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응보, 권선징악이 진리이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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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응보, 권선징악이 진리이긴 합니다만,
[서론]
우리가 스포츠를 보면서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특히 최근에 끝난 아시안 게임같은 올림픽을 보면 어떤가요?
운동선수들이 수년동안 준비한것을 잘 해내는 것을 보며 우리는 희열을 느낍니다.
수년동안 365일 훈련한 것을 잘 해내서 승리를 얻는 장면을 보면 참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올림픽같은 스포츠 경기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공정한 심판입니다.
심판이 판정을 잘못해서 최악의 올림픽을 만든 일들이 있습니다.
스포츠 경기에서 공정한 심판은 필수적인 요소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심판은 누구신가요?
우리는 그 분이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의 현실을 보면 심판이신 분이 항상 공정한것 같지는 않습니다.
분명 반칙을 한 사람이 있으면 옐로우카드, 레드카드를 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는것 같습니다.
악인들이 잘되고, 오히려 선한 사람들이 고통받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눈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바라보아야만 할까요?
[본론]
먼저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의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1-2장은 욥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배경설명입니다.
그리고 3장에서 우리는 욥의 깊은 탄식을 들었습니다.
4장에서는 이러한 욥에 대해 친구 엘리바스의 뼈아픈 충고가 등장합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이 공정하고 정의로운 심판자라고 대변했습니다.
그러면서 욥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엘리바스의 근거는 자신이 관찰한 세상입니다.
그는 자기 주변에서 악인들이 결국 멸망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가지는 자신이 경험한 영적인 사건입니다.
환상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6-7장에서 욥은 이렇게 말하는 엘리바스에 대한 실망을 드러냅니다.
더 나아가 욥은 결국 하나님을 향해 불평불만을 터트립니다.
이렇게 욥이 불평을 터트리자 오늘 말씀 8장에서 욥의 또다른 친구인 빌닷이 나섭니다.
그는 욥이 하나님을 향해 내뱉은 불평들을 도저히 받아들일수가 없었습니다.
1-4절입니다.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였다. 언제까지 네가 그런 투로 말을 계속할테냐? 네 입에서 나오는 말 거센 바람과도 같아서 걷잡을수가 없구나. 너는 하나님이 심판을 잘못하신다고 생각하느냐? 전능하신 분께서 공의를 거짓으로 판단하신다고 생각하느냐? 네 자식들이 주님께 죄를 지으면, 주님께서 그들을 벌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빌닷은 욥이 하나님께 하는 말이 너무 거칠다고 화를 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변호합니다.
하나님은 욥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런 징계를 내리실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빌닷의 주장도 엘리바스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공정하시고 정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법원에 가보면 디케 여신상이 있습니다.
바로 이 사진입니다.
원래 디케 여신상은 눈을 가리고 저울과 칼을 들고 있습니다.
눈을 가리는 이유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속지 않고 공정한 재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저울에 죄를 달아보고 칼로 냉혹한 심판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나라 대법원 디케 조각상은 눈을 뜨고 있습니다.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습니다.
눈을 뜬 목적은 눈을 감고 있는 목적과 동일합니다.
오히려 눈을 떠서 정확히 보고 공정한 판결을 내리겠다는 것입니다.
칼 대신 법전을 든 이유는 법전에 따라 저울에 정확히 죄를 달아보고 공정하게 심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빌닷에게 하나님은 마치 정의의 여신 디케와 같습니다.
혹시 우리중 누군가에게도 하나님은 이런 이미지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빌닷이 보기에 하나님은 욥에게 아무 이유없이 고난을 주실 분이 아닌 것입니다.
그에게 욥은 단지 자신의 죄때문에 이러한 고난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욥의 자녀들이 모두 죽은 것도 그의 자녀들이 그만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빌닷의 말은 자녀들이 모두 죽은 욥에게는 참 잔인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과응보적 사고방식은 잠언뿐만 아니라 굉장히 보편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예전에 방송에서 참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미스코리아 출신 연예인이 비구니가 된 사연이었습니다.
그녀는 적막한 산에 올라가 홀로 눈물을 펑펑 쏟아가면서 삼천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 싶어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인생이 참 기구했습니다.
결혼한지 4년만에 갑자기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사업을 하게 되었는데 IMF로 그것도 망한 겁니다.
그런데 그 후 또 하나밖에 없던 아들이 이유를 알수없는 병으로 아픈 겁니다.
이렇게 인생이 너무 괴로워 생각해보니 그게 모두 자신의 업보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죄때문에 이런 고난을 겪게 된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물론 진짜 속마음은 자신의 죄때문에 자식에게도 피해가 갈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의 고리를 끊기 위해 머리를 깎고 홀로 산으로 들어가 고행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굉장히 특이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세상을 인과응보의 사고방식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이태원 참사를 보십시오.
대놓고 말은 안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태원 참사를 내심 어떻게 여길까요?
놀랍게도 꽤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태원 참사를 깊이 가슴 아파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죽은 이유를 할로윈 축제에 가서 귀신놀이하다가 죽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죽은 것은 안타깝지만 마치 그들의 죽음은 그들이 지은 죄의 결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겉으로는 안타까운척 하지만 진심어린 위로의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빌닷처럼 인과응보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교회 권사님이 이태원 참사로 아들이 죽었는데 자기 교회 안에서 이런 시선때문에 참 괴롭다고 고백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목회자들에게도 있습니다.
예전에 필리핀에 큰 태풍이 일어 많은 사람들이 죽은 일이 있습니다.
그때 한 유명한 목회자는 필리핀에 동성애자가 많아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신앙관을 가진 사람에게는 고난받는 이들이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요?
고난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회개입니다.
5-7절입니다.
네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전능하신 분께 자비를 구하면, 또 네가 정말 깨끗하고 정직하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너를 살리시려고 떨치고 일어나셔서, 네 경건한 가정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겠지만 나중에는 크게 될 것이다.
빌닷은 거의 욥에게 죄의 자백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빌닷이 생각하기에 욥은 욥의 자식들처럼 죽지는 않았으니 회개의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찾고 자비를 빌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숨겨둔 죄를 회개하고 자비를 구하면 주님이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7절은 매우 잘 알려진 구절입니다.
새번역 말고 개역개정으로 보면 익숙하실 것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 사진으로 보십시오.
교회 다니시는 분들이 주인인 식당에 가면 대부분 붙어있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지금은 가게가 작지만 나중에 크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구절은 욥이 겪는 고난이 지금은 참 괴롭고 힘들지만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면 주님이 다시 회복시켜주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이 문장은 욥의 회개를 촉구하는 구절이지, 축복을 기원하기 위해 사용할수 있는 좋은 구절은 아닙니다.
그럼 빌닷이 이렇게 인과응보 원리를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첫째, 전통입니다.
8-10절입니다.
이제 옛 세대에게 물어 보아라. 조상들의 경험으로 배운 진리를 잘 생각해 보아라. 우리는 다만 갓 태어난 사람과 같아서, 아는 것이 없으며, 땅 위에 사는 우리의 나날도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조상들이 네게 가르쳐 주며 일러주지 않았느냐? 조상들이 마음에 깨달은 바를 말하지 않았느냐?
조상들이 오랜 경험을 통해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인과응보, 권선징악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빌닷은 전통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인생을 조상들이 살아온 세월과 비교하면 마치 어른과 갓난 아이에 비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오랜 세월 조상들의 축척된 경험의 결과가 바로 인과응보, 권선징악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상들이 깨달은 전통적인 지혜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유대인들에게 축척된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책이 무엇일까요?
바로 잠언입니다.
잠언이 말하는 진리가 바로 인과응보, 권선징악, 뿌린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앞서 엘리바스가 근거로 제시한 것은 주위에서 자신이 관찰한 사실과 영적 환상이었습니다.
반면 빌닷이 제시한 근거는 전통입니다.
빌닷의 근거 역시 반박하기가 힘듭니다.
우리도 잘 생각해보면 역사속에서 결국 드러난 진리는 인과응보, 권선징악입니다.
역사속 수많은 악한 지도자들은 결국 비참한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히틀러입니다.
역사속 악인의 멸망을 보면 인과응보, 권선징악이 맞아 떨어지는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빌닷은 역사가 아닌 다른 근거를 제시합니다.
첫째가 전통이었다면 둘째는 자연질서입니다.
자연질서를 비유로 들어 악인의 운명을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자연 질서는 인과응보의 원리가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11-19절입니다.
여기는 읽지 않고 그냥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왕골과 갈대입니다.
둘다 비슷한 종류라고 보시면 됩니다.
왕골과 갈대는 물이 있는곳에서 순식간에 자랍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물이 말라버리면 사람이 아직 벨때도 아닌데 금방 죽어 버립니다.
겉보기에는 잘 자라는것처럼 보이지만 순식간에 죽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왕골과 갈대의 운명이 바로 악인의 운명과 같다는 것입니다.
악인도 겉으로 보기에는 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순식간에 멸망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거미줄입니다.
거미줄도 겉으로 보기에는 큰 새도 걸려있어 굉장히 튼튼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손으로 만지면 금방 끊어지고 맙니다.
그렇듯 악인들이 안전하다고 믿는 것들도 결국 거미줄같이 불안정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믿지만 그것은 거미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 위에 악인들이 집을 지어봤자 결국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식물입니다.
식물이 처음에는 햇빛을 보고 동산에 뿌리를 잘 내립니다.
심지어 돌사이에도 뿌리를 내리고 휘감아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나 돌이 뽑히고 식물도 뽑히면 그곳에는 또다른 식물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악인의 운명도 처음에는 번성하는것처럼 보여도 결국 사라지고 잊혀질 운명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빌닷의 설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너무 훌륭하지 않습니까?
빌닷은 참 훌륭한 자연 묵상가입니다.
전통에서 얻은 지혜, 자연에서 얻은 지혜 모두 너무나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과응보적 신앙관은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점은 하나님과 세상을 내가 통제할수 있다고 믿게 되는 점입니다.
그들의 신앙관에 따르면 나만 죄를 짓지 않으면 아무런 재앙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만 잘 섬기면 세상에서 큰 복을 받을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도 저주도 모두 내가 하기에 달려있는 셈인 것입니다.
혹시 우리도 은연중에 이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이런 신앙관이 무조건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이런 신앙관이 무조건 틀린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분명 잠언이 말하는 인과응보, 권선징악의 질서가 있습니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말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오직 이러한 신앙관만 붙들고 있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신앙관은 하나님과 세상을 왜곡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내가 믿는 신앙의 틀 속에 집어넣고 하나님을 조정하고 통제할수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종교와 신앙의 차이점은 누가 주체이고 누가 객체이냐 하는 점입니다.
종교는 신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주인이 되어 신을 통제하려는 것입니다.
내 욕망을 채워주고, 내 두려움을 해결해주는 존재가 신인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고, 그 뜻에 내가 순종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신앙관의 결말은 무엇일까요?
20-22절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온전한 사람을 물리치지 않으시며, 악한 사람 손 잡아 주지 않으신다. 그분께서 네 입을 웃음으로 채워주시면, 네 입술은 즐거운 소리를 낼 것이니, 너를 미워하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며, 악인의 장막은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여기서 온전한 사람은 죄악을 버린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욥에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주님이 욥의 입에 웃음이 넘치게 해주시고, 욥을 미워하던 자들은 모두 부끄러움을 당하고 사라지게 해주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십시오.
욥이 왜 이런 시험을 당하고 있습니까?
1-2장에서 사탄이 말한것을 보십시오.
욥이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복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복이 없어지면 하나님을 저주하고 신앙을 버릴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이 시험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빌닷이 주장하는 것은 욥에게 다시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셈입니다.
욥이 회개하면 다시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 회개하라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러면 사탄이 욥을 고소한 내용과 다를바가 없게 됩니다.
이렇듯 인과응보의 신앙관만 붙들고 있으면 우리의 신앙의 동기가 왜곡될수 있습니다.
[결론]
그럼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욥기가 참 좋습니다.
신앙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신앙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며 누군가에게서 배운 것일수도 있고, 신앙전통을 고수하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오랫동안 스스로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관은 마치 우리의 습관처럼 우리 마음 속에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신앙관이 하나님과 세상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해석을 제공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나의 신앙관을 건드리거나 깨뜨리려고 하면 두려워합니다.
그것에 대한 반응이 바로 엘리바스나 빌닷과 같은 분노인 것입니다.
내가 붙들고 있던 하나님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깨지기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을 수용해버리면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신앙생활을 부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단이나 사이비에서 사람들이 잘 나오지 못하는 것도 그 이유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욥기의 핵심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욥이 가지고 있던 신앙관을 하나님이 깨뜨리신 것입니다.
우물안 개구리같은 신앙관을 가지고 있던 욥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욥 역시 친구들처럼 인과응보, 권선징악, 뿌린대로 거둔다는 신앙관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자식들이 죄를 지을까봐 노심초사하며 소위 ‘제사꾼’이 된 사람이 욥입니다.
마치 죄를 짓지 않기 위해 교회안에만 있는 사람들, 또는 하루 종일 예배만 고집스럽게 드리는 사람들과 비슷한 것이죠.
이런 신앙관을 가지고 욥은 지금까지 하나님과 세상을 통제했던 것입니다.
이 신앙관이 잘 들어맞을 때는 너무 좋았습니다.
그의 세상은 안전하고 평안했습니다.
그런데 이 고난을 통해 욥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42장 5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마치 알을 깨고 나온 것처럼, 내 신앙을 가로막고 있던 두꺼운 벽을 뚫고 나온 것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 모두 욥의 친구들처럼 하나의 사로잡힌 신앙관을 고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분명 우리를 욥처럼 더 깊고 더 넓은 신앙의 세계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