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2023 수능기도회 설교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40 viewsNotes
Transcript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레슬리 뉴비긴의 요한복음 강해 (4:7–15)
피곤에 지치고 목마르고 지극히 연약한 상태에서 그분은 정오의 강렬한 태양열을 받으면서 우물가에 앉아 있는 시골 아낙네와 마주치시게 된다. 그 곳은 유대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땅이었고, 그 거민들은 이방 종교와 너무나 깊이 타협한 나머지 경건한 유대인에게는 불결한 인간으로 여겨졌다. 그 곳에서의 예수님은 힘 없는 낯선 자다. 아무리 목이 마르다 한들, 어찌 지체 높은 분이 천민의 동네 우물에서 물을 마실 수 있겠으며 천민이 주는 바가지로 목을 축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 시골 여자는 낯선 자로부터 물 한 모금 달라는 부탁을 받고 깜짝 놀란 것이다.
그녀의 질문은 반쯤 조롱하는 것이고 반쯤 놀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의 대답은 신비로운 암시로 가득 차 있다. ‘생수’ 는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과 대조되는, 샘에서 솟는 신선한 물이다(렘 2:13). 그것은 언젠가 광야로 흘러내려, 죽음만 있던 그 곳에 생명을 줄 생명의 물줄기다(겔 47:1–12). 그것은 토라, 즉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에게 주신 생명의 가르침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령이다. ‘생수’ 라는 말은 이 모든 것을 시사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분명 그렇지 않다. 이 지쳐 있는 나그네는 자기가 그 위대한 족장보다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인가? 그 족장이 이 곳에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이 신성하게 되었고, 그가 판 이 우물이 그 자신과 짐승들의 목까지 축여 주지 않았던가? 아니, 이 남자는 야곱이 물을 찾으려고 그토록 깊이 팠던 이 곳에서 금방 새 우물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복음서의 독자는 이 여인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간격보다 훨씬 더 깊은 골짜기 위에 서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것은 생명의 창조자이신 그분과 그 생명에 대해 갈증을 느끼는 세상 간의 간격이다. 그 여인은 예수님이 제안한 것을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이해할 수도 없다. 그것은 반복되는 자연적인 육체의 목마름을 해갈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목마름을 충족시킨다. 후자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그분 자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으므로 다른 어떤 것도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다-에 의해서만 해갈될 수 있다(시42편). 그 나그네가 제공하는 생수는 진정 신자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새롭게 되는 참된 토라요 살아 있는 영이다. 그러나 광야에서 허기를 채웠던 유대인들처럼(6:25–34), 이 여인은 계속되는 육체의 목마름을 채워 줄 영원한 만족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이다. 그것만 해도 하나님의 굉장한 선물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담대하게 그것을 달라고 한다. 유치한 수준에서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니고데모와는 달리-그 낯선 자를 신뢰하고 자신 있게 간구한다. 이것은 아직 성숙한 믿음은 아니지만 깨달음의 시초가 될 수 있는 그런 믿음이다. 예수님께 몸을 돌려 그분을 신뢰하는 행위-온전한 깨달음에는 못 미친다 하더라도-는 깨달음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시발점이다. 미미한 그리스도인도 장차 성숙한 신자로 자라나서 진정한 증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대화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와는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를 것이다. 이는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고백하는 데까지(42절) 이르게 된다.
4:16–26
16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예수님께 몸을 돌리는 것은 빛을 향하는 것을 뜻한다. 그분 안에는 어두움이 전혀 없다. 그분이 오시면 감추어진 것이 밝히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 여인뿐 아니라 그녀의 집안을 위해서도 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간구에 대한 예수님의 첫 반응이 “네 남편을 불러오라” 는 말이라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이제 감춰진 것이 빛 앞에 놓인다. 사마리아 여인의 혼잡한 인간 관계는 사마리아 종교의 무질서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이다.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정복해서 열방의 신들을 예배하도록 만든 이래, 사마리아의 종교는 난잡한 상태에 빠졌다. 족장들(조상)의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조차도 이 같은 난잡함을 용인하게 되면 진정한 예배가 아니다. 복음서의 독자는 사마리아가 온갖 유의 영지주의적 예배의 본거지임을 알고 있으므로 이런 혼잡성이 사마리아 여인의 삶에 투영된 것에 별로 놀라지 않는다.
그 여인은 자기 앞에 있는 인물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며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는” 분이라는-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자원을 갖고 있다. 이 낯선 이는 선지자다. 그는 참 선지자들이 항상 했던 일, 곧 감추어진 죄를 노출시키는 일을 했다. 여인은 자신을 변호하거나 죄를 감추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녀는 이 낯선 이를 신뢰하기로 작정했으므로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오히려 앞으로 더 나아간다. 죄가 노출된 이상 이제는 속죄의 가능성, 곧 용서의 가능성을 물어 보아야 한다. 만약 제사장의 사역이 가능하지 않다면, 제사가 용납되고 죄가 씻어질 수 있는 ‘속죄소’ 가 없다면, 선지자가 치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죄로부터 깨끗게 된 양심으로 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속죄소, 참 성전은 어디에 있는가? 유대인들이 믿듯이 시온 산에 있는가, 아니면 사마리아인이 예배하는 그리심 산에 있는가? 이것은 여인의 죄라는 초점에서 슬쩍 비켜가는 말이지만 적절치 못한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죄가 빛 가운데 노출되었을 때 반드시 제기되어야 할 질문을 촉발시키는 바른 압박이다.
여인이 비록 무지한 가운데 던진 질문이지만 예수님은 이 진지한 질문을 계기로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시는 새롭고도 결정적인 행동을 펼쳐 보이신다. 21–25절에 나온 예수님의 말씀은 계몽주의 이후의 사유화된 종교를 옹호하는 데 종종 이용되어 왔다. 이는 마치 예수님이 종교는 인간 정신의 내적인 문제이므로 유대와 사마리아가 분쟁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 씀하신 것처럼 해석되었다. 이런 해석은 그 말씀의 문맥을 무시하는 처사다. 그 문맥은 여전히 궁극적인 대조-생수와 영생을 줄 수 없는 물, 영과 육, 위로부터 온 것과 아래로부터 온 것-와 관련된다. 시온 산과 그리심 산 사이의 논쟁은 상관없는 것이 아니다. 혼합주의적인 사마리아 예배는 무지한 가운데 드리는 예배다. 그것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드리는 예배다(행 17:22–23). 인간의 종교적 상상력이 만든 서로 상반되는 이미지들을 똑같이 반영하는 신은 하나님이 아니다. 이 모든 종교적 상상력의 세계에서 하나님은 미지의 존재로 남아 있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은 유다 땅에서 자신을 알리셨다. 결코 반(反)유대주의자가 아닌 요한은 바울과 같은 신앙-유대인에게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 이 속했다고 믿는(롬 9:4)-을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비교 종교학’ 에 관한 토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유대 사람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표준새번역).
그러나 이제 새로운 실재가 임박했다. 새로운 때가 이르고 있다. 그 완전한 실재는 장차 아들이 십자가상에서 영화롭게 되고, 부활하고, 성령의 부으심이 이르러야 밝히 드러나겠지만 지금도 현존하고 있다. 그 때에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그리고 진정 온 세상이 참된 예배로 부름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하실 일이다. 그분이 친히 그러한 예배자들을 찾으실 것이고, 그분이 친히 그들을 아들-그 안에 진리가 현존하는-에게로 ‘이끄실’ 것이다(예를 들면, 6:44과 여러 곳). 이 아버지의 행동은 행동하시는 아버지 그 자신인데, 하나님은 영이시고 영은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 강력한 행동은 ‘위로부터’ 온 것이며 바람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의 현존과 강력한 효과는 의심할 수 없다. 하나님은 본질(essence)이 아니라 행동(action)이시다. 그분의 존재는 행동이고, 그 행동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각 나라로부터 참 예배자들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은 진리를 동반하시는 분이다. 그분은 세상의 근본적인 종교적 신념과 관련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분이요(16:8이하) 교회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다(16:13이하). 시온과 그리심을 종교적 지도의 중심지에서 내쫓을 새로운 실재가 임박했다. 아니 사실은 이미 여기에 계신다. 그 여인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이 그분께 충만히 주어졌기 때문에 그분은 진리를 말씀하신다. 그분은 또한 생명이시므로 진리이기도 하다(14:6). 이 새로운 계시의 때가 임박했으며 지금 현존하고 있다. 즉, 예수님이 아직 영화롭게 되지 않으셨으므로 임박한 것이고, 현재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님 자신이므로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여인은 “이 낯선 이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자신의 첫 번째 대답이 부적절한 것임을 바로 깨닫는다. 이 언어는 선지자의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다. 이것은 종말론의 언어, 마지막 일들에 관한 언어, 메시아의 언어다. 사마리아인들은 메시아(Taleb)가 오실 것을 바라보았는데, 그는 유다가 기다렸던 다윗 혈통의 통치자이기보다는 신명기의 약속(18:15–16)에 따른 선생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녀는 진리를 듣기 위해 그분의 오심을 기꺼이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바로 이와 같은 믿음과 소망을 듣고 예수님은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 라고 대답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인의 다윗 같은 메시아와 동일시되는 것은 분명히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이 반(半)이방인이자 자유분방한 시골 여인의 진실한 질문에 반응하여, 자신이 진정 하나님의 일을 말하는 자로 여겨지는 것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영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탕자의 아버지가 아들을 맞으려고 뛰어나간 것처럼 하나님은 두 팔을 벌린 채 우리를 향해 뛰어오신다” (Born-Kamm)는 뜻이다. 그리고 성령은 진리를 가져오시므로, 그 여인에 관한 진실과 예수님에 관한 진리가 드러날 수 있고 수용될 수 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7). 따라서 참된 예배가 가능해진다.
4:27–38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이제 무대 위에서 여러 등장 인물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 여인은 물동이를 남겨 둔 채 서둘러 마을을 향해 떠난다. 지금 그녀는 몇 시간 동안 목마름을 채워 줄 ‘아래로부터’ 온 물을 갖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물일지도 모를 어떤 것, 모든 목마름을 영원히 해갈시켜 줄, 마지막 날에 약속된 선물에 관한 소식을 들고 가고 있다. 그리고 무대 전면에는 빵을 들고 오는 제자들이 등장한다. 이 떡은 한두 시간 동안 배고픔을 채워 줄지 모르나 예수님이 원하시는 양식은 아니다. 그들은 자기 스승이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으나 감히 질문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자기들이 가져온 양식을 그분께 들이댄다. 한편, 그 여인의 텅 빈 양동이는 말 없는 증인으로 곁에 서서, 그들이 궁극적인 배고픔을 채워 줄 수 있는 것에 대해 오해하고 있음을 증언한다. 예수님에게는 오직 하나의 압도적인 배고픔이 있을 뿐이다. 그 배고픔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는 대성(大聲)을 발하실 때에만 완전히 충족되는 것이다. ‘생명의 떡’ 이신 그분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오신 분이다(6:35–39). ‘영생’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가진 자는 ‘이 떡을 먹는’ 자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으로,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그분의 일을 함으로써 살 것이기 때문이다(신 8:3과 8:2을 비교하라).
사실 이 하나님의 생명은 이미 세상에 제공되고 있다. 선지자들이 갈망하며 내다보았던 그 추수할 때가 이미 무르익었다. “밭 가는 자가 곡식 베는 자의 뒤를 이을 것” 이라는 약속이 이미 성취되고 있다(암 9:13). 추수할 때까지 인내하면서 오랫동안 기다린 것은 지난 과거의 일이다. 지금은 씨를 뿌리자마자 추수하는 때다. 그 여인에게 하신 말씀이 벌써 수많은 사마리아인을 예수님의 발 앞으로 데려오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엄청난 수확을 거둬 들일 능력이 있는 씨앗이다. 씨를 뿌리는 자와 추수하는 자는 다를 수 있다. 심지어는 서로를 모를 수도 있다. 38절의 ‘다른 사람들’ 이 누군지는 분명히 파악할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은 선교사의 전형적인 경험이다. 선교사는 미지의 잊혀진 다른 이들이 씨를 뿌린 곳에서 추수를 하게 된다. 보상을 받는 자는 거두는 사람이지만,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의 기쁨은 똑같다. 즉, 거두는 자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데서 기쁨을 누린다.
4:39–42
39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이제 무대의 장면이 다시 바뀐다. 제자들은 사라지고 무대 전면은 사마리아의 마을 사람들로 가득 찬다. 그들은 여인의 증거로 인해 예수님께 오게 되었는데,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그들 역시 그분을 기꺼이 신뢰하려 하고, 그분께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 를 부탁한다(이 ‘유한다는 것’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모른 채). 그리고 결국에는 그분을 ‘믿게’ 된다. 이 믿음은 여인의 말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곧 진리인 그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참된 고백에 이르게 된다. 여행에 지치고 목말라했던 저 낯선 이가 선지자 이상의 인물이요, 유대의 메시아 왕이나 사마리아의 약속된 선생을 능가하는 분임을 고백한 것이다. 그분의 다스림은 땅끝까지 미칠 것이다. 그분은 세상의 구주다. 그렇게 해서 현명하고 총명한 니고데모에게 감추어져 있던 것이 이 영적인 유아들에게 계시되었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비켜 서 있는 동안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떼 지어 들어가고 있다.
