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기도가 마르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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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12–25 NKRV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형식적인 기도에 지칠 때

여러분은 한 해를 시작할 때, 또는 긴 시간 기도하고 있는 기도제목이 있나요?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어떤 기도제목을 가지고 나아가며, 간절한 시간을 보내고는 합니다.
하지만 기도라는 것이 너무나 추상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보니 우리는 기도가운데, “이런 기도를 하나님이 정말 들어주시는 걸까?” 싶기도 하고, “하나님은 왜 나의 기도를 안들어주시는걸까?” 싶기도 하고 기도에 대한 의문들이 생기곤 합니다.
신앙생활의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이 해소될 것 같지만, 언제나처럼 우리는 기다리다 못해 지치고 지치다 못해 형식적인 기도로 변해버리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하죠.
오늘은 우리가 참 난해하게 느낄 수도 있는 예수님의 무화과나무 저주사건을 살펴보면서, “형식적인 기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라는 내용으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살펴보며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특이한 행동들

오늘 말씀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다.
마가복음 11: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예루살렘 성전을 둘러보시고는 ‘베다니’라는 마을로 제자들과 함께 이동하십니다.
다음 날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성전으로 향하던중 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더니 독특한 행동을 하십니다.
마가복음 11: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이 말씀이 독특한 이유는 바로 앞절에 무화과 나무의 상태 때문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1: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무화과의 열매를 맺히지 않을 시에 잎사귀가 풍성한 무화과 나무에게 열매를 따먹지 못할거라는 선언을 하시다니, 너무 특이합니다.
제자들은 그 상황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또 한번 특이한 행동을 하십니다. 마가복음 11: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어제 예루살렘 성전을 돌아보실 때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베다니로 가셨던 예수님이, 이번에는 성전안에서 돈바꾸는 자들과 상인들을 내쫓고 이렇게 선언하시는 겁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라고 말이죠.
이 상황을 제자들은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날이 저물자 예수님과 제자들은 다시 ‘베다니’마을로 돌아갑니다. 이튿 날 다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는데,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라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제 일이 떠오른 베드로는 예수님께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다고 하자 예수님은 뜬금없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1: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뜬금없이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시더니, 믿음과 기도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왜 갑자기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고, 예루살렘을 둘러보신 당일이 아니라 그 이튿날이 되어서야 상인들을 내쫓으시며 성전에 대해 가르치시고, 마른 나무를 보고 뜬금없이 하나님을 믿으라며 기도를 가르치셨던 걸까요?

무화과 나무와 성전

우리가 예수님의 독특한 행동들을 이해하려면 먼저 무화과 나무와 성전에 대한 유대인들의 인식과 당시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포도와 같이 가장 보편적인 식재료중에 하나입니다. 포도가 당시의 물이 부족한 그 지역에 물을 대신할 수 있는 음료의 역할을 했다면, 무화과는 음식 뿐만 아니라 상처에 바르는 의료용으로 쓰였을 만큼 일상속에 가장 밀접하고 필수적인 요소로 사용되었었죠.
그래서 구약에서는 종종 이스라엘의 상태를 표현할때 무화과 나무의 열매를 비유 삼고는 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을 때에는
열왕기상 4:25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
하나님안에서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표현했다면, 반대로 하나님을 멀리하고 죄악이 편만할 때에는
예레미야 8: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심판의 상징으로 무화과나무를 인용해 표현하고는 했습니다.
이렇듯이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많이 쓰여서 유대인들에게 무화과 나무를 인용한 비유들은 효과적으로 이해되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단순히 배가 고파서 열매없는 무화과나무에 화를 낸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가르칠 것이 있기에 비유적으로 제자들앞에 의도를 가지고 무화과 나무를 저주했던 것입니다.
어떤 의도일까요? 바로 성전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제자들과 둘러보신 후 이 비유를 시작하셨습니다.
성전이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을까요?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하는 다윗의 마음을 보신 하나님이 다윗과 언약하시고 솔로몬을 통해 성전이 완성되고 지어질때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언약하실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열왕기상 9: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
유대인들의 인식속에서 성전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높이는 공간이자 유일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간구하며 기도할 수 있는 곳,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망하고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올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무너진 성전을 건축한 일입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성전은 역사적으로 ‘헤롯 성전’이라고 불리는 성전이었는데 이 성전은 말라기 선지자로 구약이 끝난 이후 두번째 성전이 무너져 있을때 왕권을 잡은 헤롯대왕이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지어준 성전입니다.
헤롯은 이 성전을 통해 유대인의 마음을 사고 또 이익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매 절기마다 어디에 있든지 이 성전으로 모여서 흠없는 동물을 제사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속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너무 멀리서 오는 사람들은 흠없는 동물을 데리고 올 수 없어서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 있는 시장에서 흠없는 동물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돈을 주고 제사장직을 산 사두개인들과 성전을 통해 이익을 취하고자 했던 헤롯은 성전의 원래 목적이 아닌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찾고 기도할 수 있는 넓은 뜰에서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고, 대신 이익을 챙기기 위해 그들이 허용한 동전으로만 거래를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환전상들은 그 돈을 바꿔주며 수수료를 받았고 그 수익은 온전히 사두개인들과 헤롯의 몫이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상황을 어느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곳에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하러 왔던 유대인들도, 그 광경을 예수님과 같이 바라본 제자들도 굳이 신경쓰지 않는 이방인들의 뜰이니 오히려 그 편리함에, 당연한 듯 여기며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고 예배하며 기도해야하는 성전을 자신들의 이익과 편리함이란 형식적인 공간으로 바꿔버린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상인들과 환전상을 내쫓으시며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진짜 해야할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마음을 버린 것을 책망하신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이런 성전의 원래 의미를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이익과 편리함이란 형식만 남아버린 이스라엘의 상태를 바라보며 화려하게 잎을 폈지만 열매하나 없는 무화과 나무를 빗대어 정말 편리하고 화려한 성전과 기도의 모양은 있으나, 정작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형식만 갖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기도를 드리는 이스라엘과 그것을 모르고 당연하게 여기는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며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형식만 남지 않기 위해

그들이 형식만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에도 불구하며 오랜시간 강대국에 지배를 받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점점 작아졌습니다.그럼에도 습관적으로 선민이라는 민족성은 남아 형식적으로 정체성을 표현하는 의식인 예배와 성전, 절기를 통해 행했을 뿐 진짜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기도를 올리는 사람이 극히 적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마치 한국인이라면 이래야지 하는 것 처럼 말이에요.
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약해지니, 형식만 남고, 기대가 없고 형식만 남은 습관은 결국 편리함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하는 안타까운 결과만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떠한가요? 나의 기대와 다른 현실에, 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확신이 점점 작아지지는 않나요? 어느 순간 우리는 기대와 믿음이 약해짐과 동시에 형식에 익숙해져 점점 편리함을 찾게 되고, 하나님의 기대보단 나의 기대, 나만을 위한 솔루션, 오로지 ‘나’의 이익을 위한 기도만 남게 되지는 않나요?
어쩌면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처럼 화려하고 잘 갖춰지지만 현실에선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기도로 느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강력한 가르침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금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그 반응인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형식만 남아 현실에선 무능력한 기도가 아니라 정말 현실을 이겨내는 기도가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행동과 가르침을 살펴보며 3가지로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1. 내 마음의 성전을 “깨끗하게”

예수님은 성전에서 상업행위를 하는 자들을 내쫓으십니다.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신 첫번째 가르침은 원래 의미를 기억하고 자신들의 이익과 편리함으로 가져온 세상적인 어지러움을 치워버리는 것입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 입니다. 원래 의미에 맞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 있는 상태여야 합니다. 성전이란 단순히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바로 우리가 ‘성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성전 된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우리를 향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구라도, 언제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환경 그 마음의 상태를 가질 수 있도록 내 삶속에 어떤 분주함, 세상이 말하는 성공 등 나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수많은 가치관들을 내어버리고,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마음과 환경을 만들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기도의 자리,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는 것 뿐만 아니라 나의 일상속에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고, 말씀을 보며 하나님의 뜻을 묻는 시간들이 필요한 것이죠.

2. 참된 기도는 ‘믿음’으로 시작된다.

뜬금없이 예수님은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보며 ‘하나님을 믿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어떤 의식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는 기도가 어떤 것인지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마가복음 11:22–24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중요한 포인트는 내가 이렇게 기도하면 이루어지겠지? 라고 생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기도할 때 내가 기도하는 대상이 어떤 분인지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어느순간 형식으로 바뀌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은 어김없이 내가 믿는 하나님이 현실보다 작게 느껴지기 시작할 때입니다.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이 말이 믿어지시나요? 현실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보다 더 크게 나에게 다가올때 우리는 의심이 생기고, 하나님이 현실보다 작게 느껴지고 그렇게 작게 느껴지는 하나님을 점점 기대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종종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기도도 내가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도 내가 믿기로 결정해서 믿었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죠.
내가 한 것이니 하나님은 나보다 작은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믿음’은 ‘내가’ 판단하고 결정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가운데 하나님을 믿는 마음을 부어주실 때 우리는 반응하는 것이죠.
그래서 믿음으로 기도하라는 것 또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다가올때 내가 그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믿음이고,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이죠. 그래서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반응’입니다. 반응이기때문에 반응 이후의 결과를 기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며 내 상식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말씀처럼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그만큼 크신 분이니까요.
이건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 안에 일어난 일이죠.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신 분이라는게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믿어지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면, 못할 게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기도해서 이뤄지는게 아니라 내가 구하는 분이 나를 ‘믿어지게’ 하신 놀라운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다시 기대하게 되고, 다시 바라보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으로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에 반응하며, 다시 기대하는 것

3. 성숙한 기도는 나의 성전을 넘어 우리의 성전으로

예수님은 믿음으로 구할 것을 가르치시다가 마지막에 한가지를 더 얹으십니다. 바로 ‘형제 용서’ 를 얹는 것이죠. 개인을 위한 기도를 넘어 또 다른 성전인 형제, 그리스도의 몸인 서로를 위해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나를 위한 기도와 동시에 하나님의 뜻인 ‘우리를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마가복음 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누군가에게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용서’는 나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나는 결국 거기에 매여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매우 중요한 것이죠. 중요한 것은 용서는 그 자유를 내가 먼저 누리기에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나를 용서해주시고, 나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이죠.
예수님의 마음이 나에게 들어와 내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혐의가 있는 형제를 용서하듯,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각 지체들을 품게 되고, 더 나아가 교회들을, 사회를 품게 되는 것이죠.
믿음으로 하는 기도는 무엇이라고 했죠? “내가 기도하기로 결정해서” 아닙니다. 나는 품어지지 못할 지라도, 나에게 그런 마음을 주시고, 나에게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내가 품을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여, 말씀을 따라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 마음을 주시기에 우리는 나를 넘어 우리를 위해 기도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성숙한 기도는 점점 ‘나’중심에서 ‘우리’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물론 직접적으로 몸으로 와닿지 않는 환경과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힘들지라도,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안에 들어와 나의 눈에 들어오게 되는 어떤 부분들, 공동체, ‘우리’라는 주변을 보며 그들을 위해 축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그래서 원수마저도 축복하며 기도하라고 하시는 데 그 이유는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원수마저도 품는 공동체를 위한 축복, 주변을 위한 기도는 결국 나를 위한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나에게는 더욱 크게 누리는 은혜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마르지 않기를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내가 하려는 기도, 내가 드린다 생각하던 기도로 인해 형식적인 기도에 지치시나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1:22–24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그렇다면 이제는 나에게 ‘믿음’이라는 기적을 선물해주신 주님, 그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에 반응하여서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믿어진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놀라우신 분입니다. 능치 못하심이 없는 분입니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여전히 고집불통인 나를,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믿게 만드신 분이시니 더더욱 확실합니다.
오늘 이시간 우리의 마음의 자리, ‘내가’ 주인되어 끌어가던 그 자리를 나를 구원하시고 믿어지게 하신 그분께 내어드리며, 말씀을 붙잡고 찬양하며 기도하기 원합니다.
찬양
내 마음의 한 자리
기도제목 1 “나의 마음의 성전을 정리하는 기도” - 세상 가치관으로 나의 이익과 편리함만 구하는 마음의 분주함들, 가치관들을 버리고 다시 나의 마음의 자리에 주님을 모시기 원합니다. 주님이 주인되어서 다시 주님을 바라보며 나아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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