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08 수요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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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하나님
1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
2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고
3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며
4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이니 다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
5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
6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산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쪽 땅으로 가게 하였더라
7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8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9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10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
11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12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고
13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이름과 그 세대대로 이와 같으니라 이스마엘의 장자는 느바욧이요 그 다음은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14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15 하닷과 데마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니
16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열두 지도자들이었더라
17 이스마엘은 향년이 백삼십칠 세에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고
18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
오늘 본문을 보면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 등장한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고 나서 아브라함이 재혼을 한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여러 학자의 의견이 갈리기 때문에 정확히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고나서 재혼을 했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두라 라는 여인은 사라가 살아 있을 때 첩으로 있었던 사람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는 의견을 가진 학자들도 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140살이 넘은 나이에 6명의 아들을 얻는다는 것은 매우 희박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당시 아브라함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두라외에 몇명의 첩이 있었다.
그렇다면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되는 그두라의 존재를 밝힌것인가? 그것은 아브라함은 노년에도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았다는 것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이다.
아브라함 당시 첩을 두고 많은 자녀를 두었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당시 첩이 몇명이 있고, 자녀의 수가 많다고 소개하는 것을 보고 오늘날의 시선으로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로 말하면 아브라함에게 집이 몇채가 있었고 아브라함이 소유한 자동차가 무엇 무엇이더라…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많은 자녀가 있다고 이야기만 한다. 그리고 5절에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소유는 문자적으로 ‘아브라함이 소유한 모든 것을’, ‘아브라함이 가진 모든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가진 모든 것은 단순히 아브라함이 소유한 재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 즉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과 그외에 자녀와 부에 대한 모든 상속권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의미이다.
이 말은 결국 아브라함은 이삭을 유일하고 합법적인 상속자로 삼고 이삭에게 가정 전체(육체적 가정 뿐 아니라 영적 가정까지)를 양도한 것이다.
그러기에 아무리 많은 첩이 있고 그에 따른 많은 자녀들이 있어도, 아브라함의 모든 것을 양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이삭밖에 없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 이었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6절을 보면 이삭을 재외한 모든 자녀를 마치 쫓아내듯 떠나게 한다.
이렇게 한 이유는 이삭이 다른 자식들로부터 재산과 관련된 분재에 휩싸이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브라함은 노년 까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고 그 축복의 계보는 다른 누구도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태어난 이삭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성경은 아브라함이 175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을 기록한다.
그래서 우리는 대충 이다음의 내용을 예상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죽었고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상속받은 사람이 이삭이기에 이제 이삭의 이야기가 나오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이 이삭이 아닌 이삭의 이복형인 이스마엘이 등장한다.
성경은 과거 있었던 모든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다시말해 아브라함의 모든 내용이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부분만 하나님께서 기록하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그 나름의 이유가 분명히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창세기 25장에서 이스마엘의 후손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 하는 점은 특이하고 어쩌면 낯설어 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삭 중심으로 본문을 읽는 것이 우리에게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낯선 기록을 만났을 때, 우리의 시각은 더욱 넓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언약’ 백성 여부를 막론하고 동일하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민족을 이루시고 그 민족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머지 백성들 소위 말하는 이방민족들에게 관심이 없으셨던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미디어 용어로 스핀오프라는 말이 있다.
스핀오프는 오리지널 영화나 드라마의 캐릭터나 설정에 기초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스핀오프 영화나 드라마는 원작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지만 주인공이 다르고 그에 따른 이야기도 다르게 전달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춘향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2010년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춘향전에 등장하는 인물 그대로 출연시키고 이몽룡이나 춘향이가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을 방자로 한 방자전이라는 이름으로 영화가 개봉을 하였다.
이와 같이 동일한 등장인물이지만 그 안에서 주인공을 달리 해서 또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오늘 본문이 꼭 그렇게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서만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이삭만 바라보고 계신다고 생각 한다. 얼핏 보면 그렇게 생각 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을 조금더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또 21장 17-19절을 보면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노년에 얻은 이삭을 상속자로 선택하신다.
이 일 때문에 이스마엘과 여종 하갈은 추방을 당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의 생명을 지켜 주셨을 뿐 아니라 이스마엘을 통해서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열방의 많은 민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주께로 돌아오도록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나도 모르게 어느순간 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한 나 중심의 신앙생활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나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만을 사랑하시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올바로 살아가길 바라고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시각을 넓혀야 한다.
결코 나만을 위해 살아가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올바른 성도의 모습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기위해 또는, 나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해 타인을 나의 도구로만 사용하신다는 착각을 할 때가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시고 가나안 땅으로 갈 것을 지시하신다.
그런데 가나안 땅의 사는 사람들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신다.
이것을 잘 못 이해하면,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이스라엘 밖에 없다고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민족은 이스라엘의 들러리라고 생각 할 수 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모든 백성에게 관심이 있고 모든 백성을 사랑하신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면서 앞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경험할 것들을 미리 말씀하신다.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이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 동안 가나안땅에 들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아는가?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창세기 15장을 기준으로 아모리 족속은 이미 400여 년간을 살면서 온갖 죄를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400년동안 기다려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모리 족속에게 400년동안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회개 하지 않았기에 그 땅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것이다.
그래서 신명기 9장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3 오늘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네 앞에 나아가신즉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니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멸할 것이라
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내 공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차지하게 하셨다 하지 말라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선하고 의롭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해서 가나안을 선물과 같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의 백성을 심판하시는데 도구로 사용하시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들의 악이 찼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가나안 백성을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시각을 넓혀야 한다. 나만을 보며 모든 관점이 내 중심에 머물러 있다면 건강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볼 수 있는 시각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나만의 하나님이 아닌 것을 반드시 기억해라.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종종 이스라엘과 우리를 나를 동일시 한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사람취급도 하지 않은 이방인이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만 보아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시선은 나, 우리가 아닌 하나님과 이웃에게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행하신다. 하지만 이삭의 라이벌과 같은 이스마엘도 이삭과 동일하게 사랑하신다. 그리고 가나안의 그 백성들도 사랑하신다. 사랑하시기에 창세기 15장의 말씀처럼 그들의 죄를 회개할 기회를 더 주신 것이다.
아마 그들이 그들의 죄를 회개 하였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38년이 아닌 더 오랜 시간 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시각을 넓혀야 한다.
하나님은 나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옆의 지체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나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미워하고 용서가 안되는 그 사람도 사랑하신다. 믿어지는가?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선교회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선교회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아교회도 사랑하시고 새왕상교회도 사랑하시고 영종도 안의 모든 교회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감리교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장로교도, 침례교도, 순복음도 사랑하신다.
그러기에 나보다 남이 잘 되는 것에대해 시기하지 하는 것 이 아니라 정말 축하해 주고 축복해 줄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안에 있길 바란다. 그래서 로마서에 바울이 권면했듯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더 나아가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그 사랑을 먼저 누리는 사람으로써의 하나님께서 나뿐 아니라 너도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으로써의 의무임도 기억하길 바란다. 그 놀아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이들에게 전할 수 있길 바란다.
기도
사랑의 주님 저희에게 놀라운 사랑을 허락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그 사랑을 깨달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셨으니 이제 나만을 위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를 둘러보아 하나님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여 함께 웃고 함께 울 수 있는 성도되게 하여주옵소서, 더나아가 그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도 허락하셔서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전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