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어지럽더

에스더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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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밤인데, 더욱 어두워질 수 있습니까? 밤 중에 어두운 곳을 바라보면 그래도 때로는 달 빛에 많은 것들이 보입니다. 그러나 달 빛이 없으면 많은 것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도 그저 캄캄하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별빛에 앞이 보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구름에 모든 별빛 마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정말 흑암 캄캄한 그때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적에게 가장 취약한 때입니다. 나 자신을 방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 또한 군에서 밤에 매복을 하면, 이렇게 캄캄한 날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9명의 사람들이 한 개의 조로 이뤄져 함께 매복을 하는데, 이런 날은 두렵습니다. 혹여나 적군이 침투할까 두렵고, 또 혹여나 우리가 먼저 발견되어서 적에게 기습을 당할까봐 무섭습니다. 여러 날들 중에서 이러한 날은 기도가 더욱 간절해집니다.
이 자리에 함께하시는 사랑하는 성도님들 또한 이러한 날들을 마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에스더의 말씀이 이 가운데 우리에게 참된 위로의 말씀이 되길 소원합니다.
에스더서는 포로 귀환 이후에도 여전히 페르시아의 땅을 살아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결과는 모든 유대 민족들에게 동일하게 영향을 미칠 이야기였습니다. 주님의 백성으로서 운명 공동체로서 마주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것은 성경으로서 모든 교회가 한 운명 공동체로서 마주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1장에서 우리가 함께 살펴본 내용은 페르시아를 통치하는 왕은 공정한 왕이 아니더라는 겁니다. 향낙을 좋아하고, 왕후라 할지라도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과시의 대상이자 얼마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소모품이라는 겁니다. 왕후라 할지라도 이럴진대, 페르시아 땅을 살아가는 유대민족은 어떻겠습니까. 이들은 훨씬 더 연약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폭군 같은 성품의 사람에게 운명이 맡겨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시한폭탄과 같은 군주 아래에서 살아가는 민족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에스더 왕비가 그의 아내가 되기에, 어쩌면 긍정적으로 평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를 냉혹하게 평가합니다. 역사에서는 이 아하수에로 왕이 크세르크세스로 불립니다. 그리고 17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도 그리스 연합에 대패한 실패한 군주로 평가됩니다. 정말 그리스 전역을 뒤덮고도 남을 인원임에도 패배합니다. 헤로도토스의 기술을 보면, 그가 마지막 운명은 집안에 정분과 후궁들의 암투 속에서 죽었다고 말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더욱 어두워지는 밤은 교회 안에서도 벌어지기도 합니다. 저 또한 신학생으로 있으면서 학교 안의 정치적인 문제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대학교 4년, 군휴학 4년, 그리고 신대원 3년의 시간이었는데, 거의 10년 이상의 시간 동안 어떤 특정한 문제로 말미암아 해결은 되지 않고, 더욱 복잡하고 상황이 어려워져 갔습니다.
교회를 섬길 목회자가 양성되는 곳, 때로는 하나님의 선지동산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이러한 문제는 참 어려웠습니다. 때때로 학교를 놓고 가슴 아파하며 기도할 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어느 정도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런 문제는 당연하다 여길 때도 있었습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신대원에 들어오니,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밤인데, 더 어두워질 수도 있구나.
오늘 본문 또한 이렇게 에스더서에서 밤이 찾아오고, 더욱더 흑암이 캄캄해지는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아하수에로 왕 자체만 해도 캄캄합니다. 그런 가운데서 에스더가 왕비가 된 것이 한편으로는 기쁜 소식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고, 혼재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2장 말미에서 모르드개가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발견하였습니다. 엄청난 공적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3장으로 넘어가면, 엉뚱한 사람이 재상으로 올라갑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2절을 보면, 왕의 명령으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대문에 있는 모든 신하들이 하만에게 꿇어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왕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절할 수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날마다 권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모르드개가 어쩔 수 없이 밝히게 된 이유는 그가 유다인이라는 겁니다.
사실 어찌보면 참 황당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편으로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하만은 아각사람 함므다다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각은 사무엘상 15장에서 사울이 진멸하지 않은 아멜렉 사람의 왕 아각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는 에스더 2장 5절 베냐민 지파사람인데, 공교롭게도 기스의 증손이라고 말합니다. 사울의 아버지와 동일인물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를 통해서 사울을 떠올리게 합니다. 영적인 대립각을 보여주는 겁니다.
유다인으로서 신앙적인 절개로서 하만에게 절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립각으로 말미암아 더욱 한층 분위기가 무거워집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하만이 이를 듣고서, 모르드개에 대한 적개심 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들을 죽이고자 했던 겁니다. 모르드개가 자신이 절하지 않은 이유가 화근이 되었습니다. ‘자기는 유다인임을 알렸더니’ 그 말이 꼬투리가 되어서, 모든 유다인을 죽이겠노라고 말하는 겁니다. 정황적으로는 사울과 아각의 관계가 역전되어 있습니다. 이전의 영적 전쟁에서는 사울의 손에 아말렉과 아각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사울은 아멜렉은 진멸했지만, 아각을 살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만의 손에 모르드개가 있는데, 그도 죽이고, 민족도 모두 멸족하겠다는 겁니다. 사울의 영적을 실패를 떠올리게 할 뿐만 아니라, 상황적으로도 사면초가와 같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전쟁 속에서, 모르드개와 유다 민족의 운명을 마치 손에 쥐고 있는 듯한 하만은 어떤 존재일까요?
사실 그는 사탄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존재입니다. 모르드개의 행위만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죽일 듯이 증오하고, 그의 민족까지 삼키려하는 존재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도 그의 방식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정말 악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치 불이 볏짚 하나만 태우는 것이 아니라, 온 집을 태우듯이 일하고 있습니다.
모르드개가 어리석은 태도로 말미암아 온 유다 민족이 죽게 되었습니다. 온 사망이 온 민족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하만의 모습은 사망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아담이 대표가 되어, 모든 인류에게 사망이 미친 것과 같은 사망의 모습입니다.
또 하만, 그는 너무나도 간교합니다. 아하수에로 왕을 설득함에 있어서 분별력을 상실하도록 꾑니다. 구체적인 사실을 말하지 않고, 과대포장합니다. 8절을 보면, 유다인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저 한 민족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 한 민족에 대해서 부연하기를 법률의 근간 자체가 서로 맞지 않아서 상종할 수 없는 무리처럼 표현합니다.
유다인들은 성실하게 그 나라의 법을 준수하며 살았습니다. 일부 특수한 몇 가지만 맞지 않을 뿐입니다. 사실 상세한 이유를 들으면, 민족을 전체 진멸한다는 것은 오히려 하만에게 불리한 상소였을 겁니다.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면서, 하만이 제안하는 것은 ‘은 일만 달란트’입니다. 뇌물로서 자신의 충성심을 드러내었습니다. 일만 달란트면, 최소 3~400톤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당시 은은 페르시아의 화폐였다고 말합니다. 제국의 2/3 정도되는 재정으로 추정합니다. 한 개인이 이러한 부를 소유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추정하기로는 유다인들을 학살함으로서 이를 보충하려고 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하만의 행동에 왕은 자신의 왕권을 상징하는 반지를 통째로 줍니다. 즉 이 일에 간섭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만 그가 수행할 수 있도록 전권을 주어버립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왕이고, 또 동시에 하만의 간교함이 뱀의 간교함과 같이 매우 간교함을 보게 됩니다.
하만의 이러한 특징을 보게 되면, 그가 어떤 무위로서 왕국의 최고의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2절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만에게 절하라는 왕의 명령 또한 수상합니다. 하만은 그의 간교함으로 그러한 자리에 올랐고, 또 사실상 왕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자신의 입맛대로 움직일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보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만은 ‘교만’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중의 하만의 운명과도 연관되는 죄목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하만의 모든 유다인을 진멸하리라는 계획 속에서 왕의 직인까지 찍혀 온 나라에 공포 됩니다. 정말 이제는 조금도 빛이 없는 흑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사탄의 세력이 완전히 온 세상을 장악한 것처럼 보입니다. 15절에서 이러한 상황이 매우 어지럽게 묘사됩니다.
“역졸이 왕의 명령을 받들어 급히 나가매 그 조서가 도성 수산에도 반포되니 왕은 하만과 함께 앉아 마시되 수산 성은 어지럽더라”
성은 혼란스럽습니다. 어찌보면, 하나님 구원 사역이 막힌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고 있는 창세 때 혼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창세기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가득한 모습처럼 보입니다.
사실 에스더서는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는 성경 중에 하나입니다. 그 중 3장은 그 중에서도 가장 흑암이 가득한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곳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불의가 온 세상을 가득히 덮는 가운데 하나님의 선민들은 악한 세력들의 의도를 전혀 파악도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은밀하게 모의 되고, 왕과 같은 권력자가 이에 속고 넘어가며, 의결되는지 인식조차 하지 못합니다. 왕의 명령이 공포되고서야 사람들은 알아차릴 뿐입니다. 성이 떠들썩합니다. 요란합니다. 선한 이들은 울부짖고, 악한 이들은 피를 삼킬 미소를 띕니다.
15절 말씀 그대로 왕은 하만이 주는 혼탁한 술에 쉬해 총기를 잃고 나라는 어지럽습니다. 왕과 하만 아래에 수 많은 사람들이 울부짖고, 악은 모든 것을 장악한 듯이 보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우리가 이 3장의 시기를 살았다면, 종말의 시기로 생각했을 겁니다.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에스더서의 끝을 알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주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과 같이 오늘을 해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에스더서를 부림절에 항상 읽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각종 제국 속에서 살아갈 때에, 그들의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해주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하만과 같이 유대 민족을 집어 삼키려 했을 때에도, 그들에게는 소망의 말씀으로서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3장에서도 이러한 끝을 알고 본다면, 이미 하나님께서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는 말씀과 같이 역사하심을 보게 됩니다.
3장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찾는다면, 7절에서 발견됩니다. 곧 부르입니다. 제비뽑는 겁니다. 추첨이지요. 하만의 무리는 자신들이 의지하는 신을 따라 추첨했을 겁니다. 또 세상 사람들은 제비와 부르를 우연이라고 말합니다. 확률이라고 말합니다. 네 맞습니다. 이들은 각각 달과 날에 대해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365일 중에서 하루를 뽑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첫째달 니산월에 뽑았는데, 아달월 열두째달을 뽑습니다. 13일을 뽑았습니다. 대략 1년이라는 긴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래도 이게 어디입니까. 당장 일주일 뒤, 한달 뒤가 아니라, 1년이라는 긴 시간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일차적인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끝으로 가면, 이들이 원래는 죽게 될 날이 오히려 역전이 날이 됩니다. 오히려 원수들이 드러나고, 이들을 제거하는 날이 된 겁니다. 죽임 당한 날이 보복이 날이 됨을 보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 부림이라는 제비 뽑기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역전과 원수에게 보복하는 날을 기념하는 것이 부림절이었습니다. 총 3일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13일의 부림절은 이후 14과 15일을 잔치날로 보내게 됩니다. 어찌보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엿보게 하는 날입니다.
아무리 흑암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그 수면 위를 운행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새 날을 준비하십니다. 여러분들의 앞날이 보이지 않는다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새로운 날을 이미 준비하고 계십니다.
앞서 저는 학교의 이야기를 나눠드렸는데, 다행히 그 불의한 분은 징역도 살고, 학교 운영에는 전혀 간섭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정말 흑암이 캄캄한 상황 속에서 빛을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절망 속에서 가장 선명한 빛이 임하는 법입니다.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신실하심을 믿으며 나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께서는 흑암 가운데서도 일하십니다. 우리가 잠들며, 알지 못할 때에도 우리를 보호하시며 지키십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원수를 갚으시며, 친히 보복하십니다.
우리 안에 내면적인 어려움들, 흑암들 있습니까. 믿음으로 주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원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우리의 부활이요,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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