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12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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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태어났니

우리 11기 여러분들! 오늘도 주일을 맞이하여서 이렇게 주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모든 친구들 환영합니다. 말씀을 듣기 전에 옆사람과 이렇게 인사를 해 볼게요.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하십니다. 한번 더 해볼까요. 우리도 당신과 함께합니다.
여러분들 아주 중요한 순간을 앞에 두고 있지요. 많은 긴장과 두려움이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잊지 않는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지난주 예배 후에 많은 행사들이 있었죠? 우리 후배들이 선배들을 응원하는 영상들을 함께 보고, 또 특송도 함께 들었습니다. 꽤나 감동되는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또 뭘 했죠? 생일 축하를 함께했습니다. 10월과 11월 생일 맞은 이들을 축하해주었죠. 저도 사실은 지난 10월달에 생일을 맞았어서, 고맙게도 많은 축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생일이라는 것이 즐겁지만은 않더라구요. 왜냐하면, 이제 새로운 만 나이 제도가 들어오면서, 생일은 곧 나이를 먹는 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입장에서는 빨리 성인이 되고 싶은 친구들도 있겠지만, 저도 이제 만으로 스물 아홉에 되다보니 나이를 먹는 것이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마지막 20대의 생일을 많은 축하와 함께, 또한 한편의 씁슬함과 함께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생일이라는 것은 모두에게 축복된 날이라고 할 수 있을 거에요. 왜 그럴까요? 그 사람이 이 세상과 처음 마주한 날이기 때문일거에요.
그래서 여러분들도 친한 친구들 생일을 기꺼이 축하해주고, 또 자신이 생일을 맞으면 그 날을 온전히 즐기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자신의 생일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저주를 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던 욥이라는 인물이죠.
오늘 이 욥이 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면서, 욥이 처한 상황과 욥의 대처,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은 어떤 것인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난주까지 욥기의 프롤로그 격인 1장과 2장을 보면서 욥이 엄청난 고난을 받고 있는 상태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가진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의 몸마저 망가진 상태에서 그의 친구들이 찾아와 그와 함께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친구들은 욥을 만나고 칠일간 이야기를 못했다고 했죠.
그리고 오늘 말씀 첫구절에서 드디어 그가 입을 엽니다. 3절에서 뭐라고 하죠?
욥기 3:3 NKRV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그렇습니다. 내가 난 날, 즉 생일날이 멸망하기를 바라고 있죠. 심지어는 자신의 임신을 알게 되었던 그 날도 멸망하기까지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몇 구절에 이어 자신이 태어난 그 날이 캄캄하고, 빛이 비추질 못하고, 구름이 덥히고, 아무도 즐거워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욥은 자신의 생일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1절에서부터는 무슨 이야기를 하나요? 차라리 내가 태어날 때 죽었어야 했었음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건강하게 태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면, 차라리 죽은 자들과 함께 평안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마지막 25절과 26절에서 지금 자신의 상황을 토로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생일이 망하고, 자신이 온전하지 못하게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자신은 두렵고 떨리고, 평온도 없고, 불안만이 가득하다고 말하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던 욥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매우 경건한 모습이었죠. 엄청난 고난의 순간이 닥치더라도 하나님을 찬양했던 모습이 바로 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하나님 욕하고 죽으라고 해도, 절대로 그러한 범죄를 행하지 않죠.
하지만 그의 몸이 종기로 뒤덮인 고통 속에서 일주일이 지나자, 그의 입은 고통으로 인한 탄식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내가 왜 태어났고, 왜 죽지 못해서 이렇게 고통 속에 있는 것인가.
욥의 고통이 너무나도 극심하다는 것을 우리는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왜 이 고난을 당하는 것인지조차도 알지 못한 채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니, 그 아픔을 어떻게든 발산하고자 했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한탄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의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욥이 한탄을 하는 대상이 누구냐는 것이죠.
욥이 누구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일까요? 우리 한번 이 화자의 대화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찾아봅시다. 1번. 하나님 2번. 욥의 친구들 3번. 욥의 아내
혹시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마 글을 잘 읽는 친구들이라면 어느정도 감이 오실 거에요.
사실 보기에는 답이 없죠. 왜? 특정 대상에게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욥기라는 성경이 마치 뮤지컬같다고 했었죠? 뮤지컬에서 자주 나오는 주인공이 혼자 하는 대사들이 있습니다. 그걸 보통 뭐라고 하죠? 바로 독백이라고 합니다.
욥이 오늘 본문에서 한 것도 마찬가지인 것이죠. 그저 독백으로 어느 누군가를 향하지 않고 소리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욥이 이렇게 독백으로 이야기를 했을까요? 사실 다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이 불평을 하나님께 하게 된다면, 욥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을 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엄청난 고통이 있지만, 그것을 하나님을 탓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누구의 탓이겠어요? 갑자기 찾아온 친구들이 잘못이겠어요? 그렇지는 않겠죠. 결국 하나님 탓이 아니라면, 욥 자신의 탓이라고 해야겠죠.
하지만 욥은 이 고난에 자신의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지를 않았습니다. 아무리 자신의 행동을 곱씹어봐도 자신의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흠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떠한 정답도 도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욥은 자신의 생일만을 저주하며 뜬구름을 잡는 불평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이 말을 듣고 욥의 세 친구들 중 한명이 반응을 시작합니다. 바로 엘리바스였죠.
엘리바스는 4장에서 길게 욥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욥아, 너가 이렇게 큰 고난을 당하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너의 죄악에 있을 것이다. 너가 아무리 온전하게 행한다 해도,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있겠느냐. 너의 죄악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한번 잘 생각해보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라. 나라면 그렇게 하겠다.
하지만 우리가 보았듯이 욥은 자신의 행동에 어떠한 잘못도 없음을 확신하고 있죠. 결국 욥이 6장에서 그의 이야기를 되받아치며, 지난주에 이야기했던 토론의 내용들이 이어지게 됩니다.
자세한 토론의 내용들은 다음 시간에 보게 될 것 같아요.
그러면 우리는 다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와봅시다. 우리는 처음 이 본문을 보게 되면, 욥의 상황과 욥의 한탄이 겹쳐지며, 그래 그럴 수 있지 라는 생각이 들게 될 거에요.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욥의 잘못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모든 인간은 죄가 있고, 욥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그의 잘못이 고통중에 드러나게 되었죠.
욥의 잘못은 하나님을 찾지 않음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방금 본문을 보면서 그 내용이 독백이라는 것을, 향하는 대상이 없었음을 보았죠.
그렇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저 고통을 불평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으면 조금 의아함이 있을거에요. 왜죠? 욥이 본문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은 이유가 있었잖아요. 하나님을 여기서 입에 담게 되면, 하나님을 향해 욕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찾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자신의 다짐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욥의 이러한 생각은 어떤 결과로 나타났을까요? 자신의 고통과 함께 자신을 홀로 놓아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에서 생각나는 말씀 구절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0:7 NKRV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바로 십계명의 3계명에 해당하는 말씀이죠. 저는 이 말씀을 듣고 배우면서, 어린 시절에 ‘하나님 바보’ 이런 말을 하면 마치 천벌을 받을 것 처럼 생각했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말을 하면 안되겠죠. 하지만 이 구절의 본문은 그러한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서 잘못된 일들을 행하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가지고서 잘못된 일을 하는 것들, 죄악을 저지르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식의,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들에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는 죄악들이 바로 대표적인 일이겠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면서 세상에서 죄악된 일들을 행하는 것도 크게는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모습에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불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런데 그러한 이들의 삶이 잘못되어 사람들에게 욕을 듣게 된다면, 그 욕이 어디로 향하겠어요? 바로 하나님께 향하게 되겠죠.
3계명의 실제적 의미는 바로 이러한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봅시다. 아무리 3계명의 의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불평하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 아닐까요?
물론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한 악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욕하는 것을 기뻐하지는 않으십니다.
하지만 욕과 불평의 개념은 조금 다릅니다. 욕은 그 마음 속에 상대를 증오하는 마음을 가지고 상대를 해하기 위해 말을 뱉는 것이죠.
하지만 불평은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상대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있지만, 지금 자신의 마음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이 상황을 이해해달라고 말을 내뱉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향한 불평에 대해서 모두 미워하시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시편 말씀 중에는 대놓고 하나님을 향해 불평을 하는 말씀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욥과 같이 자신의 상황이 좋지 못함을 놓고 하나님께 불평을 하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평에 대해 미워하시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그 시편의 말씀 속에 하나님을 향한 도우심을 구하고, 자신의 죄악됨을 고백하는 내용들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불평했던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죄악도 존재함을 고백하고, 그와 함께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시며 자신을 도우실 것임을 믿는 믿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욥의 오늘 본문에서의 한탄은 어땠나요? 그저 자신이 아프다는 것만 이야기할 뿐, 그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자신이 이 고난에 책임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하나님께 항변이라도 해야 할텐데, 그러한 이야기도 존재하지 않죠.
그러면서 바로 지난 구절에서 스스로가 고백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 또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는 고난을 하나님과 분리시키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을 욕하지 않겠다는 생각만으로 말이죠.
하지만 아무리 그가 하나님을 욕하지 않으려 했다고 한들, 그러한 불평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게 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죠.
하나님은 세상에서의 모든 것을 운영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기에, 욥이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아픔 속에 있는 것을 아시고 허용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결과적으로는 고통의 책임에 하나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아마도 욥이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간접적인 책임을 씌우게 되었고, 자신의 책임은 이야기하지 않는 그러한 한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불평의 모습은 또 다른 성경에도 등장합니다. 바로 출애굽 과정에서 나타나는 백성들의 불평이죠.
그들은 광야에서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께 자신들의 고통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불평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좋지 않은 마음들이 분명히 존재했던 것이죠.
결국 그러한 불평들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대응하시나요? 땅을 가르시고, 불뱀을 내리시는 등 그러한 불평을 기뻐하시지 않으심을 보여주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욥의 이러한 잘못에 대해 이후의 말씀에서 꾸짖으십니다.
자. 우리는 이렇게 오늘 이 욥의 한탄을 통해서 욥이 하나님 앞에 어떠한 잘못을 범하게 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죠. 바로 하나님께 자신의 상황에 대한 한탄을 토로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늘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그렇기에 여러분들이 고통 속에 있을 때, 그것으로 인해 마음이 아플 때, 우리의 마음을 공감하시고 함께 아파해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감정으로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님께 우리의 고통을 토로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절대로 미워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뻐하시며 그 가운데서 함께해주실 것입니다.
오히려 욥의 이러한 모습처럼,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모든 일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모습들을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대비하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지난 두 마음 설교때 이야기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역과 세상의 영역을 나눠놓는 것이죠. 우리의 신앙적인 것들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맡기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세상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죠.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역이 아닌 곳은 없습니다. 지난주에 나눴던 것처럼, 여러분들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고, 그렇기에 여러분들이 지금 겪는 고난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서 의지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고 맡기고 하나님께 쏟아내십시요.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지금 상황과 감정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시고 여러분들에게 함께하시며 힘을 불어넣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달 보았던 열왕기상의 말씀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했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엘리야 선지자였죠.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크게 무찌르면서 엄청난 믿음을 보였다는 것을 나눴던 것 기억하고 계실 거에요.
그런데, 제가 엘리야 또한 연약한 인간이라고 하면서 뭐라고 했었죠? 이세벨이 죽여버리겠다! 라고 하니까 바로 줄행랑쳤다고 했었죠.
그 상황에서 엘리야는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친 터라 너무나도 지쳐 로뎀나무 옆에서 쓰러지듯이 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말하죠.
이 역시도 하나님께 자신의 상황을 놓고 불평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제 생명조차 지켜주지를 못하십니까. 차라리 그냥 하나님이 죽여주세요! 라고 말한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그의 불평에 대해 아무 말을 하지 않으시고 그저 떡과 물을 주시고 그가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그것으로 인해 힘을 얻어 이후의 사역들을 감당하게 되죠.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에게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고통으로 인해 지쳐 쓰러져 있을 때, 우리를 일으켜주시고 나아갈 힘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 모든 친구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의 지금 상황이 그 고난일 수 있겠죠. 두렵고 힘들고, 빨리 끝났으면 싶은 마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의지할 분은 바로 주님뿐입니다. 좋은 것이 있다면 주님께 이야기하고, 불만이 있더라도 주님께 이야기하세요.
그러한 모든 한마디 한마디 여러분들의 감정과 여러분들의 마음을 하나님은 다 듣고계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함께하실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 의지함으로 여러분들의 고난과 앞으로의 시험을 이겨낼 수 있는 우리 모든 하늘고 11기 친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 공감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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