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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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그 선지자

우리는 앞서 일어난 기적을 생각해보면 2장 가나지역 혼인잔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기적, 4장 사마리아 여인 후에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시고 5장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오늘 오병이어 사건은 4복음서 모두에 나오는 기적사건입니다. 그렇다면 4복음서 모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그래서 해석을 요하며 4복음서의 각각 기록자가 바라보는 시선의 다양성은 우리에게 이 사건의 풍부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에 집중하면 눈에 띄는 단어를 보면 ‘큰 무리’입니다. 이는 지금의 요한 복음의 흐름이 개인, 소수 그리고 무리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무리가 된 결정적인 이유가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기적 때문인데 요한 사도는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예수께서 어떠분이신지를 전하고자 했을까요?
또한 본문에서 우리가 자주 다루던 ‘유월절’이 다시 등장합니다. 요한복음은 적어도 3번의 유월절을 중심으로 전후에 일어나는 사건과 예수님의 말씀 등이 유월절 사건에 결론적으로 또는 새로운 시작으로 구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개인 소수에서 무리로 확장되면서 예수의 영향력은 5장에서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들이 이제 민중의 지지를 받게 됨으로 쉽게 제거할 수 없는 상황으로 흘러가고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의 선언은 대중에게서 다른 의도로 흘러 갑니다. 그것을 살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빌립’이라는 인물이 다시 등장시켜 예수께서 직접 빌립에게 묻는 과정, 시험하는 과정으로 시작합니다. 빌립은 1장에서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예수께서 큰 무리가 오시는 것을 보셨고 6절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라고 시작합니다. 어떤 일인가요? 아이가 가져올 것, 기도하실 것, 오천명의 요구대로 배부르게 먹을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인식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 하는 모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빌립이라는 개인의 이성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제자들이 예수를 믿는 방편이 되었고, 예루살렘에 다녀 온 사이 왕의 신하는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기적이 있었던 가나에서의 이야기를 자기와 연결시켰음을 기억해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어날 일을 아시고 빌립 한 개인의 믿음을 시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다양한 일과 사건은 결과적으로 ‘나'라는 개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이렇게 물으신 이유가 6절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입니다.
빌립을 생각해보세요. 빌립은 요한복음 1: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의 직접적인 따르라는 요구를 받은 인물이 빌립입니다. 또한 그는 나다나엘을 찾아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다.’ 그러니까 5장 후반부 ‘모세의 이야기와, 그 선지자에 대한 약속을’ ‘성경을 통해 연구한’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인물이 빌립입니다.
본문에서 빌립의 시험은 일종에 ‘중간고사’즘 된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빌립은 모세를 알았습니다. 그는 모세의 기록과 예수님을 연결시켰습니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켰으며 출애굽 절정이 양을 잡아서 먹고 피를 문설주에 발라 태어난 모든 첫째가 죽는 죽음을 유월시킨 유월절과 연결됩니다. 그렇게 애굽을 떠나 광야의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직접 받았던 인물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그의 생애 마지막 즘에 이렇게 예언합니다. 신명기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여기에 ‘나와 같은 선지자’도 빌립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연결’되지 못한 즉 앞선 5장의 47절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의 다음 단계 정도의 시험입니다. 빌립은 알았지만 ‘새 출애굽'과 연결하지 못했습니다. 무엇이 연결되지 못했냐하면 모세가 유월절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종되었던 애굽에서 출애굽 시키듯, ‘나와 같은 선지자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다시 출애굽 시키시는 청사진을 연결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예수께서 보여 주시려는 사건이 오병이어입니다.
지난 주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감정’보다 ‘이성’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성은 객관적인 정보에 반응을 합니다. 객관적인 정보는 ‘지식’으로만 머물러 있는 단점을 갖고 있고 그렇게 ‘안다’는 자기 결론에 고립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과학적으로 자전거가 3킬로의 시속을 유지하면 넘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속도는 사람이 걷는 속도보다 느린 속도입니다. 하지만 자전거를 처음 배우는 사람이 한 번에 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그래서 안된다고 포기하는 사람이 ‘과학적으로 분명하게 되는 것이니 그걸 믿고 해야지’ 라고 하기 보다는 아주 복합적인 감정이 작용하면서 성공하는 사람이 보편적인 경우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면 다 하게 돼'라고 말하죠. 아쉽게도 이런 말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합니다. ‘하다보면 알게 돼, 순종하면 돼'라고 말합니다. 말로써 우리의 행동을 강제할 것이 아니라 원리 이해의 어려움을 잘 적용시켜줄 선생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빌립은 나름 객관적인 사람입니다. 제가볼 때 mbti에 t에 해당될 것 같습니다. 7절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다'라고 답합니다. 이런 빌립과의 대화는 다른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왜 요한 사도는 이 내용을 넣었을까요? 그리고 성경은 무엇을 시험하고자 했는지 빌립의 말에 대해서도 이렇다할 반응없이 우리가 알고 있는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8절부터 시작해서 한 아이의 보리덕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리고 예수님의 축사와 함께 오천명이 원하는 대로 배 불리 먹는 엄청난 기적이 무리 앞에 나타납니다. 사실 중요한 기록은 10절과 11절 두 절에 불과합니다. (읽고)
14절에 ‘그 사람들이' 5천명을 다 말하는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해졌을 것이고 그들의 반응은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라라'는 기록을 담습니다. 사건이 너무 큰 사건이기에 대부분 우리는 기적 자체에 집중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고 듣는 사람들에게 잘려나간 듯한 빌립을 향한 시험은 어떻게 된거지?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한 번 흐름을 보면 ‘무리가 오는 것을 보신 예수께서 이미 기적행하심을 앞두고 빌립을 시험하기 위해 묻고, 이어 안드레가 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고 예수께서 축사하시고 기적을 베풀었더니 그들이 예수를 ‘ 그 선지자’로 인식하는 전개가 되는 것이죠' 여기서 왜 ‘그 선지자'라고 사람들은 인식했을까요? 지난 주 ‘그 선지자'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빌립이 매우 현실적인 사람일지라도 그의 계산 즉 200데나리온의 필요가 맞을까요? 빌립은 이렇게 많은 사람을 먹이는 일을 한 적이 있을까요? 그저 그의 경험은 일반인 수준에 하는 말입니다. 나이든 분들과 이야기를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딱 보면 모릅니까?’ 요즘은 유트브 등 다양한 매체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런게 아닙니다. 고도의 과학 원리 일부를 이해하는 것도 해석이 없다면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믿는다'는 단어 하나로 한 문장을 만들고 ‘믿으면 구원받아'라는 식이 과연 온당한 말일까요? 5천명을 보고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는 질문은 ‘돈만 있다면 가능성은 있지요', ‘세상 권력자들은 할 수 있는 일이지요'라는 세상의 가능성과 대치되는 말입니다. 아주 좋은 예가 바로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예수에 대한 그의 답은 예수를 경험한 그의 고백이 되는 것이죠. 빌립은 먼저 고백했지만 그 고백만큼 예수를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시험'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말하시는 겁니다. ‘빌립아 나를 모세가 말한 그 선지자 즉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고 그렇다면 너의 믿음이 어디를 향하는지 보여 줄께'라고 하시면서 빌립이 눈으로 읽은 ‘모세의 출애굽'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선지자'라고 말할 때 빌립의 마음 속에서 ‘이성'과 ‘믿음'이 한 그릇에 담기는 놀라운 경험을 예수께서 빌립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빌립처럼 성경을 알고 나름 신앙생활 한다는 우리를 예수께로 성령님은 동일하게 인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만나는 경험을 통해 각자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써 삶을 살아간다고 정리해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빌립처럼 세상의 방식으로 믿음을 해석하려는 우리가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때론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해석하며 연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오병이어 기적으로 일약 스타가 됩니다. 5장에서 예수를 죽이려 했지만 쉽게 죽일 수 없게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선지자'라는 타이틀로 많은 사람에게 호명되며 ‘정말로 메시아인가?’라고 하는 질문으로 확장됩니다.
그런데 살펴야 할 한 가지가 더 있다면 ‘그 선지자'라고 했던 그들을 예수께서는 또 다시 아시는 분으로 기록합니다. 15절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라고 말합니다. 기적을 경험한 자들은 입으로 ‘그 선지자'라고 구약적 표현을 사용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를 정치적인 왕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이 세상의 계산적 눈으로 본 것처럼, 5천명이 경험한 예수님을 향한 ‘그 선지자'라는 모세를 통해 계시 된 하나님의 약속은 로마의 압제라는 현실에서 자신들을 해방 시켜줄 현실의 눈에는 자신들을 이끌 정치적인 왕으로 보이는 것이며 보이는 것을 바라는 사람들의 거짓된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우리도 많은 찬양에서 ‘예수를 왕' 만왕의 왕 등 다양한 표현으로 ‘왕'으로 칭하며 왕이신 예수님을 경배합니다. 우리를 통치하시는 뿐만 아니라 우주를 다스리시는 왕으로 생각하면서 그 왕에 대한 표상을 인간을 다스리는 인간의 왕 또는 통치자의 형상으로 대입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러한 인간 군주, 왕에 대한 대입은 힘으로 통치하고 억압하고 다른 나라를 전쟁으로 압제하고 세상의 의를 세운다고 말합니다. 이런 논리는 지금도 여전히 미국을 전 세계의 왕과 같은 통치자의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쉽게 세계를 이분화하여 아직도 이념의 대립으로 치닫는 것이죠.
지금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라고 하기에는 일방적인 싸움은 1만여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온이즘을 완성하려는 이스라엘의 끝모를 분노와 정치적인 야망을 누구도 단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명 테러를 자행한 하마스의 잘못은 즉각적이며 신속하게 처단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보복하며 수많은 희생을 동반한 무차별 공격은 국제법으로도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분명 잘못된 것이죠. 바로 여기에 이분화된 통치, 인간의 왕과 같은 권력의 형태가 드러난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을 그렇게 오해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하시고 징계하시고 전쟁을 일삼는 분으로 봅니다. 반면 근대에 들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외치며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사랑의 통치라고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앞서 5장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심판 권한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세상의 임금과 다릅니다. 여기에서 임금, 왕을 대표하는 단어가 메시아,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 또 다른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왕이심을 믿는데 그 왕이 어떤 왕인가? 어떻게 우리를 통치하시는가?를 알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내 마음의 구주 즉 나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신 분으로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요구하는 통치가 각자의 삶에서 나타나야만 온전한 구원받은 자, 영생에 이른 자, 생명이 있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생명에 이른다는 것은 한 번 살아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느 위중한 환자가 수술을 받고 살아났다면 살아남에 대한 감사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병의 원인이 되었던 비만, 흡연, 음주, 폭식 등 다양한 잘못된 행동을 바꿀 때 비로소 다시 살아남은 온전함에 이를 것입니다.
기억하시죠 5장 38년된 병자를 고치시고 하신 말씀 요한복음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입니다. 예수께서 빌립을 아시는 것은 오늘도 여전히 믿는다고 하면서 현실에서 아웅다웅하고 자본주의 속에서 돈이 있고 없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그렇다고 믿음으로 향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갈등 속에서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뭔가 변혁적인 일이 일어나기를 마음 한편으로 바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빌립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 두 번 더 언급됩니다. 여전히 빌립은 예수님 주변에서 맡은 바를 감당하면서 제자로 불립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빌립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14:9
요한복음 14:9 NKRV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한복음에서 빌립은 예수를 보면서도 알지 못한다고 책망을 듣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빌립처럼 뛰어넘지 못합니다. ‘그 선지자'를 보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 선지자'가 보여준 놀라운 표적을 눈 앞에 보면서도 많은 사람들처럼 ‘본 것, 배부른 것'으로 예수를 따르는 것은 6장을 시작하며 ‘아픈 것을 고쳐준' 기적을 보고 따르는 무리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습니다 하는 고백은 무엇입니까? 예배 시작과 함께 고백한 사도 신경 두 번째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딱딱한 고백의 깊이는 저와 여러분의 모든 것을 들여 얻어야 할 가장 갚진 보화임을 깨닫는 시간이 되셨기를 바라봅니다. 아무리 귀한 옷이라도 더러움이 묻고 헤어지면 가치는 떨어집니다. 그러나 보석은 아무리 더러운 곳에서 더러움이 묻는다고 해도 그 가치는 변할 수 없듯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변할 수 없는 가치라고 믿는다면 그 가치를 발견하는 이 시간을 사랑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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