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64 views
Notes
Transcript
<금요설교>
시편 1:1-6
“복 있는 사람”
2023. 11. 24
조 정 수
오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시편 1편의 말씀입니다. 이 시편 1편 말씀은 고대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의와 악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 명확하게 구분하여 보여주고 있는 노래로서 매우 중요한 노래입니다. 150편이나 되는 시편의 가장 첫 머리에 위치한다는 것만으로도 이 시편 1편이 얼마나 중요한 노래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특별히 이 시편 1편을 농경사회에 근거하여 비유를 기록하고 있는데, 복이 있는 사람은 가뭄에도 어려움 없이 시냇가에서 물을 공급받아 늘 푸르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고 말하고, 반면에 악인은 추수 때 알곡을 털고 남은 쓸모없는 빈 껍질로서 바람에 날려가 버리는 겨와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당시 고대 팔레스타인 지방의 농경사회를 비유로 말함으로써, 이 노래를 듣는 자가 분명하고 명확하게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고, 우리가 과연 어떠한 편에 서야 하는가를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복 있는 사람, 의로운 사람의 편에 서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편 1편은 과연 어떠한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복 있는 사람이란 어떠한 사람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악인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
첫 번째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길을 따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복 있는 사람”으로 시작하고 있는데요. 이 복 있는 사람을 뒤이어서 등장하는 세 종류의 악인들과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악인들과 죄인들과 오만한 자들입니다. 시편 기자는 특이하게도 이처럼 복 있는 사람을 설명함에 있어서 먼저 “복 있는 사람은 이러이러한 사람이다”, 라고 설명하기에 앞서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과 구별된 사람이다”, 라고 대조하여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 있는 사람과 대조되는 악인들의 종류가 세 종류로 나타나요. 악인들과 죄인들과 오만한 자들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 나열한 것은 악인들의 종류가 이렇게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악인도 있고 악인과는 좀 다른 죄인들도 있고, 또 그와 비슷한 오만한 자들도 있다. 이렇게 분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복 있는 사람이 악인들과 구별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한 삼중강화입니다. 비슷한 말을 세 번 반복해서 말함으로써 둘 사이의 차이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장치인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과 달라, 죄인들과도 달라, 오만한 자들과도 달라!” 이렇게 세 번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한편으로, 이 세 부류의 악인들 뒤에 붙어 있는 행위들을 가만히 보면 그 행위에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꾀를 따르지 않고, 길에 서지 않고, 자리에 앉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꾀를 따르고, 길에 서고, 자리에 앉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행동의 . 꾀를 따라서 걷다가, 길에 서고, 그 자리에 앉는, 일련의 흐름입니다.
이것은 행위의 연속성으로서 다시 말해서 죄악의 연속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걸어가다가 길에 서고, 자리에 앉는 행동이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것처럼, 인간이 죄를 짓는 것 역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죄를 지으면, 자연스럽게 또 다른 죄를 짓게 되고, 또 다른 죄를 짓게 되는 것이죠. 죄는 필연적으로 또 다른 죄를 불러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점차 더 크고 나쁜 죄로 발전되어 가고 맙니다.
처음에는 죄의 길을 따라서 멋모르고 갔지만, 이후에는 그 죄의 길에 스스로 멈추게 되고, 결국에는 그 죄 가운데 눌러앉게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처럼, 작은 죄 하나가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게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악인의 길을 가지 않도록 죄를 끊어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2절에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우리는 우리가 가진 악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버릴 것인가?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욕하고 싶을 때 참고, 때리고 싶을 때 참고, 맘속에 미움이 생길 때 그것을 다스리면 됩니다. “아, 저 인간 딱 한 대만 때렸으면 속이 시원하겠다.” 이런 생각이 들 때, “아, 나 그리스도인이지.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저 인간을 위해서 기도하자.” 예수님도 그러셨잖아요. 누가복음 6장 28절에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처럼 우리 안에 미움과 갈등이 생겨날 때, 우리 마음을 다스리고 상대방을 긍휼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쉽게 될 수는 없겠죠. 그래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노력하여서, 하루에 욕 열 번 할 거 한 번 줄여서 아홉 번만 하고. 사람 다섯 번 때릴 거 네 번만 때리고. 이렇게 차차 줄여나가다 보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모든 악의 길에서 돌이켜 의의 길을 따르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한다.
두 번째로,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사람입니다. 2절을 보면, “의인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다른 무엇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밤낮으로 읽고 되뇌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성도님들도 다 그렇게 하고 계신줄로 압니다. 그렇지요? 밤낮으로 성경 읽고, 암송하고, 필사도 하고, 교회 홈페이지에서 담임목사님 설교영상도 찾아보고. 그렇게 하시잖아요. 다들 쑥쓰러워서 표현은 안 하시지만 그렇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 6장 17절에,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여러분이 먼저 마음으로 순종하여 이 2절의 말씀을 잘 따라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왜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못할까?” 이렇게 스스로를 책망하지 말고. 비록 내가 지금 당장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꼭 주님 말씀대로 그렇게 해야지. 이런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최근에 제가 우리 교회 옆에 있는 헬스장에 회원권을 끊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아침에 운동을 하려고 하는데요. 저번주 화요일에 회원이 되었는데 지금까지 한 4번 정도밖에 못 갔습니다. 마음을 잡고 시작했어도, 새벽기도 끝나고 잠깐 잠을 자는 그 유혹을 이겨내고 실행하기가 너무나 어려워요. 오늘도 결국에 못 갔는데요. 그래도 오늘의 실패를 교훈삼아서 내일은 꼭 가야겠다고 새롭게 다짐하고 결단하여서 내일은 꼭 가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일의 시작은 그 일을 마음에 품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일을 품고, 기대와 소망으로 그 일을 실천해 나가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한 번, 두 번. 실패하였다고 해서 실망하고 그만둘 것이 아니라. 끝까지 마음에 품고 조금씩 조금씩 발전해 나가다 보면, 마침내 우리가 복 있는 사람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형통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특별히 이 3절에서 말하는 시냇가는 히브리어로 “펠레그”라고 합니다. 이 펠레그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시내가 아니라, 인간이 직접 땅을 파고 물을 끌어와서 만든 인공수로를 말합니다. 물이 부족한 이쪽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시내는 잠깐 물이 흐르다가 말라버립니다. 하지만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펠레그는 사람들이 항상 관리를 하기 때문에 물이 마르지 않고 항상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펠레그에 심어진 나무는 물이 부족한 일 없이 항상 풍족하게 물을 먹으면서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고, 그 잎이 마르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1년 365일, 마르지 않는 시냇가에 심겨져서 가뭄에도 어려움 없이, 철에 따라 열매를 맺고, 잎이 마르지 않는다는 것은 나무에게 있어서 최고의 성공이고 행복일 것입니다. 이 나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심어져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고,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풍성하고 은혜가 넘쳐나는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삶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 여호와의 인정을 받는다.
세 번째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시편 기자는 5절과 6절에서 악인들과 의인들의 결과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의인들의 모임에 들어오지 못하지만, 의인들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의 척도를 사람들에게서 인정받는 것에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 그로 인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 받는 것이 성공이다, 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에요. 하나님이 주시는 그러한 복을 우리가 누리고 사는 것이 왜 나쁘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에 있어서 우선순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인정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구해야 하고, 그 일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요? 답은 먼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들은 바와 같이, 악인의 길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이 묵상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로운 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의의 길을 따르고 말씀을 잘 묵상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인정하지 않으시는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보시기에 인정할 만한 자를 인정하십니다. 결코 우리 생각이나 판단으로 “아, 저 사람은 참 의로운 사람이네.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한 사람이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수요일에 담임목사님께서 토기장이가 귀하게 쓰는 그릇이나 천하게 쓰는 그릇을 판단하는 것이 토기장이 마음에 달려있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인정받고 인정받지 않고는 모두 하나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내가 이 정도 했으니까 이 정도면 인정 받겠지.” 하는 마음으로 달려갈 길을 멈춰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삶이 되도록 계속해서 부단하게 의인의 길을 경주하고 해야 할 일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8절에서 바울은 “인정을 받는 자는 자기 스스로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처럼 스스로 만족하고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복된 삶이 되도록 끊임없이 내 자신을 돌이켜 악을 밀어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삶,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을 대조하며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의인의 삶, 복 있는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은 먼저는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처럼, 명확한 두 길 사이에 머뭇거림 없이, 오직 주님이 기뻐하시는 의인의 길, 복 있는 사람의 길을 따라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경주하여, 늘 푸르고 시절을 좇아 풍성한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사랑하는 서광교회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