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에 구해야 할 감사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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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1:2-4
어떤 글을 보니까 대략 50년 전 분들이 이 땅을 살아갈 때는 생필품이 약 50여 가지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50년이 지난 이 시대에 필요한 생필품은 무려 800여 가지로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무슨 근거를 가지고 그 생필품의 기준을 뽑았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난 수년 전과 비교해봐도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던 많은 기기가 생필품으로 우리 손에 들려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벌써 스마트폰만 하더라도 현대인들의 일상에 꼭 필요한 생필품 중 하나 아닙니까? 요즘은 또 ‘에어 프라이어’가 없는 집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예전에 어른들은 이 생필품 50가지를 가지고도 참 여유 있고 넉넉하게 사시는 것 같았는데, 요즘은 무려 800가지가 되는 생필품을 가지고도 더 많은 것을 가지지 못해서 더 누리지 못해서 늘 아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이 800가지를 가지고도 만족함이 없어 불평하는 존재가 아니라, 50가지밖에 손에 들리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자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이 자족하는 마음, 이 자족하는 마음이 신앙생활에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디모데전서 6:6 합독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지난 1년을 돌이켜보면서 내게 경건의 유익이 되는 이미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자족하는 마음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감사로 연결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이 부분을 오며 가며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과연 자족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가?’ ‘50가지를 가지고도 자족하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가?’ 지난번에 자족하는 것이 훈련이라고 말씀을 드렸었잖아요? 제가 한참 그것을 생각하다 보니까 문득 떠올랐던 것이 이 자족으로 인해 찾아오는 감사도 필요하지만, 무엇을 감사하느냐? 이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을 감사하느냐? 무엇을 가지고 어떤 제목으로 감사하느냐가 그 사람의 본질이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한 해 동안 여러분들의 감사 제목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우리 믿음의 현주소입니다.
저는 오늘 성경의 바울을 생각하면서 그분이 왜 신령한 하나님의 사람인가를 봤더니 바울의 감사 제목이 우리와는 좀 다르더라고요. 대부분에 있어서 바울의 감사 제목은 물질이나 명예가 아니라 ‘사람’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지난 주중에 바울 서신을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봤는데요.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몰라요. 성경 곳곳에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감사가 얼마나 자주 표현되고 있는지 예전에도 그 본문을 틀림없이 읽었는데, 새롭게 발견하게 되면서 참 많이 놀랐습니다. 몇 군데를 함께 살펴보길 원하는데요. 바울의 편지 서두에 대부분 사람에 대한 감사가 담겨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에베소서 1:16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빌립보서 1:3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골로새서 1:3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렇게 사람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제가 이런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요. “여러분,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자족하십시오.” 이걸 가르치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을 감사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필요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지난번에 이 가을에 함께 구해야 할 기도에 이어 ‘이 가을에 구해야 할 감사 제목’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다음 주일이면 추수감사절인데요.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하나님이 주신 많은 물질이나 풍성한 것들로 인해 감사한 것도 필요하지만, 바울처럼 사람으로 인한 감사,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나 한 사람의 필요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붙여 주셨습니까? 저만 하더라도요. 제 목회의 여정 곳곳에서 낙심을 겪을 때나 어려움이 있을 때도 그때마다 도움을 주셨던 분들이 한두 분이 아니세요. 그분들이 제가 열심히 목회하는데 원동력이 되시는 분들이세요.
그래서 이번에 사업이 잘돼서 감사하고, 아파트값이 올라가서 감사하고, 건강이 회복되어서 감사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감사한 게 참 많이 있지만, 저는 그 수많은 감사 제일 꼭대기에 ‘좋은 아내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좋은 남편 주심을 감사합니다’ ‘좋은 교회에서 이렇게 만남의 축복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런 ‘사람’에 대한 감사가 이번 가을에 여러분들의 제일 큰 감사 제목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런 감사가 왜 필요할까요? 제가 발견한 것이요. 물질이나 명예 같은 가변적인 것들에 의해 감사가 넘치는 분들은 그것에 따라서 기쁨도 요동치더라는 거예요. 올 한해는 사업이 잘돼서 풍성한 감사를 누렸는데, 내년에는 이게 안 되면 감사가 곤두박질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보니까 그런 가변적인 것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동역자,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사람에 대한 감사가 있으니까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서도 절대 흔들리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히던, 핍박을 받는 자리에 있던 변함없는 감사가 넘쳐나는 거예요.
감옥에서 쓴 옥중서신에서도 ‘감사, 감사’ “너희로 인하여 내가 감사가 넘친다” 이런 은혜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이런 감사를 가르쳐야 합니다. 만남의 축복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 교회학교에 김은채라고 이제 초등학교 4학년입니다. 김연정 집사님 딸이잖아요? 이 아이가 올해 신년기도제목 카드에 신앙적인 목표란에 뭐라고 썼는지 아세요? “매일 받은 복을 세어보기” 이렇게 적은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매일 받은 복을 세어보는 삶이라면 어떻게 감사를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말 그대로 평생감사로 사는 거죠.
예전에 제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온 식구가 저녁을 함께 먹었던 것 같아요. 요즘은 ‘가족’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지만, 예전에는 ‘식구’라고 했습니다. ‘밥 먹는 입’이라는 뜻 아닙니까? 그렇게 한 상에 둘러앉아서 밥을 먹고 상 치우고 나면 또 식구끼리 과일도 먹고 고구마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다가 다 같이 한방에서 잠드는 것. 이것이 정서적인 건강에 얼마나 좋은 것인지 실제로 연구 결과가 나왔더라고요.
뉴욕대학의 포스트만 교수님이라는 분의 논문에 의하면, ‘방 하나를 독차지하면서 혼자 자란 아이들 한 그룹’과 ‘한 방에서 여러 형제가 함께 사는 한 그룹’으로 나누어서 이 두 그룹을 가지고 장기간에 걸쳐 조사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결과가 어땠는지 아십니까?
한 방에서 형제자매들과 부대끼면서 자란 아이들이 자기만의 독방을 사용하면서 자란 아이들에 비해서 지능 발달지수가 높고 사회 적응지수가 상승하는 결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런 조사 결과를 생각하면 하나님께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그러진 않았는데, 저희 윗세대 어른들은 어쩔 수 없이 한 방에 다 모여 살아야 하셨잖아요? 그것이 우리의 정서를 풍성하게 하더라는 것이죠.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동안 계속 소풍을 다녔잖아요? 그중에 분명히 한두 번은 비를 만난 적이 있을 거예요. 기대하고 소풍을 갔는데, 갑자기 막 비가 쏟아진단 말이에요. 그럴 때 절망감이 몰려오셨습니까? 좌절감에 빠져서 괴로워하셨습니까? 그러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니까 저도 어린 시절에 소풍 가는 날 비를 만난 적이 있는데, 저만 비 맞는 게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비를 맞으면서도 소풍 가는 날이니까 저는 막 즐겁더라고요. 소풍 못가고 교실에서 김밥 까놓고 노는대도 재미있더라고요. 그래서 내 인생에 고통이 찾아오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인생의 고통은 오히려 하나의 이벤트처럼 여겨질 때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저나 우리 성도님들의 인생이 아무런 고통도 없는 순탄한 생활을 혼자만 하는 인생이 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사람과 소풍 길에 맞는 비처럼 즐겁고 재미있었던 추억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인생 가운데 찾아오는 고통이 오히려 인생의 큰 그림 안에서는 하나의 작은 이벤트와 같고 풍미가 가득한 맛있는 진수성찬을 위한 하나의 양념과도 같이 여겨지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그다음 가사는 모르겠어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오오오오오~” 뭐 그런 노래잖아요? 참 좋은 노래 가사 같아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더라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길이 진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고 사람이 꽃보다 향기롭고 사람이 내가 가진 수많은 감사 제목을 다 뭉쳐도 이 아름다운 사람 한 명 만난 것보다 못하다고 인식할 수 있는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기 시작하면 바울처럼 행복해져요.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가끔 성도님들 중에 담임목사가 토요일에는 온통 설교 준비만 하는 줄 아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의 경우는 주로 주초에 설교를 다 준비해 놔요. 그리고 계속 그때그때 주시는 마음으로 설교를 다듬고 또 다듬고 합니다. 오히려 토요일은요. 설교 준비가 다 끝났어요. 그리고 오히려 사람들 만나는 게 더 좋아요.
생각해 보세요. 다들 주중에 일하시느라 바쁘신데, 심방을 하더라도 토요일에 해야죠. 저에게 시간을 맞추는 게 아니라 제가 시간을 맞추어서 성도님들을 만나다 보면 노래가 나와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오오오오오~ 그만해야겠네요^^:
모든 설교 준비를 다 끝내놓고 주일 날 성도님들을 만날 생각하면 막 신이 납니다. 비가 오면 더 좋아요. 다른 데 놀러 가지 못하시고 꼼짝없이 교회 올 거라는 기대에 더 신이 나요. 빨리 주일 아침이 왔으면 좋겠어요. 만남이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출간된 <깨달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사막 교부들의 글을 엮은 책인데요. 거기서 제가 참 제 마음을 울리는 글 하나를 보았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아가도는 말했다. 나는 어떤 사람에 대해 불만을 품은 채 잠을 청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내게 불만을 품은 사람을 그냥 자도록 내버려 준 적 또한 단 한 번도 없었다.” 다시 한번 읽어드릴게요.
“나는 어떤 사람에 대해 불만을 품은 채 잠을 청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내게 불만을 품은 사람을 그냥 자도록 내버려 준 적 또한 단 한 번도 없었다.”
여러분, 사막의 교부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 아닙니까? 그냥 불만이 없고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요? 사막 교부 아가도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 아가도와 같은 사람을 많이 만나시는 축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축복요.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들 주변 사람들에게 이 사막의 교부 아가도와 같은 존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신랑을 만난 아내, 이런 아내를 만난 신랑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을 자기 전에 사람으로 인한 불평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는 이런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생활을 하면 지하 단칸방에서도 불행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런 행복을 얻고, 그런 행복감을 주는 하나님의 사람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12장 18절에서 이렇게 권면하는 것 아닙니까? 로마서 12:18 합독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또 히브리서 12장 14절에
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화평함과 거룩함을 같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거룩함 못지않게 모든 사람과 화평하는 것, 분쟁하지 않는 것, 다투지 않는 것, 이 두 가지가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에서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절 합독]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바울이 자기가 개척한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하여 그렇게 감사가 넘친다고 고백합니까? 세 가지의 감사 조건이 나옵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
위대한 종교개혁자인 칼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야말로 참된 기독교에 대한 간략한 정의이다.” 그래서 누군가 “기독교에 대해 간단히 정의해 보세요” 한다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예수 믿는 우리가 항상 지녀야 할 덕목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 3절에 보니까 이 중요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꼬리표가 하나씩 다 붙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것들을 같이 살펴보면서 “하나님, 제 인생이 제 옆에 있는 사람에게 감사 제목이 되게 해 주시고 또 이 사람이 제 인생에 감사 제목이 되게 해 주셔서 오늘 나누게 되는 이 세 가지 전제조건이 풍성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첫째로 믿음의 역사입니다. 믿음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해 따라다니는 꼬리표 바로 “믿음의 역사”입니다. 믿음의 역사라는 것은, 믿음에 의해 산출 되어지는 일들, 혹은 믿음으로 행하게 되는 일들이라고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 속에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항상 능력이 나타나는 결과가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 그 눈에 거의 보이지도 않는 겨자씨만 한 믿음 하나만 있어도 그 작은 믿음이 어떤 역사를 일으킵니까? 산을 옮기는 능력이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5절 말씀에 생명력이 있는 데살리노니가교인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5절 합독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말만 가지고 떠드는 믿음, 입만 살아 있는 믿음을 탈피하기 위하여 세 가지 구비 조건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요. 그게 바로 뭡니까? 첫째는 능력이에요. 둘째는 성령이에요. 셋째는 큰 확신입니다. 이 세 가지가 서로 얽히고설켜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복음 자체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 자체가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이 이론이 딱딱한 이론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삶 속에서 사건을 일으키는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바로 큰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래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은 우리가 행함이 있는 큰 믿음을 위해 가져야 할 3가지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믿으시길 바랍니다.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
두 번째는 사랑의 수고입니다. 사랑이야말로 기독교의 본질인데, 거기에 사족처럼 붙어 있는 것 하나가 사랑에는 수고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 때문에 행하여지는 수고, 혹은 땀 흘리는 노동으로 표현될 수 있는 수고라는 단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문학적인 표현이 있는 것처럼, 여러분 사랑은요. 행동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여러분들이 잘 아시잖아요? 요3:1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한다고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독생자를 내어주시는 동사로서의 사랑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이 그 결정체 아닙니까? 오늘날 우리의 치명적인 결함 중의 하나가 무엇일까요? 사랑한다고 하는데, 수고가 없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의 사랑의 수고가 점점 확장되기를 바랍니다.
수능 시험을 보는 자녀를 둔 어머니들, 그 뒷바라지의 수고가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내 평생에 한 사랑의 수고가 자식밖에 없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사랑의 수고가 점점 더 지경이 넓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점점 지경이 넓혀져서 사랑의 수고가 곳곳에서 묻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땀과 눈물과 노력의 결정체인 물질을 가지고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기꺼이 사용하는 것, 그래서요. 여러분, 다음 주일 추수감사절 과일에 많이 봉헌해 주세요. 우리 교회가 많은 곳을 도울 수는 없지만, 우리가 늘 후원하는 홍파복지원과 이성용 성도님이 계시는 요양원 분들과 충분히 나눌 수 있도록 우리 가족이 조금 덜 먹고 봉헌해 주시면 그분들이 풍성하게 누릴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여러분들의 땀과 수고의 결정체가 담긴 귀한 헌금과 과일들을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이웃들과 나누는 것이야말로 우리 교회가 할 수 있는 사랑의 수고라고 믿습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소망의 인내입니다. 여기서 소망의 인내라는 것은 ‘소망 때문에 행하여지는 수고’ 또는 ‘소망에 근거한 인내’입니다. 로마서 5:3-4 합독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레언 모리스라는 분은 이 본문을 두고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여기서 의도하는 바는 조용하고 수동적인 체념이 아니라, 난관에 부딪혔을 때 일관적인 일관성이다” 단순히 고통이 찾아왔을 때 이불 뒤집어쓰고 참는 것을 소망의 인내라고 하지 않습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이까짓 장애물, 이까짓 고통, 이까짓 어려움 내가 인내할 수 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헤쳐나가는 능력을 소망의 인내라고 말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의 심령에 소망의 인내가 있기를 바랍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하여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신 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자리까지 내려가셨던 그분, 그분으로 말미암아 내게 소망이 생겼다면 지금의 이 고통이 비록 감당하기 버겁지만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6절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 고통을 어떻게 이겨냅니까? 살전1:6 합독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여러분, 닥쳐온 환난을 억지로 참는 게 아닙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으로, 기쁨으로! 자기 환난을 이겨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우리 하름교회가 이 세 가지의 덕목을 잘 갖춘 그런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믿음의 역사가 있는 교회, 이 믿음의 역사는 하나님을 위한 항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가 사랑의 수고,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갖춰야 할 항목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소망의 인내, 이것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 내 삶 속에 소망의 인내가 풍성하길 원합니다’ 이렇게 풍성한 나와 네가 모여 이룬 것이 바로 교회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을 봐도, 옆을 봐도 “당신이 내 감사 제목입니다.” “당신이 내 기도 제목입니다” “당신 때문에 살맛이 납니다” 이런 아름다운 고백을 하는 이번 감사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 주변에 계신 분들에게 진심을 담아서 이렇게 축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나의 감사 제목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 듣고 그냥 끝나지 마시고요. 오늘 집에 돌아가셔서 여러분들의 배우자에게 자녀에게 꼭 “당신이 나의 감사 제목입니다” 하시면서 왜 감사 제목인지 진심을 담아서 고백해 주세요. 말로 하기 어렵거나 멀리 계신 분에게 감사하고 싶다면 카톡으로 이모티콘 엄청나게 넣어서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주세요. 진짜 감사한 분에게 그 정도 못 하겠습니까? 그리고 삶의 어려움이 오신 분들은 부디 소망의 인내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헤쳐나가세요. 주님이 반드시 함께하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 이 찬양을 같이 불러보길 원합니다. 화면에 가사를 한 번 죽 보여주시면 좋겠는데요.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여러분 감사는 받을 때는 잘 모릅니다. 깨닫게 해 주실 때 진정한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어떤 감사입니까?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걸” 여러분, 먼저 자기 자신에게 감사하세요. 왜 그렇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나 여러분 자신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누가 가르쳐 주었어요? “고마워요. 그 사랑을 가르쳐 준 당신께 주께서 허락하신 당신께” 지금 바로 여러분들 옆에 있는 그분은 하나님께서 감사를 회복하라고 허락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 감사하세요.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더욱 섬기며 이제 나도 세상에 전하리라” 사랑의 수고입니다. 이게 감사를 깨달은 자들이 행해야 할 사명입니다.
우리 이 찬양 오늘 말씀을 생각하시면서 함께 불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찬양 :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합심기도
여러분, 우리 이제 함께 기도하시는데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여러분들에게 허락하신 주변 사람들, 앞을 봐도 옆을 봐도 “당신이 나의 감사 제목입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하름교회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 되게 해달라고 미리 감사하시면서 이 시간 오늘 주신 말씀의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한 번 크게 부르시고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마침 기도
살아 계셔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걸” 하나님,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시는 그 엄청난 사랑으로 구원해 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도 그런 주님을 닮아 믿음의 역사를 이루고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살아가는 주의 자녀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사람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추수감사절이 되기를 원합니다. 앞을 봐도 감사, 옆을 봐도 감사한 마음이 넘치게 하시고 그저 감사헌금만 드리고 넘어가는 추수감사절이 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에 감사가 회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삶의 어려움이 찾아오신 분들이 계십니다.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헤처나갈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을 주셔서 올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감사하며 고백할 수 있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감사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오늘 말씀으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이 가을에 더욱 감사의 영이 회복되길 소망하는 사랑하는 교우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