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내세우기보다 겸손하라(욥1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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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3년 11월 15일 수요일 새벽
1. 사도신경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2. 찬송가 418장 기쁠 때나 슬플 때나
3. 성경봉독 : 욥기 11장 1-20절
4. 말씀선포
1. 도입
1) 나의 지혜는 영원하지 않으며, 완벽하지 않다
나이가 차면 세상을 살아갈 지혜가 함께 쌓여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지혜가 매순간 정답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저 역시 체대를 준비했지만, 지금 체대를 준비하는 친구들을 보면 사뭇 다릅니다. 더 좋은 환경과 시스템이 구축된 곳에서 훈련하기도 하고, 대입을 준비하는 개념 자체도 달라졌습니다. 체대 준비한지 2-3년이 지나서까지는, 준비하는 후배들을 위해 조언도 해주고 방향성도 제시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지나니 제가 준비한 환경과 방식이 달라 조언하기가 어려워 졌습니다.
분명 듣고 알고 있는 내용과 내부적인 소식들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분명 지혜가 쌓여져 가지만 모든 게 정답이라 말하기에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아니,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습니다. 많이 알 수는 있지만, 모든 정답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아는 것을 전부인 것처럼 포장해 말하곤 합니다. 우리가 보는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지식에 하나님을 끼워 맞춰 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2. 소발을 통해 보니
1) 하나님을 감히 평가하지 말라
그런 아쉬운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소발이 보이고 있습니다. 욥의 말을 하나 하나 가만히 듣던 소발이 분노 합니다. 2절을 새번역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굉장히 직설적이고 실감이 납니다. “네가 하는 헛소리를 듣고서, 어느 누가 잠잠할 수 있겠느냐? 말이면 다 말인 줄 아느냐?”
욥의 그 긴 말들을 소발은 ‘헛소리’라고 정의합니다. 참담하지 않습니까? 고통과 절망 가운데 놓인 자가 언급한 모든 것들을 ‘헛소리’라 평가받으니 얼마나 참담합니까?
뿐만 아니라 12절을 보면 욥을 비하하기 까지 합니다. 이도 새번역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미련한 사람이 똑똑해지기를 바라느니 차라리 들나귀가 사람 낳기를 기다려라”
헛소리에 이어 미련한 자라 말합니다. 소발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지혜 앞에 욥이 어리석어 보였을 것입니다.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욥의 입장에서는 무엇 하나 달콤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한 칼이고 총 아닙니까?
누구 하나 승자 없는 무익한 대화가 따로 없습니다. 거기에 소발은 하나님을 자신의 지혜에 가두어 두는 어리석음을 보입니다. 14절과 15절입니다.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 그리하면 네가 반드시 흠 없는 얼굴을 들게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하나님은 악을 싫어 하십니다. 틀린 것 하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극히 싫어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모든 고난이 ‘죄’ 때문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너 지금 힘들지? 그거 다 너의 죄 때문이야. 하나님은 죄를 범하지 않은 자를 고통 가운데 두지 않아. 너가 지금 힘든 이유는 다 너의 죄 때문이야.” 이게 지금 소발의 태도입니다.
이는 너무나 잘못된 태도입니다. 소발은 자신이 아는 것을 전부인 것처럼 하나님을 말했습니다. 오히려 창조주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한 욥의 고백이 더 귀해 보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나의 지혜와 지식에 가두어 두고 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감히 내가 정의할 수 없는 곳으로 두고 계십니까?
바라옵기로는 우리 모두 하나님을 감히 평가하지 않는 자의 삶을 살아내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우리 지식으로 가두지 맙시다. 그 분의 크고 위대하심을 더욱 바라봅시다. 그 분의 일하심을 더욱 경험하는 오늘이 되길 소망합니다.
2) 겸손하라
그리고 겸손하십시오. 소발은 겸손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지혜를 앞세우니,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지혜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말을 참 쉽게 하지만, 막상 겸손하게 산다는 개념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도대체 겸손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하루 “우리가 겸손하게 살아가 보자” 다짐하려는데, 겸손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존 파이퍼 목사님은 우리가 겸손할 수 없는 이유를, ‘우리가 좋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권리 의식 때문에 화를 내고, 그로 인해 우리는 겸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압니다. 그래서 배운 것에 대한 결과에 기대합니다. 그러나 기대한 결과 값이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화가 납니다. 이를 우리는 겸손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겸손은 하나님 아래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고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현실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곧 듣는 것입니다. 입을 열기보다 귀를 여는 것입니다. 겸손은 나보다 남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겸손은 나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 소발처럼 나의 지식을 주장하기 보다, 나의 앎에 하나님을 끼어 맞추기보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 이름 앞에 겸손함으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5. 기도제목
1) 말씀을 가지고
- 하나님을 평가하지 않는 우리 되게 하소서
- 하나님 앞에 겸손함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2) 삶을 위해서, 그리고 각자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 겸손함으로 수능을 맞이하는 수험생, 가정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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