가받은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아합 시대에 바알 숭배가 극에 달했다고 하는데요.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섬기는 바알이라는 우상은 비와 구름을 관장하는 우상이었으며, 바알을 섬기면 풍요로움을 얻을 수 있다는 거짓된 믿음과 바알을 숭배할 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음란한 제사 의식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을 송두리째 앗아갔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엘리야가 선포한 가뭄과 아합 시대와의 연관성을 이해하려면, 바알이라는 우상에 대한 이해도가 필요한데요. 바알 신화에 따르면, 바알은 건기에 죽었다가 우기에 살아나는 신으로 표현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바알이라는 우상의 특징은 건기에 비가 쏟아지거나, 우기에 비가 오지 않으면 바알은 무능력한 신으로 비추어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따라서 엘리야가 가뭄을 선포한 것은, “바알이 신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신이냐.”라는 중차대한 문제를 판가름할 수 있는 선포가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엘리야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가뭄을 선포했는데, 비가 내린다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실존하는 신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겠죠. 반대로 우기인데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건기에 죽어있다가 우기에 살아나는 바알을 위해서 뜨겁게 숭배했는데, 비를 내려달라고 내려달라고 그렇게 제사를 지냈는데 정작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다면, 과연 바알을 살아있는 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겠죠.
이러한 배경에서 엘리야의 등장은, 엘리야의 이름 의미대로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 라는 그 이름대로 누가 진짜 신이냐 하는 문제를 증명하기 위한 선지자로서의 사역 시작을 알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성경이 독자 친화적으로 모든 것을 하나 하나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열왕기에는 엘리야가 하나님께 선지자로 부르심 받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또한 엘리야가 북이스라엘에 보내심 받아서 가뭄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시는 장면 역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선지자로서 행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서 행한 것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엘리야는 선지자니까 당연히 하나님 뜻대로 하지 않았겠나.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하나님의 작정, 하나님의 일하심의 관점에서 볼 때, 엘리야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 증거가 열왕기 말씀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열왕기상 17장 9절 말씀 보세요. (in)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엘리야 선지자가 그릿 시냇가에서 숨어서 지내다가 가뭄으로 인해 시내가 마르자 하나님께서 사르밧으로 가라고 명령하시는데요. 이때 하나님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음식을 주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out) 아직 엘리야 선지자는 그릿 시냇가에 있고, 하나님께서 음식을 주게 하신다는 사르밧 과부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사르밧에 거주하는 과부가 한두사람 뿐이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으로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를 알든 모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사르밧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그 과부를 만나게 하실 것이며, 그 과부로 하여금 엘리야가 가뭄 때문에 굶주려 사망하는 일이 없도록 먹이시겠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작정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자 그런데, 하나님의 작정과 인도하심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 하면, 엘리야 선지자를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신 사건은, 엘리야 선지자의 배를 채워주기 위한 목적 하나만으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사르밧은 시돈에 속해 있는 지역입니다. 시돈은 아합의 아내인 이세벨의 고향이자 바알 숭배의 본거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알 숭배의 본거지에 자신의 선지자를 파견 보내신 것입니다. 누가 진짜 신인지, 바알이 진짜 신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진짜 신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보내신 것이죠.
열왕기상 17장 12절 말씀을 보면, 사르밧 과부는 자기 아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고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말합니다. 풍요를 가져다 주는 신이라고 믿는 바알을 누구보다 열심히 섬기는 시돈 땅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가뭄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열왕기상 17장 14절 말씀 보세요. (in)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에게 무엇이라 말합니까?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out)
여기서 사르밧 과부가 믿고 있는 신은 누구일까요? 1번 하나님, 2번 바알. 네. 바알의 본고장이 시돈이기 때문에, 당연히 바알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자기 아들과 밥 한끼 먹고 나면 이제 굶어 죽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도대체 바알은 어디에 있습니까? 건기에는 죽어있다가 우기에는 살아나서 땅에 비를 내려주어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어준다는 바알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사르밧 과부는 바알 신앙에 대한 회의를 느끼며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엘리야 선지자가 찾아오더니,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엘리야의 발언 이후에 실제로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사르밧 과부는 바알이 참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있는 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중간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작정하시고, 통치하시고 인도하시는데, 이를 통칭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열왕기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사람의 생각으로 모두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릿 시냇가에서 숨어지내는 엘리야를 시돈 땅으로 보내시는 우리 하나님의 의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어차피 사르밧 과부는 바알 숭배자였으며 더러운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과부에게 엘리야를 보내셔서, 하나님이야말로 살아계신 참된 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엘리야의 입장에서도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시는 하나님의 본심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차피 이스라엘 과부나, 사르밧 과부나 똑같은 죄인이고 똑같은 바알 숭배자인데, 이왕 살려줄 거면, 먹을 것을 끊이지 않게 공급해 주실 거면, 이스라엘 과부를 선택하는 것이 좀 더 낫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역사적으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니, 둘 다 비슷한 죄인이면,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이스라엘 과부를 선택해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사르밧 과부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르밧 과부는 계속되는 가뭄 앞에서 바알 신앙이 흔들렸고, 결국 엘리야의 말에 순종하게 됩니다. 이는 가나안 땅 전역을 휩쓸었던 극심한 가뭄이 사르밧 과부의 무지를 깨뜨리는 은혜의 수단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기나긴 가뭄이 너무나 끔찍한 재앙처럼 느껴졌겠습니다만, 사르밧 과부의 경우에는, 가뭄을 통해 엘리야를 만나게 되고, 또 엘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시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한 번에 처리하셨습니다. 엘리야가 굶어 죽지 않도록 음식을 제공해 주시고, 엘리야가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거처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또한 엘리야를 통해 사르밧 과부의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해 주시며, 이방인 바알 숭배자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깨달을 수 있다는 여지를 보여주신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은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 간의 대결에서도 나타납니다. 이 대결의 핵심은 누가 불을 내리는가, 그래서 누가 참 신인가. 바알이 신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신인가. 이런 대결 구도 아래에서 진행됩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유념해야 하는 점은 바알이 무응답으로 일관하고,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주셔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과 도랑의 물을 모두 태운 것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대결 이후에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 선지자 450명을 처형한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북이스라엘에 가뭄이 시작되었을 때, 가뭄이 시작된 근본적인 원인과 목적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고 거룩하게 잘 믿어야만 하는 구별된 나라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바알을 신으로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 누가 참 신인지 보여주시기 위해서 가뭄이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가뭄이 시작되고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를 찾아가서 바알 땅에 사는 과부를 바알이 아닌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살려주시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와의 대결 역시, 누가 참 신인가, 누가 진짜 하나님인가. 이 문제로 대결하게 되었는데, 결과는 하나님이 진짜 신이라는 사실이 확실하게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문제입니다.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 간의 대결은 서로 정당하게 자신이 믿는 신에게 응답을 요구하고, 응답받으면 승부가 결정되는 것으로 합의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대결 이후에 엘리야가 어떻게 행동합니까? 열왕기상 17장 40절 말씀 보세요. (in)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out)
대결이 끝나고,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여명을 기손 시내로 데려가서 모두 처형합니다. 이는 굉장히 잔인하다고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계획하심대로,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시행한 것입니다. 이것 역시 사람이 감히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사적으로 규칙 정하고, 경기가 끝나면 서로 웃으며 악수하고 인사하는 그런 개념은 통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이스라엘 땅에서 우상 숭배자들, 특히 우상을 더욱 부추기는 우상 선지자들이 심판 받는 것은 잔인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 그래서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해서 450명을 처형한 뒤에 오늘 본문 말씀이 등장하는데요. 오늘 본문 말씀은 3년간 지속된 북이스라엘의 가뭄이 종식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본문은 손바닥 만한 작은 구름이 기적의 표징처럼 여겨져서, 엘리야가 손바닥 만한 작은 구름을 보았듯이, 우리 삶에서도 이런 기적의 표징을 보게 해달라는 식의 해석이 주를 이룹니다. 그런데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면, 비는 무조건 내릴 예정이었습니다. 강수율이 무려 100%였던 것이죠. 열왕기상 18장 41절 말씀 보세요. (in)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엘리야 선지자는 큰 비 소리가 있으니 아합에게 먹고 마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가 말한 큰 비 소리는 모두가 듣고 인지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닌, 엘리야 선지자만 들은 특별한 소리였습니다. (out) 하나님은 선지자로 하여금 일반 사람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것들을 보고 듣게 하십니다. 따라서 엘리야 선지자는 화창한 날씨에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에서 큰 비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열왕기상 18장 45절 상반절 말씀을 보시면, (in)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out) 3년간 지속된 가뭄은 하나님의 작정과 인도하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가뭄이 끝난 것 역시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에서 결정된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엘리야가 기도하는 시점이 큰 비 소리를 듣기 전이 아닌, 큰 비 소리를 들은 뒤의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가뭄의 시작부터 가뭄의 끝까지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홀로 역사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가뭄이 끝나는 시점이 되었을 때, 엘리야가 큰 비 소리를 들었을 때,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 4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엘리야는 큰 비 소리를 들은 이후에 혼자서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땅에 꿇어 엎드립니다. 이 부분이 바로 오늘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out)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 우리가 열왕기상 18장 41절 시점의 엘리야라면, 어떻게 행동할까요. 41절에서 엘리야가 큰 비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까? 큰 비 소리를 들었으니 머지않아 비가 곧 내릴 것이고, 가나안 땅 전역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간 가뭄은 이제 완전히 끝날 것이고, 바알 선지자 450명은 이미 모두 처형했고, 아합왕은 이런 큼직한 사건들을 겪었으니 누가 하나님인지 명확하게 깨달을 것이고. 뭐 이런 여러 가지 기대감을 품으면서, 집에 가서 편하게 쉬면서 하늘을 보면서 기다리면, 비가 내리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입니다. 그동안 엘리야의 사역이 워낙 고됐기 때문이죠.
그러나 엘리야는 큰 비 소리를 들은 이후에 혼자서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꿇어 엎드립니다.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산에 올라가 꿇어 엎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엘리야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기도의 중요성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대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일하시는 것인데,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근거한 일하심은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것이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우리가 해야 할 바인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다 하신다고 하더라도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효율이라는 것은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효율이 떨어지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죠. 둘이 하는 일을 혼자서 하는 것이 훨씬 더 편하고 효율적이라고 판단하면, 혼자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가치관에 따르면, 어차피 이루어질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원래 알아서 다 하시는 건데, 그걸 위해서 우리가 또 기도한다는 것이 다소 미련해 보일 수 있습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그것도 다 확인할 수 없는 노릇인데, 기도를 도대체 왜 또 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36장 36절과 3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통해 유익을 얻는 그 수혜자들이 직접 그 일들을 위해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에스겔 36장 36절과 3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너희 사방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폐한 자리에 심은 줄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아멘. (out)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폐한 자리에 심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무슨 일이 있어도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성취하시는 때가 몇 날 몇 시인지 정확하게 모를 뿐, 회복의 말씀이 약속으로 주어졌다면, 이스라엘이 회복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정하신 확실한 회복의 약속이라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족속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기도한 것은 하나님께서 곧 행하실 일이라고 하더라도 기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행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기도에 대해서 나태하게 생각하고 안일하게 기도했던 우리의 미흡한 신앙생활을 청산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성도님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열왕기상 17장과 18장 말씀을 포괄적으로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일하심이 어떻게 실현되며,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주님의 자녀들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살펴보았습니다. 이 내용 가운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작정과, 작정에 따른 일하심은 우리가 감히 다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시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도 있지만, 하나님의 신적인 지식을 피조물이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명백한 교만입니다. 하나의 사건에도 수많은 인과관계와 각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모두 다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고려하여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것인데, 이를 우리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겸손하게 내려놓고,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온전히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작정과 일하심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큰 비 소리를 들었음에도 홀로 산에 올라가 땅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엘리야의 모습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배우고 우리 삶에서 적용해야 합니다. 예컨대, 나 하나 기도 안 해도 괜찮겠지? 내가 기도 좀 덜 해도 우리 양운섭 목사님이 매일 두세시간씩 기도하시니까 괜찮겠지? 내가 기도 안 해도 어차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겠지? 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오늘 우리 개개인에게 기도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믿으십니까?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당연히 이루어질 일들이라고 하더라도 더욱 적극적으로 뜨겁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교회를 위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우리 가정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며, 기도로 승리하시는 모든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오늘도 살아계시며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대로 일하시며, 오늘도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심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열왕기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드리되,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인 기도를 진실하게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신앙인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라옵기는 엘리야가 일곱 번 꿇어 엎드렸듯이, 쉽게 기도를 포기하지 않도록, 주여 우리 모두를 붙잡아주시고, 끈질기고 간절한 기도를 통해, 주님께 기도 응답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406장 함께 찬송하시겠습니다.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히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충만케 하심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일하심을 온전히 믿으며, 더욱더 신실한 기도 생활을 결단하며 나아가는 모든 주님의 자녀들 머리 머리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설교 개요
1. 서론
하나님의 작정과 통치 행위를 수행하는 중요한 수단이 성도의 기도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기도는 하나님의 작정을 시행하는 방법이다. 또한 신약 시대에 야고보는 엘리야를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으로 일반화시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사실을 예증하는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약 5:17–18). 이것은 우리도 엘리야와 같이 기도하면 기도의 결과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2. 본론
3. 결론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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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날개 아래 – 김지찬 (pp.817)
엘리야의 등장과 도전
왕상 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엘리야의 이름은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 엘리야의 이름은 그의 삶과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보여줌. 엘리야는 아합에게 자신의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음. 갑자기 왜 뜬금없이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인가? 성경의 문맥과 당시 바알 신화에 따르면 엘리야의 선포는 적실성이 있음.
첫째, 가뭄은 언약에 불순종할 때 임하는 여호와의 심판. 아합이 바알을 선택한 것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으로 기근이 있을 것이라고 선포한 것.
둘째, 아합이 섬기는 바알은 비와 구름을 관장하는 풍요 신. 바알 신화에 의하면, 바알은 건기에는 죽었다가 우기에는 살아나는 신. 건기에 비가 온다든지, 우기에 비가 오지 않으면 바알은 무능력한 신이 됨. 만일 여호와의 선지자의 말대로 수년 동안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는다면 진정한 신은 바알이 아닌 여호와이심이 드러나게 되는 것. 결국 왕상 17장의 핵심 질문은 “누가 비를 내리는가?”임. 이는 18장에서 있을 바알 선지자와의 대결에서도 핵심 질문이 됨.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사르밧 과부를 찾아가서 물과 떡 한 조각을 요구함. 과부는 자신에게 떡이 없고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이 있는데 마지막으로 아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함. 이세벨의 고향인 시돈 땅 역시 기근이 심각했던 것으로 보임. 바알 신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 어찌 되었든 엘리야는 과부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먼저 떡을 만들어 오라고 요구하면서 이렇게 선포함.
왕상 17: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방 시돈 땅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할 것인가?
놀랍게도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명령에 순종함. 그러자 엘리야와 과부와 아들이 여러 날 동안 음식을 먹는 일에 문제가 없었음.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 그렇다면 누가 음식을 주시는가? 바알인가, 여호와인가? 바알의 고향인 시돈의 과부에게 음식을 준 신은 바알이 아닌 여호와였음.
** 이스라엘에 기근이 있은지 3년째가 되었음. 18:1에서 엘리야는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아합을 만나러 떠났음. 이때 사마리아에는 기근이 극심했음. 엘리야는 오바댜를 통해 아합을 만나게 되었는데, 아합은 엘리야를 보자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왕상 18:17)라고 물었음. 여기서 ‘괴롭게 하다’라는 동사(아카르)는 맹세를 어기거나 바보같은 맹세를 하는 것을 의미함. 아합은 쓸데없이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하는 바람에 기근이 임한 것으로 본 것. 그러나 엘리야는 생각이 전혀 달랐음.
왕상 18:18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기근의 원인을 놓고 해석이 정면으로 충돌함. 엘리야가 쓸데없이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한 것이 문제인가? 아니면 아합과 그의 집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들을 따른 것이 문제인가? 그렇다면 누가 진정한 신인가? 여호와인가? 바알인가? 이제 승부를 가려야 한다.
바알 신화를 보면, 바알은 구름을 타고 날며 천둥소리를 내고 비를 내리는 폭풍의 신임. 그런데 성경을 보면 여호와께서도 구름을 병거로 사용하시고(사 19:1), 천둥소리를 내시고(욥 37:4), 번개를 창과 칼과 활로 사용하시며(시 18:14; 135:7; 욥 38:25)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이심. 두 신의 기능과 역할이 비슷하다고 주장한다면, 여호와와 바알 중 누가 하나님인지는 불로 응답하는 것의 여부로 확인할 수 있는 것.
결과는 엘리야의 승리. 그제서야 백성들은 엎드려 경배함.
왕상 18: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이에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바알 선지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백성들은 바알 선지자들을 잡았음.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을 기손 강으로 끌고 가 거기서 죽였음. 그 후에 엘리야는 아합에게 말함.
왕상 18:41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었음. 그렇다면 이제 아합이 그토록 바라던 비를 주관하시는 분이 여호와이심을 보여줘야 했음. 엘리야는 비가 내릴 기미는커녕 구름 하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미 큰 비 소리(콜 하몬 핫게솀)를 듣고 있었음. - 엘리야는 큰 비 소리를 듣고 나서 아합에게 말한 것. = 기근의 때가 끝났음을 선언!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간 사이에 엘리야는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땅에 꿇어 엎드렸음. 엘리야는 홀로 하나님과 대면하는 고독한 장소로 올라가 간절하게 비가 내릴 때까지 이 자세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임. 성경에는 기도의 내용이 나오지 않음. 18:1에서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어떤 간청도, 어떤 간구도 하지 않았는지도 모름.
엘리야는 사환을 통해 7번 확인하였음. 엘리야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어도 7번까지 징조를 확인하며 엎드렸음. 결국 7번째에 사람의 손만 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었음. 엘리야는 아합에게 비에 막히지 않도록 마차를 타고 내려가라고 알려주었음.
왕상 18:45a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김지찬 교수의 결론
여호와 하나님은 불을 내리기도 하시고 가뭄을 허락하기도 하시고, 큰 비를 내리기도 하심.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것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께서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이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신실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잘 받아들이지 않음.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서로 기도할 것을 요청하면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는 사실을 가르치며 엘리야를 예로 듦.
약 5:16-18
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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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 주해 – 김진수
1) 비와 생명의 주관자
(1) 엘리야의 등장과 가뭄(17:1-7)
엘리야는 구약 선지자들 중 대표적이라고 할 만큼 유명한 선지자임.
선지자 말라기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다시 엘리야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했음(말 4:5). 변화산에서 모세와 함께 나타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실 일을 이야기한 선지자도 엘리야였음(눅 9:28-36). 이처럼 중요한 인물이 등장한 곳이 열왕기상 17장임.
그런데 엘리야의 등장은 너무나 소박하고 단순함.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그의 가계나 신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음. 길르앗 지방의 디셉 사람으로 소개될 뿐. 사실 선지자에게 중요한 것은 명망 있는 가문과 화려한 배경이 아님.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이라는 사실만 중요함. 그의 신분을 드러내는 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님.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하나님의 목소리이므로, 그를 통해 하나님의 목소리만 들려지는 것이 중요함(사 40:3; 마 3:3).
엘리야는 아합을 향해 가뭄을 선포함으로써 그의 사역을 시작함.
이 당시 아합 왕가를 중심으로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 숭배에 깊이 빠져있었음. 우가릿 신화에서 바알이 구름을 타는 자로 묘사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가나안 사람들에게 바알은 비를 주관하고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이었음. 아합 왕가가 바알 숭배에 열을 올린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음. 왕을 비롯하여 대다수의 백성이 비를 주관하는 신으로 바알을 섬기고 있을 때 엘리야가 등장해서 가뭄을 선포한 것. 그러자 엘리야의 말대로 3년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음.
이 사건이 갖는 극적인 의미는 분명함. 그것은 비를 주관하시는 분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라는 사실과, 바알 숭배가 얼마나 헛되고 어리석은 일인지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함.
또한 신명기에서 비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 약속된 축복이며, 가뭄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깬 언약 파기자들에게 임하는 저주임.
신 28: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그러므로 아합 시대에 이스라엘 땅에 임한 기근은 우상숭배로 언약의 하나님을 저버린 자들에게 내린 언약의 저주에 해당하는 것.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무서운 저주를 통해 징계를 받고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함.
(2) 풍요의 주관자(17:8-16)
하나님은 엘리야를 시돈 땅의 사르밧에 있는 한 과부에게 보내심. 시돈은 이세벨의 고향이자 바알 숭배의 본거지. 하나님께서 그곳에 자신의 선지자를 보내신 것은 의미심장함. 이 당시 시돈 땅에도 가뭄이 극심하였음. 바알이 비를 주관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사는 땅에 기근이 임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돈 사람들이 신으로 믿는 바알은 비도 내리지 못하는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라는 것.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던 것이 분명함. 사르밧 과부에게 어떻게 이런 믿음이 생겼을까? 그녀는 다른 시돈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바알숭배자였을 것. 그녀의 마음에 바알 신앙에 대한 회의감이 생긴 것일까? 비를 주고 풍요를 주관한다고 믿었던 바알이 계속되는 기근 앞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자, 마음에 혼란이 생겼고, 이것이 그녀로 하여금 엘리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든 것. 이 추측이 옳다면 당시 가나안 땅 전역을 휩쓴 기근이 과부에게 무지의 늪에서 헤어나오게 만드는 은혜의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음. 정리하자면, 하나님은 기근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여 사르밧 과부의 마음을 일깨우시고 그녀로 하여금 엘리야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끄신 것.
그런데 사르밧 과부가 말씀을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께서 과부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
왕상 17: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여기서 딜러드(Dillard)는 다음과 같이 기적의 의미를 설명한다. “기적은 우선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기능을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메신저들이 전한 말씀을 보증하시는 방편으로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신다. 따라서 그것은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을 자극하기 위해 멋대로 연출되는 마술 쇼 같은 것이 아니다.”
(4) 비를 내리신 하나님(18:41-46)
엘리야는 아합에게 “큰 비 소리가 있다”라고 말함. 본문에 나와있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큰 비 소리”를 듣게 하신 것으로 보임. 하나님은 종종 선지자로 하여금 일반 사람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바를 보고 듣게 하심(왕하 6:12, 14-17). 주목할만한 것은 엘리야가 “큰 비 소리”를 들었음에도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사실. 그는 간절히 기도했을 뿐 아니라(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응답의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일곱번까지) 기도했음. 이는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쳐 줌.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라도 기도는 반드시 필요함(겔 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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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o500
하나님이 비를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일과 엘리야가 기도한 일은 어떤 연관이 있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작정과 통치 행위를 수행하는 중요한 수단이 성도의 기도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기도는 하나님의 작정을 시행하는 방법이다. 또한 신약 시대에 야고보는 엘리야를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으로 일반화시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사실을 예증하는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약 5:17–18). 이것은 우리도 엘리야와 같이 기도하면 기도의 결과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