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로 물들다(고전15:4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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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3년 11월 8일 수요일
제목 : 예수로 물들다
본문 : 고린도전서 15장 48-49절
1. 내면의 채움없이 외적인 평판 만들기에 급급한 오늘 날
1) 건강한 평판은 성품이 만든다
평소 우리가 인지하지 않기 때문에, 대놓고 신경쓰지는 않았지만 막상 들어보면 은연 중에 신경쓰고 있었을 법한 우리의 삶의 영역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좋은 평판’ 입니다.
사실 누가 좋은 평판을 인생의 목표로 살겠습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명예에, 평판에 굉장히 큰 신경을 쓰고 있다는거죠.
예를 들어, 저에 대한 평판을 조금 소개해 보면, 이런 내용들이 있겠죠. “내가 보니까, 조광원이란 사람이 참 진국이더라고.” “내가 이야기를 좀 나눠봤는데,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더라.” “내가 같이 일해봤는데, 일처리가 깔끔해.”
여하튼, 이런 평판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평판은 무엇을 기반으로 합니까? 바로 인성, 즉 성품을 배경으로 평판이 나옵니다.
농담 반, 진담 반이지만 결혼 전 배우자의 본성을 알기 위해선 예비 배우자가 운전하는 차를 타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도 운전을 하며 고쳐야 할 습관이 물론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클락션을 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제 모습을 보며 제 아내는 늘 말합니다. “저럴 땐, 빵! 해야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사고가 날 수도 있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경각심을 주고 또 주변 다른 차들도 조심하라는 의미로 울려야 한다고 하니 이해는 충분히 됩니다.
그러나 제가 클락션을 울리지 않는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이 있어 몇 가지 주장해보자면, 첫째, 어차피 사고가 나지 않았고, 둘째, 내가 방어 잘 하면 될 일이고, 셋째, 한 손으로 클락션 울릴 바엔 그 한 손을 핸들에 올리고 있는게 더 안전하겠다 싶어서 였습니다.
여하튼, 사람마다 내재된 본성, 성품, 인성은 다 다릅니다. 그리고 그런 성품을 만들어 내는 데까지 드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습니다. 한 순간 그 성품이 만들어지기보다 오랜 시간 거치고, 경험해온 삶의 여정과 환경을 토대로 성품이 만들어 집니다.
2) 그러나 오늘 날, 성품보다 평판이 앞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늘 날에는 소위 ‘가식된 평판’이 대다수 입니다. 즉 내면의 성품을 기반으로 한 평판이 아니라, 그 순서를 바꾼다는 겁니다. 성품보다 평판이 우선시 되는 거지요.
대게 우리는 내면의 성품을 잘 가꾸기보다, 오히려 보여지는 모습을, 외적으로 노출되는 브랜드를 더 강조하려 합니다. 이를 위해 많은 기업들도 내면의 어떤 모습이 있음을 보여주기보다, 더 능력있는 기획자, 기술자들을 고용하는 것이 현실이지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신앙에 있어 이런 ‘평판 만들기’에 동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되는 삶보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더 의식해서 ‘마치 괜찮은 크리스천’인 것처럼 보여지려 신경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 우리는 복음을 전하다 상대와의 껄끄러운 관계가 되는 것을 두려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는 내가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발각 당할까 걱정하며, 그러다 발각 당하면 당황스러워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미국의 ‘버크 파슨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황스러움은 오늘 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형태의 박해일 것이다.” 파슨스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이 문제를 꼬집어 냅니다. 내 안에 채움이 없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오늘 날의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박해는 폭력과 같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그저 당황스러움이라는 상황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으로부터 반드시 해방할 필요가 있는데, 우리를 해방케 하는 유일한 희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 말합니다.
2. 예수로 채우다
1) 고린도교회 교인들, 부활하신 예수를 믿다 vs 부활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유일한 희망인 예수 그리스도를 모를리가 있습니까? 아니요. 우리는 예수를 압니다. 너무나 잘 알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두려움과 당황 가운데 현실판 박해를 당합니다.
이게 비단 오늘 날만의 문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또 이 문제의 해결책이 예수 그리스도라 하는 것이 오늘 날에서야 나온 것입니까? 이 또한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본문 속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보면 마치 오늘 날 우리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들도 분명 사도 바울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리고 그의 죽음은 곧 우리를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죽은지 3일만에 부활하셨음을, 그리고 지금은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여전히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그들은 들었습니다. 이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세례를 받고 모인 이들이 바로 고린도교회 성도들 입니다.
그런데 이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나타납니다. “부활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부활은 있을 수가 없다.” 왜요? 왜 부정합니까? 현실적으로 부활을 믿는 것보다 믿지 않는게 더 쉬운 일 아닙니까? 또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면 “쯧쯧쯧, 교회 다니더니 드디어 정신이 나갔네!” 라는 소리 듣기 십상 아닙니까? 마치 오늘 날 ‘가식된 평판’을 추구하는 우리의 모습이 이들의 모습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그런 이들을 보며 답답한 심정을 가지고 쓴 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5장의 내용입니다. 이들을 보며 사도 바울이 말하고 싶었던 핵심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다면 의심하지 말아라! 부활 신앙을 가져라! 예수, 제대로 믿어라!” 이지 않겠습니까?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님은 그리스도인에 두 부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믿는 사람”
우리 성도님들은 어떤 부류에 속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정말 믿는” 사람들 입니까? 또는 의심하고 채움 없이 평판을 중요시 하는 사람들 입니까? 오늘의 본문을 통해 저와 여러분 모두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새생명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가 맞는가?” 또 “예수로 물들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에 따르는 은혜는 무엇인가?” 를 함께 나누며 자기점검과 결단과 도전으로 나아가는 시간 되길 소망합니다.
2) 사도 바울의 외침,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먼저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우리는 몸의 부활을 하게 된 것”이라 선포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묻죠. “아니,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고, 도대체 어떤 몸으로 온다는 겁니까?”
이에 사도 바울이 답합니다. “씨가 땅에 뿌려져 죽어야 그 씨에 맞는 형체로 자라날 것이라.” 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형체는 곧 썩지 아니할 것이고, 영광스러운 것이고 또 신령한 몸으로써 살아난다는 겁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예수를 믿는 그 삶에 복음이, 진리가 또 부활 신앙이 제대로 채워지길 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아가 변치않을 영생의 소망을 꿈꾸길 원했던 겁니다.
3) 부활하신 예수로 채워진 자의 삶 : 일사각오, 주기철 목사님
일제감정때 신사참배를 거부하시고 복음을 위해 고군분투한 주기철 목사님을 우리 성도님들은 잘 아실 겁니다. 그는 민족의 광복을 위해 고군분투한 독립투사기도하지만, 그보다 먼저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전하고 선포하던 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그의 아들 주광조가 12살 때, 그리고 주기철 목사님의 나이 48세에 순교하게 됩니다.
너무나 어린 아이를 남겨두고, 또 너무나 젊은 나이에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은 많은 목회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바로 일사각오의 설교를 통해 세 가지의 메세지를 남기셨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첫째, 주와 함께 죽자. 예수를 따라서 일사각오. 둘째, 예수 믿는 자들은 남들을 위해 희생한다. 남을 위하여 일사각오. 셋째,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성경은 피로서 써졌고, 피로써 전하여졌다. 피로써 전하여진 부활의 복음을 우리 또한 피로써 지키고 전하자. 부활 진리를 위하여 일사각오.
도대체 무엇이 주기철 목사님을 이리 만들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부활 하시어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안에 채워지고, 그래서 예수를 위해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살았고, 그게 오늘 날 삶의 표본을 만든 우리가 바라보는 평판 아닙니까?
3. 예수로 물들다
1) 예수를 채우는 방법은 “자리를 지키는 것” 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주기철 목사님처럼, 사도 바울의 외침처럼 예수로 채울 수 있습니까? 특별한 방법이 있는게 아닙니다. 지금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바로 그 방법입니다. 내 모습 그대로, 주어진 삶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겁니다. 허락하신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는 겁니다.
49절에서 우리를 향해 어찌 말합니까?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라 말하지 않습니까? 사탄의 형상을 띄라 말하지 않습니다. 악인의 형상대로 살아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늘 소망을 품은,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가지고 살아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한 그 모습대로, 벗어나지 않고 그대로 말입니다. 우리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야 말로 예수로 채우는 것이지요.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 저는 그 자리를 수년을 지켜왔지만 바뀐 게 하나 없는데요? 예수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는 버림받은 것 아닌가요?”
여러분, 이미 예수를 믿은 것 자체가 복이고 변화 아닙니까? 예수를 믿은게 기쁨 아니에요? 예수를 믿고 잘되는게 복이 아니라, 이미 예수를 믿은 것 자체가 복이고 변화가 된 것 아닙니까? 이미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채우심을 기대하고 소망할 수 있는 것이 복이고 은혜라는 겁니다.
여기에 깨끗한 물 한 잔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잉크 한 방울이 볼펜에 달려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잉크가 ‘똑’ 하고 떨어지면 이 물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변합니다. 고작 한 방울로 이 물 전체가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기다리고 기다리다 너무 안떨어져서 물컵을 다른 곳으로 옮겨 버립니다. 옮기자 마자 잉크가 ‘톡’ 떨어집니다. 이 물에 변화가 생깁니까? 아니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요? 이 물컵이 자리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 아닙니까?
2) 예수가 채워지면 : 1. 예수를 닮아간다
우리의 삶에 예수 한 방울이 반드시 떨어질 것을 소망하고 그 자리를 지킨다면, 하늘의 속한 자로 부르셨음에 확신을 가지고 순종으로 그 자리를 지킨다면, 그러다 예수 한 방울이 우리 안에 ‘톡’하고 떨어진다면 반드시 우리의 삶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야 비로소 예수로 물들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 한 방울로 물들기 우리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인데, 먼저는 우리를 통해 예수가 드러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예수 닮은 삶을 살아내는 것이지요.
우리의 내면이 예수로 물들면, 예수로 채워지면 그 성질이 겸손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로 채워지면 그 성질이 온유로 나타날 것입니다. 때로는 그 성질이 담대함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가 없다면, 불가능합니다. 물론 흉내를 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흉내는 오래 못갑니다. 애당초 우리 안에 겸손이 없고, 온유가 없고, 성실이 없는데 어찌 예수 없이 우리 삶을 통해 겸손이 나오고 온유가 나오고 성실이 나오겠습니까?
3) 예수가 채워지면 : 2. 하나됨의 은혜를 누린다
또 우리 안에 예수 한 방울이 떨어져, 예수로 채워지면 각기 다른 이들을 통해 하나됨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청년들과 등산을 했습니다. 물론 계획된 등산은 아니었고, 한 청년이 “어머~ 단풍이 너무 이쁜데, 저희 등산하면서 회의할까요?” 라 운을 띄었습니다. MBTI 중 ‘엔프피’의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즉흥에 약하고 흥에 약하다는 겁니다. 저는 그 미끼를 그대로 물어버렸습니다.
근데 또 상상해 보세요. 너무나 아름답지 않습니까? 단풍이 든 산을 함께 오르며 남은 2학기의 일정을 정리하고 또 준비하며, 뿐만 아니라 예수를 나누는 그림을 그려보니 어찌 아름답지 않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한 명, 두 명 모여 아름다운 단풍 아래 예수를 나누고자 등산을 시작하는데, 왠걸요? 조금 오르니 그 안이 너무 푸릇푸릇한 겁니다. 분명 외관의 단풍을 보고 기대하며 갔는데, 내부는 녹색의 향연이 따로 없었습니다. “이런게 가식된 평판인가? 막상 열어보니 겉과 속이 너무 다른 이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생각이 들덥니다.
산을 오르자마자 의심부터 들어 기대감이 살짝 떨어졌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 있겠습니까? 한 걸음, 한 걸음 산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초입과는 다르게 점점 색이 붉어지는 겁니다.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단풍도 보이고, 물이 다 든 단풍도 곳곳에 보였습니다.
그리고 든 생각이 “그래, 이게 맞지. 단풍이 한 날, 한 시에 드는게 아니지. 잎 마다 물드는 시기와 때가 다 다르지.”
모든 잎이 물들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지금을 가을이라 부릅니다. 모든 잎이 물이 들어야 비로소 가을이 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푸르나, 이제 막 물들기 시작했으나, 이미 물이 다 들었으나 상관없이 이미 가을입니다. “아~ 색은 다르지만 이들은 가을이라는 계절을 함께 만들어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가져보았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 삶에 예수 한 방울 떨어지는 시기가 다 다르기에, 우리도 예수로 물드는 때는 다 다릅니다. 우리 모두 영적인 가을을, 각자의 시기와 때로 보내고 있지요.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리 모두 교회로 모여, 마음 모아 하나되길 힘쓰지 않습니까? 하산하면서 청년들을 보며 너무 다 다른겁니다. 누군가는 하산 후에 주말이지만 출근을 해야했고, 누군가는 저녁에 동생과 함께 곱창 약속을 지켜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야 했습니다. 삶이 이렇게나 다른데 교회로 모여 하나되길 힘쓰는 모습을 보며,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써 가능하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4.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 예수로 물드는 시기와 때는 다 다릅니다. 그렇기에 아직 물들지 않았다고 낙담하고 좌절하여 포기하지 마시고, 반드시 예수 한 방울의 은혜를 허락하실 하나님을 소망하며 지금의 자리를 지키는 저와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아직 물들지 않았다고 하나님의 은혜를 못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 자리에 계심이, 예수를 믿음 그 자체가 복이고 은혜 입니다. 그 은혜의 기쁨을 붙들어 더욱 예수로 물들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찬양 및 기도]
1. 부르신 곳에서 + 예배합니다
- 예수 한 방울을 구하는 이 시간 되길 원합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급급한 가식된 평판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도, 어떠한 여건 속에서도 낙담과 좌절하기 보다 사랑과 진리로 한 줄기의 빛을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며 지금 이 자리를 지키는 자가 되게 하소서. 부르신 곳 어디에서든 주님을 바라며 예배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우리의 삶이 예수로 충만하여 채워지게 하소서.
- 나의 하나님을 찾는 우리의 자녀들, 우리의 다음세대 또 우리의 청년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참으로 감사했던 것은 부모님의 하나님이라는 벽에 부딪혀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을 찾는 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 우리의 다음세대, 우리의 청년들이 예수 한 방울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기회를 허락하소서.
2. 내 삶의 이유라
- 수험생들을 위해 기도했으면 합니다. 이제 수능이 8일 남았습니다. 두렵고 떨릴 것입니다. 준비한 모든 것 지혜롭게 치루게 하소서. 남은 일정을 하나님 앞에 겸손함으로 내려놓고 준비하는 시간들 되게 하소서.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해 기도하는 가정과 부모님들의 심령 가운데 위로와 격려와 사랑을 허락하사, 대학을 자랑하고 세상의 성공을 자랑하기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평생 노래하고 자랑하는 가정 되게 하소서.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