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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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26–30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성경에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다양한 호칭이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여호와’뿐 아니라 그 뒤에 ‘샬롬’(평강), ‘이레’(예배하심), ‘라파’(치료), ‘닛시’(승리) 등의 다양한 별칭이 붙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해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란 호칭이 붙기도 합니다.
또 예수님의 구속사역과 관련해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요5:37, 6:44), 또 로마서에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롬4:24, 8:11)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을 하나 더 소개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27 을 함께 읽겠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무엇인가요? ‘마음을 살피시는 이’입니다. 언뜻 볼 때 이는 전형적인 구약의 각 사람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여기서 ‘마음’(헬.카르디아)이란 내면의 가장 깊은 부분으로 가치체계와 근본 동기가 뿌리내려 있는 중심을 말합니다. 살핀다(헬. 에라우나오)라는 단어는 횃불을 붙이고 온갖 물건들로 꽉 찬 어두운 방을 천천히 돌아다니면서 특정한 물건을 찾는 동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모르고 떠난 이들에게는 그들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진 은밀한 죄와 정욕을 어둠에 횃불을 밝혀 살피듯 샅샅이 살피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드러나는 죄와 더러움들을 종말의 때에 심판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성령을 힘입어 그를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성도들에게서 무엇을 찾으실까요? 로마서 8:26 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소리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이란 무엇인가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로마서에서 묘사해왔던 성도의 실존을 전제해야 합니다. 성도는 죄와 사망의 궈세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로마서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인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이미 맛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현 시대에 살면서 죄의 유혹과 공격을 맞서 싸워야 할 도전을 안고 있습니다. 연약한 몸을 갖고 살아가기에 중첩된 ‘이미’와 ‘아직 아닌’ 상태에서 오는 긴장이 큽니다. 때로 하나님의 뜻임을 알면서도 사망의 몸 가운데 악이 죄의 법을 타고 역사하는 일을 경험하며 자신에게 좌절하고 실망하기도 합니다.
이를 본문은 ‘우리의 연약함’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연약함(헬. 아스테네이아)이란 두 세대 사이에 끼고 고난받는 성도의 취약한 상태를 말합니다. 자신에게 실망하여 기도할 힘조차 없을 때 성령은 성도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며 역사하십니다. 그분의 영이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우리 안에 기도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러한 탄식에 대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황홀경 중에 부르짖는 방언기도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은 이러한 방언기도를 넘어섭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탄식은 방언의 언어조차도 초월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탄식은 26절에서와 같이 ‘성도의 연약함을 돕는’탄식입니다. 여기서 돕는다(헬. 쉰안티람바네인)라는 동사는 함께를 의미하는 쉰과 위로 혹은 대항하여를 의미하는 안티, 그리고 취하다 들다를 의미하는 람바네인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따라서 안티람바네인 하면 들어 올려주다 혹은 (넘어지지 않도록 대항하여) 잡아주다를 의미하고, 여기에 함께라는 의미가 있는 접두어 쉰이 결합되면 다른 사람의 손을 같이 잡아주다 혹은 함께 짐을 들어 올려주다 라는 뜻이 됩니다. 즉 성령의 도우심은 함께 오셔서 우리의 손을 붙잡아 주시며 돕는 것입니다.
성도가 연약하여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 성령님은 그속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기도하십니다. 성령의 탄식은 넘어지려는 우리의 손을 붙들어 주시고, 짐의 무게로 눌러앉지 않도록 오셔서 함께 이 짐을 들어 올리십니다. 이 탄식은 기도를 초월한 기도로, 인간 심연의 어둡고 차가운 바닥까지 잠수하여 들어갑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은가요?
성령님은 우리의 상태가 좋을 때뿐만 아니라 좋지 않을 때, 기쁠 때뿐만 아니라 슬프고 낙담될 때, 심지어 가장 밑바닥으로 가라앉을 때도 함께하시며 탄식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탄식의 기도 소리를 찾고 계십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이 말할 수 없는 성령의 탄식 안에 성도의 절망과 탄식 뿐 아니라 그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들어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탄식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듯에 따라 드리는 기도이며, 하나님의 역사를 촉구하는 기도입니다.
또한 이 기도는 ‘하나님을 따라’드리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27절을 다시 함께 읽겠습니다. 로마서 8: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여기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뜻대로’라는 원문을 직역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행동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따라’ 기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런 기도는 ‘간구’입니다. 그야말로 간절하고 애절한 중보기도인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결단하심에 반응하며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이러한 성령의 탄식 어린 중보에 우리가 반드시 확신 가운데 붙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2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이룬다는 사실입니다. ‘선을 이룬다’라는 것은 탄식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며, 종말적인 하나님의 최종 목적과 계획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현 세대에서 활약하는 악의 온갖 방해 가운데서도 결국 하나님이 모든 잘못된 일을 바로잡으시고, 그의 언약적인 정의를 세우시며, 정의를 회복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선언은 구약의 요셉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온갖 고난과 역경 끝에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형제들과 다시 만납니다. 요셉은 형제들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요셉은 자신의 고난을 아름다운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선은 요셉의 구원을 넘어 이스라엘 전체의 구원에까지 이르게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미리 작정하셨던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전에는 매 순간이 고난이었지만, 이 고난의 모자이크 조각이 어느 순간 하나로 맞추어지기 시작할 때 단순한 모자이크 조각들의 모음이 아니라 깜짝 놀랄 만한 작품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셨고, 그동안 잘못되었던 모든 일을 바로잡으셨으며, 마침내 요셉과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그분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인생을 향하여도 이런 놀라운 작품을 작정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헬. 프로테시스)은 하나님께서 미리 세우신 그분의 목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셨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목적과 장정하심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입니다. 비록 두 세대 사이에 끼어 고난이 있지만,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함께하시며 우리의 고난을 재료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가도록 도우십니다. 2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그 목적을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일로 명시합니다.
아들의 형상이란 하나님이 처음 아담에게 의도하셨던 하나님의 형상이기도 합니다. 아들의 형상을 온전히 이룰 때 우리는 영광스럽게 변하고, 창조의 본래 목적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탄식하시는 성령님은 우리로 죄로 인해 파괴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온전히 회복시키는데까지 인도하길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아들의 형상은 어떤 단계를 통하여 회복될까요? 이는 30절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첫째는 미리 정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 작정하심은 둘째, 부르심으로 이어집니다. 부르심은 복음선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전도는 미련한 일 같지만 하나님은 이 전도의 미련한 일로 그분의 백성을 부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성도의 전도를 통해 하나님의 성령은 그들의 마음속에 효과적으로 역사하셔서 믿음, 소망, 사랑을 붙들게 하십니다. 여기서 효과적인 부르심이 일어납니다. 셋째, 부르신 백성을 의롭다고 선언해 주십니다. 이는 칭의의 역사를 말합니다. 칭의는 단순히 의롭다고 선포하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그 마음에 부으셔서 의롭게 살 힘과 능력을 주셔서 믿음의 순종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형상과 그 안에 담긴 영광을 회복시켜주십니다. 이 최종적인 목적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갖고 계셨던 목적이지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므로 좌절되었던 목표였습니다.
이제 이것이 마침내 실현될 수 있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를 좀 더 순서대로 세밀하게 나누면 다음과 같습니다.
소명(복음 전도를 통해 예수님을 믿도록 하심)
중생(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우리의 성향을 바꾸어주심)
회심(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도록 하심)
연합(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심)
칭의(의롭다고 선언해주심)
양자(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해주심)
성화(전인적으로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심)
견인(죽는 순간가지 믿음을 지키게 하심)
확신(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해주심)
영화(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변화하여 영광스럽게 됨)
이 길이 열려 이는 것을 알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 탄식하시는 성령의 기도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 탄식은 하나님의 상속자로 영광을 받기 위해 고난과 싸워 이기도록 하시는 성령의 탄식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탄식에 나의 탄식이 실려 하나님께로 상달됩니다.
여러분, 지금 나의 상황을 돌아보세요. 세상과 주님 사이에 끼어 압박감과 괴로움으로 탄식이 흘러나오지 않는가요? 만약 그렇다면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세요. 이런 고난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우리 안에 성령께서 함께하시며 역사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영광의 소망이 있기에 고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고난을 겪을 틈도 없이 세상의 격량에 거침없이 휩쓸려갔을 것입니다. 영광의 약속에 이르기까지 성령의 탄식에 귀 기울이고, 하나님의 선한 뜻을 신뢰하며 나아가기를 축복합니다. 고난과 아픔의 모든 재료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선으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