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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의 선지자 예레미야
인내의 선지자 예레미야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하루를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생명을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한 그 때부터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셨으니,
나도 주님의 사랑을 닮아, 나를 알지도 못하는 이들을 향해 사랑을 베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닮아가게 하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을 닮는 하루가 되길 간절히 바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 그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고, 본 받아야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체험하며, 그 것을 내 삶 속에서 녹인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복인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말씀과 나의 삶의 간극을 줄인다는 것은 실제로 꽤나 어려운 일입니다.
나의 삶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간다는 것. 나와 하나님과의 거리를 점차 좁혀져 가는 것.
그 폭을 점차 좁혀가면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삶을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과 내 삶의 간극을 좁혀가는 것을 신앙 생활이라고 하였을 때
그저 교회에 출석하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교회에 왜 다니는 지에 대해 인식해야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만약 오랜 시간 교회에 다녔다고 하여도 내 삶이 나의 행실이 나의 목적과 태도가 하나님과 전혀 가까워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것은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종교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종교 생활과 신앙 생활의 가장 큰 차이는 소원이 어디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원하는 지에 따라 우리의 방향성도 달라질 뿐만 아니라, 현재의 삶의 태도도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 혹은 그 시대 많은 사람들이 우상 숭배를 하던 이유는 자신의 인생에 있는 필요를 채우려는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어떤 것을 내놓으면 분명 그들도 나에게 무엇인가를 줄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스로의 인생에 있어 필요한 재화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인생을 얼마나 건강하고 길게 사는 지가 복에 대한 이해였고, 그 인생 안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누리고 살고자 하였습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돈과 시간과 건강이었습니다.
돈과 시간과 건강을 위해 우상을 섬기는데, 자신의 돈을 들이고 시간을 들이고, 그리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진 계약관계 속에서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목숨을 바칠 때에는 나의 목숨을 바칠 수는 없으니, 동물의 피를 바치거나, 혹은 자신의 노예나 심지어 자신의 자녀의 목숨을 바치게도 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었지만, 그 것은 하나님께서 이삭의 목숨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려고 주신 시련의 과정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던 입다는 스스로 자신의 자녀를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종종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지식으로 하나님을 마치 이방신을 섬기듯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즉 한계가 없으신 분이니, 유한한 세상의 것들은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드리지 않더라도 그 것들은 본디 그리고 이미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린다는 표현 자체는 어불성설입니다.
왜냐하면 본디 하나님의 것이었기 때문이고 온 세상 전체가 하나님이 만든신 피조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신들은 그 것을 만들어본 적도 없기 때문에 주고 받고 거래가 가능한 관계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것들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재화들을 포기함으로써 보여 드릴 수 있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종교생활을 하는지 혹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자신을 점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의 목표가 어디 있는지를 봐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의 대척점에서 어떻게 느끼고 행동하였는지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레미야 1:4-5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예레미야 선지자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세우신다’, ‘여호와께서 풀어주신다’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한 시대는 포로시대 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 포로가 되었고, 남유다만이 남았는데 그마저도 바벨론과 애굽 사이에 껴서 남유다의 국운은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였습니다. 또한 앞에서 말씀드린 이방신을 섬기는 종교생활이 이스라엘 전국에 잔뜩 퍼져있었고, 특히 가나안 지역에서는 아이들을 이방 신에게 바치는 풍습이 만연하였습니다. 아세라 목상이네 바알의 신전들이 가득한 시기에 살고 있었습니다. 각기 사람들은 스스로의 안위와 평안을 위해 이방신들과 열심히 거래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혼란한 시기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예레미야서 1장 5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탄생에 대해서 미리 아시고 그를 구별하시고,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를 아셨다는 것은 그의 탄생에 매우 관심이 많고, 그를 소중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를 복중에서 구별하셨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구별하다는 ‘카다쉬’ 라는 히브리어를 썼습니다. 카다쉬는 따로 뗴어 놓다에 대해 배운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결과 거룩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어떠한 행위로도 어떠한 마음으로도 스스로 거룩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거룩을 허락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과 열방의 선지자의 역할을 담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레미야 선지자는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 받습니다.
두 가지의 환상을 보는데 하나는 살구꽃 환상이고 다른 하나는 끓는 솥의 환상입니다.
렘 1:11-14
1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1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13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임하리라
살구 꽃이 봄을 알리는 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먼저 피는 꽃이기 때문입니다. 살구꽃의 의미는 여호와의 말씀을 급히 실행에 옮기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유다와 온 세계의 죄악들이 가득 찼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끓는 가마가 북쪽에서부터 기울어져 흘러 넘치는 환상은 유다 북쪽에 위치한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들어 쓰셔서 유다를 치겠다는 것입니다.
급하고 끓어오르는 진노를 내는데에 이유는
그 이유는 16절에 나옵니다
16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베풀어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신들을 향해 우상 숭배하기에 급하고도 맹렬하게 유다를 벌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우상을 섬기기에 하나님을 버리기를 서슴지 않았던 그 시대의 사람들입니다만, 저는 종교행위야 말로 가장 가증되게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라고 생각됩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쫓았던 이유는 마음이 다 빼앗겼기 떄문입니다.
그런데 종교 행위도 마찬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느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외면하고 나의 필요를 쫓는 우상숭배와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한술 더떠서 나는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을 믿는 척 하면서, 교회를 그저 다니기만 한다면,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기만입니다.
종교의 행위로서 자신의 죄악에 대한 아무런 뉘우침도 반성도 없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받는 사랑에 대한 아무런 감사도 없이 그저, 언젠가는 나에게도 복이 오겠지라는 막연한 기대 그리고 세상적인 욕심과 적당히 섞인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려고 교회를 다닌다면, 그것은 우상 숭배보다 더 큰 문제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이야기를 도무지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격하고 급한 진노의 메시지가 그들 귀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시대 왕들과 제사장들 선지자들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그들을 책망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소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목적과 동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목적과 동기가 무엇입니까?
예레미야 선지자의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의 촉구이고,
동기는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도 명확히 받았기 때문입니다.
복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거룩함 받은 선택된 선지자로서 이스라엘과 세계를 구하기 위해
자기 한 몸 바쳐 목소리 높여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사회 고위계층인 제사장과 왕가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위가 중요했고, 자신의 성공이 중요했고, 남들의 시선이 중요했다 이말입니다.
종교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목적과 동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귀로 듣고도 모른 척하고 자신의 삶에만 집중하며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목적과 동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꿈은 자신의 삶의 안위가 중요하고, 내가 살아가는 인생의 과정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로 불릴 만큼 나라와 세계를 위해 많은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종교행위를 하러 교회에 나다니는 사람들은 그럴 수가 있습니까?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혹은 내 삶의 터전의 있는 영혼의 안위를 위해 눈물 흘리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수가 있을까요?
아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 신앙을 지켜나가고 있는 또한 하나님께서 태중에서부터 미리 아시고 이 자리에 따로 떼어 부르셔서 거룩하다 여김받는 복된 성도님들
여러분들이 한 분 한 분이 눈물의 선지자가 되셔야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점차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급하고도 맹렬히 올 것 같습니다.
어느 때 어느 곳으로 올지는 아무도 모르고, 어떤 방식으로 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삶의 터전에서 흘러가는 복음으로 세상은 바뀝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의 타락으로 이스라엘의 멸망이 되었지만,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백성으로 불림 받는 여러분들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삶 속에 녹이며 진정한 신앙 생활을 살아간다면, 우리 나라 아직 희망 있습니다.
만약 내가 무슨 힘이 있단 말인가 나 한 명쯤으로 될 수 있다는 말인가 하고 생각하신다면
착각입니다.
6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