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11 양청] 96-97문

소요리문답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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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교회들마다 1년에 2번씩 성례식을 거행한다. 1번은 부활주일에, 1번은 추수감사주일이다. 우리는 11월 19일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킨다. 그래서 교회주보를 눈여겨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광고에 학습, 입교, 세례식이 있다고 한달 전부터 광고가 나갔다. 그 이유는 여러분들이 은혜의 방편으로 제정하신 성례를 통하여 예비된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미리부터 준비하라는 것이다. 우리 주님의 낮아지심과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과 축복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깊이 새기고, 그 은혜에 감격하며 준비하라는 것이다. 오늘은 이런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
96문. 주의 성찬은 무엇입니까?
답. 주의 성찬은 성례로서 그리스도의 재정하심에 따라 떡과 포도주를 주고 받는데, 이것에 의하여 그의 죽으심이 나타나 보이고 합당한 수찬자는 신체적이고 육체적인 방식이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해서 그의 몸과 피에 그의 모든 유익과 함께 참여하는 자로 만들어져 영적인 양육에 이르고 은혜에서 성장합니다.
97문. 주의 성찬을 합당하게 받기 위해서 무엇이 요구됩니까?
답. 주의 성찬에 합당하게 참여하려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주의 몸을 분별하는 지식이, 그를 먹는 믿음이, 그리고 회개와 사랑과 새로운 순종이 자신들에게 있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합당하지 않게 참여하여 자신들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찬에 대해 지금 배우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다뤄야 할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바로 합당한 수찬자가 누구냐에 대한 부분이다. 96문 중간 부분을 보면 합당한 수찬자는 신체적이고 육체적인 방식이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해 그 몸과 피에 그의 모든 유익과 함께 참여하는 자로 만들어진다 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종교개혁이 진행되는 가운데 대단히 큰 논쟁이 일어났다. 이 논쟁은 로마 카톨릭의 입장을 반대하며 시작되었으나 종교개혁자들 안에서도 좀처럼 쉽게 정리 되지 않는 논쟁이었다. 그것은 성찬의 의미에 대한 부분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보기엔 별 대수롭지 않은 부분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 가운데 대단히 중요한 본질적 문제였다. 성찬의 의미가 무엇이며 떡과 포도주, 이 표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여러분 교재 5번을 보라.
먼저 로마카톨릭의 견해를 살펴보자. 제가 91-93문을 강의하면서 간략하게 전했던 적이 있다. 로마카톨릭은 화체설을 따른다. 될 화, 몸 체. 그래서 눈앞의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된다는 것이다. 사제가 축사 기도하면 실제로 바뀐다는 것이다. 방금 96문에서 “신체적이고 육치적인 방식이 아니다" 라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로마카톨릭의 성찬에 대한 입장이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날 한국교회 가운데 화체설을 따르는 개신교회가 얼마나 많이있는지 모른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화체설을 따른다고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따르고 있는지조차 분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로마카톨릭은 성찬을 말씀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설교, 말씀보다 성찬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들은 미사라고 그런다. 미사. 미사는 오늘날 우리의 예배적인 성격이 아니라 제사적인 성격이 강하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미사를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희생제사가 다시 한번 실제적으로 일어난다고 여겼다. 그들의 미사를 통해 예수님이 계속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다. 그래서 천주교회의 십자가에는 여전히 예수께서 달려 계시지 않나? 제의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특징이 그들의 성찬에서도 두드러지는데, 미사의 자리에서 사제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찢기신 주님의 살이라”라고 선언하기만 하면, 그 순간 떡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카톨릭의 주장이다. 사제의 권위로 이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말하는 순간, 떡과 포도주가 실제 진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먹어보면 고기인가? 떡인가? 먹어보면 떡이다. “아니 사제님, 이거 안 변했는데요? 여전히 떡인데요?” 그러면 뭐라고 대답할까? "그건 당신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진짜로 그렇다. 그들은 변했다고 말한다.
그들의 화체설에 의하면 본질은 변하지만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무슨 말인가? 그 물질의 속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떡 고유의 속성, 떡 맛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제의 축사기도로 인해 본질이 바뀌었단다. 분명 떡인데, 생긴 것도 떡이고 맛도 떡이고 식감도 떡인데 떡이 떡이 아니라 예수님의 살이라는 것이다. 카톨릭의 화체설은 사제의 기도로 인하여 본질이 예수님의 살로 변한 그 떡을 먹는 자에게 자동적으로 은혜가 흘러들어간다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자동적"이다. 은혜가 자동적으로 주어진다. 성찬을 받는 수찬자의 마음 자세나 믿음, 태도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내가 예수님의 살을 먹었으니까, 내가 예수님의 피를 마셨으니까, 그것이 내 속에 들어와서 내 온 몸을 돌아다니며 예수님의 살이 내 살이 되고 예수님의 피가 내 피가 된다. 그분과 내가 하나로 섞이는 것이다. 이처럼 신체적이고 육체적인 방식을 인정해서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이 물질적 차원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믿음이 왜 필요하겠나? 그냥 가서 줏어 먹기만 하면 은혜를 받는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니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비성경적으로 규정했다. 그러면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를 따르는 루터파는 어떻게 이해했을까? 로마카톨릭으로부터 개혁을 이루면서 루터파의 경우는 물론 종교개혁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지만 아직 완전히 개혁을 이룬 상태는 아니었다. 적당히 타협을 한 설명이라 할 수 있는데, 그들은 공재설을 따른다. 공 공, 함께 재, 즉 함께 있는 것이다. 함께 있다는 것이 뭐가 함께 있다는 것일까? 떡과 함께 예수님의 살이, 포도주와 함께 예수님의 피가 함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이런 표현을 썼다. “이 떡이 여기 있지 않습니까? 이 떡 위에 떡 아래에 떡 옆에 떡 오른쪽에 왼쪽에 떡과 함께 예수님의 살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눌 때, 2천년 전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성찬과 함께 신성과 육체로 그 자리에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여러분들께 질문 드린다. 지금 하늘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주님은 영으로 계시나? 아니면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시나? 몸을 입고 계신다. 그 몸은 부활체, 영광의 몸이다. 부활승천하신 주님은 여전히 인성과 신성을 가지신 가운데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다. 그런데 그분이 지상의 교회들이 성찬식을 할 때마다 내려오신단 말이다. 이 설명에 의하면 그 거룩하신 몸이 오시는데, 그게 보이나 안 보이나? 당연 한보인다. 그래서 어떻게 설명하는가? 주님의 몸이 오시기는 오시는데, 우리 눈에 볼 수 없을 신비적이고 기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쯔빙글리라는 사람은 이렇게 주장한다. “아니다! 성찬의 떡과 잔에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실 수는 없다. 단지 주님은 나의 죽음을 기념하라 하셨으니 우리는 성찬을 통해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성찬을 통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이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쩌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츠빙글리의 주장에 크게 잘못된 부분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 우리의 성찬식때도 그래서 주님의 죽으심을 묵상할 수 있도록 고난과 죽으심에 대한 말씀을 읽어주고, 찬송가 BGM도 주님의 고난당하심과 죽으심에 대한 것만 틀어주잖아!? 주님께서도 나의 죽음을 기념하라 하셨으니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은혜 베푸신 주님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자리가 성찬이 아니겠어?” 어쩌면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이 쯔빙글리의 입장을 따른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성찬이 단지 기념하는 자리라면, 단지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자리라고 한다면, 함께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그것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준단 말인가? 단지 기념만 한다면 말이다. 쯔빙글리의 상징설이 가진 한계가 바로 이것이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나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
이에 대해 종교개혁자 칼빈은 어떻게 설명하는가? 칼빈은 “영적 임재설"을 주장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실재로 떡과 포도주에 임하는데, 여러분 교재 5번의 D를 함께 읽어보자. “이를 영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임재가 성령님의 사역에 의해 이루어지며 우리 몸이 아니라 우리 영에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몸에 역사하셔서 우리의 영혼이 먹을 수 있게 하시고 또한 성령님은 우리 영혼에 역사하셔서 예수님의 몸을 먹을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이런 점에서 성령은 그리스도와 신자를 연결하는 고리이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개혁주의를 따르는 모든 교단들이 받아들이며 가장 성경적이라고 믿는 바 해설이다.
성찬의 떡과 잔을 받는 성도들에게 성령님께서 은혜, 곧 영적인 감화를 주신다. 이 감화는 성령님을 통해 영적으로 신비하게 주어진다. 수찬자는 믿음으로 이 은혜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인성으로 몸을 가지고 여기에 임재하시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신성으로, 영적으로 이 떡과 포도주에 임재하신다. 그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은혜를 받는 것이다.
여기서 설명하는 것의 초점은 이것이다. 예수님께서 몸으로 임재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성으로 임재하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인성과 신성 중 절반만 임재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한 인격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절반만 경험한다고 말하지 않고 전인격으로 예수님이 우리 성찬 가운데에 임재하신다는,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은혜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고려신학대학원의 이성호교수가 성찬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보라. 5번의 작은 4번을 함께 읽어보자. “따라서 성찬은 우리 영혼을 위한 식사시간이다. 우리 몸은 비록 땅에 있으나 우리 영혼은 하늘에 올라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먹는 참으로 즐거운 시간이다. 성찬을 통해 주님의 몸이 이 땅에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하늘로 들려 올라가 그리스도 몸앞에 임재한다" 이런 점에서 칼빈의 영적임재설은 그리스도께서 성찬을 행하는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찬을 받는 우리의 영혼이 즉시 하늘의 만찬장소로 올려져 그곳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영혼의 양식을 먹는 잔치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제 6번을 보라. 성찬에서 받는 유익을 설명하는데 96문 마지막 부분에 “영적인 양육에 이르고 은혜에서 성장한다" 라는 부분을 살펴볼 것이다. 고린도전서 10:16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이 말씀에서 성찬이 주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성찬을 먹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참여하다" 라는 말은 롬6 장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개념과 아주 상통하는 개념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보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더 잘 표현하는 것이 없고, 이것보다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개념은 없다. 감히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과 하찮고 연약하며 유한한 내가 하나가 된다? 이것만큼이나 우리에게 감격스러운 것이 무엇이 있겠나?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함으로서 그분께서 누리시던 모든 권세와 능력과 영광 가운데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내가 지금 참여하는 성찬을 통해 이 땅에서 조금씩 맛본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찬의 유익이다.
몇 가지 예를 보자. 6번에 a. 떡과 포도주가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대속의 가치를 앎으로써 오는 유익이라 했다. 보고 맛보고 경험하고 실감하는 은혜이다. 그래서 성찬식을 눈으로 보는 말씀이라고 한다. 보이는 복음이다. 그리고 B, 떡과 포도주를 먹어 자기 것으로 삼는 데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하는 유익이 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를 먹이신 후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먹지 아니하면...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고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이 어떤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는 게 성찬식이다. 맛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다. C에, 떡과 포도주는 허기진 자에게 육적인 힘을 공급하듯이 영적인 힘을 공급하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사실 성찬식을 자주 할수록 좋다. 우리교회는 1년에 2번 성찬이 있는데, 이것조차 귀하게 여기지 않은 채로 별 대수롭지 않게 빠지는 경우들이 있다. 안타깝다. 이것이 우리에게 영적인 힘을 주는데 말이다.
d를 보면, 성찬에 참여한 신자들이 같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하나 됨을 깊이 경험하는 유익이 있다. 말하자면 뷔페에 가서 각자 먹고 싶은대로 떠먹는게 아니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고, 그리스도의 피를 마심으로서 이 떡과 잔을 함께 먹고 마시는 너와 내가 한 몸이요, 한 형제라는 것을 다시금 고백하는 것이다. 형제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e, 찢기는 떡과 흘려지는 포도주를 보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을 생각하고 죄를 더욱 멀리하겠다는 거룩한 삶에 대한 결단과 회개가 깊어지는 유익이 있다. “그래, 주님께서 나를 위해 몸이 찢기시고 나를 위해 피를 흘리셨지, 그러니 나는 이 떡과 잔을 받으며 더욱 죄로부터 멀어지고 거룩을 향해 나아가야지!” 결단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97문에 대한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여러분 교재 7번을 보면, 성찬을 받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 가장 먼저는 주님의 몸을 분별하는 지식이다. 고린도전서 11:28–29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사실 이 부분은 오늘날 너무나 강조되지 않는 부분인데 잘 들으라. 성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울타리가 있는 성찬과 울타리가 없는 성찬.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오늘날 미국의 PCA 교단 같은 경우는 성찬을 이렇게 행한다. 예배당 가운데에 줄을 치고, 성찬을 받을 사람들은 줄 앞으로 나아와 앉는다. 그리고 성찬을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만 준다. 굉장히 명확하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적인 교회들은 이 제한을 전혀 철폐해버린다. 성찬식을 시행하기 전에 묻질 않습니다. 어떤 사람만 받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를 보통 오픈 성찬식 혹은 개방된 성찬식이라고 말한다. 방금 읽었던 고전11:28-29 의 말씀을 보면, 사람이 자신을 살피고 그 이후에 떡과 잔을 마시라 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주님의 몸을 분별하지 않은 채로 먹고 마시는 자가 된다고 했다. 이는 은혜가 아니라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제한을 명확하게 두고 있는데, 이런 제한을 우리가 없애버리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또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7번의 A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성찬 의식 자체의 의미나 효력 때문이 아니라, 수찬자의 믿음과 태도가 중요하다. 그러니까 이 의식 자체의 의미를 두고 이 물질 떡과 포도주의 의미를 지나치게 부여하게 되면 그건 굉장히 로마 카톨릭적인 성찬식이 될 것이고, b처럼 의미를 모르고 참석하는 거는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질문! 유아 세례 받은 사람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가 없는가? 언제까지 없는가? 입교할 때까지이다. 그 차이가 무엇인가? 부모의 신앙 고백을 통해서 내가 스스로 주의 죽으심의 의미가 무엇인지 내가 죄인 됨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 상태에서 세례를 받았었다.
그러나 입교라는 의미는 성찬상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성찬상에 참여한다는 것은 성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드디어 분별하게 되었다는 뜻이고 그때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의미를 모르고 참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데 이런 경우들이 있었다. 할머니가 손주들을 데리고 예배를 드리다가 할머니가 성찬을 받았다. 옆에 있던 손주들이 묻는다. “왜 할머니만 먹고 나는 안줘?” 할머니가 이 손주들이 너무 예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 내꺼 니가 먹어라"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이어서 c를 보면, 성찬을 준비하며 성찬을 받기에 합당한 거룩한 삶으로 자기를 준비하는 게 유익하다. 성찬식을 광고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성찬 받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자신을 돌아보라고.
그리고 수찬자에게 또한 요구되는 것은 바로 믿음이다. 믿음. 그 믿음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6:32–35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이라 하셨다. 이를 믿는 믿음으로 성찬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이런 믿음이 있는지를 거듭 살펴야 한다.
9번에 수천자에게 또한 요구되는 것은 “회개, 사랑, 순종"이다. 내 안에 이러한 열매들이 있는지를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한다. 나는 정말로 나의 죄인됨과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죄씻음을 받는다는 것을 나는 확신하는지,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이제부터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회개의 열매들이 나타나고 있는지, 내 삶을 통해 회개, 사랑, 순종의 삶을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만일 여러분들의 기도 속에서 회개가 아니라 간구의 기도 밖에 없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의 믿음이 심각하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성찬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를 회개로 데리고 가는 굉장히 좋은 시간이다.
적용점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죽는 그 순간까지 지속적으로 성찬의 식탁을 마주하게 될 것인데, 단지 형식적인 수찬자가 아니라 성찬의 은혜를 매순간 누리기 위해서 두 가지 정도를 말하고 싶다.
첫째는 성찬의 의미를 배우고 또 배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깨닫는 것이다. 성찬의 의미를 아는 것은 결국 복음을 아는 우리의 깊이와 관련이 있다. 복음을 아는 것이다. 복음은 기독교의 초보가 아니다. 복음은 기독교의 전부이다. 그리고 우리는 천국에서도 그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그 은혜의 깊이를 점점점점 더 알게 될 것이다. 이 복음의 은혜를 아는 만큼 우리는 성찬의 은혜를 받게 된다.
두 번째, 성찬을 준비해야 한다. 아까 7번에 c에서 얘기한 것처럼 성찬을 준비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다. 주보에 성찬 광고를 보면서, “아! 다음 주에 성찬식이 있구나!” 이 정도로 그칠 것이 아니라, 내가 이것을 기억하며 기도하며 합당한 수찬자가 되도록 경건히 몸과 마음을 준비하며, 기도로 이 일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성찬을 준비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합당하다. 이 성찬을 믿음으로 받는 자들, 합당하게 받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성찬을 통하여 경험하였던 은혜가 오늘날에도 합당하게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들에게 전해진다는 것을 기억하며, 2주 후에 있을 성찬식을 지금부터 잘 준비하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란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들의 연약함을 아시고 이 세상에서 저희들이 얼마나 감각적인 존재인지 아시고 은혜의 수단으로 성찬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2주 후에 저희가 성찬을 받을 때에 준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죽으심이 포함하고 있는 그 모든 영광을 기억하고 큰 은혜를 누리는 복된 시간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저희들의 평생에 성찬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를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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